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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구정’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참으로 마음 아픕니다. 일제가 우리 문화를 지우고 억압하려고 만들어놓은 이 용어를 왜 사용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몰라서 그러리라 생각합니다. 우리의 고유명절을 없애고 자기네 식 신정을 사용하라고, 우리를 무시하려고 ‘설날’을 없애고 ‘구정’이라 칭하였습니다. 그 치욕적인 말을 왜 자꾸 들먹여야 하는지 짜증도 나고 화도 납니다. 하기야 일제의 잔재는 아직도 우리 생활 속에 많이 남아있습니다. 아는 대로 지워버려야 하겠습니다. 우선 가장 좋은 우리 명절 ‘설날’을 모두 되살리면 좋겠습니다. 말 자체도 아름답지 않습니까? 옛정도 아니고 ‘구정’이라니, 이 말이 없어지든지 그 말을 하는 사람들이 없어지든지 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어느덧 한 달을 보내고 있습니다. 새 달 초에는 느긋하던 날씨가 본때를 보여주며 겨울을 지냅니다. 추울 때는 추워야지요. 날씨도 날씨답고 사람도 사람다워야 합니다. 그런데 난방비로 아우성치고 있습니다. 어쩌면 세상 가장 저렴한 에너지 비용을 써오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그런데 한꺼번에 십년 치를 올리다보니 아우성 안 나올 수가 없지요. 우리는 또 이겨낼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온 민족 아닙니까? 그래도 법을 쥐고 있는 양반들이 힘 좀 써주기를 기대해봅니다. 자기네야 오르던 말든 상관없겠지만 백성이 아프면 어찌 될지는 머지않아 알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눈보라 헤치며 2월이 옵니다. 봄이 그만큼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지요. 희망이 보입니다. 살고 보자는 말이지요. 일단은 몸이 팔팔해야 하니 건강합시다. 행복한 주말을 빕니다. ^)^
2023년 1월 28일 김종우 목사 드림
“왕께 대답하되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나의 열조의 묘실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무하고 성문이 소화되었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색이 없사오리이까” (느헤미야 2 : 3)
<유령>
나라 잃고 십년, 기다림 속에서는 하루가 여삼추라고 합니다. 십년이 결코 짧지 않습니다. 그보다 문제는 그럼에도 앞이 캄캄하다는 것입니다. 희망이 안 보인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희망은 생기는 것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우리 자신이 만들어야 합니다. 그 기간이 짧을수록 좋겠지만 현실이 그리 녹록치 않습니다.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하여 그냥 전진해야만 합니다. 그 속에서 희망이 더욱 가능성 안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움직임이 없다면 희망도 생기지 않습니다. 비록 앞에 보장이 없다 해도 우리는 그 희망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활동을 하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그러한 백성이 있는 나라는 결코 이 땅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일반적으로 한 나라 또는 민족이 다른 나라에 정복을 당하면 시간이 흐를수록 정복자의 나라에 동화됩니다. 그래서 먼저 있던 나라 또는 민족은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정복자의 나라로 귀속되든지 합하여 새로운 나라 또는 민족으로 발전합니다. 세계사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예외적인 나라와 민족이 있습니다. 잘 아는 이스라엘 민족은 나라를 잃고도 2천 년의 세월을 흩어져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다시 나라를 세우고 그 민족의 정체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 많은 나라들 민족들 속에 섞여 살면서도 동화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그만큼은 아니더라도 우리나라 또한 비슷한 예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지속적으로 침략을 받으며 살아왔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직접 우리나라로 들어와 통치를 한 적도 있습니다. 크게는 원나라의 지배를 받았고 근대 역사 속에서는 일본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우리 문화를 없애고 자국의 문화로 대치하려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받을 것을 받기는 하였으나 동화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부단히 저항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냥 그들과 하나 되어 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는 우리 땅이니 나가라 하는 식으로 계속 저항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꾸준히 희망을 만들었습니다. 이름도 없이 얻는 것도 없이 그냥 내 것 바쳐가며 싸웠습니다. 대를 이어가면서 말이지요.
