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구 앞에 서본 일이 있는가. 한국말로 ‘ 야, 그 총 저리 치워 ’ 라고 말할 수 있으면 그는 죽지 않는다. 이때의 모국어는 동족 전체가 그와 함께 한다는 교감이다.”
김지원「시간과 강물」
「빨리빨리, 허리업.」 강도는 발길질까지 했다. 도혜는 날카로운 그 발길에 맞을 새 없이 앉았던 자리에서 용수철이 튕기듯 일어나 화장실로 향해 한달음으로 달렸다.
이웃 상점 주인도 객장에 서 있던 다른 흑인에 의해 화장실 문 안으로 떠밀려지고 있었다. 찬 와인을 넣어두는 냉장고 옆에 있는 나무문을 열면 오른쪽에 상점 바닥과 같은 높이로 세면대와 변기가 있고 왼쪽으로 지하 창고로 통하는 좁고 가파른 층계가 있었다. 화장실에는 청소용 물걸레와 물통, 빗자루 등을 두어 복잡했다.
이웃 남자와 도혜는 가파른 층계를 공이 구르듯 내려갔다. 이웃 남자와 도혜를 몰아넣고 강도는 문을 닫았으므로 한 줄기 빛도 들어오지 않아 축축한 먼지내 나는 어둠은 고체같이 짙었다. 전등 스위치를 올려 불을 켠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몸을 숨길 수 있는 어둠은 오히려 다행이었다.
층계 끝나는 곳에 상점과 비슷한 면적의 지하실이 있었다. 술 상자들이 현대 도시같이 통로만 남기고 반듯반듯 쌓여 있었으며 상점과 상점 위의 네 세대 아파트를 상관하는 보일러와 수도 계량기, 전기 미터기가 그 안에 있었다. 이웃 상점 남자와는 고개인사나 하고 지내던 처지인데 이제 이곳에 갇혀 인간의 존엄성은 간 곳 없이 벌거벗긴 듯 무력하고 수모당하는 모습을 서로 보이고 보는 것이 도혜는 부끄러웠다.
「여기가 막혔습니까? 」 이웃 남자가 어둠 속에서 말했다. 도혜는 지하실 입구를 더듬어보는 중이나 찾을 수가 없었다. 덩치 큰 어른이 술 상자를 안고서도 수월히 드나들던 입이 큰 통로가 감쪽같이 없어졌다. 도혜는 강도들이 어느 순간 화장실 문을 열고 시커먼 계단 아래쪽을 향해 총질할 것만 같아서 지하 창고로 들어가 높이 쌓인 물건 상자들 속에 몸을 숨기고 싶었다. 그 입구를 찾는 일이 초를 다투며 죽고 사는 일같이 절박했다. 지난 추수감사절 즈음에 물건을 많이 쌓던 때 물건 정리하는 청년이 잘못해서 입구를 막도록 물건을 쌓아버렸다고 도혜는 생각했다. 입구 찾기를 단념하려니까 도혜에게 절망감이 거꾸러지듯 엄습했다. 도혜는 계단 밑바닥 흙먼지 속에 얼굴을 박았다. 층계 한 칸밖에 안 되는 면적에 물건 상자가 버티고 높이 막았으므로 도혜의 엉치는 들려 있게 되었다. 모래 속에 대가리를 박은 타조 모양이 되었다.
「엎드리세요. 」 도혜가 말했다. 한국말이 통해 편했다.
▶ 작가_ 김지원 – 소설가. 1942년 경기도 덕소에서 시인 김동환과 소설가 최정희 사이에서 태어남. 이화여대 영문과 졸업 후 한국일보 기자인 남편 따라 미국으로 이민. 이민생활의 두렵고 아픈 속내를 섬세한 감성으로 쓴 소설들을 발표하기 시작.「사랑의 예감」으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2013년 71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지은 책으로『폭설』,『잠과꿈』,『낭만의 집』등이 있음.
▶ 낭독_ 전현아 – 배우. 연극 <차이메리카>,<쉬반의 선발>,<가스등>,<상당한 가족> 등에 출연.
박성연 – 배우. 연극 <베르나르다알바의 집>,<목란언니>,<아가멤논> 등에 출연.
이상구 – 배우. 연극 <리어왕>, <미망인들>, <유리알눈>,<스페인연극> 등에 출연. ▶ 출전_ 김지원 소설 선집3 ☜『물이 물속으로 흐르듯』 (작가정신.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