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를 들어서 사무실에 누가 있지 않아요? 물질적으로 그 사람이 있지 않아요. 그걸 부재라 그래요. 사람은 부재이지만 그곳을 연구실이라고 하면 연구실은 돌아가고는 있어요. 존(存)하지 않는 건 아니어요. 연구실로서의 기능은 살아있는데, 연구실에 사람이 없으니까 부재라고 그러는 거죠. 그러니까 물질적으로 무언 가가 있다 없다 할 때는 재(在)를 써요. 그런데 있고 없고와 상관없이 기능은 돌아가고 있다 없다! 어떤 사람의 역할이 있다 없다! 그럴 때는 존(存)이라고 그래요. 존(存)과 재(在)가 분간이 잘 안 될 수 있어요.
아버지는 계시는데 아버지 같지 않아요. 아버지를 못 느끼고 살아요. 그러면 아버지는 실재하는데 아버지는 심중에서 부존(不存)하는 거예요. 없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어떤 잘못된 가정에서는 그런 얘기를 하죠. 아버지가 있지만 아버지가 있으나 없으나 한다고 생각해요. 있으나 없으나 하는건,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뜻이잖아요. 그럴 때는 존(存)을 써요.
이게 구분이 잘 안 되는 점이 있기 때문에 합해서 존재라고 그러지만, 존재는 이그지스트(exist)의 개념은 아니어요. 꼭 굳이 한다면 존(存)은 be동사의 개념이에요. 재(在)는 있다 없다의 이그지스트의 개념이에요. 이그지스트는 정말로 있다 없다의 개념이에요. 근데 be 동사는 그가 있든 없든 간에 그의 존재됨이에요. 실존의 개념이죠. 이 이그지스트는 실재의 개념이에요. 다르죠.
여기서 부재(父在)라 그랬어요. 아버지가 아버지다운지 안 다운지 아무 관계가 없는 거예요. 아버지라는 물질적 존재가 있으면, 그 물질적 존재가 아닌 아버지로서 인식하라는 거예요. 그 인식이 존중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있다는 것 자체를 정신적으로 받아들이고 또는 이해하라는 거예요. 그게 존중의 한 모습이라는 거예요.
부재(父在)하면 관기지(觀其志) 즉 “그 뜻을 보라” 그랬는데요. 번역하면 쉬운데 여기도 살펴볼 단어가 몇 개가 있어요. 우리가 ‘관(觀)’이라고 이렇게 쓰잖아요. 이 관이라는 말의 뜻이 우리가 볼 때 ‘보다’ 라고 하는 것과 좀 달라요. ‘보다’라는 표현을 쓰면 무슨 시청할 때 볼 시(視)자도 있죠. 그리고 관찰할 때 찰(察)자도 있죠. 볼 견(見) 자도 있죠. ‘보다’라고 하지만 뜻이 서로 다르니까 다른 글자가 있는 겁니다.
견(見)은 컨텍트예요. 사물과 사물이 이렇게 컨택(contact)하는 거예요. 내가 이 사물에 눈이 미쳐서 컨택이 됐다는 뜻이지 컨택의 내용이 어느 정도인지, 컨택이 얼마나 섬세하게 됐는지 강하게 됐는지는 따지지 않아요. 컨택이 됐으면 그냥 볼 견(見)자가 들어가요. 그러니까 사람을 봤다, 얼굴을 봤다, 이것은 ‘견면(見面)’이죠. 중국어로 지엔미엔(见面)이라 하는데, 그러면 그냥 얼굴을 본 거예요. 얼마나 제대로 봤는지, 반갑게 봤는지, 그냥 보는 척만 대충 봤는지를 떠나서 직접 얼굴이 컨택 된 거예요. 그러면 見이에요.
시(視)는 내가 보려고 해서 보는 게 아니에요. 엄밀하게 보면 보여지는 거예요. 앞에 이게(礻) 붙었죠. 이게 붙으면 보통 귀신 등 비물질적인 영역과 관련된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그러니까 내가 보려고 하는 게 아니라 보여지는 거예요. 나타나지는 거예요. 이건 엄밀하게 말하면 어피어(appear)의 개념이에요. “내 눈앞에 나타났다”의 개념이에요. 나타나니까 보게 되는 거죠. TV는 내가 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청이라고 하는 말에 충실하다면, 나는 보려고 하지 않는데 스위치를 트니까 탁 나타난 거예요. 나는 보게 된 거예요. (물론 스위치는 자기가 눌렀겠죠.) 시(視)는 그런 의미예요. 시(視)는 보게 된 게 아니라 약간은 아예 보여지는 셈이죠.
그러면 관(觀)은 뭐냐? 큰 틀로서 관은 움직이는 과정을 보고 있는 거예요. 뭔가 움직이고 있잖아요. 그러면 움직이는 걸 같이 보고 있는 거예요. 하나 하나 흘러가잖아요. 그 흐름을 보고 있는 거예요. 약간은 시간을 점유하고 있어요. 견(見)은 탁 컨택하는 순간을, 시(視)는 나타나게 되는 어떤 피동형을 말한다면, 관(觀)은 움직이는 과정을 추적하는 트레이싱(tracing)의 모습이 있어요.
반면, ‘찰(察)’은 정지된 것을 뜯어보는 느낌이에요. 딱 정지돼 있어요. 뜯어봐요. 하나하나 요모조모 뜯어봐요. 그러니까 구분은 잘 안 될 수는 있죠. 즉 움직이는 걸 보면서 동시에 그 움직이는 존재를 뜯어보면서 볼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구분은 돼요. 관(觀)은 시간을 점유하는 것을 이렇게 추적하는 개념, 찰(察)은 멈추어져 있는 사물이 멈춰져 있지 않지만 멈추어졌다고 가정하고 요모조모 뜯어보는 거예요.
