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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스크랩 갑골문으로 적은 천부경 찾다
김 국 열 추천 0 조회 81 10.07.23 15:17 댓글 4
게시글 본문내용

 

갑골문으로 적은 천부경(天符經) 찾아

단군.환웅 실재성 높아




   오래 전에 개천대학장이며 미국- s - Baylor 대학교 명예교수이신 송호수 교수님의 저서인 "한겨레의 뿌리 얼" 의 겉장에 나오는 "천부경문" 사진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그 동안 풀이 자료를 물으신 분이 많았습니다. 자료를 찾지 못하여 소개를 못하고 있던 터에 방문 네티즌 "궁구미"님이 대종언어연구소(www.hanja.com)에 이 자료를 소개하여 연구소 소장인 박대종님께서 손수 풀이를 시도해 이 연구 자료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자료 따오기를 허락하여 주신 대종언어연구소에 고마움을 드리며 끊임없는 연구와 자료 발표에 머리를 숙입니다. 더욱 땀흘려 주시길 빕니다. 고맙습니다.

< 운영자 송준희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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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부경 - 사진자료 >


고려시대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와 더불어

오은(五隱)중에 한사람인 농은(農隱)의 유집에 있는 천부경문

 

 

                출처 : 대종언어연구소(www.hanja.com), 일요시사 9월 29일자


< 특종 “갑골문자 ‘천부경(天符經)’발견, 단군.환웅 실재성 높아 >


   겨레나 사람에게 있어서 역사(歷史)는 존재의 정체성과 더불어 어제와 내일을 자리매김하는 가장 잘 드러나는 준거의 하나다.


   그러나 우리 역사는 자주적인 역사를 이어왔음에도 주변의 중국역사에 견주어 못난 모습으로, 그리고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부끄러운 데를 지닌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비춰져 왔다.


   여기에는 우리 역사의 실체에 대한 치열한 연구와 의식의 모자람, 그리고 거기에 따른 강단사학(講壇史學)의 영향도 적지 않다.


   우리 고대사(古代史)는 그러한 역사 관행의 피해를 본 대표적인 분야다. 이 때문에 빛나는 고대사를 증거해주는 사료(史料)는 위서(僞書)로 여겨져, 재야사학자들의 몫으로만 남아왔다.


   그런데 최근 우리 고대사의 참모습을 밝힐 수 있는 획기적인 자료가 나와 향후 나라의 학계는 물론 역사의식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보인다.


   언어학자 박대종씨가 선조의 유집 "농은유집(農隱遺集)"에 나오는 천부경을 소개했다. 이 천부경은 한자(漢子)의 기원인 갑골(甲骨)문으로 적혀 있는데, 그는 이에 대한 연구를 통해 갑골문의 뿌리가 단군조선 이전인 환웅(桓雄)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밝혀낸 것이다.


   이에 따라 본지는 "농은유집 천부경"의 참뜻과 박대종씨의 연구 성과가 갖는 참뜻을 나라에서 처음으로 소개하기로 한다.


< 갑골문과 천부경 >


   갑골(甲骨)문은 한자(漢子)의 가장 이른 때의 꼴로 알려진 글자다. 갑골문이란 이름은 그 글자가 주로 거북껍질(龜甲)이나 소의 어깨뼈 따위에 칼로 새긴 것에서 나온 것으로 1,899년 중국 하남성 은허(殷墟)에서 처음 나왔다. 갑골문은 은 왕조(B.C 3400~3100) 때의 도성의 유적지인 은허에서 나와 은허문자라고도 한다.


   한편 천부경(天符經)은 배달겨레의 처음 나라로 알려진 환국(桓國)에서 비롯, 입말로 내려오다가 환웅(桓雄)의 명에 따라 신지(新誌) 혁덕(赫德)이 처음으로 녹도문(鹿圖文)으로 적었고 뒤에 신라의 최치원이 옛비석에서 신지(新誌, 단군시대의 천황의 명령을 전하고 출납의 일을 전담하다가 혁덕 이후 기록을 맡았던 벼슬의 이름, 앞의 신지 혁덕과는 다른 사람임)가 쓴 전자(篆字)로 된 고각본(古刻本)을 찾아내어 그것을 다시 첩(帖)으로 만들어 세상에 알리게 된 것이다.


