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 중 가장 춥다고 하는 소한이나 대한이 오기도 전에
뭐가 그리도 급했는지 날씨는 할 짓을 다했다.
수은주를 영하 10°아래로 끌어내리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더니
연일 영하를 고수하며 강추위 연장전은 끝낼 줄을 모른다. 도대체 어쩌자는 건지....
춥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몸도 마음도 지쳐가다 보면
이따금씩 새하얀 눈이 소복소복 쌓이는 날도 있었다.
소담스럽게 눈이 오는 날에는 마음은 이미 덕유산 자락으로 산행을 떠나고 있다.
물론 도심에 눈이 내리는 순간부터 불편하기만 한 천덕꾸러기라는 걸 잘 알면서도
평생토록 철이 들지 않은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검은 호랑이해 임인년이 다가는 12월 말 까지도.
여전히 온도계 수은주는 영하를 오르내리며 엄동설한을
자랑하는 12월 31일은 서울 한가운데 있는 남산으로 가볍게 산행이 있는 날이다.
설산을 가는 산행이 아니라 살짝 서운했지만 아무렴 어떤가
남산 또한 임인년을 보내기에는 안성맞춤이다.
남산 다시 보기
잿빛구름이 가득한 하늘에는 금방이라도 뭔 일을 저지를 것처럼 음산합니다.
아침햇살은 간 곳이 없어 지극히 실망했지만 눈이라도 온다면 천만다행이라고
위로를 하며 간식만 넣은 백팩을 맥없이 추스릅니다.
주차장 공사로 어수선한 시민운동장 옆길에서
먹이사냥하는 비둘기 서너 마리를 만났습니다.
오랜만에 산행 자랑질하고 싶어 순간 멈칫했지만 살얼음이 끼인 도로에서
먹이를 찾아 부지런히 움직이는 빨간 발이 안쓰러워
재빨리 지하철역으로 갔습니다.
서울역 숭례문 앞에서 산우님들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주고
받으며 숭례문(남대문)으로 향합니다.
2008년 화재가 나기 전에는 일제강점기 때 한양도성이 철거되는
비극에 비켜가지 못해 숭례문 주위가 몽땅 헐린 채로 숭례문만 덩그러니 남아
사방팔방으로 차도가 연결되어 '가까이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였습니다.
화재가 난 후에 시민들이 숭례문을 드나들 수 있도록 도로를 만들고 길지는 않지만
성벽도 있어 아늑하게 남대문 성안으로 들어가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조선시대를 가는 것처럼.
숭례문을 들어가자 남대문 시장이 주말 아침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활기를 잃은 남대문 시장에서 조선시대가 아니고
문명이 활짝 꽃핀 21세기라는 것을 실감 합니다.
대형할인점과 백화점에 고객을 빼앗겨 경쟁력을 잃은 남대문시장이라 하더라도
남대문시장만의 또 다른 매력에 가끔은 오게 되는 남대문시장을 뒤로하고
나지막한 언덕길을 올라갑니다.
힐든호텔이 없어진다고 옥상에서 인부들이 힐튼호텔 간판을 떼고 있는
모습이 먼발치에서도 보입니다.
임인년 마지막날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대우실업과 인연이 깊은 힐튼호텔.
가 본 적이 없어 강 건너 불구경이지만 전화위복이라 믿고 싶습니다.
숭례문이 화재로 인해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것처럼.
남산공원이 우리를 기다리며 들머리라고 합니다.
그들의 예쁜 짓에 호기심 가득 언덕을 올라갑니다.
잔설이 언덕길 한 편을 새하얗게 카펫을 깔아 놓고
어서 오라고 손짓합니다.
자칫 훌러덩 미끄러지면 대형사고라는 걸 알면서도
그들의 치명적 유혹에 넘어가 기어이 잔설길을 따라가면서
어처구니없는 행동에 웃음꽃은 저절로 펴졌답니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우리는 흔히 말을 합니다.
서울 한복판 남산공원에는 우리들의 영웅들이 운집해
있는 동상과 기념관이 있습니다.
제일 처음 만난 김유신동상.
삼국통일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장군이지만 개인적으로
고려가 통일을 했더라면 우리는 중국으로부터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 때문에 영웅으로 까지는
부르고 싶지 않은 김유신 장군 동상을 지나갑니다.
1860년대 조선에 대부호 아들로 태어나 장원급제까지
했으니 시쳇말로 금수저에 엄친아입니다.
그렇지만 시대는 일제강점기로 들어서고 마음이 있는 곳에
물질이 있다고 전재산을 털어 만주에서 독립군을 양성하는
신흥 강습소를 설립했던 너무도 멋진 이시영 선생님 동상도 보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교과서에서 많이 배워 누구나가 알고 계신
백범 김구 선생님 동상 앞에는 백범광장까지 있어 선생님이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의 영향력을 가히 짐작케 합니다.
만일에 백범 김구 선생님이 살아계셨다면 한국전은 없었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도 하면서.
마지막으로 들린 곳 안중근 의사 기념관입니다.
김구 선생이 말씀하셨던 "총 잘 쏘는 청년"은 서른두 살.