관(觀)이라고 했으니까요. ‘부재(父在)’ 즉 아버지라는 물질적 존재가 있으면, 움직이는 과정을 보라는 거예요. 관기지(觀其志)! 뭘 움직이는 걸 보느냐? ‘기지(其志)’ 그것도 행동도 아니고 뜻이 움직이는 것을 보라는 거죠. 意志라고 할 때 ‘의’와 ‘지’가 뜻이 다르지만, 아무튼 지(志)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인식 가능한 형태로 선분화된 뜻이어요. 그러니까 意는 분석이 안 돼요. 그냥 바짝바짝 일어나는 거예요. 그런데 이 ‘志’는 이미 두뇌 작용을 통해서 하나의 명제 또는 연결된 명제로 발전된 약간의 가설적이고 이론적인, 엄밀하게 말하면 ‘견해’예요.
그런 ‘견해’가 생기면 그건 ‘지(志)’라고 볼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父在觀其志’는)아버지의 견해가 움직이고 있는 걸 보라는 거예요. “아버지라는 물질이 있으면(父在), 아버지라는 사람의 생각이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라(觀其志)”는 거예요. 그게 존중이라는 거예요. 그게 효(孝)라는 거예요. 효라는 것은 아버지가 앞에 있으니까 떡 하나 드리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높임’이라는 것은 그것이 아버지로 상징됐지만, 존재하고 있는 자에 대한, 그의 생각이 움직이고 있는 걸 보라는 거예요. 그게 ‘부재관기지(父在觀其志)’예요.
“아버지 살아 계실 때 아버지의 뜻을 살피고” 단순하게 이게 아니라는 거예요. 맞긴 맞아요. 그런데 정확하게 보면 이렇다는 거예요.
처음에 어떤 출발점을 보잖아요. 이렇게 다니다 보니까 내 눈에 무언가 들어왔어요. 그 다음부터 그걸 이제 이해하려고 하죠. 그러면 어떻게 하죠? 처음에 소이(所以)가 되는 것이 보여졌어요. 즉 시기소이(視其所以)했어요. 그 어떤 거리가 보여진 거죠. 그럼 어떻게 하느냐? 그 과정을 ‘관기(觀其)’라고 해서, 기(其)자를 쓰고 그가 경유(由)하는 것을 (觀으로)봐요. 그 다음에 찰기소안(察其所安)이에요. 안(安)은 종착점이라는 의미도 돼요. 종착점을 뜯어봐야 사물을 보는 거예요.
어디 가다 보니까 내 인연이 닿아서 그런지 사람이든 무언가 하나가 툭 들어왔어요. 그런데 이것을 이해하고 싶어졌어요. 그러면 그 움직인 걸 쫓아가요. 그러다 어딘가 앉아요. 앉아가 있으면 그걸 가만히 어떻게 생겼나 뜯어봐요. 어떻게 움직이나 하는 시간을 갖고 보고, 어떻게 생겨먹었나 어떻게 돌아가나 하는 것을 뜯어봐요.
처음 시작은 내게 우연히 다가온 거예요. 보려고 해서 봤을 수도 있지만 보려고 해서 본 것조차도 사실은 우연히 다가온 거예요. 우리가 생각하는 많은 편견이라는 게, 자신의 정당한 견해 아닙니까? 자신의 정당한 견해잖아요. 자신의 정당한 견해가 타인이 볼 때는 다 편견이죠.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자기가 봤다고 생각하지만 그냥 들어온 거예요.
저기 가서 강가의 돌을 한번 살펴봐! 했어요. 돌 위로 물도 지나가요. 그런데 자기가 돌을 하나 봤어요. 내가 봤죠. 하지만 그 돌이 나타난 거기도 해요. 돌은 한두 개가 아니어요. 하필이면 이 돌이예요. 하필이면 이 돌이라는 것은 내가 정말 이 돌을 선택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돌이 나에게 나타난 게 아닐까? 내 눈에 이 돌이 다가온 게 아닐까? 알 수 없잖아요. 내가 이 돌을 본 것인지, 이 돌이 내게 다가온 것인지 알 수는 없어요.
아무튼 아버지가 계세요. 그러면 아버지가 어떤 뜻을 갖고 움직이는지 보는 거예요. 그 뜻에 (해당하는) 생각이 계속 움직이겠죠. 그 생각이 움직이는 바를 봐주는 것, 즉 그의 생각의 폭을 이해해 주는 것, 그것이 높임입니다. 누구든지 간에 상대방이 있으면 뭔 생각하지? 어제 저런 생각하더니, 오늘은 이것 보고 이런 생각하네, 저것 보고 저런 생각하네, 또 저런 생각하네! 그걸 쭉 이렇게 관(觀)해주는 거죠.
觀이라는 것은, 새가 뭔가 내려다보듯이 보는 걸 말하죠. 새가 내려다볼 때 돌 내려다보고 풀 내려다보는 거 아니어요. 그런 걸 보긴 보죠. 하지만 새는 자기가 잡을 토끼를 바라보고 여우를 바라보겠죠. 근데 뭘 봅니까? 토끼가 뛰고 있는 걸 보는 거예요. 쭉 보다가 약점이 있는 지역에 가서 쫙 내리 덮칠 것 아니에요. 그렇게 보고 있는 게 觀이에요.
