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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잠
신잠申潛(1491년~1554년)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원량(元亮), 호는 영천자(靈川子) 또는 아차산인(峨嵯山人). 숙주(叔舟)의 증손자이며, 종호(從護)의 아들이다.
태인 현감을 역임하고 상주목사로 재임 중 죽었다. 태인 현감 재임 시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가 남아 있으며, 상주에도 유애비가 있다.
정읍 태인읍에 남아 있는 선정비의 명문은 아래와 같다.
“縣監申潛善政碑
申泰仁善政碑文
余閑居田里。門雀可羅。一日。坐竹間小齋。有二生褒衣博帶。頎然其貌。懷小刺求見。迺金上庠元,白上庠三龜也。二生之言曰。吾等世居泰仁。請言吾太守申侯之爲政焉。吾邑當輪蹄走集之地。人稀而事殷。役繁而賦夥。緩之則廚傳薄。急之則怨咨興。兩俱病焉。而理鮮得宜。侯於甲辰歲。初分左符。下車之日。首問宿弊之爲民害者。釐革立盡。孜孜於撫摩。斤斤於聽斷。律己以嚴。待人以恕。民迺悅服。歌頌始起。侯曰。未也。昔子游氏之爲武城也。以禮樂爲敎。而夫子喜之。此古今牧民之良法。而後世。德敎之澤不流。率以刑法束縛而操切之。故醇風美俗。罕或見之。吾但規規。於治道之末而已乎。於是。慨然以興,學變俗爲意。令於坊里。各設局堂。印藏書冊。豐 其餼廩。聚鄕子弟俊秀者。擇師而敎之。以至卹孤寡。崇節義。尙禮讓。礪廉恥。躬淳篤之行。而闡化道之方。豪胥猾吏。亦莫不縮頸革心而樂趨於善。不朞年而闔境大治。嘗扁退食之堂曰三事。蓋取古人當官之法。唯有淸愼勤而已。大書注解三字之義於壁上。旣飭其躬。又勖後來之君子。堂之東。搆草舍數楹。暇日則鳴琴玩鶴。蕭然有出塵之想。昔新羅之季。崔文昌孤雲。曾宰吾邑。其流風餘韻。至今爽人牙頰。吾侯之文藻襟期。可與孤雲。竝論於千載之上。而人之愛慕 歆艶之深者。則孤雲或未之先也。侯名潛。字元亮。高靈勳相叔舟之曾孫。三魁先生從濩之胤子。早承庭訓。克紹家業。文章書畫。世稱三絶。遠近來求者。戶屨常滿。每於聽事之餘。一掃百紙。略不凝滯。譬猶庖丁之解牛。其於游刃。恢恢乎有餘地矣。今者。秩滿賜環。行橐蕭然。琴劍圖書。不滿數馱。邑之老幼。攀轅截鐙。旣不可留。則伐石磨治。謀所以刻諸善政。而立于逵道之上。以傳示無極。願得先生揄揚之文。敢來請。余聞而嘆曰。有是哉。元亮之爲政。所謂導之以德。齊 以禮也。漢之公卿。多出於良二千石。君其人哉。第恨老拙不文。烏足以塞諸君之望。雖然。元亮魁癸酉進士。於吾門生友也。詩山距吾家蒼茫之間。異政之及民者。聞之稔矣。如是而喑無一語。則不幾於廢道人之善乎。況太史氏方秉大筆。特書于簡策者非一再。奚待余文。姑書與二生相道之言。以遺其父老。且規夫繼來之守土者
嘉靖紀元 二十八年蒼龍己酉仲春旣望
崇政大夫前議政府左贊成兼義禁府事知
經筵春秋館成均講事
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五衛都摠府都摠管
世子貳師
晉山 蘇世讓 記
<번역>
내가 시골에 살았는데 찾아오는 이도 드물었다.
하루는 대밭 서재에 앉아 있으니 큰 옷에 넓은 띠를 두른 두 선비가 찾아왔다.
생김새는 훤칠하고 명함을 보니 김상상 생원과 백상상 삼구이었다.
두 선비가 말하기를 우리는 대대로 태인에 살아왔습니다.
우리 고을 현감 신잠에 정사에 대하 말하고자 합니다.
