|
|
요한복음 19장 강해 5부 무덤에 묻히신 예수님
요한복음 19장 38-42
요절 42 이 날은 유대인의 준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
많은 사람이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많은 은혜를 받지만 예수님의 장사가 주는 은혜를 잘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장사지내고 사흘 동안 무덤에 있었던 것은 우리에게 엄청난 은혜를 주시는 복음입니다.
영어 사도 신경에 보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셨으니, 지옥(음부)에 내려가셨다” 로 기록되었습니다. “Was crucified, dead, and buried: descended into hell” 이라고 나옵니다. 예수님이 장사 지내고 지옥에 내려간 것도 복음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사도 바울도 내가 받은 복음을 전하는데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고 전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장사되고 지옥에 내려가신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은혜를 주시는지 알고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1) 아리마데 요셉과 니고데모가 변화되었습니다.
“38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39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2)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아리마데 요셉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박해가 두려워 숨겼습니다. 당시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으면 출교 당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셉에게 반전이 일어납니다. 그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험한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체 가져가기를 빌라도에게 구하였습니다. 그는 공개적으로 예수님 믿는 것을 사람들에게 선포하였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출교 당할 것을 각오하고 공개적으로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하였습니다. 빌라도가 시체를 가져가라고 허락하자 아무도 장사한 일이 없는 부자 아리마대 요셉 소유의 새 무덤에 예수님을 장사하였습니다.
일찍이 밤에 예수님께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섞은 것을 백리트라 33킬로를 가져왔습니다. 쌀 한가마가 40킬로인데 엄청 많은 양입니다.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은 시체의 부패를 방지하고 냄새를 제거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험하면서 공개적으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는 요셉과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면서 변화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그들이 십자가를 보면서 두 가지 점에서 변화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그들은 두더지 신자에서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요셉과 니고데모는 둘 다 공회원이고 예수님에게 사형 판결을 내릴 때 가편 투표를 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존경받는 사람이고 부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지만 소심하게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공개적으로 믿지 못하였습니다. 니고데모도 밤에 찾아올 정도로 예수님을 은밀히 알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둘 다 예수님의 십자가 후에 출교나 죽음을 각오하고 담대히 예수님 믿는 것을 사람들에게 선포하였습니다.
둘째, 주님을 위해서 헌신적인 자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들은 둘 다 많은 물질을 가지고 있는 부자였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마태복음에 부자라고 나오고 3억원 짜리 무덤을 내어 놓았습니다. 니고데모는 30억 상당의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예수님의 장례에 사용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장례식에 그들의 돈을 아낌없이 썼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돈을 쓴 것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예수님을 사랑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돈을 쓰는 것이 아깝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마리아처럼 헌신적인 자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왜 이렇게 이 사람들을 담대하고 희생적인 자로 변화시켰을까요? 한 마디로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나옵니다. 니고데모도 요한복음에 하나님 나라를 갈망하며 예수님께 나왔다고 나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 요한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공관복음에는 지성소와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다고 나옵니다. 하나님 나라로 가는 산 길이 열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갈망하는 니고데모에게 십자가에 놋뱀처럼 달린 예수님을 보면 영생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십자가를 보면서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의 벽이 허물어진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 나라로 가는 새롭고 산 길이 열린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영생을 주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십자가보다 하나님 나라를 더 확실히 증거하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실 때 마태복음에 보면 많은 죽은 사람들이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신 후 사흘 후에 부활하십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이 죽을 때 살아난 사람들과 달리 새로운 모습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썪지 않고 강하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엄밀히 말하면 다시 살아났다는 것보다는 새로운 변화입니다. 