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예루살렘 여행 중에 한 성당 안에서 찬송가 338장을 불렀습니다. 찬송을 부르고 나오는데 초로의 부부가 나를 붙잡고 묻습니다. “우리는 스위스에서 온 사람들인데 당신들 어디서 온 사람들이냐. 당신들의 찬송(Chant)이 너무 아름답고 은혜스러웠다”며 얼굴에 형언할 수 없는 감정으로 충만하여 나를 바라봅니다. 11년 전에도 나는 이곳에서 일행과 함께 Amazing grace를 불렀습니다. 우리의 노래를 듣고 있던, 미국 남침례교 교인이라고 밝힌 중년의 부부도 나를 붙잡고 눈물을 글썽이며 자신이 받은 감동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감동은 우리가 노래를 특별히 잘 불러서가 아닙니다. 이곳의 공간 구조가 어떠한 소리도 아름답게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올드시티 안에 있는 성안나성당은 세상의 어떤 음치가 와서 노래를 불러도 그 소리를 풍성하고 아름답게 해 주는 음향효과가 나타나도록 설계된 고대 건축물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여행하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찬송을 한 곡씩 부르고 가는 필수 코스입니다. 성안나성당은 건물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악기입니다.
좋은 악기는 소리가 시작되는 곳에서 음향의 질이 결정되지 않습니다. 소리를 증폭시켜주는 공간에 좋은 악기의 조건이 있습니다. 소리가 그 공간을 지나며 공명(共鳴)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 공명이 음향의 질을 결정합니다. 그래서 좋은 공명통(共鳴筒)을 가진 악기가 명품 악기가 될 수 있습니다. 소리의 시작점에서 음향이 전파되는 방식은 ‘떨림’입니다. 이 떨림을 음파(音波)라고 하며 모든 방송은 이 음파를 주파수로 표시하여 송출합니다. 우리의 청각으로 듣는 모든 소리는 떨림 현상입니다.
양자물리학의 한 분야로 ‘끈이론(string theory)’이라는 게 있습니다. 고전물리학에서는 물질의 최소단위가 질량을 가진 입자로 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양자물리학에서는 물질의 최소단위가 점으로 된 입자가 아니라, 1차원의 끈이라고 보았습니다. 이 끈이 끊임없이 진동함으로 질량과 물질, 세계가 존재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1차원적인 끈들의 떨림에 의해 만들어지고 유지된다고 본 것입니다.
“나뭇잎이 바람에 떨리다”, “입술이 파르르 떨리다”, “가슴이 떨린다”, “목소리가 떨리다”, “살 떨린다” 등과 같이 우리는 자연현상이나 몸의 상태, 심리 상태를 표현할 때 ‘떨리다’는 말을 사용합니다. 우리는 감각적으로, 또는 심리적으로 이 떨림을 통해 세계를 경험하고 타자와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떨림이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예술작품을 감상하며 그 감동으로 떨림을 경험합니다. 좋은 음악을 들으며 심장의 떨림을 경험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벅찬 감정으로 떨림을 경험합니다. 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와 사랑을 경험할 때 떨림이 일어납니다. 떨림은 나에게 시작되어 외부를 향해 그 파장이 퍼져 나갑니다. 그런데 이 떨림은 내 안에 공명(共鳴)이 클수록 더 풍성한 울림을 갖습니다. 내 안에 여백이 많을수록 삶의 감동과 기쁨이 우리 안에 풍성하게 울리게 됩니다.
창세기 33장 1-4절은 원수 되었던 에서와 야곱이 만나 화해하는, 격정적인 장면입니다. 야곱은 어머니와 공모하여 아버지와 형을 속여 장자의 축복권을 빼앗은 대가로 14년 동안 외삼촌 라반의 속임수에 당하고 삽니다. 이 과정에서 속임수와 배신으로 인한 상처를 경험하고 그것이 자신의 형이 겪었을 배신감과 상실감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야곱은 에서의 마음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아픔과 상실감, 분노에 휩싸인 형의 처지를 자신의 처지로 느끼게 됩니다. 야곱에게 일어난 이 심리적 상태가 바로 ‘공감(sympathy)’입니다. 공감은 타자의 자리에 나를 오버랩시키는 것입니다. 타자의 입장으로 들어가 그의 경험을 나에게 이입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공명(共鳴)입니다. 공감은 사람에게 일어나는 가장 큰 공명입니다. 이 울림이 클수록 우리는 사람(이웃)을 사랑할 수 있고, 궁극에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신명기와 레위기에 나오는, 율법의 핵심 가르침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이 떨림과 울림의 다른 표현입니다. 신앙은 떨림과 울림입니다. 세상과 이웃(사람)에 대한 이해와 감동이 없는 사람, 타자와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 기계적인 사고로 자기 이해관계와 성공을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는 사람에게 떨림과 울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사회 지도층 인사가 될 때 그 사회는 비인간화되고 폭력적인 사회가 됩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그렇습니다.
아침에 돋는 해가 지구의 자전으로 일어나는 과학적인 현상이 아니라 우리에게 날마다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을 때, 길가에 피어난 작은 꽃 한 송이가 계절의 변화에 따라 일어나는 자연 현상이 아니라 신비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역사라고 생각할 때, 내가 마시는 물 한 모금이 수소와 산소 분자가 결합된 화학적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우주적 사건이며 생명의 신비한 경험이라고 생각할 때, 우리의 생명과 삶은 풍성한 울림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과학만능과 물질만능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만능의 시대가 우리에게 신비한 울림을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사람은 돈이 없어서 죽는 것도 아니고, 병들어 죽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 안에 이 떨림과 울림이 사라졌기 때문에 메말라 죽어가는 것입니다. 에서와 야곱이 서로 부등켜 안고 격정적으로 우는, 그 순간의 공명이 우리 안에서 사라졌기 때문에, 차가운 계산과 이기적 성공담론에 갇혀 메말라 죽어가는 것입니다. 떨림과 울림이 우리 안에 일어나도록, 공명통을 만드는 게 신앙입니다. 내 삶에서 공명이 일어나도록 나를 비우는 게 신앙입니다. 신앙은 존재의 공명입니다. 우리 안에 이 울림이 있습니까?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 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오고 있는지라. 그의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여종들과 그들의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의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 (창 3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