晉州姜門(진주강문) 姜孟卿(강맹경):(1410~1462)-(어머니에게 종아리 맞은 宰相)
鄭昌孫(정창손)의 뒤를 이어 左議政영의정)姜孟卿(강희경)이 領議政(영의정)에 오르니,世祖(세조)4年(1459)11月1日 姜孟卿(강희경)의 나이 아직 50(歲(50세)이 채 안된 比較的(비교적)이른 나이였다. 姜孟卿(강맹경)은 晉州姜氏(진주강씨)로 高麗(고려)때, 재주가 넘쳐 漢江以南第一學童(한강이남제1학동)으로 稱頌(칭송)을 받던 翰林院(한림원)의 直翰林(직한림)姜彰瑞(강창서)의 後孫(후손)으로,曾祖父(증조부)姜蓍(강기)는 恭讓王(공양왕)과 査頓(사돈)으로 文下贊成事(문하찬성사)였고, 할아버지 姜淮伯(강회백)은 朝鮮(조선)太祖(태조)때 東北面都巡問使(동북면도순문사)였는데,咸鏡道(함경도)를 摠括(총괄)한 地方長官(지방장관)인 셈이었다. 姜孟卿(강맹경)은 이처럼 隆盛(융성)했던 名門家(명문가)에서 朝鮮(조선)太宗(태종)때 昌寧縣監(창녕현감) 姜友德(강우덕)의 두 아들 中(중)長男(장남)으로 태어나, 世宗(세종)11年 文科(문과)에 올라 열아홉 살 弱冠(약관)의 나이로 官職(관직)에 들어섰는데, 벼슬길이 順調(순조)로와 舍人(사인)·司憲府執議(사헌부집의)等(등)要職(요직)을 거치며 世宗(세종)의 信任(신임)을 받았고,文宗(문종)이 卽位(즉위)하자 42歲(42세)나이로 오늘날의 靑瓦臺秘書室長格(청와대비서실장격)인 都承旨(도승지 )에 올랐다.賓禮(빈례)와 祭禮(제례)等(등)큰 禮式(예식)이 있을 때 마다 임금은 반드시 姜孟卿(강맹경)을 찾았다.名相(명상)黃喜(황희)의 幕下(막하)에 있을 때 黃喜(황희)가 稱讚(칭찬)하기를“내 늙은 몸으로 사람을 많이 보았지만 姜郞(강랑)같이 훌륭한 사람은 보질 못했다.10年이 지나지 않아 내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하였는데,果然(과연) 그의 말대로 된 셈이었다. 世祖(세조)의 信任(신임)이 두터운 데다,淸白(청백)하기까지 하여, 그야말로 그의 運命(운명)은 錦裳添花(금상첨화)격으로 다듬어졌다. 姜孟卿(강맹경)이 領議政(영의정)에 갓 올랐을때 世祖(세조)가 讓寧大君(양영대군)과 걸음을 같이하여 姜孟卿(강맹경)의 집을 찾았다. 기둥이 낡아 쓰러져가는 草屋(초옥)의 뜰에는 질그릇 두어 개가 놓여 있을 뿐 집안은 困窮(곤궁)함이 가득하였다. 이에 讓寧大君(양영대군)은“기둥이 썩어가고 있구려! 사람이 다칠 것 같소.一國(일국)의 首相(수상)집이 이와 같으니 이 또한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오!”하고 慶歎(경탄)하였다. 姜孟卿(강맹경)의 어머니는 知甫州事(지보주사) 李惠(이혜)의 딸이었는데, 賢母良妻(현모양처)의 龜鑑(귀감)이었으며, 母道(모도)가 峻嚴(준엄)한 女傑(여걸)로 故鄕(고향)인 晉州(진주)에서 살기를 固執(고집)했다. 어느날 領議政(영의정)에 오른 姜孟卿(강맹경)이 故鄕(고향)의 어머니를 찾아보고 잔치를 베풀려 晉州(진주)로 내려오다가,途中(도중)에 地方官廳(지방관청)에 들려 쉬면서 오느라 미리 豫告(예고)해 드린 날짜보다 하루가 늦게 故鄕(고향)집에 닿았다. 이에 마음이 傷(상)한 老母(노모)는,宰相(재상)인 아들의 冠帶(관대)를 벗기고 긴 회초리로 宰相(재상)의 종아리를 事情(사정)없이 치면서,姜孟卿(강맹경)의 輕率(경솔)했던 行動(행동)을 꾸짖었다. 이에 사람들은“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다!”라고 讚歎(찬탄)하였다. 世祖(세조)7年(1461)4月 17日, 姜孟卿(강맹경)은 51歲(51세)比較的(비교적)젊은 나이로 눈을 감으니, 諡號(시호)는 文景公(문경공)으로 내려졌다. 오늘날의 京畿道(경기도)楊平郡(양평군)玉泉面(옥천면)新福里(신복리)에 그의 墓所(묘소)가 마련되었고, 이듬해에 神道碑(신도비)를 세웠는데, 碑文(비문)은 領議政(영의정)申叔舟(신숙주)가 짓고,4寸(4촌)아우인 戶曺參議(호조참의)姜希顔(강희안)이 篆字(전자)와 함께 글씨를 썼다. 姜孟卿(강맹경)의 墓域(묘역)은 京畿道記念物(경기도기념물)第154號(제154호)로 指定管理(지정관리)되고 있다. 姜孟卿(강맹경)의 아우 姜叔卿(강숙경)은 오늘날의 副知事格(부지사격)인 江原道事(강원도사)를 거쳐 司憲府(사헌부)의 從3品(종3품)執義(집의)에 올랐는데,世祖(세조)가 特別(특별)히 故鄕(고향)晉州近處(진주근처)의 咸安郡守職(함안군수직)을 내려, 가까이서 어머니를 모시게 하였다. 그는 善政(선정)을 베풀어 그의 治積(치적)이 朝廷(조정)에 보고되기도 하였다. 출처 歷史와 人物 [출처] 晉州姜門(진주강문) 姜孟卿(강맹경):(1410~1462)-(어머니에게 종아리 맞은 宰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