   단군을 받드는 겨레 종교인 대종교(大倧敎)에 따르면 배달겨레의 거룩한 세 경전으로 조화경인 천부경과 교화경인 삼일신고와 치화경인 참전계경이 있는데 모두 81자로 짜인 "천부경"은 환웅께서 태백산(백두산) 신단수(神檀樹) 아래 내려오셔서 신시를 열어 홍익인간(弘益人間)을 위하여 만 백성을 가르칠 적에 조화의 원리, 곧 우주 창조의 이치를 81자로 풀이한 진경(眞經)이라고 한다.


   "천부경"은 고려말까지 이어 내려오다 유교를 받드는 조선왕조 때 묻히게 됐다. 그러다가 1916년 대종교도 계연수(桂延壽)가 묘향산 돌벼락에서 이를 찾아내어 탁본한 것을 1917년 인편으로 대종교에 넘겨주어 비로소 다시 맥을 잇게 됐다.


< 농은유집 천부경의 발견 >


   앞서 말했듯 갑골문은 1899년 중국대륙에서 처음 나왔지만 가장 오랜 문자학서인 "설문해자(說文解字)"를 지은 후한(後漢 A.D 25~ 220)의 허신(許愼)조차 갑골문을 몰랐다.


   중국에서 갑골문을 본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것의 실체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청나라 끝무렵 광서 25년(1899)금석학자이자 국립대 총장인 왕의영이 비로소 연구하였다.


   그런데 고려말 충신인 농은(農隱) 민안부(閔安富)의 유품에서 나온 천부경문(天符經文)에는 은허 갑골문과 비슷한 글자들이 많았다. 이는 두 가지 쪽에서 일대 사건에 비유될만한 충격적인 일이다.


   하나는 갑골문 하면 오직 중국대륙 안에서만 나온다는 이제까지의 고정관념이 깨졌다는 것이다.


   둘은 이제부터 약 650년 앞선 사람인 민안부가 중국대륙 은허에서 나온 갑골문을 보고 천부경을 적을 수는 없다는 일이다.


   또한 중국대륙에서는 아직까지 찾기지 않았거나 찼겼다 하더라도 못 읽은 갑골문자들이 농은 유집 천부경에 많이 나온다는 점이다.


   농은 민안부는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도은 이숭인, 야은 길재, 수은 김충한과 더불어 6은(六隱)으로 불리던 충신으로 조선을 열자 고려 신하로서 도리를 다하지 못했다며 두문동(杜門同)에 은거한 72현 중의 한 사람이다.


   주목할 점은 조선조 이맥이 "태백일사"에서 “세상에 전하는 바 목은 이색, 범세동은 모두 천부경을 읽었다.”고 증언한 점이다.


   이색은 민안부와 당시 교분이 두터웠고 범세동은 민안부와 같이 두문동에 들어간 72현 중의 한 사람이다. 이는 민안부도 천부경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즉 고려충신 72현들 사이에서 천부경은 여러 부 적혀 귀중하게 보관되었고, 이번에 찾은 농은 민안부의 천부경은 그의 후손인 민홍규씨가 2000년 들머리 송호수 박사를 찾아가 선보임으로써 알려진 것이다.


   또 눈여겨볼 것은 민족경전인 "삼일신고"의 내용 중 발해 문왕이 지은 "삼일신고 봉장기"에 단군이 신지에게 삼일신고를 그리라는 명을 내렸다는 구절이 나온다.


   "천부경"이 삼일신고와 한 쌍임을 고려할 때 천부경에 대해서도 같은 그림문자로 돌위에 새겼다는 추정이 가능해진다.


   또한 "후조선기"에는 ‘기자(箕子)가 부여의 법학지였던 왕수긍(王受兢)을 초빙해 박달나무에 은문(殷文)으로 삼일신고를 쓰게 하여 그것을 읽었다.’고 적고 있다.


   종래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 지배적이지만 일반적으로 기자는 은나라의 현인(賢人)으로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나라를 빼앗자 B.C 1122년에 동쪽 조선으로 들어와 기자조선을 세운 이로 알려져 있는데 B.C 1122년이면 지금으로부터 3122년으로 은허 갑골문 때와 맞다.


   모두를 아우를 때 민안부의 "농은유집 천부경"은 기자의 초빙(招聘)과 지시에 따라 왕수긍이 삼일신고와 함께 은문(은허갑골문)으로 쓴 것으로 그 진본을 후대에 일급 서예가(농은일 가능성이 많음)가 지금으로부터 최소 6백 년 전 이상의 옛날에 정밀모사한 것으로 여겨진다. 왕수긍이 쓴 때는 지금으로부터 약 3100년 앞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기자 이전의 원본 천부경, 즉 단군 나아가 환웅시대의 천부경까지 고려하면 천부경 자체는 그보다 훨씬 멀리까지 올라간다.


