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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25일
말씀: 마20: 28
제목: 예수그리스도가 오신 이유
2023년도의 교회목표가 ‘십자가 복음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그래서 12월 달부터 십자가복음에 대해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복음의 핵심은 ‘구원’입니다. 아기예수가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성탄절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 구원을 빼고 아무리 기뻐다 구주오셨다고 환영을 해도, 산타를 아름답게 미화해서 만들어도, 서로가 선물을 주고 받고 그 하루가 행복해도 아무소용이 없습니다. 아기예수가 오신 것이 기쁜 이유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기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서 그 십자가로 어떻게 구원을 얻습니까? 구원받은 사람들은 십자가로만 구원을 받습니다. ‘다른 방법으로 구원을 받는다.’, 라고 말하면 이단이나 사이비종교입니다. 구원을 십자가 복음으로만 얻습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다는 뜻이며, 하나님과 우리가 화목 되었다는 뜻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우리의 생애에 최고의 축복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구원에서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고 계속해서 강조해왔습니다. 왜냐하면 구원 이후의 삶이 우리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구원 이후의 삶이 영적으로 뿌리는 삶이기 때문이며 그 나라에서 거두는 삶이기에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제부터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무덤이나 심판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죽음은 하나의 관문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그 나라를 소유할 관문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십자가로 구원을 왜 얻습니까? 십자가가 우리를 어떻게 구원합니까? 구원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죄 문제입니다. 이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것을 구약을 통해, 신약을 통해 증거 해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 문제에 대해 이렇게 답을 합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우리에게 자랑할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을 정도로 십자가에 집중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십자가만이 구원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십자가를 묵상하고 바라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십자가 설교를 계속하면서 여러분들에게 이런 계기로 십자가를 깊이 생각하고 바라보는 계기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예수그리스도가 갈보리라는 작은 언덕위에서 세 개의 십자가 중에 중간의 십자가에 매달리신 주님이 빨리 죽게 된 것을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아기예수로 나실 때부터 마구간에서 태어나시고 대우도 받지 못하시며 멸시와 천대 속에서 나약하게 십자가에 매달려서 얼마 버티지 못하시고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 분이 바로 우리 구주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그리스도를 두 사람과 함께 못 박힌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나사렛에서 자란 목수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전도자라고도 하고, 특이한 선지자라고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종교적으로 천재라고 이야기도하고 어떤 사람은 선동가라고도합니다. 우리의 대답은 베드로의 고백처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는 자들이며, 그래서 주님께서 ‘내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니라’만일 베드로에게도 동일한 말씀이지만, 우리가 육신으로 예수님을 보았더라면 사람 이외에 어떤 것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육신으로 보는 예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계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보게 된 것이 복입니다. 우리는 그가 성자하나님이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을 아는 것이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왜 성자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하는가? 왜 죽기 위해 이 땅에 아기예수로 태어나야하는가? 예수님의 죽으심은 평화주의자의 죽음도 아닙니다. 너무 연약하여 군중들의 여론에 의해 십자가에 죽으신 분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마20: 28절에서 명확하게 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함이니라’분명히 죽기위해 오셨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제자들은 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지를 몰랐습니다. 눅13:32-33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삼 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주님이 가셔야할 길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왜 이 땅에 오셔야만 하는지를 명확히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 계실 때에 그 최후의 순간에 제자들은 긴장하며 주님을 지켜 내리라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칼을 뽑아서 말고의 귀를 자르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장면을 보고 칼을 칼집에 넣어라고 말씀하시면서 ‘너는 내가 아버지께 고하여 지금 열두 영이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있으며, 천사들에게 떠 받들려 내가 있는 그 영광으로 되돌아갈 수 있음을 알지 못하느냐’그런데 왜 십자가를 지셔야하느냐 하면, 이를 위해서 아기예수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일이 없으면 우리는 구원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히2:9 ‘오직 우리는 천사들보다 잠깐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님을 보니 이를 행하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인해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신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죽기 위해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죽음의 고난을 받기위해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왜요?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왜 천사보다 못한 자로 고난을 받습니까? 예수님이 짊어져야할 십자가의 무게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악, 더러움, 수치, 잔인함, 교활함, 살인 등의 죄를 한 번에 다 짊어져서야할 그 무게는 엄청난 것입니다. 그것도 모든 인류의 죄입니다. 그 모습은 죄인의 모습이요, 죄인으로 희생양의 모습니다.
