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드컵 이야기
월드컵이 한창입니다. 16강 경기가 모두 끝나고, 8강의 주인공들이 가려졌습니다.
프랑스, 잉글랜드, 스페인, 벨기에 등 유럽의 강호들이 8강에 올랐고, 남미에서는 아르헨티나가 살아남았습니다. 여기에 모로코, 노르웨이, 스위스까지 가세하며 월드컵은 다시 치열한 승부의 무대로 접어들었습니다. 한국 시간으로 7월 10일부터 이들은 4강 진출을 놓고 다시 격돌합니다.
그러나 왠지 한국에서는 월드컵의 열기가 예전 같지 않습니다. 아마도 우리 대표팀이 32강에 오르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문득 2002 한일월드컵이 생각납니다.
2002년 6월 18일, 저는 아내와 함께 이탈리아와의 16강전이 열린 대전 월드컵경기장에 있었습니다. 전반 5분 안정환 선수가 페널티킥을 실축했을 때, 경기장 전체에는 아쉬운 탄성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후반 43분 설기현 선수의 극적인 동점골이 터지는 순간, 경기장은 말 그대로 떠나갈 듯했습니다.
하이라이트는 연장 후반 12분이었습니다. 이영표 선수가 왼쪽 측면에서 올린 크로스를 안정환 선수가 페널티박스 안에서 뛰어오르며 머리로 받아 넣었습니다. 공이 골문을 가르는 순간,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서로를 끌어안았습니다. 그 순간의 함성과 환호는 지금도 생생합니다.
나흘 뒤에는 아내와 함께 스페인과의 8강전이 열린 광주 월드컵경기장을 찾았습니다.
경기장으로 걸어가는 길에 한 외국인과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는 미국인이었습니다. 4년 동안 일해서 모은 돈으로, 4년마다 월드컵이 열리는 나라를 찾아가 자신이 좋아하는 브라질의 모든 경기를 관람한다고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참 멋지게 사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날 대한민국과 스페인의 경기는 정규 시간 90분과 연장전 30분, 총 120분 동안 치열한 공방을 벌였지만 끝내 득점 없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승부는 승부차기로 이어졌습니다.
4대3으로 앞선 상황. 대한민국의 마지막 다섯번째 키커는 주장 홍명보 선수였습니다. 그는 골키퍼의 방향을 완전히 속이며 골문 상단으로 정확하게 공을 꽂아 넣었습니다. 승부차기 최종 스코어 5대3. 대한민국이 월드컵 4강에 오르는 순간이었습니다.
‘영원한 리베로’ 홍명보 선수는 골망이 흔들리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그라운드를 달려 나갔습니다. 중앙선 부근에 서 있던 동료 선수들과 코칭스태프가 일제히 달려와 그를 감싸 안았습니다. 그날 홍명보는 국민 모두의 영웅이었습니다.
그로부터 24년이 흘렀습니다.
2026 북중미 월드컵에서 감독 홍명보는 조별리그 1승 2패를 기록하며 32강 진출에 실패했습니다. 감독의 전술과 위기관리 능력은 도마 위에 올랐습니다. 24년 전 국민의 환호를 한 몸에 받던 그는, 이제 같은 이름으로 국민의 실망과 비판을 감당해야 하는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저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월드컵은 과연 우리나라가 이길 때만 의미 있는 축제일까요. 우리가 이길 때만 뜨겁고, 탈락하면 곧바로 관심이 식어버리는 행사일까요.
바로 그 지점에서 저는 월드컵의 다른 얼굴이 보였습니다. 월드컵은 이긴 사람만을 위한 무대가 아닙니다. 환호받는 영웅도, 비판받는 감독도, 눈물 흘리는 선수도 모두 이 무대 위에서 인간의 한 장면을 보여줍니다.
월드컵은 단순한 축구 대회가 아닙니다. 4년마다 지구 전체가 함께 바라보는 거대한 인간 드라마입니다. 그라운드 위에는 한 나라의 승패만 오르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인생과 한 가족의 눈물, 한 민족의 상처와 한 시대의 희망도 함께 올라섭니다.
공 하나가 굴러갈 뿐인데 사람들은 왜 울까요. 90분의 경기를 볼 뿐인데, 왜 어떤 장면은 수십 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을까요. 그 이유는 월드컵이 결국 인간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야기 하나> 1950 브라질 월드컵에서 브라질의 우승을 의심한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결승에서 우루과이에 패하자 온 나라가 슬픔에 잠겼습니다. 당시 아홉살이던 소년 펠레는 라디오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는 아버지를 보고 말했습니다. "울지 마세요 아버지, 제가 커서 브라질에 월드컵 우승을 선물할게요." 그리고 8년 뒤, 1958년 스웨덴 월드컵에서 열일곱 살 소년 펠레는 브라질을 첫 우승으로 이끌었습니다. 결승전이 끝난 뒤 그는 동료들의 품에 안겨 아이처럼 울었습니다. 세계를 놀라게 했던 천재도, 그 순간만큼은 그저 감격을 주체하지 못한 한 소년이었습니다. <이야기 둘> 2005년 10월 8일 코트디부아르는 사상 처음으로 2006 독일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습니다. 그러나 기쁨은 온전하지 않았습니다. 나라는 북과 남으로 갈라져 있었고, 내전의 총성은 아직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때 주장 디디에 드록바가 라커룸의 카메라 앞에 섰습니다. 동료들과 함께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는 국민과 무장 세력에게 무기를 내려놓고 전쟁을 멈춰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Please, put down your weapons!” 실제 와가두구 평화협정은 2007년 3월 체결되었습니다. 물론 한 사람의 연설만으로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드록바의 호소는 국민 정서를 움직이고, 평화를 향한 분위기를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이야기 셋> 2018년 7월 2일 러시아 월드컵 16강전. 일본은 벨기에를 상대로 한때 2대0으로 앞섰지만 후반에 내리 세 골을 허용하며 2대3으로 역전패했습니다. 일본은 사상 첫 월드컵 8강 진출을 눈앞에 두고 있었기에, 그 패배의 충격은 더욱 컸습니다. 그런데 경기 직후 일본 선수단은 뜻밖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라커룸을 깨끗이 정리한 뒤, 테이블 위에 러시아어로 "Спасибо", 즉 "감사합니다"라는 메모를 남긴 것입니다. 당시 많은 언론은 "가슴 아픈 패배 뒤에도 라커룸을 완벽하게 정리한 일본 선수단"을 조명했습니다.
월드컵은 누가 우승했는가를 기록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기억에는 우승만 남지 않습니다. 눈물 흘리던 소년을 기억하고, 무릎 꿇은 주장을 기억하며, 패배 뒤에도 마지막까지 품위를 지킨 사람들을 기억합니다.
우리의 인생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긴 순간만 인생은 아닙니다. 졌지만 끝까지 뛰어낸 시간도 인생이고, 누구의 주목도 받지 못했지만 자기 자리를 묵묵히 지켜낸 날들도 인생입니다.
한국의 월드컵은 잠시 멈췄지만, 월드컵의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우리에게 조용히 말해줍니다. 이겨야만 기억되는 것은 아니라고. 끝까지 뛰는 사람은 언젠가 반드시 누군가의 마음속에 남는다고.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26.7.8. 조근호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