어머니를 통하여 조선의 피를 받은 것에 대하여 치욕을 느끼며 스스로 일본인보다 더 일본인답게 살려고 한 사람도 있습니다. 아마도 그들 속에서 더 치열한 경쟁을 했을 것이고 그래서 내노라 하는 자리까지 올라갔을 것입니다. 감독관인 ‘무라야마’와 일본인 경호대장 ‘카이토’의 대결은 그런 배경에서 생깁니다. 같은 적을 상대하지만 서로 경쟁합니다. 더구나 무라야마가 조선인의 피를 가진 것을 빌미로 무시하고 덤벼듭니다. 반대로 무라야마는 그 약점을 이긴 경험으로 카이토를 윽박지릅니다. 그들의 경쟁이 ‘유령’의 활동에는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경호대장이 마련한 함정에도 불구하고 정체가 쉽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초조해집니다.
새로 부임하는 조선총독이 환영식장 앞에서 저격을 당합니다. 죽음을 당하지는 않았으니 실패작입니다. 아무튼 난리가 났지요. 중국에서만 활동하는 ‘흑색단’이 조선에까지 손을 미치고 있는 줄 몰랐습니다. 이것은 분명 내부에 첩자가 있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 정보가 어떻게 새나갈 수 있다는 말인가? 경호대장이 내부 직원들을, 특히 조선인으로 일하는 사람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읍니다. 이 속에 있다, 하루의 시간 속에 밝혀라, 그렇지 아니하면 한 사람씩 고문을 행하겠다 합니다. 그 자리에 무라야마도 함께 있습니다. 역시 의심받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 분노하게 되지요. 그러나 분명한 증거가 아직은 없습니다. 이 모욕을 반드시 갚으리라 다짐합니다.
모인 사람들이 몇 안 되지만 모두 한 마디씩 할 수 있는 자리에 있습니다. 특히 정무총감 직속 비서 ‘유리코’는 조선인임에도 권력의 최측근이 된 인물로 입심도 남자들 뺨칩니다. 그에 비해 차분하게 일하는 암호문 기록 담당인 ‘박차경은 조용하면서 당찹니다. 두 여자의 대결이 또 하나의 이야기를 이끌고 있습니다. 일본측 무라야마와 카이토의 대결과 조선측 박차경과 유리코의 대결이 병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남자와 두 여자의 대결입니다. 일본 쪽에서 그리고 조선 안에서, 묘한 구도입니다. 아무튼 고문당할 위기 속에서 가장 위협을 느낄만한 사람을 카이토가 택하여 혼자 심문합니다. 약점을 잘 알지요. 홀로 계신 어머니를 돌봐드려야 하는데 말입니다.
설마, 설마 하면서 이야기를 따라갑니다. 원수가 원수 되기도 하고 원수가 친구로 나타납니다. 외딴 호텔 일본군에 포위된 속에서 유령을 찾는 전투가 전개됩니다. 끝에 가서야 유령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야기의 묘미지요. 끝을 구태여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 만했는데 하는 아쉬움이 있기는 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속도감이 있고 재미있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여인들의 액션도 볼만하고요. 아무튼 나라 사랑과 애국자는 유명인보다는 일반 백성 속에 더 많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나라의 희망은 정치인이 아니라 바로 백성임을 다시 새깁니다. 영화 ‘유령’(Phantom)을 보았습니다.
알기는 뭘 알아요?
