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産 맥주 소비 10년만에 11배로…
1933년 영등포에 조선맥주,
소화기린맥주 건립
석영 안석주가 조선일보 1930년4월5일자에 그린 만문만화 '이 사람이 술을 마시면!'. 일본산 맥주 소비 급증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1930년 당시 조선서 팔리던 맥주는 거의 전부 일본산이었다. 맥주는 모던 보이들이 즐겨마시던 술이다. 조선은 '술 권하는 사회'에서 '술 취한 사회'로 바뀌는 중이었다.
‘조선 전토(全土)에서 1년에 소비되는 술이 그중에 맥주만 보더라도 근 900만 병-.돈으로는 삼백 수십만원이라 한다. 그래서 조선서의 술세가 일천삼백만원이라는 놀라운 숫자를 보여준다. 술도 좋은 때는 좋은 것이로되, 이렇게 조선 사람의 생활이 파멸이 이 술에도 원인이 있다는 것은 진실로 두려운 일이다. 조선의 박카-스(酒神)의 신도들이 아직 이 술을 향락품으로….’(‘이 사람이 이 술을 마시면!’, 조선일보 1930년 4월5일)
만문만화가 석영 안석주(1901~1950)가 뉴스를 보고 통탄했던 모양이다. 조선의 술 소비량이 늘어서 총독부가 주세(酒稅)로 거둬들이는 수입만 1300만원이라는 뉴스였다. 특히 ‘모던 보이’들이 사랑한 맥주 소비가 늘어나 지난 1년간 940만 병을 마셨고, 술값만 329만원이었다고 했다.(’1년간 맥주소비 800만병에 300만원’, 조선일보 1930년 4월3일. 제목은 800만병이라고 썼지만, 실제론 940만병으로 기사에 나온다)
이 기사는 ‘없는 살림에 술값이 이렇게 많다’는 부제를 달았다. 조선인이 술을 많이 마시는 것도 문제이지만, 맥주 소비량이 급증한 것도 가계를 압박하는 원인으로 지목됐다. 안석주는 금욕적 금주론자는 아니었다.
‘울분과 설움이 어찌 술 한잔에 풀어지리오마는 정신상으로 잠시라도 고통을 잊게하는 데는 술이라는 게 좋은 때도 있다. 하루 온종일 햇빛도 없는 공장속에서나 등덜미가 패이도록 온종일 등짐을 져도 선술집 막걸리 한잔에 기운을 돋아 너털웃음을 웃는 것도 통쾌한 일이다. 그리고 양복세민들의 쓰라린 마음도 이 술 한잔에 녹아버리는 수도 있다.’ 위 만문만화를 이렇게 시작한 것을 보면 그렇다.
맥주 1병이 소고기 150그램의 영양분을 갖고 있다고 선전한 기린맥주 광고. 1930년 신문에 실렸다.
◇ 일본서 전량 수입한 맥주
1930년 안석주가 비판한 맥주는 전량 일본서 수입했다. 당연히 비쌌다. 1924년 기준, 한병에 요즘 돈으로 약 7500원꼴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소비량은 급증했다. 1923년 약 112만8000병을 마셨는데, 10년 뒤인 1933년 1254만병으로 급증했다. 안석주가 만평을 그린 3년 뒤, 연 300만 병이 늘어난 것이다.
일본 맥주회사는 몇차례 합병을 거치면서 삿포로, 아사히를 생산하는 대일본맥주, 기린 맥주가 시장을 장악했다. 1933년 경성에서 가장 많이 팔린 맥주는 기린이었고, 다음이 삿포로, 사쿠라, 유니온, 아사히 순이었다. (‘경성맥주소비’, 조선일보 1933년3월16일)
나라 없는 식민지에서 우리 기업은 신통찮았고, 일자리는 마땅찮았다. 그런데 주세는 해마다 급증했다. 1935년에도 마찬가지였다. 지금도 조선일보 1면 촌평으로 남아있는 ‘팔면봉’ 필자는 이렇게 한탄했다. ‘주세를 일천오백만원이나 내게 되었다고 주조협회(酒造協會)에서 축하회 계획. 맥주의 소비도 삼십만상자에 달(達)한다니, 조선의 경기(景氣)는 술먹은 경기(景氣)로군.’(팔면봉, 조선일보 1935년8월11일
기린맨주는 맥주가 연말연시 선물로 좋다고 선전했다. 맥주는 고급품이었다. 기린맥주 1930년말 신문광고.