우리 고을은 교통은 변화하나 인구는 적고 일이 많으며, 부역은 번거롭고 세금은 많으니
느리게 다스리면 음식점과 여관이 박하고 급하게 다스리면 백성들의 원성이 일어나 모두 근심거리여서 적당히 다스리기 어려웠습니다.
갑진년(1554년) 신후가 현감으로 와서 부임하는 날 백성들의 폐해를 물어 개혁하고, 민심을 무마하고 시비를 밝혀 법을 엄하게 다스리며, 백성들을 친절하게 대하니 백성들이 기뻐하여, 칭송하는 노래가 일기 시작하였습니다.
신후는 말하기는 아직 미흡하다.
옛날 자유씨 읍재로 있을 때 예악으로 백성들을 가르치니 공자도 기뻐했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백성을 다스리는 좋은 법인데 후세 덕화의 정치가 통하지 않고 형벌로 다스림으로 순하고 아름다운 풍속을 보기가 드물게 되었다.
내 부질없이 치도에만 얽매이겠는가? 하고 이에 학문(學問)을 일으키고 풍속을 변화하려는 뜻으로 방리(坊里)에 각각 마을 서당을 설치하고 서책을 인쇄하여 정서하게 하였으며 관곡을 풍부히 하고 마을의 준수한 자제들을 모아 스승을 데려다가 가르치고 부모를 잃은 고아와 과부들을 구조하여 절개와 예의를 숭상하고 염치심을 기르고 몸소 순수하고 돈독하게 행하여 교화의 길을 밝히니 호사하고 간활한 향리들도 움츠리고 마음을 고치지 않는 이가 없이 즐거이 선을 하게 되어 1년이 못 되어 온 고을이 잘 다스려졌습니다.
일찍이 퇴식지당(退食之堂: 자기 집)에 삼사(三事)를 편(扁)하였으니 대게 고인들의 관로(官路)의 법을 취한 것으로 오직 청(淸)과 신(愼)과 근(勤)이 있을 뿐이다 하고 세 자의 뜻을 해석하여 크게 써서 벽에 붙이고 스스로 몸을 닦고 또한 뒤에 오는 군수(郡守)들에 더욱 힘쓰게 하였습니다.
당의 동편에 초가 수 칸을 지어 놓고 틈이 있는 날에는 거문고를 올리고 즐기며 벼슬을 잊고 소연하였습니다.
옛날 신라(新羅) 말(末) 최문창(崔文昌) 고운(孤雲)이 일찍이 우리 고을의 군수로 있을 때의 치적의 여운이 지금까지 사람의 입에 오르고 있습니다.
우리 군수의 문장과 도량을 고운(孤雲)과 더불어 천년 동안 아울러 논의되지만 사람의 애모함과 우러러 하는 정도가 최고운도 어쩌면 신후(申侯)를 앞지르지 못할 것입니다.
신후(申侯)의 이름은 잠(潛) 자는 원량(元亮)이요 관은 고령(高靈)이니 훈상 숙주(叔舟)의 증손으로 삼괴(三槐) 선생 종호(從濩)의 아들이다.
일찍이 정훈을 받아 가업을 이뤄 문장, 서․화에 능하여 세상에서는 삼절(三絶)이라 일컬어 원근에서 구하려(작품을) 찾아오는 사람이 집안에 가득하다.
매양 공무에도 조금도 지체함이 없었으니 마치 포정(백정)이 소를 다루는 데 칼 놀림처럼 척척 여유가 있었도다.
이제 임기가 되어 돌아감에 행랑(보따리, 이삿짐)이 쓸쓸하여 휴대물과 도서가 몇 짐에 불과하였도다.
고을의 늙은이와 젊은이가 수레를 붙잡고 이별을 못내 아쉬워했으나 이미 만류할 수가 없게 되어 돌을 다듬어 그 치적을 새겨 큰 길거리에 세워 길이 전하고자 하오니 선생의 칭찬하는 글을 얻고자 한다며 글을 청하다.
내 듣고 이런 일이 있었던가 하고 탄식하다. 원량(元亮)의 정사함이 이른바 덕으로써 인도하고 예로써 다스림이다.
한(漢)나라의 공경(公卿: 三公九卿, 고위관직)이 양이천석(良二千石: 太守 良二千石-漢나라 때 郡의 太守(郡守)의 봉급 年 二千石이었음.)에서 많이 나왔는데 신후(申侯)도 그런 사람인가 다만 한스러운 것은 늙고 못난이의 서투른 문장으로 어찌 제군의 소망을 채울 수 있으리오.
