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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스완’시대, 숲이 경쟁력이다] 2부 〈5〉 해발 900m 대관령 특수조림지
日강점기 목재 수탈로 헐벗은 산… 초속 45m 바람에 묘목 98% 죽어
장벽 세워 바람막고 논흙 뿌려 조림… 녹화 50년 숲 기술, 카자흐 등에 전수
강원 평창군 대관령 특수조림지 안에 있는 선자령 등산로(총 길이 8.3㎞)를 드론으로 촬영한 모습. 오른쪽에 보이는 시멘트 기둥은 최대 풍속 초속 45m로 부는 바람을 이용한 풍력발전기다. 평창=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모래바람만 불던 민둥산이 50년 만에 초록 숲으로 변했습니다.”
10일 오전 해발 900m 강원 평창군 대관령 특수조림지에서 만난 이주식 동부지방산림청 산림경영과장이 자신의 몸통 두께만큼 자란 전나무에 기댄 채 이렇게 말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에 목재 수탈로 민둥산이 됐다가, 1968년 화전민이 이주해 온 뒤 산을 개간하면서 황폐화됐다. 1970년대부터 조림이 진행됐지만 기온이 영하 30도에서 영상 30도까지 널뛰고, 최대 풍속이 초속 45m에 달하는 대관령 황소바람이 불어닥쳤다. 이런 열악한 환경을 뚫고 조림에 성공했다. 국내 조림지 중에서 유일하게 ‘특수조림지’라는 명칭이 붙게 된 배경이다.
● 반세기 만에 민둥산을 빽빽한 숲으로
이곳 일대 조림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로 고속도로변 국토 녹화 계획에 따라 1974년부터 1986년에 걸쳐 진행됐다. 311ha 면적에 나무 84만3000그루를 심었다. 1974년도에는 38ha에 잣나무 등 11만4000그루를 심었지만 강한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묘목 98%가 죽었다. 시행착오 끝에 바람을 막을 벽을 세우고 망을 두르며 영양분 가득한 논흙을 산으로 끌어올려 나무를 심었다. 이후 지속적으로 나무를 가꿔 50년이 지난 현재 민둥산은 풍성한 숲으로 변신한 것이다.
조림의 천적은 바람이었다. 어린나무의 뿌리와 몸통이 바람을 견디지 못해 제대로 자리 잡기가 쉽지 않았다. 1974년 강풍 때문에 조림에 실패한 이후 당시 전문가와 학계에서는 “대관령은 황소바람이 불어 조림이 어렵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고 한다. 1976년 조림 당시 평창 양묘장에서 근무했던 성기주 씨(77)는 “나무를 심고 뒤돌아보면 쓰러져 있었다”며 “대관령 바람이 어찌나 센지 모래바람이 불면 자동차 앞 유리가 파일 정도였다”고 했다.
바람을 견디고 나무를 심기 위해 방풍책과 방풍망, 지주목을 이용했다. 방풍책은 바람을 막는 장벽이다. 50m 간격으로 높이 3m, 길이 20m 장벽을 세웠다. 시멘트나 나무로 만든 기둥에 지름 15cm 안팎의 낙엽송을 철사로 촘촘하게 엮은 장벽을 만들어 1차로 바람을 막았다. 조림지에 세운 장벽 길이는 총 4.8km에 이른다.
또, 모래나 다름없는 토양을 대신해 양질의 논흙을 산으로 옮겨서 뿌리고 묘목을 심었다. 당시 산 위로 옮긴 흙은 90t이 넘는다. 인부들이 지게를 짊어지고 직접 옮겼다. 성 씨는 “대형 움막을 쳐놓고 합숙하듯이 몇 달씩 먹고 자며 나무를 심었다”고 했다.
현재 특수조림지 임목축적은 190m³다. 2022년 전국 산림 평균 172m³보다 높다. 임목축적은 1ha에 있는 굵기 8cm 이상 나무의 밀집도를 뜻한다. 이 과장은 “이런 환경에서 빽빽한 숲으로 키워낸 게 경쟁력이자 기술”이라고 했다. 황재홍 산림과학원 산림기술경영연구소장은 “국내 목재 자급률은 여전히 20%를 못 넘고 있다. 조림을 통해 숲을 늘려가면 목재 자급률도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산림과학원의 수종 표준 탄소흡수량에 따르면 특수조림지에 사는 50년 된 잣나무는 ha당 연간 7.5t, 낙엽송은 7.7t, 신갈나무는 7.8t의 이산화탄소를 각각 흡수한다. 승용차 1대(연료소비효율 L당 14km 기준)가 연간 1만5000km를 주행했을 때 내뿜는 이산화탄소는 2.4t 정도다. 특수조림지 1ha마다 최소 승용차 3대 넘게 1년 동안 내뿜는 이산화탄소를 빨아들이는 셈이다. 이 과장은 “천덕꾸러기 산이 보물산으로 변신한 것”이라며 “산이 무너져 내리는 사태 같은 2차 재난도 막고, 생태계와 생물 다양성도 지킬 수 있다”고 말했다.