아버지를 쭉 시간적으로 관찰하는 거예요. 그게 높임인 거죠. 그때 비로소 나에게 아버지는 존(存)해요. 그때 그 관찰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아버지는 재(在)할 따름이에요. 아버지가 계시면 그 뜻이 움직이는 과정을 시간적으로 바라보고 이해했을 때 아버지는 비로소 나에게 존(存)해요.
그런데 현재의 관계는 존(存)하지 않는 아버지가 많죠. 대개 어머니는 늘 존(存)해요. 어머니는 밥도 해주고 하시니 어머니가 바쁜가 지금 무슨 생각하시나 관찰을 안 하면, 내가 밥을 못 얻어먹으니까요. 아버지는 存하지 않는 경우가 과거에도 있었겠죠. 어쨌든 이건 제가 지금 우스개 소리 비슷하게 드린 것이고요.
‘재(在)하는 존재’를 ‘존(存)하게 하는 게’ 존중이에요. 그래서 ‘存’은 우리 ‘존경하다’의 존(尊)과 발음도 같아요. 현재 중국어에서는 발음이 ‘춘(cun)’과 ‘쭌(zun)’으로 다르지만, 원래 당나라 송나라 때까지 발음은 같은 발음이에요. 이렇게 在하는 존재를 存하는 존재로 전환시켜주는 것이 곧 존경이에요.
그래서 아버지가 계실 때에는 그 아버지 삶의 생각의 궤적들을 바라보고, 부몰(父沒) 아버지가 몰(沒)한 것은 부재하죠. 안 계시는 거예요. 근데 문제는 몰(沒) 해도 존(存)할 수는 있어요. 안 계시는데 아버지 또는 어머니는 가슴 속에서 잠들어 있는 거예요. 존할 수는 있어요. 어쨌든 아버지라는 존재가 부재(不在)하게 됐어요.
‘父沒하면 관기행(觀其行)’ 그때 하셨던 행동들을 하나하나 시간적으로 보라는 거예요. 살았을 때 행동은 같이 하고 있는 하나의 작은 공동체 안에 있으니까요. 그런데 끝나고 나면 남은 것은 기억밖에 없잖아요. 그가 해왔던 행위! 그가 뭘 하려고 했는가! 여기서 행(行)과 위(爲)는 다르잖아요. 우리는 행위(行爲)라고 그러는데, 행(行)은 저절로 뭘 하는 거예요. 위(爲)는 목적의식적으로 뭘 하는 거예요.
아버지가 목적의식적으로 뭘 해온 게 아니라 그냥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이유를 떠나 그 모습을 이렇게 떠올려서 시간적으로 살펴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모든 존재가 재(在)와 부재(不在)를 떠나서 ‘존(存)하게 됐을 때’, ‘높임’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 다음에 많이 오해되고 있는 문장이 나옵니다.
“三年無改於父之道 可謂孝矣.”
삼년무개어부지도(三年無改於父之道)! 여기서 ‘어(於)’는 강조하기 위해서 들어간 거고요. 일본말 할 때 끝에 ‘데(て)’자를 안 붙여도 되는데 ‘데’자를 꼭 붙이는 것은 강조일 때가 있거든요. 마찬가지로 이 ‘於’자가 ‘~에 대하여’라는 의미인데 사실 없어도 되는 글자죠.
‘삼년무개(三年無改)’ 삼년 동안 고치지 않는다! 목적의식적으로 고치지 않는다! 목적의식적으로 고치지 않지만 저절로 고쳐 지긴 할 수밖에 없어요.
예를 들어, 여러분이 청바지를 사셨어요. 1920년대 40년대에 입던 청바지를 사셨는데, 이게 뻐덕뻐덕하고 잘 세워놓으면 서 있어요. 이런 청바지를 입어보니까 너무 힘든 거예요. 그걸 좋다고 입고 또는 억지로 닥터마틴 길들이거나 레드윅 길들이듯이 소킹(soaking)하고 길들여서 변화를 만드는 사람도 있죠. 이건 갱년 변화죠. 그러니까 시간이 지나니까 저절로 변해진 거죠. 물론 자기가 뭔가 딴 짓을 했죠. 세월을 흘러가면 변하는데, 안 해도 빛은 바래요. 굳이 청바지를 비교하면 워싱 하는 거예요. 아예 갱년 변화가 있는 것처럼 원 워싱, 투 워싱 해가지고 아예 이렇게 씻은 흔적을 만들어 가지고 내보내는 거예요. 사람이 고친 거죠. 이런 게 개(改)예요. 앞에 이것은 경(更)이죠.
여기서는 ‘무개(無改)’예요. 그러니까 억지로 고치지 마라는 얘기예요. 변화되는 것 자체를 거부하지 말라는 얘기는 아니에요.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면 당연히 저절로 변하는 것들이 많아요. 가족 구성원이 변해요. 집에 먹는 숟가락 수가 변해요. 밥그릇 수도 변해요. 먹는 사람들끼리 변하다 보니까 하는 대화의 내용도 변해요. 노동 구성도 변해요. 다 변해요. 이렇게 변해지는 것 자체를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에요. 억지로 뭔가를 뜯어고치지 말라는 거예요. ‘아버지 가셨으니 이제 내 마음대로 다 뜯어고칠 거야!’ 그런 거는 하지 말라는 거예요. 변하는 것은 받아들이되, 억지로 고치는 건 하지 마라.