< 중국갑골문 연구의 한계 >


   한자의 뿌리는 갑골문과 고대 청동기에 새겨진 금문(金文)이다. 금문은 은나라의 뒤를 이은 주나라 때 유물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것으로 은문보다 나아진 꼴이 있지만 넓은 뜻에서 금문은 은문이라 불러도 된다.


   농은유집 천부경문에는 은문이나 금문에 나오지 않는 글자가 있고, 은문, 금문으로 읽을 수 없는 글자가 있으므로 천부경이 갑골문에 앞서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해 준다.


   구체적으로 농은유집 천부경문에서 거듭 나오는 글자를 뺀 모두 46개의 글자 중 은허갑골문에 이미 나오는 글자들은 모두 32자(69.6%)이다. 이중 갑골학을 지금껏 주도해오고 있는 중국학계에서도 밝게 읽지 못하거나 모르는 글자들이 있다.


  지(地), 환(環), 동(動), 태(太), 등이 그것이다. 동(動)자 안에 포함된 중(重)까지 합칠 경우 천부경문에 있는 글자 중 못 풀었던 글자는 모두 다섯 글자가 된다.


  특히 지(地)나 환(環)과 같은 고자(古字)의 발견은 기존 갑골학계의 연구가 짧다는 것이 밝게 드러난다는 것이 박대종씨의 주장이다.

   그에 따르면 은허문에 와 같은 글자가 나오지만 중국의 갑골문 권위자들은

을 지(地)가 아닌 다른 글자로 감정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곽말약은 그의 저서 "복사통찬(卜辭通簒)"에서 이 글자를 사람이 떨어지는 모양을 그린 ‘떨어질 타(墮)’자라고 고찰하였다. 서중서도 갑골문자전(甲骨文字典)에서 무너질‘휴’자로 곽말약과 같이 풀고 있다.


   그러나 ‘天一一地一二人一三’에서와 같이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를 나타낸 천부경문이 천지인이 아닌 천타인(天墮人)일 리 없다.


  또한 환(環)에 대해 중국학자들은 아예 못 풀거나 '그물 견자’로 풀이하는 잘못을 저질르고 있다는 것이 박대종씨의 말이다.


   금문(金文)에서도 농은유집 천부경에 나오는 글자들 중 五, 六, 七, 八, 九를 뺀 41자 중 11자(26.8%)가 없다. 이 가운데 못 푸는 글자로 나뉜 환(環)자는 농은유집 천부경문으로 풀고 있다.

 

 

< 기존 천부경과의 차이 >


"농은유집 천부경"을 찾고 풀기 앞서까지 알려진 천부경은 모두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계연수가 찾은 묘향산 돌벼락본이고, 둘째는 최문창전집 ‘고운(孤雲, 최치원)선생, 사적’ 편에 나오는 최고운 사적본이며, 셋째는 노사(盧沙) 기정진(1798~1876)으로 전유하여 내려오던 노사전본이고, 넷째는 조선조 이맥(李陌)의 "태백일사(太白逸史)"에 실려있는 태백일사본이 그것이다.


   이중 태백일사본 또는 묘향산 돌벼락본은 한 자도 어긋남이 없이 전문이 일치하여 현재까지 가장 많이 읽힌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一始無始一             일시무시일

析三極無盡本          석삼극무진본

天一一地一二人一三 천일일지일이인일삼

一積十鉅無?化三    일적십거무궤화삼

天二三地二三人二三 천이삼지이삼인이삼

大三合六生七八九運 대삼합육생칠팔구운

三四成環五七一妙衍 삼사성환오칠일묘연

萬往萬來用變不動本 만왕만래용변부동본

本心本太陽             본심본태양

昻明人中天地一       앙명인중천지일

一終無終一             일종무종일


   그러나 태백일사본과 묘향산 돌벼락본은 농은유집 천부경과 네 군데서 차이가 있다. 첫 번째는 석삼극(析三極이 아니라 新(새로울 신)자를 쓴 신삼극(新三極)이었으며, 두 번째는 대삼합(大三合)이 아니라 氣(기운 기)자를 쓴 대기합(大氣合)이었고, 세 번째는 무궤화삼(無궤化三)이 아니라 종(從, 좇을 / 나아갈 종)자를 쓴 무궤종삼(無궤從三)이었고, 네 번째는 衷(가운데 / 통할 충)자를 쓴 칠팔구충(七八九衷)이었다.