● K숲 기술, 39개국에 수출
대관령 특수조림지 비법은 백두대간 복원에 활용됐다. 2017년 해발 1000m가 넘는 대관령면 횡계리에 있는 목장 용지를 산림으로 바꿀 때 바람을 막는 울타리와 묘목을 보호하는 대나무 통발을 만들어 소나무 등 나무 9000그루 정도를 심었다.
산림청은 39개 국가와 업무협약을 맺고 이 같은 우리 숲 기술을 전수하고 있다. 12일 카자흐스탄과 산림 협력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산불 예방과 대응, 피해지 복원법 등을 협력하기로 했다. 또 생물 다양성 증진을 위한 종자 협력과 연구기관 교류를 강화하기로 했다. 카자흐스탄은 2022년부터 다음 해까지 10만 ha의 숲이 불에 타 예방과 복구를 하기 위해 우리 산림청에 협력을 요청했다. 이 밖에도 바람이 많이 부는 고산지대에 조성된 특수조림지를 직접 보기 위해 최근 3년 동안 베트남과 네팔 등 10여 개국에서 54명이 대관령을 찾았다.
산림청은 경제림, 산불 피해지, 섬 지역 산림, 큰 나무 육성 등 7개 항목에 맞춰 다양한 조림 사업을 추진 중이다. 올해는 산불 피해지 1600ha, 양봉 농가를 위한 밀원수(아까시나무와 같이 꿀을 품은 나무) 150ha를 포함해 기존 숲 수종 교체까지 모두 1만6671ha 규모의 숲을 가꿀 예정이다. 남성현 산림청장은 “국토 녹화 50년 만에 숲 가꾸기 기술을 수출하는 나라가 됐다. 동티모르, 부탄을 포함해 39개국과 업무협약을 맺고 우리 숲 기술을 전수하고 있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
▽팀장 강경석 사회부 차장 coolup@donga.com ▽이상훈 조은아 특파원(이상 국제부) 김태영 김소민 명민준 기자(이상 사회부) |
기사 링크
‘그린스완’ 시대, 숲이 경쟁력이다|동아일보 (donga.com)
황무지를 숲으로 가꾸다
대관령 특수조림지
출처 : 다음백과
새 영동고속도로가 뚫린 뒤, 영동과 영서를 가르는 백두대간 마루금에 서서 사방을 조망하는 감흥을 느낄 수 있던 대관령휴게소는 점차 잊혀갔다. 그러나 요즘 들어 옛 대관령휴게소가 다시 북적거리고 있다. 양떼목장과 대관령 옛길 등이 인기를 끌면서 관광객이 몰려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대관령엔 국내보다 외국에 더 많이 알려진 우리나라의 ‘조림 신화’가 깃든 곳이 있다. 대관령 특수조림지가 바로 그곳이다.
옛 대관령휴게소를 중심으로 도로 양쪽 산자락 311헥타르에 걸쳐 있는 이 조림지는, 1976년부터 10년 동안 황무지에 84만 3,000여 그루의 전나무, 잣나무, 낙엽송 등을 일일이 손으로 심고 가꿔 숲으로 일궈낸 곳이다. 한여름엔 33도까지 기온이 오르다 겨울엔 영하 32도까지 떨어지고, 초속 30~40미터의 강풍이 늘 부는데다 연평균 강설량이 1.8미터에 이르는 이곳은 일단 황폐해지면 다시 나무가 자라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이런 데서 어떻게 숲을 가꾸었는지를 보기 위해 요즘도 몽골과 중국, 그리고 임업 선진국인 캐나다에서까지 견학을 온다.