세상에 책이 엄청 많습니다. 인쇄술이 등장하기 전부터 책이 있었습니다. 물론 손으로 쓰고 필사하며 만든 책이겠지요. 인쇄술의 발명은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보다 쉽게, 보다 빨리 세상의 지식들을 공유할 수 있는 길이 열렸으니 말입니다. 인류 문명 발전과 문화 전파에 그야말로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 말씀이 온 세상으로 전파되는데 크게 기여하였지요. 가장 오랜 시간, 가장 많은 지역으로 말씀이 전달되어 나갔습니다. 역사상 최고 장수의 최고 베스트셀러 아닙니까? 지금도 세계 구석구석으로 번역되어 나가고 있습니다. 마 24 : 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비로소 끝이 다가오는 듯합니다. 제자들이 일일이 다니며 전하던 때와 다르지요. 예수님 다녀가시고 2천 년, 이제 다시 오실 때도 되지 않았겠습니까? 온 세상에 전파도 되었고 때는 되었습니다. 우리 하나님 백성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주님 오시는 날을 기대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준비되었는가 하는 것이지요. 일단 오시면 알아보겠습니까? 처음 오셨을 때 하나님 백성이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알아볼 자신이 있습니까? 그 답이 어디 있지요? 당연히 성경에 있겠지요.
그런데 성경이 어렵다고들 말합니다. 성경이 어렵습니까? 그래도 창세기는 쉽게 재미있게 읽습니다. 또 사무엘서나 열왕기서도 흥미 있게 읽지요. 시편은 은혜스럽게 읽고 잠언은 눈을 반짝이면서 읽습니다. 신약성경도 웬만해서는 쉽게 읽습니다. 물론 어려운 부분도 있습니다. 특히 요한계시록은 아예 읽을 생각조차도 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무리 읽어도 오리무중, 그러니 읽는다 한들 읽지 않는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흔히 성경, 하나님의 말씀을 영의 양식이라고 합니다. 우리 몸이 먹는 양식의 3대 영양소가 있습니다. 잘 아는 대로 탄수화물과 단백질 그리고 지방입니다. 어느 것 하나라도 부족하면 건강을 잃습니다. 그러므로 음식을 먹을 때 이 세 가지를 의식하고 골고루 섭취해야 합니다. 영의 양식도 마찬가지겠지요. 하나님 말씀 성경에는 세 가지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역사와 교훈 그리고 예언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 동안 우리가 편식하지 않았습니까? 무엇에 치중하였지요? 역사와 교훈입니다. 예언에 대하여 들어본 것이 얼마나 됩니까? 또 들었다 한들 제대로 전하는 말씀을 들었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요즘 먹거리에 대해서 말썽이 많고 그래서 굉장히 주의를 하고 있습니다. 영의 양식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그렇게 주의합니까? 그러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아무튼 성경이 어렵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 안에 무엇이 들어있기 때문입니까? 역사와 교훈은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성경, 특히 율법을 축약하여 주신 것이 십계명입니다. 하나의 교훈입니다. 어렵습니까? 그나마도 어렵다면 우리 예수님이 그것마저 요약해서 아주 간단히 말씀해 주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 율법사와의 대화 속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질문하지요. 사실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즉 네가 알면 얼마나 알아? 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질문합니다.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냐 하는 것입니다. 그에게 예수님이 대답해주십니다. 마 22 : 37 - 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는 말은 전체 성경의 요약이라는 뜻이지요. 즉 정리하면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명하는 교훈입니다. 그것을 순종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을 또한 성경 역사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역사와 교훈은 성경을 읽으면 쉽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언이 성경에 들어있다는 말입니다. 이것 또한 우리가 바르게 섭취하지 아니하면 불균형을 초래합니다. 몸의 영양상태가 불균형이 되면 건강을 잃듯이 영의 양식을 불균형으로 섭취하면 역시 신앙의 건강을 잃게 됩니다. 심하면 목숨을 잃듯이 우리 신앙 또한 죽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그 동안 너무 편식하여 왔습니다. 무엇을 소홀히 하였다고요? 예언의 말씀입니다. 옛날 유대인들이 그랬듯이 우리 또한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결론도 마찬가지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핍박하고 망했듯이 우리 또한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 때 유대인들은 예언서를 몇 권이나 가지고 있었습니까? 구약의 선지서가 바로 예언서지요. 구약 39권 가운데 17권입니다. 이사야부터 말라기까지. 그런데 우리는 신약성경 27권 가운데 예언서를 몇 권 가지고 있습니까? 단 한 권입니다. 참으로 다행스런 일 아닙니까? 