어찌 보면 새파랗게 젊은 청년이 자신이 읊었던 시
"사나이 뜻을 품고 나라 밖에 나왔다가"처럼 이 나라를 위해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내놓았으니 우리들의 영웅임에는 틀림없습니다.
3층 건물의 안중근 기념관은 안중근 의사 생애부터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 저격하는 장면 뤼순 옥중 재판 과정 등등
자세하게 전시되어 있어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는 듯했습니다.
개인적으로 뤼순 옥중에서 집필한 '동양평화론'이 가장 호기심을 자극했고
혈서로 쓴 대한독립은 우리가 대대손손 가슴속에 깊이 새겨야 할 말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나와 새하얀 눈이 소복소복 쌓인
한양 도성 벽을 따라 돌계단을 올라갑니다.
남산타워가 훤히 보이는 팔각정으로 올라 갈수록 후끈 열기도 올라오지만,
찬바람이 쓰윽 지나가며 겨울산행의 백미라고 살짝 귀띔했습니다.
팔각정 바로 아래에는 연인들의 사랑이 도망가지 말라고
사랑의 자물쇠가 형형색색 수도 없이 많이 철책에 매달려있어
사랑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들의 영원한 화자라고 합니다.
이제는 그저 유물에 불과한 봉수대가 철책에 갇혀있는 남산
팔각정에 가볍게 올라왔습니다.
서울 한복판에 있는 남산을 조선시대에는 목멱산이라고 했답니다.
목멱산에서 잠시 조선시대로 시간여행을 떠나봅니다.
저 멀리 한양도성 안에는 인왕산, 북악산, 낙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한양도성 밖에 있는 북한산, 아차산도 손에 잡힐 듯 아련합니다.
목멱산에는 다산성곽길도 있습니다.
다산 정약용과 동시대 사셨던 연암 박지원의 허생전에 나오는
허생원도 목면산 아래 목적골(남산골)에 살았답니다.
우리 모두가 조선의 르네상스를 꽃피우고 개혁군주로 추앙받는 정조 재위 시절
다산 정약용은 끝까지 정조를 도와 수원 화성이란 커다란 업적을 남기고 곳곳에 성곽을 세웠다면,
연암 박지원은 허생전과 같은 사회 비판적인 소설을 지어
정조가 문체반정을 만드는 계기를 준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물론 '이덕일'씨는 '정조와 철인정치 시대'에서 문체반정이 그게 다는 아니라고 변명해 주지만.
무장과 지장 그리고 덕장의 리더십까지 골고루 갖춘 정조라 하더라도
군주라는 위치가 어떤 것인지를 조선시대 시간 여행을 끝내며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산길 눈이 소복이 있는 산길을 내려오면서 비록 상고대가
눈꽃처럼 피어있을 덕유산 덕유평전은 못 갔지만 덕유산 산행을
한 것 같은 기분은 충분히 느낄 수가 있어 임인년 한해를
즐거운 마음으로 보낼 수가 있었습니다.
2022년 12월 31일
NaMu
첫댓글
시간 여행, 덕분에 잘 따라 읽었습니다.
목멱산이 남산의 다른 이름이었다는 것을
그새 세월의 흐름에 잊고 있었네요.
나무랑님의 등산기는 그냥 등산만이 아니지요.
겨울등산, 서울의 중심에 있는 남산을 가면서
숭례문에서 부터 시작하여
남산에 자리하는 대한민국의 역사적인 인물 나열이
흥미도 가고 남산에 있는 것이 남산의 면모를
갖추게 되어 재미있게 읽습니다.
등산을 하면서, 여러가지 역사적 사실에
다시 한 번 더 마음에 담을 수 있어
감사합니다.
사진이 예뻐서 한 번 더 보았습니다.ㅎ
남산에 그렇게나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는지
저도 이번에 처음 알었어요.
학생이 산행하고 어설픈 글을 써서
선생님께 검사 받는 것처럼
세심한 댓글 정말정말 감사드립니다.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복 많이많이 받으세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지하철 1호선 타시고 서울역에서
내리셔서 4번 출구로 나오면 남대문이
훤히 보인답니다.
남대문 시장 쪽으로는 수문장도 있어요.
첨에는 마네킹인줄 알었는데요.
가만히 보니까 눈썹을 움직여서 정말
수문장 이구나 했다니까요.
새롭게 단장된 남대문 잘 보았습니다
오래전 소공동에서 근무할때 점심시간이면 남산을 자주 올랐지만
김유신 이시영 백범 동상과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남산에 있는줄은 몰랐어요
팔각정은 생각나네요
숭의여전 앞길로 하산하고는 했지요
아무튼 눈길에 운동화가 위태로워 보이기도 하구요
아고야~ 장문의 글을 대하고는 기가 팍 죽습니다 ~
가볍게 산책하기에는 남산 참 좋아요.
김유신,이시영, 백범 동상하고 안중근 의사 기념관은
최근에 만든 것 같아요.
저도 첨 가 봤거든요.
남산 간다고해서 아무생각 없이 운동화 신고 갔답니다.