그러나 원량은 계유진사(癸酉進士)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한 내 문생의 벗이다.
시산(詩山: 泰仁)은 내 집에서 먼 거리에 있으나 신후의 백성에 대한 특이한 정사를 들은 지가 오래이다.
이러한데 말 한마디 없이 가만히 있다면 도인의 선을 폐함이 아니겠는가?
항차 사관(史官)이 붓을 잡아 역사에 쓰는 경우도 하나둘이 아니니 어찌 나의 글을 기다리오만 우선 두 사람의 서로 하는 말을 써서 그 부모들에게 주고 또한 뒤에 오는 군수들에 규범이 되었으면 한다.”
가정기원 二十八 년 창룡기유중춘기망
승정대부전의정부좌찬성겸의금부사지
경연춘추관성균강사
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오위도총부도총관
세자이사
진산 소 세 양 쓰다
정읍 태인에 있는 피향정을 보러 갔었을 때 피향정 부근에 신잠의 비가 있어 보고 온 것인데, 그 당시는 청백리에 관심이 덜하여 대충 사진만 촬영하였다.
그리고 2023년 8월 휴가에 다시 가서 책에 필요한 사진을 촬영하였다.
특히 손중돈, 신잠, 주세붕, 노진 선생의 碑들은 1600년 이전의 선정비들로, 조선 영조 시대에 많은 碑들이 훼손되거나 망가진 것을 생각하면 역사적으로 인물을 연구하는 데 아주 중요한 것이다.
특히 조선왕조실록에는 나오지 않는 벼슬아치의 재임 기록이 보이는 것은 더욱 중요한 것으로 생각된다.
신잠 선생의 유애비는 상주에 1좌가 있으며, 청리면 수선서당의 입구에 있다.
상주 선정비를 조사하러 1박 2일로 가서 마지막으로 사진 촬영한 碑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애비遺愛碑
遺愛碑者故牧使申公碑也 尙實嶺南當孔道之州而又牧衆地大
號稱難治之來更値隔倂之歲憂民如病所以賑恤撫字者無不用
其情祛弊拙彊賦平均役季 巷窮谷之民益被惠澤待士以禮創書
院以勸學凡所設施動法古人朞年之問政 通人孚所謂召父杜母
蔑以加矣 州民不祿奄爾損館襯回之日莫不携老扶幼奠號哭
其遺愛在民心嗚呼深哉吳民追慕之情無以表著咸願立片石以寓
遠思 萬心齋應不謨而一基與峴山之碑豈異也
公名潛字元亮初守泰仁其民亦刻石記德
銘曰天惠仁侯實我父母
嗚琴坐治抱兒拔匪誘掖士流俾識戶牖 活我敎 我恩深惠厚 方歌
來暮痛切去後 見碑隨淚遺愛永久此石可泐公名不朽
丁巳 四月日 進士 金範 撰
번역:
비문은 故 목사 신공의 碑다.
상주는 실로 영남의 사통팔방으로 통하는 영남의 큰길에 임하는 고을이요.
또 인물도 많고 땅이 넓어서 일컫기를 다스리기기 어려운 곳이라 한다.
공이 부임하였을 때는 마침 수재와 한재가 발생한 해여서, 백성을 걱정하길 자신의 병같이 하고 재난을 당한 이를 구제하고 사랑하는 일에 애정을 쏟지 않음이 없었다.
폐단을 제거하고, 강포한 것을 물리쳤으며, 부역을 공평무사히 하여 궁벽진 시골의 백성이 더욱 혜택을 입었다.
선비를 대함에 예의로써 하고 서원을 창설하여 학문을 권장한 모든 조처와 법 시행은 옛사람을 본받았다.
일 년 사이에 정사가 형통하고 백성이 믿고 따라서 이른바 소부, 두모라도 더 할 수 없는 덕정을 베풀었다.
상주의 주민이 복이 없어 문득 세상을 떠나 관이 돌아가던 날, 노인을 부축하고 어린아이를 이끌어 奠을 드리며 통곡하였으니, 그가 백성의 마음에 끼친 사랑이 깊었도다.