유대인들은 17권이나 가지고 죽을 쑤었습니다. 우리는 단 한 권입니다. 그나마 속된 말로 운 좋은 셈이지요. 그래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인데 어쩝니까? 사실 모르는 단어는 없습니다. 그 어려운 것은 단어가 어려워서가 아니지요.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듭니다. 예수님이 천국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마 13 : 47 - 48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이 말씀을 문자대로 본다면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려고 어디로 가야 하겠습니까? 바다로 가야 하겠지요. 가서 그물치고 물고기 잡아야겠지요. 그러나 이것은 비유입니다. 이 말씀 안에 말하고자 하는 뜻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여태 우리가 먹었던 양식과 다르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자칫 소화불량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토할 수도 있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양식이라고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이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베뢰아 사람들과 같은 자세입니다. 행 17 : 11 “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우선은 간절한 마음입니다. 그리고 날마다 성경을 어떻게 한다고요? 날마다 성경을 상고한다 그 말입니다. 자세히 생각하는 거죠. 그러므로 성경을 조심스럽게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경을 왜 주셨다고요? 요 5 :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아멘! 영생의 길이 성경에 있는 줄 믿습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성경을 우리 맘대로 편식하면 되겠습니까? 자 이제 그 동안 모자랐던 예언의 말씀을 먹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어려운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 속에 예언이 있기 때문이지요. 예언이 왜 어렵습니까? 예언은 무엇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까? 하나님 나라 곧 천국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은 비밀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나 들어가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천국비밀을 아는 것이 누구에게는 허락이요 누구에게는 불허한다고 말입니다. 마 13 : 10 - 11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천국에는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들만 들어가야 합니다. 그곳에 마귀 자식들이 들어가면 안 되겠지요. 그래서 비밀입니다. 그래서 비유로 감추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어렵습니다. 앞에서 예를 들었지만 천국은 바다에 그물치고 고기 잡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됩니까? 이 말씀을 단어 하나하나 문자적으로 생각하면 알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비유를 알아야 합니다.
비유란 비슷한 성질의 다른 것을 빗대어 어떤 사실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사 53 :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여기 말씀하고 있는 양이 저 풀밭에 있는 양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을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2천 년 전 유대인들이 그 사실을 알았을까요? 그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과거사이기 때문에 쉽게 이해합니다. 하지만 당장의 현실로 나타났을 때 그것을 이해하고 믿는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보내시기 700년 전에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의도로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성령의 감동을 받았던 세례 요한은 바르게 보았습니다. 요 1 : 29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하나님의 의도가 그대로 드러났지요. 양이라는 짐승의 특징을 들어서 당신의 아들의 사역을 표현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눈으로는 ‘양’을 읽었어도 우리 마음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읽어야 성경을 바르게 읽는 것입니다. 표면으로는 육적인 것을 말씀하지만 이면으로는 영적인 것을 말씀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성경이 열리는 것이지요. 천국을 말씀하며 바다에 친 그물과 같다고 한 것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바다는 무엇이고 그물은 무엇이며 물고기는 무엇인가 하는 것을 영적으로 이해해야 제대로 성경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비유를 풀면 이단이라고 떠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막힐 일 아닙니까? 