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가 반발에 쌀시장 개방 미룬 '부메랑'
정부, 쌀값 폭락 막으려 올해 40만t 매입
수입쿼터 따라 해외서 그만큼 다시 사와
올들어 8월까지 쌀 수입량이 25만t을 넘어서 작년보다 50% 이상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추세라면 올해 쌀 수입량은 40만t에 육박할 것으로 전망된다.
농가 반발을 의식해 정부가 쌀 시장 전면 개방(관세화)을 미루고 수입 쿼터(할당량)을 설정한 결과
쌀이 남아도는데도 계속 쌀을 수입해야 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3일 한국농산식품유총공사(aT) 농식품 수출정보(KATI)에 따르면 올해 1~8월 쌀 수입량은 25만2430t으로
전년 동기 (16만2961만t) 대비 54.9% 증가했다.
이런 추세가 이어지면 올해 전체로는 수입량이 38만~40만t으로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정부는 지난 8월 국무회의에서 실제 생산된 쌀 40만t과 작년 수확한 5만t을 합쳐 총 45만t을 매입하는
'2024년 공공 비축 시행계획'을 의당시 쌀 한 가마(80kg) 가격이 18만원대로 떨어져 농가 반발이 거세지자
매입량을 평년 수준(35만t)보다 늘렸다.
한국은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며 농산물 시장을 관세화했지만 쌀은 농가 보호 등을 명분으로
20년간 관세화를 유예했다.
관세화 유예화가 끝난 2015년부터는 쌀 수입관세율을 513%로 높게 적용하는 대신
일정 물량은 낮은 관세율(5%)을 적용해 수입(저율관세할당 .TQR)하고 있다.
지난해 각국이 이상기후로 쌀 수확량이 감소해 한국 수출량이 줄었지만, 올해는 원래 수준으로 돌아왔다.
정부 관계자는 '10년 만이라도 일찍 쌀 시장을 개방해 저율관세할당 물량과 국내 생산량을 줄였다면
지금처럼 쌀을 비축하면서 수입하는 역설적인 싱황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쌀 시장 막자, 되레 수입만 늘어...매년 보관비용만 혈세 4000억
20년 '쌀퓰리즘'...벼농가 눈치보며 개방 미룬 '부메랑'
1995년.2005년 두 차례 유예
매년 의무수입물량 40만t 달해
5년간 수입금액만 2조 투입
쌀풍년에 연말 비축미 140만t 전망
내년 보관비 4561억...11% 폭증
전문가 '포퓰리즘이 농업 망쳐'
한국은 쌀이 남아도는 나라다.
3일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지난 8월 말 현재 정부가 비축한 쌀 재고 물량은 약 121만t에 달한다.
유엔식량농업기구가 권고한 한국의 적정 비축 물량인 80만t보다 50% 많다.
쌀 소비량은 빠르게 줄고 있는데 생산량은 감소는 상대적으로 더딘 데 따른 것이다.
개방 미룬 대가로 수입쿼터 급증
국산 쌀도 남아도는 상황에서 수입 물량까지 더해지는 악순호나은 1995년 시작됐다.
한국은 당시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면서 농산물 시장을 개방(관세화)했지만 쌀 시장만큼은 유예했다.
국내 농업계 대다수를 차지하는 쌀 농가의 반발이 거셌기 때문이다.
농민단체는 쌀 시장 개방을 막기 위해 논을 갈아엎고 상경 투쟁했다.
분신을 시도하는 농민도 있었다.
'쌀은 '식량안보'와 직결된 문제'라는 주장도 개방 유예에 힘을 실었다.
쌀 개방은 2014년까지 20년간 이어졌다.
쌀 시장 개방 유예는 '공짜'가 아니었다.
정부는 쌀 개방을 미루는 대가로 일정 물량을 5%의 낮은 관세율로 수입하는 저율관세할당(TRQ) 방식을 받아 들여야 했다.
TRQ 물량은 1995년 5만1307t에서 2004년 20만5229t, 2014년 40만8700t으로 계속 늘어났다.
2015년 마침내 쌀 시장이 개방되면서 수입 관세율이 513%로 높게 설정됐지만
TRQ 물량인 40만8700t에는 5% 관세가 그대로 유지됐다.
정부는 매년 TRQ 물량을 계약하지만, 실제 쌀 수입량은 연도별로 차이가 난다.
운송에 시간이 걸리다보니 실제 통관이 이듬해 이뤄지는 경우도 있어서다.
미국, 중국 등 수출국의 이상기후 등으로 쌀 생산이 줄면 국내 수입량이 감소하기도 한다.
2021년 49만2901t, 2022년 48만3157t에 달하는 쌀 수입량이 지난해엔 28만2079t으로 급감한 이유다.
하지만 올해는 수출국의 생산량이 평년 수준으로 돌아와 한국의 수입량도 예년 수준으로 회복했다.
정부가 쌀을 수입하는 데는 매년 수천억원이 들어간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쌀을 수입하는 데 2조원 이상을 투입했다.
정부는 수입한 쌀과 매입한 국내 쌀을 보관하면서 매년 정부양곡 관리비 명목으로 또 수천억원을 쓴다.
최근 5년간 양곡관리비는 1조9594억원에 달했다.
농식품부는 내년 정부양곡 관리비 예산으로 올해(4091억원(보다 11.5% 늘어난 4561억원을 책정했다.
올해도 '원치 않는 풍년' 들 듯
이런 상황을 놓고 농업계에서도 '농가 눈치를 보면서 개방을 미루다 쌀 시장을 망쳤다'는 비판이 나온다.
개방을 앞 당겨 TRQ를 최소화했어야 국내 쌀 공급과잉이 해소되고 쌀 시장 왜곡도 줄었을 것이란 지적이다.
정황근 전 농식품부 장관이 작년 5월 취임 1주년 기자간담회에서 '2004년 쌀 시장 개방을 미룰 때
누군가 목숨 걸고 막았어야 했다'고 말한 이유다.
쌀 공급과잉 사태는 올해 더 심각해질 전망이다.
올해는 별다른 풍수해가 없고 일조량도 많아 쌀 풍년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정부 내부에선 '요즘은 풍년이 오더라도 기쁘지 않고 오히려 걱정만 커진다'는 말이 나온다.
농식품부는 올해 밥쌀 재배면적 2만ha 수확분을 시장에서 사전에 격리하고 필요에 따라 추가 조치를 취할 예정이다.
정부는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더불어민주당 등 야당이 추진하는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야당은 쌀값이 폭락했을 때 정부가 초과 생산된 쌀을 의무적으로 매입하는 내용의 양육밥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법안이 개정될 경우 쌀 생산량이 더 늘어 공급과잉 상황이 더욱 악화할 것으로 정부는 우려하고 있다.
정부는 지방자치단체별로 벼 재배면적 감축량을 할당해 쌀 생산량을 줄이는 작업에 나설 방침이다.
협조하지 않는 농가엔 페널티를 부여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쌀 농가가 콩 등 대체 작물을 재배하면 보조금을 주는 전략작물직불제도 강화하기로 했다. 이광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