우리 백성들이 추모의 정을 드러낼 길 없어, 모두가 비석을 세워 먼 뒷날까지 사모하는 마음을 붙이고자 원하였다.
온 고을 사람의 마음이 일제히 응하여, 일부러 꾀하지 않았는데도 일차 하였으니, 현산의 타루비와 어찌 다르리오.
공의 이름은 잠이요, 자는 원량이라, 처음은 태인 이었는데 그곳을 백성도 돌을 깎아 덕을 기록하였다.
銘(명)하노니
하늘이 어진 목사를 내셨으니, 실로 우리의 부모와 같다.
백성들이 절로 교화되어 잘 다스리지니
문을 열어 고아를 구제하고
세도가를 물리치려 하였도다.
사류(士流)를 이끌어 도와주니
식자들이 학술의 문호를 따랐도다.
우리를 살리고 우리를 가르쳤으니
은혜는 깊고 덕택은 두텁도다.
부임을 늦었음을 노래하였더니
가신 뒤에는 사무치게 간절하도다.
비석을 보며 눈물 흘리니
베푼 인애(仁愛) 후세에 영구하리로다.
비석에 새길 만하니
공의 명성은 길이 전하여
없어지지 않을 리 도다.
1557년 4월 진사 김 범 撰” 찬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에는 신잠(申潛)傳이 기록되어 있으며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진사 신잠은 신해생(辛亥生)이고 자(字)는 원량(元亮)이며 계유년 진사에 장원하였다. 한림으로 있었는데 안처겸(安處謙)의 옥사에 연루되어서 귀양 갔다.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서울에 살았고 삼괴(三魁) 신종호(申從濩)의 아들이다.
보유 : 천목에는, 헤아려 아는데 명민(明敏)하고 학행과 재예가 있으며 지조가 있다는 것이었다. 천과가 파한 뒤에 집에 있었다.
본디 명망이 있었으므로 재상들이 꺼려하는 바가 되었다. 신사년 추관(推官)이었던 영상 김전(金銓)·좌상 남곤(南袞)이 계하기를, “전일에 승지 최세절(崔世節)로 인해 최수성(崔壽城)과 신잠이 대신을 모해하고자 한다는 것을 들었으나 적실(的實)하게 알지 못했는데, 지금 송사련(宋祀連)이 바친 서기(書記)에 신잠의 이름이 또한 끼어 있으니 아울러 추문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여러 차례 형신(刑訊)을 더한 뒤에 장흥(長興)으로 유배시켰다.
양주(楊州)로 양이(量移)되었다가 사면되었다.
기해년에 임관되어 계자를 뛰어넘어 태인 현감(泰仁縣監)으로 제수된 후 여러 번 전임되어서 상주 목사(尙州牧使)가 되었는데, 백성 다스림이 첫째라 하여 통정(通政)으로 승진한 다음 죽었다.
호는 영천자(靈泉子)이다. 시율(詩律)을 잘 짓고 행서(行書)를 잘 쓰며 대[竹] 그림을 잘 그렸으므로 세상에서 삼절(三絶)이라고 일컬었다.
사문(斯文) 윤강원(尹剛元)이 일찍이 신사년 일을 물었더니, 공이 대답하기를, “강개스러운 일에 분격하여 한 말을 반측자(反側子 뒤집어 모해하는 자)가 재앙을 꾸며 얽어서 옥사를 만들게 되었다.
음애(陰崖)가 일찍이, ‘안처겸은 의협한 무리라.’ 일컬었는데, 이 일을 들어서 알 수 있다.” 하였다.”
정읍 태인면 사무소에는 신장 선생을 기리는 영상(影像)이 있다. 신잠 선생은 태인 지역의 縣監을 지내는 동안 동·서·남·북 네 곳에 學堂을 세워 儒學을 가르치고, 백성들에게 어진 다스림을 베풀었다.
그 후 태인을 떠나게 되자 백성들이 그를 기리기 위한 碑를 세우고, 선생의 조각상과 부인, 큰아들의 상, 시중드는 여인상, 호랑이상을 만들어 모시었다.
크기는 신잠像이 85.6㎝, 부인像 76.5㎝, 큰아들像 58.5㎝, 시녀像 55.5㎝, 호랑이像 61.5㎝이다.