아기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왜 이런 수모를 당해야하며 피조물의 천사보다 못한 죄인의 모든 죄를 뒤집어 써야합니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노라’우리는 세상에 속한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면 우리는 세상에 속하여 세상의 운명을 짊어져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기예수를 보내신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3장에서 ‘모든 사람들이 죄를 범했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이나 상관없이 모두가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세상에는 선한 사람, 나쁜 사람, 도덕적인사람, 부도덕한 사람 등에 차이가 없습니다. 다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입니다. 윤리적으로 볼 때 법적으로 볼 때 좋은 사람, 도덕적인 사람은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무리 훌륭해도 아무리 도덕적이라도 그리스도의 보혈을 지나지 않으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지 못한다면 가장 배역하고 흉악한 죄인입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입니다. 죄인으로 태어났습니다. 겉은 도덕적이라 할지라고 속은 더럽고 추악한 모습이 바로 인간의 모습니다. 인간적으로 훌륭하고 도덕적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전혀 계산 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오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도 있다는 말입니다.
저 번 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갈6;7절 말씀입니다. 죄인이 무엇을 심으면 죄를 낳을 수밖에 없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죄인 된 사람들이 뿌릴 것은 세상적인 것밖에 없습니다. 욕심과 정욕과 안목과 이생의 자랑밖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절대 선한 것을 뿌릴 수 없는 것이 선한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주님께서 오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의 구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구원 후의 삶이 바로 영적으로 뿌리는 영적 토양을 주셨기 때문에
의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의 삶이 풍요로 울 수밖에 없고 의미와 가치와 감사와 감격과 영광이 있을 수밖에 없는 삶으로 우리를 초청했다는 점에서도 이 땅에 아기예수님이 오신 이유를 더 풍성하게 깨닫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의로운 자로 초청했다는 사실은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왜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지 못하는지 아십니까? 죄인 된 사람들이 어떻게 의를 이해할 수 있습니까? 추하고 미련하고 비열한 죄인이 어떻게 의를 구별하고 분별하고 이해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믿지 못합니다. 그저 성탄절에 오신 고상한 아기예수 정도로, 평화를 선포하는 세계를 화평으로 선포하는 분으로 생각할 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천국도 지옥도 믿지 않습니다. 다만 현재를 만족할 뿐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성탄절에도 현재를 즐기며 기뻐하며 성탄절을 보내는데 지옥과 같은 세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성탄절에 술이 제일 많이 팔리고 여관이 성황을 이루고 쾌락과 부패가 판을 치는 것입니다. 어떻게 세상과 하나님나라가 화목할 수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를 지기위해 아기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아기예수의 십자가사건을 나의 것으로 인식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어떻게 해답이 될 수 있느냐고 따집니다. 성경말씀은 명확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이 말씀이 진리입니다. ‘피 흘림 없이는 사함이 없다’이것이 해답입니다. 구약을 보면 희생 제물에 대한 많은 기록들이 있습니다. 레위기 1:1-9절까지의 말씀이 제사에 관한 말씀입니다. 먼저 짐승을 끌고 온 이가 짐승에게 안수함으로 자가 죄를 짐승에게 전하시키고 직접 죽여 성소로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이렇게 제사제도를 지시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요, 피가 없으면 죄 사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상징적이고 일시적이지만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은 일들이 구약제사제도입니다. 이들이 죄로 인해 매일 성전서 이 일을 했습니다. 그들이 어린양, 흠 없는 어린양을 죽여 흘린 피로 죄 사함의 제사를 드린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었고 이 방법으로 일시적이고 상징적으로 나마 죄를 씻는 행위로 하나님이 인정하신 것입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해서 구원을 얻었는지를 설명합니다. 어린양을 잡아 인방과 문설주에 바름으로 인해 장자가 죽지 않고 구원을 받은 것은 피 흘림의 능력과 피 흘림의 생명과 구원을 상징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그리스도께서 왜 세상에 오셔야하는지, 아기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야하는지를 명확하게 밝혀 주십니다. 먼저 침례요한 아기예수에 대해 이렇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보라 내가 그가 아니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보라 저 하나님의 어린양,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 고 외쳤습니다. 구약의 모든 것을 모형과 그림자와 상징에 불과했습니다. 성소도, 제사제도도 정결의식도 다 모형이요, 그림자입니다. 그런데 참된 어린양이 실제 되시는 그 분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친히 자기가 받으실 제물을 공급하셨습니다. 