무엇을! 이것도 중요해요. 아버지의 길이예요. 아버지 가던 길이라 그랬지, 아버지가 보유하고 있던 물건이라든가, 아버지가 맺고 있던 인간관계라든가 하는 것이 아니어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지향하려고 해서 걷던 길 자체를 억지로 바꾸지 마라! 무리해서 바꾸지 마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바꾸지 마라가 아니에요. 억지로 무리해서 바꾸려고 하지 마라. 그것도 얼마만큼?
3년을 최소한으로 유학자들은 얘기를 해요. 최소한 3년 이상 바꾸지 마라! 그냥 3년이에요. 더도 덜도 아니고 3년이에요. 3년 좌우라고 생각하면 돼요. 이건 시대마다 다를 수가 있죠. 이때 3년은 그 시대의 예법인 거죠. 그 시대의 사회 변화 속도 등에 맞춰서 도출해낸 결론인 거죠. 지금은 3년이 아닐 수도 있어요. 3년이면 그 집안이 풍비박산 날 수도 있거든요. 그래서 이 3년이라는 개념은 다르고요.
그리고 3년 이상이라는 개념은 절대 없어요. 옛날에 유학자들이 그렇게 통치 이념으로 쓰면서 3년상(喪), 7년상, 9년상, 12년상 이렇게 가는데 그런 짓은 잘못된 거예요. 딱 3년 그 정도! 그 당시의 사회적 발전 속도에서 3년이면 오늘날의 한 6개월 같을 거예요. 저는 더 이상은 안 봐요. 그래도 저는 1년 정도는 생각을 해요. 왜냐하면, 봄 여름 가을 겨울이 가는 하나의 가을 정도는 생각해 준다면, 여름에 돌아가셨다면 겨울까지, 봄에 돌아가셨다면 겨울까지, 겨울에 돌아가셨다면 다음에 겨울까지, 그러니까 한 해의 세월이 계절이 바뀌는 정도까지는 하는 거죠.
요즘 같은 때가 아니라 그때 3년이라는 건 굉장히 느리게 변해요. 이런 것을 안 바꾸려고 하는 것 자체가 예에 대한 개념이 잘못돼 있는 거죠. 그리고 3년 이상이라는 것은 억지스러운 복종의 모토예요. 국가에 대한 또는 가부장 권위에 대한 복종의 모토예요. 그게 아니라 아버지 가시던 길을 억지로 안 바꾸고 다가오는 변화를 받아들이면서 어느 정도 지켜보고, ‘이런 길을 가셨구나!’ 그 길을 가는 것에 대한 이해와 배움! 이것은 마지막 배움인 거예요.
아버지가 가셨으면, 아버지의 행위를 배우기에 충분한 시간으로 적절한 시간이 3년이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존중의 마지막은 이해이고, 그 이해가 일치하고 나면 마지막은 그것을 배우는 거죠. 진짜 존중은 배워줘야 되는 거죠. 안 배워주는 게 문제인 거죠.
3년이면 다 배운다는 거예요. 아버지가 계실 때는 그 뜻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이해함으로써 존중을, 즉 在(재)를 존(存)으로 올려주고 그리고 사라지시면 그 행위들을 쭉 봐서, ‘이러 이렇게 사셨구나!’ 하고 일단 받아들이는 거죠. 그렇게 받아들이면서 배워가는데, 그 당시 세월으로 3년 정도 배우고 나서, 이제 아버님은 내 속에서 사라지시는 거죠. 끝까지 있는 그리움은 인간적으로 있을지 몰라도 공동체의 관계 속에서는 사라집니다.
그런데 3년, 7년, 9년, 12년 그래서 몇년상을 했다고 하여 효부(孝婦)라 하는 건 전부 봉건시대 때 통치 철학으로 쓰이면서 복종의 모토로 써먹은 거예요. 전혀 상관없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아버지 계시면 재(在)하는 자를 존(存)하게 내가 이해해 드리고, 돌아가시면 뭘 했더라 살펴서 그 속에서 배울 거리 있으면 배우고, 가던 길은 무조건 바꾸지 않고 배울 때까지는 끌고 가고, 다 배우고 나면 던지고! 이것이 바로 높임이다! 이렇다면 효(孝)라고 할 수 있다! 높임이라는 게 딴 게 아니다!
높임이라는 것이 그저 ‘먼저 들어가시죠.’ ‘먼저 드시죠.’ ‘아버지가 숟가락 들기 전에 누가 숟가락 먼저 들어!’ 막 그러는 경우도 있지만, 그러는 집은 진짜 이상한 집이에요. 심지어 봉건적이라 하더라도 이상한 거예요. 다른 구성원들이 먼저 드시죠! 하면 마지못해 먼저 드는 거고 그것도 아예 ‘같이 들어!’ 하면서 양보하고 드는 거죠.
그런 것도 없이 누가 먼저 숟가락을 들었냐고 하면서 밥상을 엎으면, 그것은 봉건 이상의 짐승의 집이에요. 그건 아버지 할 뜻이 아니에요. 내 아버지 안에 짐승이 계시는구나 해야 되는 거예요. 어쩔 수 없어요. 우리들의 아버지 속에서 약간의 짐승들은 다 있었고, 오늘날의 아버지한테도 짐승은 많이 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우리는 아직까지 짐승의 옷을 다 못 벗었고, 최소화시키려고 하는 거죠.
아무튼 존(存)이라는 것은 높임이고, 존중이라는 것의 첫째 조건은 재(在)를 존(存)으로 만들어주는 거죠. 존(存)이라는것의 두 번째 조건은 일종의 연결성(連)을 해주는 거죠. 연결성이 곧 배움(學)인 거죠. 이게 높임이고 효라는 것이죠.