나사로나 야이로의 딸이나 과부의 아들은 살아났지만 다시 죽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과 구별하기 위해서 소생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살기 알맞은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가서 살기에 알맞은 몸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 40일 동안 지상에 계시다가 하늘로 가셨는데 그 하늘은 우주의 어떤 공간이 아닙니다. 그 하늘은 셋째 하늘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부활 승천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가 실재한다는 것을 확증하였습니다. 이 하나님 나라를 확신하였으므로 담대하고 희생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부활과 하나님 나라를 확신한다면 아리마대 요셉이나 니고데모처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희생적인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 나라를 확신하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관문입니다. 죽음은 마치 미국에 가기 위해서 인천공항의 출국 게이트를 통과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로 가는 비행기를 타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 나라를 마음과 삶에서 일부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으면 우리의 육신의 몸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늘과 땅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런 좋은 하나님 나라를 가는데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60년대에 우리나라는 아주 못살았습니다. 미국은 잘 살았습니다. 미국 비자 받기가 하늘에 별따기처럼 어려웠습니다. 당시 김포공항에서 미국으로 환송을 하면 이별의 슬픔에 울었습니다. 그러나 배고프지 않고 편리한 더 좋은 곳으로 가기 때문에 한편으로 기뻐하였습니다. 그와 같이 죽음이 잠시 슬프지만 두렵지는 않고 기쁜 것입니다. 죽는 과정에서 질병이나 사고로 인하여 잠시 고통하는 것이 두려운 것이지 죽음 자체는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죽음은 장막 집을 벗고 더 좋은 벽돌 집으로 이사가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임시 거처인 텐트에서 살다가 더 좋은 완전한 벽돌집으로 이사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간절히 기다릴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하나님 나라로 가는 통로로 믿으면 하나님 나라를 간절히 기다립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하나님 나라가 없다면 주님을 위해서 순교한 사람들은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가 있기 때문에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고 순교한 사람들이 가장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믿고 예수님을 위해서 기쁨으로 순교하였습니다. 우리나라도 주기철, 손양원 목사님이 순교하였습니다. 안이숙 여사는 순교를 하려고 하였는데 총살 전날 독립이 되어 순교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순교하지 못하고 살아난 것을 기뻐한 것이 아니라 슬퍼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소망이 분명하였기 때문에 순교자에서 탈락한 것을 울었습니다.
둘째, 하나님 나라를 믿으면 주님께 물질을 쓰는 것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죽으면 돈을 하나도 가져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돈을 가져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와 복음 역사를 위해서 돈을 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곳에 쓰는 것을 하늘에 물질을 쌓아두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불의한 물질로 친구 예수님을 사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를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처소로 인도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확신한다면 주님을 위해서 물질을 쓰는 것이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물질을 쓸 수 있는 은혜를 받은 것에 감사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확신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확신할 수 있을까요?
첫째, 우리는 십자가의 피로 죄사함을 받고 거듭났을 때 하나님 나라를 확신할 수 있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보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사람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거듭난 사람들은 지금 하나님 나라를 체험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거듭난 후에 사람들이 사랑스러워 보이고 하늘과 땅과 식물과 동물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확실히 있다는 것을 증거해줍니다.
둘째, 우리는 성령님의 능력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고 하나님 나라를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하나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예닮목동이 카이스트도 성대도 떨어졌는데 칭화대를 장학생으로 간 것을 알고 있습니다. 카이스트는 세계 30위 권이고 성대는 70위권입니다. 칭화대는 세계 10위 권입니다. 여러모로 부족한 예닮 목동이 칭화대 대학원에 간 것은 하나님의 살아계신 증거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하나님 나라를 더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 승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말씀대로 부활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살기 알맞은 모습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기독교가 서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 승천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우리 안에 임합니다. 그러면 우리도 그 영을 힘입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믿으면 아리마대 요셉이나 니고데모처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을 위해서 헌신적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2) 새 무덤에 장사하였습니다.