대형 풍차와 함께 신재생에너지 전시관이 들어선 옛 대관령휴게소에 서면 줄 맞춰 심어 삼각형의 수형이 두드러지는 전나무숲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렇게 숲이 울창한데 왜 조림이 불가능한 지역이라고 했을까. 의문은 광장 뒤편에 설치된, 사람 키보다 높은 통나무로 엮어 만든 방풍 울타리를 보면 풀린다. 바람을 차단하는 울타리 뒤에서 어린 전나무가 자라고 있다. 35년 전 황무지를 숲으로 바꾼 기술은 아직도 쓰이고 있다.
야생화 숲길이 있는 광장 오른쪽 특수조림지에 오르는 길 옆에는 당시 방풍 울타리의 기둥이 잔해로 남아 있다. 방풍책은 높이 3미터의 통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조릿대, 싸리 등을 엮어 만들었는데, 울타리를 경계로 바람을 50퍼센트 이상 줄이는 효과를 냈다. 특수조림지에는 20미터 길이의 울타리가 240개 세워져 총 길이는 4,800미터에 이르렀는데, “거센 바람에 무너지면 세우기를 수십 번 되풀이해야 했다”고 동부지방산림청의 《국유림 경영 100년사》는 적고 있다.
큰 묘목은 이렇게 울타리로 바람을 막았지만 작은 묘목은 나뭇가지로 발을 만들어 둥글게 감싸는 ‘통발’로 보호했다. 조림한 모든 나무에는 지주를 설치해 뿌리가 흔들리지 않게 고정했다. 대관령 정상 일대는 바람과 추위가 극심해 산기슭의 조림사업이 성공한 뒤에도 벌거숭이인 채로 남아 있었다. 1999년부터 3년 동안의 복원사업에는 1970년대 이후 고안한 기술이 총동원됐다. 방풍 울타리와 통발 이외에 새로 방풍망이 도입됐다. 묘목 위에 모기장과 비슷한 그물을 씌우되, 삼각기둥의 꼭짓점을 바람 방향으로 향하도록 설치해 바람을 막는 장치였다. 논 흙 90톤을 산꼭대기까지 옮겨와 토질을 개량하기도 했다.
대관령 정상의 방풍 울타리
현재도 전나무를 강한 바람으로부터 지켜주는 유력한 도구이다.
ⓒ 김영사 |
이 모든 과정은 일일이 사람 손이 가는 작업이어서 지금이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실제로 주민이 아니었다면 산림을 복구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이 지역에서 초등학교에 다녔던 오영숙(평창국유림관리소 숲해설가) 씨는 “학교에서 방풍망을 만들어오라는 숙제를 내주기도 했다. 어른들은 산에서 묘목을 캐 오거나 마을마다 정해진 구역에서 반장의 인력동원에 따라 작업을 하고 밀가루 포대를 일당으로 받아 오기도 했다”고 말했다.
방풍 울타리와 통발 등은 현재 몽골과 내몽골에서 사막화 방지 조림을 하는 데 쓰이고 있다. 그런데 이 기술이 지역주민의 전통기술에서 나왔다는 주장이 있다. 조림사업 당시 평창군 산림과 직원이던 김군섭(평창국유림관리소 숲해설가) 씨는 “이 지역에서는 돌담을 쌓을 돌이 많지 않아 전통적으로 나뭇가지로 담을 세웠다가 나중에 화목으로 써왔다. 방풍책은 이런 전통 지혜를 조림에 응용한 것”이라고 말했다.
애초 대관령 일대는 소나무와 전나무뿐 아니라 피나무, 신갈나무 등 활엽수가 우거진 숲이었다. 일제강점기 말부터 가혹한 식민정책을 피해 숨어들어온 화전이 소규모로 분포했다. 5·16 쿠데타 직후에는 병역기피자와 불량배들에게 고된 노동을 시키기 위해 조직한 국토건설단이 이곳에서 대규모로 화전을 일구기도 했다. 이에 더해 북한 게릴라의 잇단 침투에 대응하기 위해 화전민들의 집단 정착촌을 이곳에 세우면서 대관령 일대의 산림은 순식간에 벌거숭이산으로 바뀌었다.
특수조림의 계기는 1975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영동고속도로 건설을 시찰하러 왔다가 헬기에서 황폐화된 대관령 일대를 목격하고 녹화를 지시한 것이었다. 당시는 1973년부터 ‘치산녹화 10개년 계획’이 대대적으로 전개되던 시점이었다. 학계에서는 조림에 대해 부정적이었지만 대통령의 특별지시는 무서웠다. 《국유림 경영 100년사》는 “상급 관서의 사업 독려로 인해 담당자들의 고생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밝히고 있다. 물론 조림에 생계가 달린 주민의 고생은 말할 것도 없다. 김군섭 씨는 “황무지가 푸른 숲이 되기까지 주민의 노력이 가장 컸다. 대대로 후손에 물려줄 자랑스러운 숲이다”라고 말했다.