아버지가 얘기하면 무조건 따른다는 개념은 <논어>에 없어요. 조심스럽게 막 논쟁을 하기도 해요. 그런 구절들도 여러 군데 나와요. 아버지가 하는 게 나랑 너무 다르면 논쟁해보는 거예요. 단 존중은 해가면서 논쟁해보라고 하죠. 조심스럽게 이래저래 한번 얘기해봐라! 하는 그런 얘기도 많아요. 이제 이런 건 있어도 눈 감고 안 배우는 거죠. 그렇게 존중의 의미에 대해서 한 번 더 보충 설명이 있었습니다.
有子曰 禮之用 和爲貴. 先王之道 斯爲美 小大由之 有所不行. 知和而和 不以禮節之 亦不可行也.
12절입니다. 유자(有子)가 또 나왔습니다. 유자 말하기를 예지용(禮之用)! 예라는 개념이 드디어 나왔습니다. 예라는 것도 앞에 이 시(礻)가 붙었는데, 물론 이 시(礻)는 나중에 붙은 거겠죠. 그러므로 뒤에 있는 글자만 보면 돼요. 뒤에 있는 풍(豊) 글자는 어떤 글자냐? 위에 이렇게 풍성하게 뭔가를 차려 놓았어요. 그걸 어디에 차려 놓았느냐? 이렇게 제단(祭壇) 위에 차려 놓았어요.
이 제단 위에 풍성하게 물질이 차려져 있는 거예요. 이것은 단이죠. 단 위에 차려진 거예요. 그런데 단(壇) 위에 차려져 있는 것이 꼭 제단일까? 모든 단이라 그러면 왜 제단이라고 생각하느냐? 서양 사람들이 생각할 때 제단은 축제의 단이에요. 공동체 축제의 단인데, 동양 사람들은 제사 지내는 단으로 생각을 해요. 한자를 만든 건 동양 사람들이잖아요. 동양 개념으로 보면 제단 위에 물건을 놓고 있는데, 우리가 오늘날 제사를 제사로 생각해서 그래요. 지금도 제사의 뜻은 다른 데 붙으면 축제로도 많이 쓰여요.
엄밀하게 말하면 축제(祝祭)에 해당되는 제가 이게 원래 제(祭)예요. 이 제가 지금 현재 왜곡된 거죠. 원래는 고구려의 동맹, 부여의 영고, 무천 이런 것처럼 사람들이 같이 모여서 축제를 여는 그 장소에 있는 단이에요. 그 단이 풍성한 것, 공동체가 거두어서 함께 즐길 수 있는 것이 풍성한 것이 예(禮)에요.
예라는 것은 내가 누리고 귀신에게 바치고 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누리는 것이 풍성한 것을 말해요. 그렇게 풍성하게 되면 예인데,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 뭔가 형식이 있겠죠, 그 형식까지 포함하고 있는 거예요. 그 형식을 뭐라 그러냐? 의(儀)라 그래요. 우리 의례(儀禮)라고 볼 수 있죠. 이런 것을 지키기 위해서 나름대로 준칙과 행동 양식이 있겠죠.
이 풍성함이 유지되는 한 행동 양식은 유의미한 거예요. 공동체가 누릴 것이 풍성하지 않으면, 儀는 바꿔야 되는 거예요. 개(改)해야 돼요. 그러니까 예라는 것 자체는 어디까지나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국가 공동체, 지역 공동체, 가족 공동체 또는 여러 가지 목적의식적으로 만들어진 벗들의 공동체가 풍성해지는 것, 그것이 예예요. 풍성하지 않으면 예가 아니에요.
이렇게 풍성하게 만드는 형식이 儀예요. 그러니까 예의(禮儀)라고 그러는데, 의는 예에서 나온 하나의 실천 방편이고 규칙이죠. 그런데 이 규칙을 지켰더니 더욱더 풍성해지는 것이 아니라 초라해진다! 그럼 바꾸는 거죠. 그래서 “예는 언제든지 시대에 따라서 바꿀 수 있다”라고 공자는 이야기합니다.
모자를 예로 들어, 어떤 때는 무슨 관을 썼는데 지금은 그 관이 안 맞는 것 같아! 이 관을 쓰는 게 맞는 것 같아! 그러죠. 그래서 이러한 공동체를 풍성하게 하는 것, 이것이 그 시대에게 주어진 문화적 소명인 거죠. 그래서 예(禮)라고 하는 것은 굳이 이 의(儀)까지 포함하면 시대적 소명, 시대 문화인 거죠.
과거의 예를 지킨다! 그랬는데 공동체가 더 초라해진다면, 그건 예가 아닌 거죠. 그건 비례(非禮), 즉 예가 아닌 거죠. 예라는 건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거죠. 이 儀는 매너인 셈이고, 이 禮는 모랄(moral)이에요. 모랄의 목적, 모랄의 뜻이 그래요. 풍부해지는 거예요. 넉넉해지는 거예요. 넉넉해지도록 하는 방법이 매너이죠. 그런데 이 매너를 지키니까 점점 초라해지면, 이건 매너가 잘못된 거고 바꿔야 되는 개정 대상이에요.
그런데 이게 그 시대에 알맞다면 이건 왜 배워야 되느냐? 모랄과 매너는 왜 배워야 되느냐? 예의는 왜 배워야 되느냐? 이게 가장 뛰어난 생존 방법이기 때문이에요. 어느 시대에서나 이것이 의미가 있는 문화인 이상은, (문화가 없으면 몰라도) 유의미한 이상에는 이것만큼 좋은 생존 방법이 없어요.