그분은 다름 아닌 독생자 예수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의 죄를 앞에 두고 예수그리스도를 대신 갈보리 언덕위에서 쳤습니다. 대신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끝내 죽으셨음으로 죄의 삯은 사망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죄는 누군가 죽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은 성경전체에서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예수그리스도께 옮긴 것입니다. 전하시켰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와 허물에 대한 형벌을 성자하나님께 지불하셨습니다. 고후5:21‘하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사야 53:6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켜셨도다.’ 이 일을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아기예수가 이 땅에 오신 이유가 희생제물이 되기 위해 오셨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획 앞에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계획대로 움직이지도 않았고 불평과 불만을 가지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대로 철저히 움직였습니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철저히 하나님과 친밀함 가운데 이 일을 이루셨습니다.
갈1: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그리고 갈라디아 2장 마지막 19절-20절까지 말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해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그러면서 갈2:20절 말씀을 고백한 것입니다. 벧전2:20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자기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왜 바울이 십자가를 자랑합니까? 왜 이제 나가 산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삶을 살기를 기뻐합니까?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살리셨다는 말입니다. 건져내셨습니다. 이 구원의 의미를 깊이 있게 깨닫는 은혜가 있다면 십자가의 사건에 대한 위대성과 그 영광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율법을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율법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다는 말입니다. 율법에 얽매려 있을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율법이 정죄하지 못합니다. 율법이 올무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었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는 쉽게 와 닿지 않겠지만 율법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얼마나 기쁜 소식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람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핵심이며 이것을 사도가 전한 것입니다. 나를 구원한 것은 십자가입니다. 그러니까 심판대입니다. 이 심판대에서 그리스도가 죽지 않았다면 우리는 구원을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메시지를 믿는 것 외에 복음에 있어서는 더 이상 할 일이 없습니다. 더 나은 삶을 살아야 되고 할례를 받아야 되고 정결 법을 지켜야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정직해야 되고 기도를 많이 해야 되고 전도를 많이 해야 구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고 난 후의 삶이 되어야합니다. 구원에 있어서는 우리가 할 일이 없습니다. 그저 은혜입니다. 그저 갚을 길 없는 무한정 감사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행13:36-39절에 있습니다.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하나님께서 살리신 이는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어떤 사람이든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지금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사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전하는 대로 전하는 것임을 아셔야합니다.
저는 여러분 앞에 하나님말씀을 전하는 자입니다. 사실은 여러분들의 입장과 여러분들의 상황을 잘 알고 메시지를 전해야 되겠지만 실질적으로는 알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의 공통점인 한 가지만 알면 됩니다. 그것은 여러분 각자가 다 비열한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목사는 사람들의 죄의 형태를 알 필요도 없습니다. 삶이 어떠한지 알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고상하다고 해도, 성품이 좋다고 해도 다 죄인입니다. 다 같은 죄인입니다. 오십보, 백보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 영광에 이르지 못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요, 왜 십자가 사건이 중요하냐하면, 이런 모든 죄악된 삶을 살았다하더라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죄를 범했다하더라도, 전 인류가 저주하는 죄를 저질렀다고 해도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는 우리를 의롭다고 하나님이 인정하십니다. 그러니까 십자가가 우리를 살린다는 말입니다. 이 때문에 아기 예수가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었다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에 참여한 자라는 사실을 믿으시면 우리의 죄는 철저하게 도말됩니다. 마치 여러분들이 한 번도 죄를 범하지 않은 사람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완벽하게 죄가 없어진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메시지입니다. 이것이 아기예수의 오심을 기뻐하는 이유요, 이것이 십자가를 자랑하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