< 비교 >

태백일사(묘향산석벽)본   농은유집 은문 천부경

 

석삼극(析三極)         -      신삼극(新三極)

대삼합(大三合)         -      대기합(大氣合)

무궤화삼(無?化三)   -      무궤종삼(無?從三)

칠팔구운(七八九運)   -      칠팔구충(七八九衷)

 

< 묘향산본과 농은유집본의 다름>  

 

一始無始一               일시무시일

析三極無盡本            석삼극무진본

天一一地一二人一三   천일일지일이인일삼

一積十鉅無?化三      일적십거무궤화삼

天二三地二三人二三   천이삼지이삼인이삼

合六生七八九運   대삼합육생칠팔구운

三四成環五七一妙衍   삼사성환오칠일묘연

萬往萬來用變不動本   만왕만래용변부동본

本心本太陽               본심본태양

昻明人中天地一         앙명인중천지일

一終無終一               일종무종일

 

 

一始無始一               일시무시일

三極無盡本            삼극무진본

天一一地一二人一三   천일일지일이인일삼

一積十鉅無 ?三     일적십거무궤

天二三地二三人二三   천이삼지이삼인이삼

合六生七八九   합육생칠팔구

三四成環五七一妙衍   삼사성환오칠일묘연

萬往萬來用變不動本   만왕만래용변부동본

本心本太陽               본심본태양

昻明人中天地一         앙명인중천지일

一終無終一               일종무종일

 

< 앞으로의 과제 >


   "농은유집 천부경"은 농은 민안부 문중에서 보관해오다 2000년 들머리 문중인 민홍규씨가 송호수 박사에게 처음 보여줌으로써 누리에 알려졌다.


   민씨는 이같은 사실을 "뉴스피플"(2000년 1월17일) "민홍규의 우리문화일기 - 나무에 뿌리가 없다" 는 글에서


“필자의 가문에는 목은, 범세동 들과 함께 두문동 72현 가운데 한 명인 농은 민안부 어른이 남긴 천부경이 있다. 그간 천부경은 고본(古本)이 있지 않고 그 나온 곳이 밝지 않으며 그 난해성 때문에 위.개작(僞.改作)되었다는 강당사학계의 비판을 받아왔다.”


고 밝힌 바 있다.


   민씨로부터 농은유집을 본 송호수 박사는 유집의 값어치를 알아보고 그의 저서 "한민족의 뿌리사상" 개정판에 영인본을 넣었다. 그러나 당시 송박사는 농은유집의 천부경문을 풀지 못하였다.


   농은유집은 언어학자 박대종씨로 말미암아 비로소 값어치가 드러났다. 이제 남은 과제는 민홍규씨가 갖고 있는 고본을 여럿 앞에 내놓는 것이다. 민씨는 고본에 대해 일본 전문감정서로부터 감정을 받았다고 한다.


   하루빨리 고본이 여럿에게 보여져 농은유집 천부경문이 고증학적 절차를 거쳐 역사적, 민족사적인 값어치를 담게 되기를 바란다.


< 일요시사 기사원문 >

 

 


(2003-03-18 18:00:55, Hit : 7843, Vote : 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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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0.07.23 15:17

    첫댓글 상고사에 대해 한 번 쯤 생각해 봅시다.

  • 10.07.23 18:38

    은(商)나라가 망하고 그 일파인 기자가 조선쪽으로 이동해서 기자조선을 세웠다는 증거가 되는 모양인데, 기자와 우리 단군과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 건가? 문제는 우리역사책은 거의 없어져 버리고, 중국의 역사책은 많이 있어서 그쪽의 논리대로 상고사가 이해되고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石刻의 연구가 많이 있어야겠고, 특히 古刻과 篆字의 연구도 있어야겠다는 이야기네. 천부경이라는 것이 篆字로 써졌다는 것을 처음 알았네.

  • 10.07.24 06:36

    우리나라에 갑골문이 있었는가? 더구나 갑골문으로 천부경을 만들다니, 국보급 이상의 가치가 있는건데, 새로운 사실을 알았네요...

  • 작성자 10.07.25 10:57

    학계에선 위작으로 본답니다. 신채호가 위작으로 언급한 사실이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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