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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524
#요한계시록 #Revelation 12:13-14
교회를 대적하는 마귀의 핍박은 교회와 성도들에 대해서는 물리적인 위협과 육체의 생명을 해하는 것과 분열 등을 야기하는 것이고 하나님 그리스도 앞에서는 끊임없이 밤낮으로 교회와 성도들을 참소하는 것이다. 교회 내에서는 마귀가 몰래 흩뿌리고 간 거짓 목사가 거짓 복음으로 성도들을 핍박하고, 거짓 장로들이 교회의 불법과 비리를 지적하는 공의로운 성도들을 핍박하며, 거짓 신자들이 귀에 거슬리는 복음을 거부함으로써 참된 목사를 핍박한다. 그러나 용이 여자를 핍박하는 것은 하늘에서의 전쟁에서 패배한 화풀이에 불과하기 때문에 제 아무리 교회와 성도들을 육적으로 괴롭히고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힌다 해도 그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용의 핍박을 받는 여자를 광야로 도피시킨 큰 독수리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 같다. 독수리가 여자에게 부여한 자신의 두 날개는 사람의 언어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보혜사이신 성령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교회는 성경과 성령으로써 이 땅에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독수리는 여자를 자신의 등에 태우고 날아서 광야로 데려다 준 것이 아니라 여자에게 자신의 두 날개를 주고 여자가 그 날개를 가지고 스스로 날아서 광야로 간 것이었는데 이는 교회가 주님께서 알아서 저절로 무언가를 해주시기를 바라서는 안되고 주님께서 주신 성경과 성령으로 힘써 복음 사역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좀 더 확장하면 교회를 구성하는 중생한 성도들 각자가 성령께서 새롭게 변화시키신 심령과 의지를 가지고 성경대로 선을 행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은 여자가 사람이 북적이는 시끌벅적한 도심 한가운데가 아니라 인적이 드물고 적막한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갔다는 것은 위기에 처한 교회가 의지해야 할 것은 육적인 사람의 방식이 아니라 세미하고 은밀한 하나님 그리스도의 섭리임을 의미하는 것 같다. 여자를 핍박하는 붉은 용은 뱀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그것이 하늘에서 미가엘의 군대와 싸울 때는 용의 모습이었지만 쫓겨나서 땅에서 교회를 괴롭힐 때에는 뱀의 모습으로 접근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덴 동산에서 하와를 꼬드긴 것도 위협적인 모습의 붉은 용이 아니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 하늘을 나는 뱀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앞서 여자는 광야에서 1260일을 머물렀는데 여기에서는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받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두 기간은 별개의 기간이 아니라 동일한 기간이다. 마지막 반 때는 민족적으로 회심한 유대인들 이스라엘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더욱 넓고 깊게 밝히기 시작해서 여섯째 나팔이 울려 모든 성도들이 새롭게 변화된 몸을 입고 하늘로 들려올라가는 때까지의 기간일 것 같다.
#20210524
#신명기 #Deuteronomy 18:9-14
오늘날에는 실제로 잔학무도하게 자기 자녀의 육신을 죽여 바치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스스로 신자라 칭하는 많은 부모들은 자기 자녀를 성경과 성령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보다는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리도록 인도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자녀들의 영혼을 공중권세 잡은 자에게 번제로 바치는 죄악이라 할 수 있다. 안타까운 것은 패역한 이스라엘이 자녀들을 몰렉에 불살라 바치고서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했듯이, 신자라 일컫는 많은 부모들이 자기 자녀들의 영혼을 공중권세 잡은 자에게 바치면서도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무당은 자의건 타의건간에 마귀 또는 악령과의 불법적인 계약으로 인해 주종관계를 맺음으로써 마귀로부터 미래의 길흉화복이나 마술 또는 요술이나 죽은 자와의 대화를 할 수 있는 능력을 받은 자들이므로 무당을 찾는 신자는 두 번 다시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는 거짓 신자이고 배교자일 수 밖에 없다.