시 119 : 130절 봅니다. “주의 말씀을 열므로우둔한 자에게 비취어 깨닫게 하나이다” 그런데 여기 ‘열므로’ 하는 부분을 난외주가 이렇게 설명해줍니다. ‘열므로’가 무엇이라고요? ‘해석하므로’ 그렇습니다. 말씀을 해석해주어야 합니다. 특히 비유는 해석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천국 간다고 바다로 가서 그물치고 앉아 물고기나 잡고 있을 것입니다. 웃기는 일 아닙니까? 막 4 : 34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셨다고요? 해석해주셨지요. 그러면 비유를 해석하신 예수님이 이단입니까?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이단이라고 한 것과 똑같습니다. 누가 이단입니까? 비유는 암호와 같습니다. 군대 다녀온 사람은 이 암호의 중요함을 압니다. 아무도 안 보이는 한밤중에 이 암호를 모르면 자기 진영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물론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군이라 할지라도 밤에는 이 암호를 모르면 자기 진영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오히려 오해를 받아 총 맞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방심하고 있다가는 진리가 없는 어두운 세상에서 총 맞아 죽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언서를 주셨습니다. 이 예언서에는 천국 비밀이 들어있습니다. 천국 비밀이 무엇입니까? 숨겨진 보화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 13 : 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옛날에 보물섬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요즘도 가끔 모험영화를 보면 무슨 이야기입니까? 숨겨진 보물을 찾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찾기 위해 무엇이 필요합니까? 보물섬 지도잖아요. 그런데 지도를 가지고 있다한들 그 지도를 볼 줄 모르면 역시 소용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지금 보물을 찾기 위해 지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지도 읽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걸 모르면 이 지도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무엇이 들어있다고요? 보화가 들어있답니다. 어마어마한 보화, 세상이 줄 수 없는 보화, 돈으로 살 수도 없는 보화입니다. 무엇입니까? 영생입니다. 그리고 천국입니다. 우리가 왜 성경을 본다고요? 천국에서 영생을 얻기 위해. 그런데 볼 줄 모르면? 아무 소용없는 일이지요.
성경에는 하나님의 비밀이 들어있습니다. 구약성경의 큰 비밀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골 2 : 2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비밀이 무엇이라고요? 그리스도입니다. 고전 2 : 6 - 8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나님의 비밀, 하나님의 지혜 그것을 세상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였다고요?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도 모르면 어떻게 할까요? 오신다 한들 다시 그리스도를 못 박을 것이라 그겁니다. 상상도 하기 싫은 무서운 일입니다. 그런 일은 없기를 빕니다. 그런데 무식하면 그럴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구약의 비밀이 예수 그리스도였다면 신약의 예언에도 비밀이 있겠지요. 그 비밀이 무엇인지 보겠습니다. 첫째 계 1 : 20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여기 비밀이 하나 나옵니다. 무엇입니까? 일곱 별의 비밀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비밀입니다. 계 17 : 7 “천사가 가로되 왜 기이히 여기느냐 내가 여자와 그의 탄 바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의 비밀을 네게 이르리라” 자 두 번째 비밀입니다. 무엇입니까?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의 비밀입니다. 도대체 이런 짐승이 상상이 됩니까? 짝이라도 맞으면 그나마 상상이라도 해볼 텐데, 머리와 뿔의 개수가 맞지도 않습니다. 아무튼 마지막으로 세 번째 비밀을 봅니다. 계 10 : 7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 나팔을 불게 될 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 하나님의 비밀이 이루어지는 날이 옵니다. 언제요? 일곱째 천사가 나팔 부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일곱째 나팔이 비밀입니다. 자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태 말해 왔지만 이것이 다 뭐라고요? 비유입니다. 예를 들어서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이라고 하여 과연 그런 괴물이 나타나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면 성경은 까만 글자와 하얀 종이로밖에 안 보이게 됩니다.