장문에 단점은 큰맘 먹고 읽지 않으면
보는 순간 질려 버리거든요.(민폐예요ㅠㅠ)
어설픈 글 잘 읽어주시고 댓글까지
달아주신 정성 넘넘 감사드려요.
남산의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집니다.
힐튼호텔이 없어지는군요.
젊은날, 맨땅에 헤딩하던 사업 초창기, 힐튼호텔에서 독일 공급자와 만났던 날이 생각나네요. 마늘을 아주 잘 먹어 놀랐습니다.
복원한 남대문이 예전의 외따로 떨어진 것 같던 남대문보다 정감이 갑니다. 역사를 빛낸 분들의 이야기를 같이 되짚어보며 산행 따르다보니 끝이 났네요.
덕분에 고국 방문기회 있으면 남산을 꼭 한번 걷고 싶어졌습니다.
힐튼호텔에서 그런 아련한 추억이 있으셨군요.
저도 남대문 보고 깜짝 놀랐어요.
남대문을 들어 갈때 조선시대로 나들이 가는
느낌였거든요.
옙^^ 서울에 오심 남대문 남산 강추예요.
맘자리님 서울에 오심 남대문 남산 수필방 정모
하기로해요.
시간 얼마 안 걸려요.(아무래도 고국에 오심 할일이
많잖아요)
가볍게 점심 먹으면 되니까요.
남산도 코스가 여러 곳이고 가보니
이런 곳도 있구나 생각이 들 정도로 멋있더군요.
지척에 명산을 가지고 있는 서울을 도성으로 정한
조상님 들에게 세삼 감사 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그러게요 남산 코스가 여러군데 있는데요.
숭례문 남산 코스가 제일 쉽게 올라가는 것같아요.
가을에는 신라호텔 뒷쪽으로 올라오는 코스도 좋다고 하는데요. 계단이 길어서요.
서울 중심에 있는 산이라서 그런지 조상들의 얼을 살리는 공사는 지금도 진행 중 인것 같아요.
옙^^ 감사드립니다.
한스님도 지금처럼 건강하시고 늘 행복하세요.
제가 가보지 않은 남산을 나무랑님 따라
가보았습니다 .
저는 충무로 역에서 몇번 남산을 올라가
보았거든요.
서울시내에 우뚝 솟은 남산이 자랑스럽다고
생각했습니다 .
아름다운 남산의 또 다른 이름이 목면산이란것을
배우고 갑니다 .
나무랑님 참 예쁘시군요 ㅎㅎㅎ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3.01.03 16:57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3.01.04 11:39
아~함 충무로 쪽에서 가셨군요.
가장 쉬운길은 숭례문 (남대문)에서 남산
가는 길입니다
젊고 예쁘기야 아녜스 님이라는 이야기를 저도 들었어요👍
어느 계절에 가도 좋은 남산을 다녀오셨군요., 나무랑님 닉에서 남자분인가? 생각했는데 이렇게. 멋진 포즈를 취할 줄 아는 여인이었군요. 잘 읽었습니다
서울 한복판에 있어서요.
가볍게 가기에는 넘 좋은 것같아요.
그래서 그런지 남산은 항상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남산을 많이 올라가 보았지만 갈 때마다 명산이란 생각이 듭니다.
없는 것 없이 오밀조밀 갖추고 있어서 지루하지 않지요.
작년에는 가을볕을 맞으며 뒤편 산길을 통해 올아갔는데요, 올라가는 길도 참 많지요.
특별한 추억이 있는 산이라 보기만 해도 정겨운 산입니다.
숭례문을 어디서 찍으면 저런 사진이 나올까요. 참 신기합니다. ㅎㅎ
저도 작년 가을날 신라호텔 뒷길로 갔는데요
성곽 바로 옆에 노송들 하고 나무들 넘넘
좋았던 기억이 있어요.
마치 비밀의 정원처럼 남산에 이런 곳이 있구나하고
감동 했답니다.
그러게요 자그마한 성벽이 온통 다 나왔어요.
저도 깜짝 놀랐어요.
화암 님께서도 사진 찍으러 다니시니까
잘 아시네요.
나무랑님 긴 글을 지루함 없이
단숨에 읽어 내리며
나무랑님 매력에 푹 빠져들었습니다
사진의 모습에서도 그런게 느껴지네요
참 좋은 친구 한 사람 만난 그런 느낌입니다
제 글이 맘에 드셨나봐요.
아직은 서투른 글인데 잘 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사실은 제가 찍은 사진을 넣으려고 했는데요.
남대문 성벽이 모두 다 나온 정말 나오기 어려운
사진을 찍어주셔서 제가 찍은 사진은 내렸답니다.
참 좋은 친구로 잘 봐주셔서 감사드려요.
글도 어쩌면 이렇게
차분하고 단정하게 쓰시는지요?
겨울 산행에 눈까지 겹치면 어렵지요.
내리막에는 살살 걸어도 미끄덩 하지요.
날씬한 아가씨 한 사람
참 이쁘구나 합니다.잘 읽었습니다.^^
우~와 정말로 넘넘 잘 봐주셔서요.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새해에도 지금처럼 건강하시고
늘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