사울 왕이 찾아간 엔돌의 신접한 여인은 죽은 사무엘의 영혼을 불러 올렸다. 대부분의 해석자들은 죽은 자의 영혼은 낙원에 있거나 음부에 있거나 할 수 밖에 없고 그 이외의 선택지나 경우는 없기 때문에 이 사무엘의 영혼은 진짜가 아니라 단지 악령이 흉내낸 것에 불과하다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성경은 그 영을 마귀가 둔갑한 것이 아니라 시종일관 사무엘의 영이라 칭하는데다 그 영이 사울을 미혹하기 위한 거짓말이 아니라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배할 것과 그와 그의 세 아들이 전부 죽을 것을 사실대로 알렸기 때문에 사무엘 자신의 영혼으로 볼 수도 있다. 엔돌의 무당은 자기가 섬기던 악령과의 모종의 계약으로 인해서 악령으로부터 실제 죽은 자의 영혼을 부를 수 있는 금지된 술법을 익혔을 것이고 이 술법으로 사무엘의 영혼을 불러 올린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죽은 자의 영혼을 다루는 것은 오로지 영의 아버지이신 여호와 하나님만의 고유권한인데도 이 무당은 악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비법을 훔쳐 사용한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무당들의 모든 초혼술이 실제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온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엔돌의 무당은 이스라엘 경내에 살고 있어서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지식으로 알고 있었으나 통상적으로 무당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엔돌의 무당의 초혼술은 아주 예외적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교회 안에서 아무리 성령께로부터 탁월하고 신령한 은사를 받았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영광과 교회의 유익이 아니라 자기의 탐욕을 위해 악용하게 되면 그는 사실 발람같은 무당보다도 더 악랄한 자가 되고 만다.
성경과 복음을 성경과 복음대로 해석하고 설교하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입맛에 맞게 이리저리 재단하고 가감하는 목사는 목사라는 직분을 가지고 있어도 결국 다른 복음으로 미혹하는 영에 자기 영이 미혹된 것이므로 하나님과 그리스도 앞에서는 예레미야를 대적한 하나냐 같은 거짓 목사라 할 수 있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교회를 가장 미혹하는 거짓 목사들의 거짓 복음은 특정 정치 및 경제 이념만이 성경과 복음이 유일무이하게 인정하는 체제라고 하는 가르침이다. 이를 부르짖는 거짓 목사들은 자기들이 추구하는 이념에 맞지 않는 정부는 악으로 규정하여 물리적인 전복을 꾀하여 사회분란을 야기하기도 하고 자국민 2천만명을 북한 주민과 동반자살하게 만들어서 무력통일을 이뤄야 한다고 선동하기도 한다. 이런 거짓 목사들의 반성경적인 선동에 미혹되어 같이 놀아나게 되면 그 또한 자기 행위에 대한 죄책을 면할 수 없다.
얼마 전부터 폭발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성격유형검사도 심취하지 않게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본래 성격유형검사의 취지와 목적과는 달리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가지고 자기 또는 타인의 성향을 판단하고 단정해 버린다. 그래서 자기가 지금은 비록 어떤 성향이더라도 향후에는 다르게 변할 가능성이 다분한데도 불구하고 그런 미래의 변화 가능성을 배제해버리고서는 일찌감치 자기는 이런 사람이라 단정해 버린다. 그렇게 되면 분명히 충분히 고치고 개선할 수 있는 단점들인데도 자기는 이런 성향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며 포기해버리고 합리화 하고 만다. 이는 타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나 단지 타인의 단점에 대해서는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정죄해버린다는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이런 성격유형검사에 심취하는 것은 본성상 자기가 쉽게 이해하고 예측하며 제어할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20200524
#출애굽기 #Exodus 29:23-37
누룩 없는 퍽퍽한 무교병과 양념하지 않은 삶은 고기는 입에서 거부할 정도로 맛이 없는 음식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거룩한 음식이다. 대제사장과 제사장으로 임명받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이 맛없는 떡과 삶은 고기를 먹어야 하는 이유는 백성들 중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직무에 선택된 거룩한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은 백성들보다 더욱 육신의 소욕을 따르는 즐거운 것들을 멀리하고 거룩한 직무를 제대로 행할 수 있을 정도로만 육적인 것을 취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께서는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셔서 자라시는 동안 세상의 좋은 것들을 누리지 못하셨다. 성령에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을 때도 세상의 온갖 부귀영화를 줄테니 자기에게 절하라는 마귀에게 오직 하나님만 섬겨야 한다며 단호히 배척하셨다. 공생애 기간 중에도 몇몇 부자들이 자기네들의 좋은 음식으로 대접한 것 이외에는 언제나 소박한 음식들과 불편한 잠자리 등을 이용하셨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성령을 받은 사도들은 그런 예수님의 본을 받아서 세상의 부귀영화를 추구하지 않고 오로지 복음사역에만 집중하면서 그 때 그 때 충족되는 것들을 일용할 양식으로 알고 자족하였다. 