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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류명리학회 時流命理學會
 
 
 
카페 게시글
자유롭게 스크랩 사진으로 보는 한국100년/1960년대 1부
행복나무 추천 0 조회 142 13.06.26 13:1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공동 우물(1961)

4.19와 5.16 두차례 정변을 거치며 세상이 바뀌고 정치가 바뀌었지만 국민들의 삶은 더 나아지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그 우물에서 물 길어다 먹고 살았다

서기가 공식화되지 않았던 그 시절 단기 4294년이면 1961년이다

 

양철 바케츠

프라스틱이 아직 보급되기 전이다

 

확독에 고추갈아 김치 담궈 먹었다

 

절구통

 

똥지게

 

똥장군

바가지로 똥을 퍼담고 짚을 둘둘 말아 주둥이를 막은 다음

지게에 지고 가다보면  발걸음에 출렁거리면서 똥물이 흘러나오는 것은 예사였다.

 

소와 한 판 승부

네가 세나 내가 세나 한 번 해보자

결국 소녀가 이겼다

 

꼴망태

 

 

석작에 선물이라도 들어오면 온 집안에 웃음꽃이 피었다

 

 

홀태로 타작하는 농촌에선

 

 발동기가 큰 재산이었고

 

요강은 꿀단지였다

 

 우물이 고쳐지고 하수도가 개량되었다

 

시민회관 준공

 

 준공식에서 테이프커팅하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요원들

 

 한강

 

 농촌 마을

 

 썰매타는 아이들(1961)

 

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삐삐선(야전 통신선)으로 만든 장바구니

 

 삼양라면(1963)

한국 최초의 라면 삼양라면이 첫 출시 되었다. 가격은 10원

 

 점방

물건을 담아놓은 것이 사과 괴짝이 전부였는데 라면 박스는 진귀한 대용품이었다

 

 가스나 석유가 보급되지 않은 당시에는 연탄 화덕에 밥해먹고 라면 끓여 먹었다

 

연탄 공장

말이 끄는 수레가 운송수단이었다 

 

 국수공장

미공법 480호에 의거 잉여농산물 콩, 옥수수, 밀이 대량 들어오자 국수가게가 번창했다

그러한 원자제를 들여와 밀가루, 식용유, 설탕을 만들어 재벌로 성장하던 삼성(제일제당)은 삼분폭리사건을 야기했다

1964년 설탕과 밀가루 메이커 제일제당과 시멘트 메이커 동양시멘트, 대한양회가

상상을 초월한 폭리를 취하여 국민들을 충격에 빠뜨린 사건이다

 

삼성은 이것도 부족하여 1966년 사카린 밀수사건을 일으켜 국민을 경악케 했다.

재벌이 밀수라니? 국민은 눈과 귀를 의심했다

더구나 울산에 요소비료 공장을 짓는다며 건설 시설재 틈바구니에

사카린 원료와 변기, 냉장고, 에어컨, 전화기 등을 몰래 들여오는 치졸함에 두 번 놀랐다

또한, 사카린 원료(OTSA) 60톤은 금북화학에 매각하고 그 차액을 챙긴것에 혀를 내둘렀다.

 

국민을 더욱 분노케 한것은 삼분폭리사건에서 언론의 위력을 실감한 삼성은

1965년 창간한 중앙일보를 동원하여 사건을 폭로한 경향신문과 진실을 호도하며 맞짱을 뜨다가 역풍을 맞았다

 

이 사건은 국회로 비화하여

대정부 질문에서 김두한 의원이 정일권 국무총리에게

정경유착의 전형이라며 똥물을 퍼붓는 <오물투척사건>을 연출해

국민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했다

 

궁지에 몰린 삼성 창업주 이병철은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하는 것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신발가게

쥔장은 비스듬히 누워있다

손님은 왕이다 는 개념이 없던 시절이다

  

 신발가게

 

미카 열차

석탄을 연료로 하는 증기기관차

 

 디젤 기관차가 끄는 비둘기호를 특급열차라 명명했다

서울-부산 3시간에 주파하는 KTX 시대에는 격세지감이다

 

 서울역

 농촌이 피폐해지고 살길이 막막해지자 무작정 상경이 늘었다

등허리에 상 하나 둘러매고 보따리를 든 아이와 함께 어디론가 가는 아빠의 모습이 힘들어 보인다

 

남자들은 인력시장으로 편입했고 여자들은 식모, 봉제공장, 버스차장으로 취직하면 행운으로 생각했다.

그럴 기회를 잡지 못하고 인신매매단에 현혹된 처자들은

서울역 앞 양동, 도동, 합동, 종로3가, 창신동 기동차길 옆에서 몸을 팔아야 했다

청량리 588 이 생기기 전이다

 

  양평동 해태제과 공장

무작정 상경녀들의 꿈의 직장이었다

 

 버스차장(1964)

  

버스 차장

 

 봉제공장

환기도 신통치 않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그래도 미싱은 쉬지않고 돌아갔다

이렇게 벌어서 동생들 공부시키고 논 사고 밭 사라고 돈 부쳤다

 

 청계천 판자촌

무작정 상경인구가 폭증하자 주택난이 심화됐다

 

 이촌동 판자촌

한강변 에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이다

 

마포아파트(1963)

우리나라 최초의 맨션형 아파트

허나, 연탄 난방이었다

 

 서울 역

귀성길은 고생길이었다

 

  서울역

솥을 자전거에 싣고 남대문시장으로 배달가는 사람이 보인다

당시 갈월동과 원효로 일대에는 주물공장이 많았다

  

서울역에서 남대문 방향

전차와 버스, 리어카, 보행인이 뒤엉켜 무질서 하다 

 

새나라 택시와 빨간 미니버스

당시 함승이라 불렀던 좌석버스로 요금은 일반 버스보다 비쌌다.

 

지금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빨간 버스는 차명도 없는 차로서 

손으로 뚝닥 드들기고 펴서 만든 자동차다.

완전 수제(?)차였다.

 

미군 부대에서 불하받은 쓰리쿼터 엔진과 샤시에

고려자동차와 하동환자동차에서 드럼통을 펴서 바디를 만들었다.

한국 사람들 손재주는 알아줄만하다.

 

서울역 앞 광고판

서울 시내에서 제일 비싼 사용료를 내야하는 서울역앞 네온싸인 광고판을 미싱과 조미료가 차지했다.

드레스 미싱, 아이디알 미싱은 당시 혼수품 1위였고 조미료 미왕은 신상품이었으며 오리온 캬라멜은 여전하다

 

 새 색시 신방 

 

 학교 종

 

 앉은뱅이 책상

 

 금성 라디오

소모성 생활용품에서 기반을 닦은 락희가 금성사를 설립하고 라디오를 출시했다

생활필수품이 아닌 라디오 보급은 대량 소비시대의 서막이었다. 

먹고 사는 것이 해결된 오락 여흥시대의 개막이다

라디오 드라마가 인기였다

 

한국 최초의 세계팸피언 프로복서 김기수(1966)

김기수 선수가 이탈리아 벤베누티 선수를 물리치는 모습을 리디오 중계로 들은 국민들은 열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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