◇ 영등포에 들어선 일본 맥주회사
성장성 높은 시장을 그냥 둘리 없었다. 일본 맥주회사들은 조선에 세울 맥주공장 후보지를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1924년에 이미 기사가 나기 시작했다. 인천과 영등포가 경쟁 후보였다. 두 지역 주민들도 유치에 나섰다. ‘일본맥주 주식회사 분공장 설치지에 대하여 인천서는 기성회를 조직하고 운동중이오, 영등포에서는 시민대회까지 열고 맹렬한 운동을 계속하고 일방으로는 두 곳이 함께 동경 본사에 교섭위원까지 보내어 극력쟁탈전을 하는 터인데 양편의 주장을 소개하면 영등포편은 공장지은 땅값의 반액밖에 안되고 한강이 가까워서 물 쓸 편의와 경성이 근접한 것을 주창하며 인천편은 인천이란 도시가 배경이오 교통이 편의하고 또 원료의 집산지인 관계상 영등포보다 낫다는 것인데 하여간 이삼일 안으로 결정되리라더라(인천)’(‘맥주 分工場에 인천, 영등포의 경쟁’,조선일보 1924년11월30일)
하지만 정작 공장이 들어선 것은 10년가까이 흐른 후였다. 신흥공업단지로 떠오른 영등포를 낙점했다. 1933년 삿포로와 아사히를 생산하는 대일본맥주회사가 조선맥주를, 기린맥주주식회사가 소화 기린맥주를 세웠다. 이듬해 공장이 완공되면서 가동에 들어갔다. 오늘날의 하이트 진로와 오비맥주의 전신이다.
◇ '맥주 1병은 소고기 125그램’
맥주는 대부분의 조선인에게 낯선 술이었다. 일본 맥주회사들은 일종의 ‘신비 마케팅’을 했다. 1920년대 삿포로 맥주 광고를 보면, 아무런 설명 없이 맥주병 그림과 브랜드 이름만 썼다.
흥미로운 사실은 맥주는 술이 아니라 자양식품이라고 광고했다는 점이다. 기린 맥주는 이렇게 선전했다. ‘맥주 한 병의 영양량(營養量)은 우육사반근(牛肉四半斤)과 같다.’ 1근=600그램으로 계산하면, 맥주 1병이 소고기 150그램과 같은 영양가가 있다고 광고한 것이다. ‘런던위생시험소’라는 그럴듯한 서구 연구소 보고서에 나오는 내용이라고 했다. 요즘 같으면 과장광고로 처벌받을 일이다. 삿포로도 체위(體位,체력) 향상에 도움되는 술이라고 광고했다. ‘최고급 순독일식’을 내세우거나 연말연시 선물, 또는 한여름 증정품으로 좋다는 문구를 붙여 이런저런 마케팅을 요란하게 했다.
◇ 국산 맥주라고 선전
영등포에 공장을 세운 일본 회사들은 한술 더 떴다.
“반도의 발전은 우리 조선 신품의 애용으로부터…
여름은 조선산의 대표품,
삿포로, 아사히를 애용하십시오.”
1937년 삿포로와 아사히를 생산하는 조선맥주는 이렇게 광고했다. 일본 기업이 세운 맥주회사지만 경성에서 만들기 때문에 국산품이라는 주장이었다. 해괴한 논리였지만 일본 맥주회사는 조선산 애용을 내세워 우리 소비자들을 공략했다. 우리 기업인이 세운 맥주 회사는 없을 때였다.
1939년 여름 맥주 소비가 급증해 경성에 맥주가 동났다고 전한 조선일보 1939년 9월3일자 기사.
◇ '분수없는 過飮이오’
맥주 판매량은 끊임없이 늘어만 갔다. 전쟁 중에도 품귀현상을 빚을 만큼 식지 않았다. ‘현재 조선서 팔리는 맥주 중 가장 많이 팔리는 것은 역시 삿포로와 기린인데 이 두회사에서는 금년도 작년만큼 여기고 각각 20만석 가량밖에는 준비를 안했던 것이 이번 여름의 한발 때문에 초여름 무렵부터 맥주가 무섭게 나가기 시작하여 8월달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스톡’(재고)이 거의 동날 지경에 달하였다는 호경기를 맞이하여 이 때문에 시내 식료품 도매상에서는 맥주가 동이 나서 카페나 빠에서는 하는 수없이 한병 두병씩 사환을 시켜서 잡화상 기타 골목 가게를 순례하여 걷어오는 상태다.’(‘분수없는 過飮이오’, 조선일보 1939년 9월3일)
맥주 품귀 때문에 주당(酒黨)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총독부는 맥주 판매량 일부를 가정용으로 제한해서 공급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 가정용 맥주도 구할 길 없어 불만이 쏟아졌다.
‘’나온다는 말만 들릴 뿐 실물은 영영 보이지 않는 것은 무엇?’이란 수수께끼까지 나오게 된 ‘가정용 맥주’의 가는 곳은 어딜까? 드디어 경찰에서는 ‘가정용 맥주’의 행방수사를 시작하였다. 가정용 맥주는 부내에 배급되는 맥주 전체의 약 2할이 나온다고 회사 측은 말하고 있으나 그같이 많이 나온다는 맥주가 소매상의 손을거처 일반 가정으로 직선 코스를 밟아야할 것이 가정에는 들어오지않고 중도에서 코스를 바꾸어 딴곳으로 빠지는 현상이라 일반 가정의 불평이 많으며….’(‘이름 좋은 가정용,꼴 볼 수없는 맥주’,조선일보 1940년8월10일)
경찰이 도소매상과 요릿집, 카페 등 맥주 배급과 판매 실상을 단속한다는 내용이었다. 중일전쟁의 총성은 높아가는데 조선에서는 맥주 확보를 위한 총력전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석영 안석주가 조선일보 1930년4월5일자에 그린 만문만화 '이 사람이 술을 마시면!'. 일본산 맥주 소비 급증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김기철 학술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