오늘날 복음사역을 남들보다 더 크게 이어받은 목사들은 이처럼 예수님과 사도들의 검소함을 본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복음사역을 자기의 육체의 소욕을 만족시키는데 악용하는 삯꾼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너무 많이 활개를 치고 있는 것이 한국 교회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왕 같은 제사장들이므로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육체의 소욕은 점점 줄여나가고 거룩한 성령의 소욕은 지속적으로 증대시켜야 한다. 교회에서나 일상에서나 맛있는 것과 재미난 것과 즐거운 것과 멋진 것들에 집착하는 것은 목사를 비롯한 성도들의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20160524
#고린도후서
고린도후서를 읽으면서 하나 발견한 것은, 바울 사도가 유난히 고린도 교인들에게 '연보(헌금)'에 대한 언급을 많이 했다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개인적으로 고린도 교인들에 대해 드는 생각은 뭐냐면, 그들은 연보에 매우 인색한 것 같다는 점이다. 고린도라는 지역은 해상 무역의 거점이어서 고린도인들은 대부분이 매우 부유하였을 것이고, 고린도 교인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그런데 이런 부유한 고린도 교인들에게 바울 사도는 그들의 자발적인 연보를 이끌어내기 위해 마게도냐 교인들이 가난한 가운데서도 풍성한 연보를 했다는 것을 자주 언급한다. 이는 아마도 고린도 교인들은 아직 자신들을 위해서는 많은 부를 축적하였어도 신앙에 따라 교회를 위한 자발적인 연보는 매우 저조하였다는 것을 반증하는 듯하다. 그러면서도 바울 사도는 억지로나 강제로 그들에게 연보하라고 하지 않는다. 고린도 교인들이 맘상하지 않게, 그들의 자존심을 세워주면서 부드럽고 온유하게 신앙적인 연보를 촉구한다. 그들이 연보에 인색하였다는 점은 바울 사도를 대한 태도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바울 사도는 11장 8-9절에서 자신이 고린도에 체류할 때 일체의 비용을 고린도 교회에 지우지 않고, 오로지 마게도냐 교회의 연보에 의지하였으며, 혹시나 고린도 교회에 폐를 끼칠까봐 매우 조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고린도 교회는 바울 사도로부터 구원의 복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부유한 가운데서 그를 위한 물질적 보살핌에는 매우 인색하였던 듯 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매우 조심하면서 일체의 비용을 의지하지 않았다는 기록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의 재물 자체에는 '어린 아이가 모아 둔 용돈' 정도의 가치 정도만 부여하였다. 만약 바울 사도의 권고를 받아서 고린도 교회가 많은 연보를 했다고 할 지라도, 이는 전적으로 고린도 교인들의 신앙 성숙과 교회의 하나됨을 위한 것이지, 절대로 그 재물 자체에 큰 가치를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바울 사도는 12장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신이 경험한 여러 환상과 계시들을 '자랑'한다. 그런데 이는 바울 사도에게 있어서는 자부심을 갖게 하는 '자랑'이 아니라, 너무나 민망하고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본전도 안나오는 그런 '자랑'이다. 왜냐하면 바울 사도에게는 오직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만이 최고의 보물이며, 그 외에 다른 것들은 모두 배설물과 같이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외에 다른 것을 자랑한다는 것은 설령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환상과 계시일지라도, 바울 사도에게 있어서는 매우 '무익'하고 '부득불'한 것이다(12:1).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왜 이런 자랑을 할 수 밖에 없었는가. 그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비록 복음을 받았어도 여전히 이런 외적인 것으로 자랑하기를 일삼았기 때문일 것이다. 고린도 교인들은 파벌을 일삼고 은사를 자랑하기를 일삼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고린도전서에서 그들의 그런 습성을 책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별반 나아지지 않은 모양이다. 고린도 교인들이 하도 유치하게 그런 신앙의 외적인 것들을 가지고 자랑하니, 바울 사도도 어쩔 수 없이 자신이 그들보다 더 많은 환상과 계시를 체험했다고 '자랑'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애들끼리 노는데 어른이 가서 자기가 1등이라고 자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모양새이다. 바울 사도는 이를 알기 때문에 매우 부끄러워하면서도 고린도 교인들의 교만함을 낮추기 위해서 무익한 자랑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환상과 계시의 시점도 최근 것이 아니다. 무려 14년 전 경험한 셋째 하늘 등의 환상을 이야기 하는데, 이는 '내가 왕년에 말야…' 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바울 사도는 그런 유치한 자랑으로 시작해서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능력으로 마무리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