당집은 1950년경 무너지고 현재는 조각상 즉 영상만이 태인면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다.
조각상은 모두 나무로 만든 입상으로, 화려한 색을 칠하였고, 조각 방법도 매우 정교하다.
제작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매년 정월 초하루와 대보름날이면 이곳에서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한다.
그리고 신잠 선생이 청백리에 녹선 되는 기록은 보이지 않지만, 염근에 대한 기록이 보이고 있다.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명종 7년 임자(1552년) 11월 4일(임오)
궐정에서 염근인과 근근인 들에게 물건을 차등 있게 내리다.
궐정(闕庭)에서 염근인(廉謹仁)에게 일등악(一等樂)을 내리라고 명했는데 근근인(勤謹人)들도 참석하였다.
각기 단목(丹木)·호초(胡椒) 등의 물건을 차등 있게 내렸고, 저물녘이 되자 각기 백랍촉(白蠟燭) 한 쌍씩을 내렸다.
---중략---
외임(外任) 염근인(廉謹仁)인 회령 부사(會寧府使) 이영(李榮), 강계 부사(江界府使) 김순(金洵), 나주 목사(羅州牧使) 오상(吳祥), 상주 목사(尙州牧使) 신잠(申潛), 밀양 부사(密陽府使) 김우(金雨), 온양 군수(溫陽郡守) 이중경(李重慶), 예천 군수(醴泉郡守) 안종전(安從琠), 강릉 부사(江陵府使) 김확(金擴), 신계 현령(新溪懸令) 유언겸(兪彦謙), 금구 현령(金溝懸令) 변훈남(卞勳男), 한산 군수(韓山郡守) 김약묵(金若默), 지례 현감(知禮縣監) 노진(盧禛), 칠원 현감(漆原縣監) 신사형(辛士衡), 선산(善山)에 사는 전 군수(郡守) 김취문(金就文) 이상 14인에게는 각기 향표리(鄕表裏) 1습(襲)을 하사하였다.”
위와 같이 대부분 현직에 있거나 생존하고 있는 관리들에게 염근이라 하여 상을 주는 기록이 보이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史官이 평하는 비판적인 글도 보인다.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사신은 논한다.
대저 사람은 속일 수 있지만 하늘은 거짓을 용납하지 않는 법인데 뽑힌 자들이 모두 자신을 반성해 보아 부끄러움이 없겠는가?
추천하여 뽑는 것이 정밀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물의가 비웃었을 뿐만 아니라 피선된 자들 가운데도 함께 참여된 것을 스스로 부끄러워한 자가 있었다.
당국자(當國者)인 윤원형(尹元衡)과 심통원(沈通源)은 참여되지 못하였으니 타오르는 불 꽃 같은 위세로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 있었던가?
사신은 논한다. 피선된 가운데 몇 명의 염근한 선비가 어찌 없겠는가?
그러나 더러는 권귀(權貴)의 문(門)에 실절(失節)한 자도 있고 더러는 어두운 밤에 뇌물을 받은 자도 있는데 이들이 함께 뒤섞여 나와 아름다운 이름을 도둑질하여 술을 마시고 음악을 들었으니, 자신을 반성하여 보아 허물이 없는 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더군다나 윤원형은 양양(梁楊)의 권세를 끼고 마음대로 탐욕을 부려 남의 것 빼앗기를 싫증 낼 줄 몰랐다.
이런 일로 시랑(豺狼)의 마음을 고쳐 염근의 풍조를 일으킬 수 있겠는가? 나는 옳은 줄 모르겠다.
사신은 논한다. 내수(內需)·사탕(私帑)의 재정(財政)이 매우 급박한데 사연(賜宴)·사물(賜物)하는 것으로 청신(淸愼)한 사람들을 권면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아랫사람들이 나의 처사를 믿지 않는데야 어쩌겠는가.
더구나 피선자(被選者) 속에 한두 사람은 합당한 자가 있지만, 기타는 소렴 곡근(小廉曲謹)일 뿐이어서 진위(眞僞)를 알 수 없고 무능한 자들까지 섞였으니, 식자들이 비웃었다.
또 탐욕하지 않음을 보배로 여기고 일 처리를 제사(祭祀)처럼 공경히 하는 자가 없지 않았는데도 시재(時宰)가 살피지 못했으니, 이를 공선(公選)이라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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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