학생들이 어릴 때 이 예의부터 배우잖아요. 어디 가서도 살아남아요. 이걸 안 배우잖아요. 어디 가서 살아남기 힘들 수도 있어요. 지금의 아이들끼리 자라면서 왕따도 있고 하는데, 왕따가 문제가 아니라 학교 폭력도 요즘 자주 나오죠. 훨씬 심해진 것 같아요. 상호성일 거예요. 어느 시대나 이 의(儀)가 안 지켜지면 왕따는 있어요. 왕따의 기준이 권력이나 돈이나 힘, 이런 게 기준이 되면 이제 이게 폭력이 되는 거죠. 예전에도 보면 욕도 너무 심하게 하고, 아무렇게 사람 대하고 그러면 그 친구 왕따당해요. 그건 어쩌면 사회적으로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도 있는데, 지금은 물론 전혀 경우가 다르고 야수화 돼 있으니까요.
아무튼 예라는 것은 시대 문화이며 동시에 공동체의 제단이 풍성해지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여기 보면 예지용(禮之用)! 그 예의 쓰임새라는 것, 즉 공동체가 풍성해지는 것이 왜 중요하냐 이거예요. 공동체의 풍성함의 쓰임새는 어디에 있느냐?
‘禮之用 和爲貴!’ 화(和), 조화, 어울림에 그 쓰임새가 있다는 거예요. 서로 어울려 살기 위해서, 화(和)를 귀(貴)하게 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그것의 목적이라는 거죠. 귀(貴)함이다! 화가 귀하기 때문이다! 和가 바로 貴하다! 시대적 공동체의 풍성함의 용도라는 것은 어울림을 위해 있는 것이다! 어울림을 위해 있기 때문에 그게 귀한 것이다! 라는 거죠.
선왕지도(先王之道), 그 앞에 우리 공동체를 이끌었던 지도자들의 길이라는 것은, 바로 이것을 아름답다 한 것이다! 이것을 아름답게 여겼다! ‘아름답다’는 우리 말을 일본어로 번역하면 뭐가 되죠? 기레이(きれい)라고 하죠. 기려(綺麗)라고 쓰죠. 기(綺)는 뭐죠? 이건 자수로 치면 여기는 하얀 실도 들어가고 녹색실도 들어가고, 뭔가 이렇게 여러 톤이 보이면서 예쁘게 잘 짜진 게 기(綺)예요.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천이 예쁘게 짜진 게 綺예요.
그 다음에 기려(綺麗) 할 때 려는 고울 려(麗)자이죠. 우리 고려나 고구려 할 때 처럼요. 밑에 있는 건 사슴(鹿)이죠. 사슴을 상형화시킨 글자가 이렇게 록(鹿)으로 바뀌었죠. 위에 있는 려(丽)는 뭐죠? 뿔이에요. 사슴의 뿔이 착 나는 것을 이쁘다고 한 거예요. 엄밀하게 우리 말로 다시 바꾸면 ‘아름답다’가 아니라 ‘이쁘다’에요. 이쁘다는 ‘보기에 좋다’는 거죠.
아름다울 미(美)는 위에 양(羊)이죠. 양을 큰 걸 써요. 언제요? 공동체 잔치에 양을 큰 걸 쓰는 거예요. 공동체의 잔치에 보다 큰 양을 쓰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고, 공동체를 위해서 그만큼 더 쓰는 것이 공동체다운 거예요. 아름다운 것은 ‘무언가 그것 다운’ 거예요. 알이 움을 틔운 것처럼 그것 다운 거예요. ‘알움다운’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이쁘다가 아니에요.
정말로 미소년이면 기레이한 소년인 것이고, 우리가 한국 사회에서 번역되기로 미소년이라면 그것은 “그의 마음씀이 공동체를 위해서 활짝 열려 있는 소년”이 미소년인 거예요. 누가 미남자일지 아닐지는 아무도 몰라요. 중요한 것은 미의 기준을 두고 나면 그 기준이 공동체를 풍성하게 하는데, 또는 작은 공동체 큰 공동체 많은데 거기를 향해서 마음이 열려 있고 거기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인 거죠. 그게 자기다운 사람인 거죠. 이 기레이(綺麗)는 겉모양이 그냥 수려한 사람인 거예요. 예쁜 비단 같을 뿐이고, 뿔 잘 난 사슴 같을 뿐인 거예요.
그래서 선왕의 길, 즉 앞 지도자들의 길이라는 것은 바로 공동체 풍성과 어울림, 공동체 풍성의 용도는 어울림이었으니까, 그 어울림을 알움답다 여겼던 것이에요. 그래서 소대(小大) 유지(由之), 즉 크고 작은 많은 것들이 바로 이 어울림으로부터, 이 어울림에 뿌리를 두고 시작했다는 거죠. 유(由)는 프럼(from)입니다. 큰 것 작은 것들이 다 여기로부터 기인한 것, 즉 말미암은 것이다!
그런데 유소불행(有所不行)! 행해지면 안 되는 것, 즉 아닌 게 있다는 거죠. 행위로 되면 안 되는 바가 있다는 거예요. 뭐냐?
지화이화(知和而和) 불이예절지(不以禮節之)! 화(和)를 화(和)로만 알고 즉 그냥 어울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예에 따라서 공동체의 풍성함이라는 이 목표와 어떤 시대 문화에 따라서 절목을 조정하지 않는다면!