“40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41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42 이 날은 유대인의 준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
예수님은 유대의 법대로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습니다. 예수님이 못박힌 동산에 아리마대 사람의 새 무덤이 있었습니다. 그 무덤은 아까 말씀드린 대로 3억원이나 되는 비싼 무덤입니다. 예수님은 부자의 새 무덤에 장사되었습니다. 이사야 53장에 보면 그리스도는 새 무덤에 묻힐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이 성취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덤에 묻힌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3일 동안 무덤에 묻힌 것은 과거와 이 세상과 완전한 단절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세상과 단절하고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과거의 세상과 단절하고 새로운 미래의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우리는 침례를 통하여 이런 죽음과 장례를 경험하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430년 애굽의 노예로 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건너 광야를 거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이 홍해를 건넌 것은 애굽 생활을 청산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다시 홍해를 건너 다시 애굽에 돌아갈 수 없습니다. 애굽은 세상이요 예수님을 믿지 않던 과거입니다. 그들이 이제 가나안 하나님 나라의 미래를 향하여 들어간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는 다시 애굽 생활을 그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애굽을 부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광야 생활이 어려우면 과거를 그리워합니다. 만나만 먹자 고기와 부추 먹던 애굽 생활을 그리워합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에 대한 불신이 생기고 두려움이 생기자 차라리 애굽에서 살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들은 몸은 출애굽하였지만 마음은 출애굽하지 않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몸은 교회에 나오지만 마음은 세상에 가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보다 세상 나라를 소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무덤을 통하여 세상과 단절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무덤에 묻힐 때 우리도 무덤에 묻힌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우리도 장사되었으니 우리는 이제 세상과 과거와 단절하고 하나님 나라의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과거를 그리워하지 말고 세상을 부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롯의 아내는 소돔과 고모라를 떠나 소알 성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소돔과 고모라에 있는 집과 땅과 물질을 그리워하며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쟁기를 잡고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미련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과거가 실패든 성공이든 배설물처럼 여기고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담대히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미련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의 물질과 사람들의 인정과 쾌락에 대해서 미련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모든 것을 시체처럼 무덤에 묻어 버리고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나가야 합니다. 마치 미국으로 이민 가는 사람이 비행기를 타면 시계도 미국 시간으로 바꾸어놓고 마음은 미국에 가 있듯이 우리는 마음은 천국을 소망하고 마음이 천국에 가 있어야 합니다.
(3) 예수님은 지옥에 다녀오셨습니다.
“19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베드로전서 3장 19,20)
이 말씀은 예수님이 죽으신 후 3일 동안 무슨 일을 했나 성경에서 유일하게 기록해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영어 사도 신경에 나온 것처럼 지옥에 다녀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지옥에 가서 두 가지 일을 하셨습니다.
첫째는 지옥을 경험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 음부에 내려가 지옥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죽어서 지옥에 가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은 우리가 죄를 시어서 지옥에 가야한다고 말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지옥에서 끌어올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을지라도 예수님이 지옥에 가셨기 때문에 우리는 지옥을 가지 않고 하나님 나라로 갈 수 있습니다.
둘째는 예수님은 지옥에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노아시대에 복종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노아 시대 구원 받은 사람들은 8명이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구원 받지 못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노아 시대 죽은 사람들은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을 대표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무덤에 있는 사흘 동안에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것은 성경 여기에만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가톨릭과 루터교에서 받아들이고 있고 칼빈의 장로교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칼빈의 장로교는 이것을 예수님이 죽은 자들에게 승리를 선포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저는 루터교의 입장이 좀더 수긍이 갑니다. 우리나라도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나라에도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다 지옥에 간다면 하나님의 공의나 사랑의 성품에 어긋나는 것 같습니다. 루터교의 주장대로 예수님이 죽으시고 사흘 동안 시공을 초월하여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에 대한 믿음이 더 생기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무덤에 있는 동안 큰 일을 하셨습니다.
“42 이 날은 유대인의 준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
예수님은 무덤에 있는 동안에 큰 일 세 가지를 하셨습니다.
첫째,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알려주셨습니다. 지옥의 문을 닫으시고 하나님 나라로 가는 문을 여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여 하나님 나라에 가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알려주셨습니다.
둘째, 세상과 죄와 단절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죽음을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곳입니다. 예수님이 무덤에 있는 동안 우리도 무덤에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과거와 세상과 완전한 단절을 하고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가게 되었습니다.
셋째, 지옥에 다녀오셨습니다. 우리대신 지옥에 다녀오심으로 우리는 지옥에 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예수 믿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장례를 통하여 세상의 미련을 버릴 수 있습니다. 세상을 부러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과거를 배설물처럼 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옥에 가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지옥에 가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죽으심과 무덤에 묻히심을 믿고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나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확신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을 위해서 더 헌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이나 니고데모처럼 헌신적이고 박해에도 불구하고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요한복음 19장 강해 5부 무덤에 묻히신 예수님
요한복음 19장 38-42
요절 42 이 날은 유대인의 준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
요한복음 15장 강해 끝.
한 마디) 하나님 나라는 분명히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