어렵게 키운 숲이어서 그랬는지 숲이 지나치게 울창해지는데도 아무도 손을 대려 하지 않았다. 마침내 1998년 금융위기 뒤 공공근로를 이용한 숲 가꾸기 사업을 벌여 1억 5,000만 원 상당의 목재를 생산하기도 했다. 김중기 평창국유림관리소 진부경영팀장은 “애초 특수조림지는 경제림 조성이 아니라 녹화, 곧 환경적 목적에서 출발했다. 바람 센 고산지역의 육림사업 모델로서 연구가치가 높은 곳이다”라고 설명했다.
대관령뿐 아니라 우리나라는 산림녹화의 선진국이라고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런 산림녹화가 어떤 역사적 맥락에서 성공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세계적인 환경사상가인 레스터 브라운(Lester Brown)의 책 《에코 이코노미(Eco-Economy)》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2000년 11월 고속도로로 남한을 달리면서 한 세대 전만 해도 헐벗었을 산마다 나무로 꽉 들어찬 모습을 보고 전율을 느꼈다. 여기서 나는 우리가 지구를 녹화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일본의 식민지 침탈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거의 모든 산이 벌겋게 벗겨졌던 최빈국 한국에서 어떻게 녹화가 성공했는지는 국제적인 관심사다. 그러나 흔히 생각하듯 단지 나무를 많이 심는다고 녹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심는 것보다 많이 베어내면 산림은 헐벗기 마련이다.
18세기부터 1960년대까지도 벌목을 막는 엄격한 형벌규정이 있었고 막대한 양을 조림했지만 산림 황폐화를 막지 못했다. 도시와 농촌을 가리지 않고 나무를 베어 아궁이에서 태워버렸기 때문이다. 식목일 행사가 일찍이 1946년에 시작됐는데도 산림 황폐화를 멈추지 못한 것도 같은 이유였다. 국내 전체의 에너지 사용량에서 나무를 태워 얻은 에너지의 비중은 1950년 90.5퍼센트에 이르렀다. 그것이 1960년 62.5퍼센트, 1979년 21.6퍼센트, 그리고 1990년 0.9퍼센트로 격감한 과정이 바로 우리나라 산림녹화의 역사이기도 하다.
국립산림과학원 배재수 박사는 해방 이후 우리나라가 산림녹화에 성공한 이유를 분석한 논문에서 “1955년 당시의 연료재(목재) 소비량이 그대로 이어졌더라면 10년이 채 지나지 않아 우리나라의 산림 대부분은 황폐화되었을 것이다”라고 했다. 무연탄의 보급, 도시로의 임산연료 반입 금지, 농산촌의 연료림 조성 등이 산림녹화를 성공으로 이끈 핵심적인 정책이라고 그는 분석했다.
그러나 이런 연료 대체도 경제성장과 소득 증가, 농촌인구의 감소 등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강력한 리더십도 무시할 수 없다. 산림녹화사업은 1962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국가 주요사업으로 포함됐고, 1967년 산림청을 설립한 이후 1973년 시작한 제1차 치산녹화 10개년 계획의 조림 목표량을 4년 앞당겨 달성했다. 1979년 시작한 제2차 치산녹화 10개년 계획에서는 1차 때의 속성수 중심에서 벗어나 경제수 조림 비중을 높였고, 인건비 등 비용 상승과 사회적 요구를 반영해 자연휴양림 조성 등으로 정책 방향을 옮겼다.
산림녹화가 성공한 데는 문화적 배경이 작용했다는 주장도 있다. 신준환 국립수목원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마을마다 숲을 지키는 오랜 전통이 삼국시대부터 내려왔고 그것이 힘든 일제강점기에도 상당수 마을숲이 보존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산림녹화를 말할 때 빠뜨릴 수 없는 요인이 열대림이다. 동남아의 값싼 목재를 수입해 쓴 덕분에 우리 산의 나무를 베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대관령에 그토록 힘들게 조림한 것도 자랑거리로 생각할 수만은 없다. 한편으로 이 사례는 고산지대는 일단 훼손되면 스스로 회복이 불가능하고 인공복원도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기도 하는 것이다. 교훈은 한 번으로 족한데, 그 후에도 곳곳에서 비슷한 실수가 벌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