‘어울리면 됐지 뭐!’ 이렇게만 생각하고, ‘그래 좋은 게 좋은 거야!’ ‘안 싸우면 됐지!’ 이렇게 얘기하면서, 그 시대적 문화에 따라가지고 조절하지 않는다면, 이것 또한 쓸모가 없다! 결국은 예는 어울림을 위해서 있지만, 그렇다고 예를 떠나서, 공동체적 풍성이라는 목표가 지속 가능하게 되는 이 어떤 것을 떠나서 어울림만 생각한다면, 그 어울림은 또한 쓸모가 없다! 이렇게 얘기하죠.
지난 번에 절(節)이 나왔지만요. 우리가 흔히 같이 쓰는 말이 있죠. 조절(調節)이라고 그러는데, 조(調)와 절(節)이 다르니까 같이 쓰겠죠. 같으면 굳이 따로 쓸 필요 없죠. 그러면 조(調)는 뭐냐? 앞에 있는 이 언(言)은 나중에 붙은 거겠죠. 두루 주(周)자가 뜻이겠죠. 말 그대로예요. 이것은 그저 항목의 내용, 그 집의 쓰임새, 그 집의 식구 수 또는 인구 수에 기준을 두든 어느 하나의 기준을 두고서 가정이면 가정, 호수(戶數)면 호수, 사람 수면 사람 수에 두고 그냥 두루두루 균등 분배해버리는 거예요. 똑같이 100명이 있다 하면, 100분의 1로 해가지고 다 100명에게 나눠줘 버리는 것! 그걸 조(調)라 하죠.
이 절(節)은 절목별로, 이 집은 지금 현재 아픈 사람이 있어서 뭐가 필요하고, 저 집은 좀 그래도 거둔 것도 넉넉하고, 이렇게 살펴가지고 골고루 절목에 따라서 두루두루 보살피고 풍성함을 누려가는 것이 절이에요. 절목이고 항목이에요. 항목별로 이렇게 분배하는 거예요.
그런데 조(調)는 항목 없이 그냥 n분의 1로 나눠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애매할 수 있어요. 절(節)이 결과적으로 어떤 경우에 독재를 가지고 오거든요. 과거에 계급의 분할을 가지고 오거든요. 그래서 조(調)도 문제지만 결국은 이 두 가지 조절(調節)이 아닌, 어느 선의 현실은 있을 거예요.
그러나 원칙은 필요한 만큼, 서로가 정당한 만큼, 절목에 따라서 나눠 가진다! 절목에 따라서 풍성함을 누린다! 그런데 조(調)는 그거 없이 인구 수가 됐든, 가정 수가 됐든, 토지 면적 수가 됐든, 무어든 기준 하나를 세워서 그냥 거기에 따라 n분의 1로 나눈다는 거예요.
특히 사람 몸을 조절한다 그러면 사람 몸을 調라고 보면 어렵죠. 장기를 그냥 기준으로 해버리면, 쓸개도 n분의 1, 간도 n분의 1, 소장도 n분의 1, 이름 있는 건 다 n분의 1 해가지고 영양분을 주욱 공급하는 거예요. 어떻게 될까요? 그 다음 날 그냥 죽어 있겠죠. 확실하게 죽어 있습니다. 안 죽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반대로 뭘 잘못 알고 이거 심장은 뭐 하니까 2, 너는 뭐 하니까 1, 너는 뭐 하니까 1, 그 다음에 어떻게 돼 있을 거예요? 죽어 있죠.
그래서 이게 답이 잘 없을 수 있어요. 이럴 때 공자가 선택하는 방법은 선택이 아니라 버림이에요. 그러니까 좋은 걸 찾지 않아요. 이제 앞으로 하겠습니다만, 10장 향당 편에 가잖아요. 공자가 뭘 고르는 게 없어요, 아닌 것을 빼나가는 거예요. 색이 안 좋으면 안 드셔요. 냄새가 이상하면 안 드셔요. 머머 하면 안 드시는 게 있지, 머머 한 것 골라가지고 꾸역꾸역 드셨다고 하는 얘기는 없어요. 우리 현대인들은 반대예요. 버리기보다는 좋은 것을 고르기에 빠져 있죠. 그래서 병이 났죠.
아무튼 n분의 1로 나누는 것도 어렵고, 항목별로 나누는 것도 내 편견이 작용하는 거죠. 엄청나게 잘 웃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조명 하나 잘못 주면 슬퍼하는 모습으로 비칠 수도 있어요. 엄청나게 슬픈 사람을 옆에서 카메라 빛으로 터치를 쫙 해주면, 이 사람이 기뻐서 환장하고 있는 모습으로 비칠 수도 있어요. 우리가 쓰는 조절 항목이라는 게, 그렇게 나의 정당함으로 비롯된 오해 편견일 가능성도 많죠. 그러니까 이게 결국은 조절이라 쓸 수밖에 없는데, 여기도 절이라고 썼지만 그 감안은 해야 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옛날에 이런 잘못된 일화가 있어요. 사실상 있지 않았던 일화인데, 꼭 있었다라고 돼 있는 일화가 있는데요. 공자께서 길을 가시는데, 어떤 한 아이는 길가에서 오줌을 누고 있고 어떤 아이는 길 복판에서 오줌을 누고 있는 거예요. 제자랑 같이 가시는데 공자가 길가에 오줌누는 애를 나무라신 거예요. 제자들이 “아니 쟤가 더 잘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하니, 공자께서 그랬다는 거예요. “쟤는 고치기가 참 어렵다. 얘는 고치기 쉽다.”