우리가 오래 전에 ‘Passion of Christ'라는 영화를 감동스럽게 보았습니다.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이 무엇입니까? 다른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채찍질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무시무시했는지 그것을 보며 많은 성도들이 눈물을 흘렸답니다. 그 잔혹함 때문에 종교영화였음에도 미성년자들 입장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누가 예수님에게 그렇게 못된 짓을 했습니까? 물론 채찍질은 로마 병정들이 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로 예수님을 보낸 것은 다름 아닌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왜 보냈지요? 자기들이 믿는 하나님을 거역했다는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려 보내신 구세주인데 그 하나님을 거역했다고요? 말이 됩니까? 그들이 믿은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하나님이었습니까? 자기들은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알지도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대적하는 유대인들과 대화할 때 그들은 주장했습니다. 요 8 : 41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예, 하나님이 자기네 아버지랍니다. 그렇게 천년 넘는 세월을 신앙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대답합니다. 44절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한 마디로 너희 아비는 하나님이 아니라 마귀다. 즉 너희는 마귀의 자식들이다, 그 말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성경을 모르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자 비유한 이 천국 비밀을 그러면 언제 그 실체를 보게 됩니까? 이 비유 속에 천국 비밀이 들어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알아야 하겠지요. 언제 알게 됩니까? 성경에는 때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요 16 : 25 “이것을 비사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비사는 비유와 동일한 뜻입니다. 때가 이르면 밝히 이르겠다 말씀하십니다. 그 예를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마지막 때까지는 간수하고 봉함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단 12 : 8 “내가 듣고도 깨닫지 못한지라 내가 가로되 내 주여 이 모든 일의 결국이 어떠하겠삽나이까” 다니엘이 하나님께로 받아 기록하였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당연하지요. 예언이고 비유입니다. 그래서 궁금하니까 여쭤본 것입니다. 그런데 가르쳐줍니까? 9절 “그가 가로되 다니엘아 갈찌어다 대저 이 말은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할 것임이니라” 잔소리 말고 봉하랍니다. 왜요? 당시 일어날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루실 때까지는 비밀이란 말입니다.
또 하나 보겠습니다. 렘 23 : 20 “나 여호와의 노는 내 마음의 뜻하는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쉬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말일에 그것을 완전히 깨달으리라” 말일에 즉 마지막 때에 완전히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일, 말세, 종말, 마지막 때 등등 말씀합니다. 그것은 세상이 생각하는 종말이 아닙니다. 반복하지만 성경은 세계사도 아니고 과학책도 아닙니다. 도덕책도 아닙니다. 그런 내용이 들어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런 책은 결코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구태여 말하자면 종교책입니다. 그러므로 종말이 온다 해도 그것은 세상 종말이 아니라 종교 종말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설교하고 들었던 종말은 대부분 세상 종말입니다. 핵전쟁이 일어나고 지진과 기근 또는 지구에 혜성이 떨어져 커다란 재앙을 만나 끝장이 나는 그런 종말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런 식으로 소설도 쓰고 영화도 만들고, 그런 식으로 설교까지 한 것입니다. 세상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다른 것이 없었습니다. 과연 하나님 백성이 맞습니까? 백성이야 몰라서 그런다 치고 그 백성을 가르치는 목자들이 똑같으니 기가 찰 일입니다.
일단 알아둡시다. 성경은 그 약속이 이루어질 때가 종말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예언이 이루어진 예수님 초림 때가 바로 구약의 종말이었습니다. 사 7 : 14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말씀대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이 때를 가리켜 세상 끝 즉 말세라고 하였습니다. 히 9 : 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예수님 초림, 그 때가 바로 ‘세상 끝’ 곧 종말이었다는 말입니다. 약속대로 오셨지만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혈통으로 이어져온 육적 이스라엘을 끝내셨습니다. 종말이지요. 구약의 종말입니다. 이제 우리 앞에 신약의 예언이 이루어질 때가 남았습니다. 그리고 그 때가 종말입니다. 핵폭탄으로 지구가 종말을 고하는 때가 아닙니다. 신약 예수 믿는 자들로 이루어진 하나님 백성 곧 영적 이스라엘의 종말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때가 종말입니다. 그리고 영적 새 이스라엘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계시록의 사건입니다. 우리가 곧 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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