그런데 이건 사실상 공자와 관련된 진짜 일화가 아니예요. 진짜 일화라면 너무 공자답지 않아요. 이럴 수도 있는 거거든요. 누가 막 화가 났어요. 평상시에는 이 공동체가 만들어놓고 서로 지키기로 한 규칙도 너무 잘 지키고, 在하는 것들에 대해서 다 存하려고 애쓰는 젊은이예요. 이 젊은이가 너무 화가 났어요. 화가 나가지고 길 복판에서 그냥 확 갈겨버린 거예요. 근데 길 가에서 그때 같이 오줌을 누고 있는 애가 있어요. 얘는 맨날 누는 애예요. 그럼 누가 더 교화가 잘 될까요? 알 수 없잖아요. 길 복판에 있는 친구가 훨씬 낫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거는 공자답지 않은 일화예요. 공자라면 그걸 봤을 거예요.
아무튼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하면 공동체가 잘 되겠지 하는, 그 정신이나 그 목표 또는 그 목표에 의해서 검토된 방법론 또는 어떤 약속이 있겠죠. 서양의 경우에 약속은 뭐죠? 서양에서 이 의(儀)를 일반적으로 번역을 하잖아요.
의식(儀式)할 때 儀를 번역하면 이게 서양에서는 뭐가 되냐면 (동사로) 컴프라미스(compromise)가 돼요. 컴프라미스는 뭐죠? 타협으로 프라미스(promise)가 있잖아요. 이 컴(com)은 뭐죠? 같이 공유하는 거잖아요. 약속을 공유하는 거예요. 이렇게 이렇게 해서 협상을 공유하는 거죠. 그런데 이 의미는 의(儀)하고 좀 달라요. 물론 당연히 약속(promise)을 공유(com)하는 거긴 하지만, 약속을 공유했다기보다는 이것은 프라미스를 하는 존재들끼리의 단위가 정해져 있지 않아요. 사적인 개인이나 도둑놈 둘이서도 다 돼요. 그런데 여기에서 이 의(儀)는 공동체 전체에서 결정된 거예요.
과거에는 1년에 한 번 의(儀)가 결정돼요. 우리로 치면 10월 1일, 10월 상달 하루에 모여서 축제를 벌이죠. 하늘의 고마움에 대한 축제를 하고, 땅의 고마움에 대한 축제를 이튿날에 하고, 3일에는 지금까지 살다 가신 분들이 베풀어준 것에 대한 고마움에 대한 축제를 하죠. 그게 개천절이죠. 엄밀하게 보면 개천절이 아니라 개조(開祖), 조상들이 온 날이죠. 개천(開天)과 개지(開地), 옛날로 치면 개천벽지(開天闢地), 그 다음에 조상들이 온 날이죠.
그때 그러고 나서 회의를 하죠. 무리 무리들이 모여서 회의도 하고, 회의한 결과 이것 이것은 원래 하기로 한다! 그리고 작년에 세웠던 이것은 고쳐서 이렇게 하기로 한다! 이렇게 그때 만들어진 게 의(儀)예요. 아무거나 서로 약속을 공유했다고 의가 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공동체 회의장에서 만들어진 것이 의가 되는 거예요. 그때 공동체 회의를 우리 옛날 북방의 사람들은 뭐라고 그랬죠?
그 총회를 제비라고 그랬죠. 10월 상달에 열리는 총회를 제비라 불렀어요.
제비꽃이 언제 피죠? 벚꽃이 언제 피죠? 4월 초에 피잖아요. 그런데 운남 남간(南澗)에 가면 (지금부터) 한 일주일 있으면 이제 핍니다. 다르죠. 같은 벚꽃이에요. 유채는 언제 피죠? 체코 같은 데 가보시면 5월에 피어요. 다 달라요. 저 만주 어느 벌판에서는 제비꽃이 양력으로 10월 무렵에 펴요. 어쨌든 그때 피는 꽃이 제비꽃이에요. 그때 그쪽 지역을 떠나는 새들이 있겠죠. 그게 제비예요. 그래서 그 두 생물에게 이 총회의 이름인 ‘제비’가 그대로 붙었어요. 그래서 제비꽃을 뭐라 그러죠? 오랑캐! 우리가 오랑캐였잖아요. ‘오랑캐 꽃’이라고 하죠.
(논어적 배경이 아닌) 아무튼 북쪽에 살다가 남쪽에 내려와서 농경을 어느 정도 정착시킨 이후에도 계속 제비를 열었겠죠. 그때 제비에 참석하는 대장들을 뭐라 그럴까요? ‘성주’라고 불러요. 성주풀이 할 때 성주라고 불러요. 한자로 발음이 비슷하니까 그냥 성을 지키는 성주인가 보다 하는데, 이것과 전혀 상관없고요. 성주들이 여러 제비들을 데리고 같이 구성원들을 데리고 모여들어겠죠. 모여들어서 총회도 하겠죠. 총회 열던 데가 제비가 모이는 곳이에요.
그 중에서 어느 쪽은 서쪽으로 갔을 것이고, 어느 쪽은 동쪽으로 갔을 것 아니에요. 그렇게 초기 신라 사람들도 내려왔을 것 아니에요. 그들도 경주까지 가기 전에, 또는 경주를 일부 갔다 하더라도 총회를 열었을 것 아니에요. 그 총회 열던 데가 오늘날의 안동이에요. 그게 안동 제비원이에요. 그래서 성주풀이에 나오죠. 성주의 모든 주인이 어디 있냐? 그 제비원에 있다 그러죠. 어쨌든 제비라는 절차에 의해서 만들어진 게 儀라는 거죠.(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