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고향-남인수
작사 김다인 작곡 박시춘
一
실버들 늘어지는 새 봄이 돌아오면
내 고향 두메 산골 풀 피리 그리워라
사시나무 고개 아래~ 누렁소 풀을 뜯는
언제나 가고픈 건 흙 냄새 고향이지
二
진달래 꽃을 따서 머리에 꽂아주면
수줍어 돌아서던 순이가 그리워라
은행나무 기대 앉어~ 십오야 달을 보며
달 노래 별 노래를 부르던 고향이지
安重根
생몰년도: 1879년(고종 16)-1910년
활동 분야: 독립운동,교육
다른 이름; 안응칠(安應七)/안토마스(安多默)
생애와 업적
1909년 2월 7일,러시아와 중국 경계인 엔치아 근처 한 여관. 안중근은 김기룡 •강기순•박봉적 등 동지 열한 명과 비밀 결사조직인 단지회(斷指會)를 결성했다. 이들은 이날,안중근은 엄인섭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를,그리고 김기룡 등은 이완용•박제순•송병준 등을 암살하기로 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그날의 일에 대해 안중근은 자서전《안응칠 역시》를 통해 이렇게 기억했다.
“동지 12인과 상의하되……,오늘우리들은 손가락을 끊어 맹서를 같이 지어 증거를 보인 다음에,마음과 폼을 하나로 묶어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기어이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어떻소’하자 모두가 그대로 따르겠다 하여,마침내 열두 사람이 각각 왼편 손 약지를 끊어,그 피로써 태극기 앞면에 글자 넉 자를 크게 쓰니 대한독립이었다. 쓰기를 마치고 대한독립만세를 일제히 세 번 부른 다음 하늘과 땅에 맹세하고 흩어졌다"
당시 이들이 태극기에 쓴 대한독립(大韓獨立)’네 글자는 1914년 8월 23일자 〈권업신문〉에 게재되어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고,약지 마지막 손마디가 잘려나간 안중근의 손도장은 지금도 안중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강렬한 이미지로 기억되고 있다.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아래에서 아버지 안태훈과 어머니 백천 조씨 사이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안중근의 어릴 적 이름은 안응칠이었다. 태어날 때 배와 가슴에 북두칠성 모양의 흑점이 일곱 개가 있어 북두칠성의 기운을 받고 태어났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1907년 망명한 이후 다시 이 이름을 썼다. 안중근의 집안은 황해도에서 이름난 부호였다.‘소년 시절 집안에 마련된 서당에서 사서삼경과 (자치통감).(조선사).(만국역사) 등을 익히는 한편,포수들을 따라다니며 사격을 배우고 사냥을 즐겼다.
황해도에서 동학농민군이 일어났을 때 아버지를 따라 동학군을 진압할 만큼 보수적이었던 그가 개화사상에 눈을 뜨게 된 것은 천주교를 접하면서부터였다. 동학군으로부터 빼앗은 양곡을 군량으로 사용한 것이 문제가 되어 신변의 위협을 느낀 아버지가 천주교 당으로 폼을 피해 있는 동안 천주교 신자가 된 것을 계기로 안중근 가문은 일가친척 대부분이 세례를 받는 천주교 신자가 된다. 안중근도 천주교 교리를 공부하고 프랑스인 신부에게 불어를 배우며 새로운 학문을 수용하기 시작했다. 신문,잡지,각국 역사 등을 읽으며 정치사상과 독립정신을 높여갔다.
안중근은 차츰 진보적 애국 계몽운동가로 성장했다. 민중의 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여러 가지 문화운동을 벌였으며 학교를 세워 교육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국채보상운동이 벌어지자 이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그러나 한일신협약에 이어 군대가 해산되자 온건한 계몽운동이나 문화운동으로는 일제의 캄략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 무장투쟁에 나서기에 이른다.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로 간 안중근은 한인청년회의 임시사찰 직을 맡았다. 그는 한인 사회의 유력자들에게 의병부대 창설의 필요성을 설득했고 이에 다수의 한인들이 무기와 자금을 지원하자 마침내 의병부대가 조직되었다. 총독에 김두성,총대장에 이범윤,그리고 안중근은 참모중장의 임무를 맡았다.1908년 안중근 등 여러 의병장들은 대를 나누어 두만강 근처에서 모인 뒤 국내진입작전을 시도했다. 안중근 부대는 몇 차례 일본군을 무찌르고 일본군을 생포하는 등 전과를 올렸다. 이때 안중근은 만국공법에 따라 사로잡은 포로를 석방하면서 무기까지 내주었다. 이를 두고 동료 의병들과 논란이 있었다. 결국 그 석방한 포로 때문에 일본군에게 위치가 노출되어 큰 곤경을 치러야만 했다.
더 이상 의병을 일으키기 어려운 상황이 되자 안중근은 새로운 전술을 모색했다. 그는 동양 평회를 저해하는 일본의 팽창주의의 중심에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단지동맹을 맺고 반년 정도가 지났을 무렵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 시찰길에 올라 러시아 재무대신인 코코프체프(Kokovsev,V. N)와 만주•조선문제를 놓고 회담을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그는 우덕순•유동하 등 동지들과 이토를 저격하기로 뜻을 모으고 1919년 10월 22일 하얼빈 역에 도착했다. 안중근 일행은 사진관에 들러 기념사진을 찍은 뒤 하얼빈 공원을 세밀히 둘러보며 계획을 검토했다 안중근과 우덕순은 하얼빈을 떠나 차이자거우로 가기로 했다. 창춘에서 오는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못 미처 차이자거우 역에 내릴 가능성에 대비해서였다. 안중근 일행은 이틀 뒤 차이자거우로 떠났다. 그곳에서 이토가 탄 특별열차가 10월 26일 오전 6시에 도착한다는 정보를 알아내고 구내 잡화점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그러면서 다시 한번 거사 계획을 점검했다. 하지만 시간이 문제였다. 오전 6시면 어두워 거사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결국 안중근은 하얼빈에서 거사를 하고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우덕순 등은 차이자거우에 남아 기회를 엿보기로 했다 안중근은 혼자 기차를 타고 한얼빈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튿날인 10월 26일 아침 하얼빈 역 구내로 잠입했다. 오전 9시,이토 히로부미가 탄 특별열차가 도착했다. 이토가 기차에서 내리자 악대가 군악을 연주했다. 귀빈 대합실 한 구석에서 차를 마시던 안중근은 플랫폼으로 나와 러시아 군인들 뒤로 보이는 백발의 이토를 향해 침착하게 방이쇠를 당겼다. 정면이 아니라 옆에서 오른쪽팔꿈치 위쪽을 겨냥했다. 그래야 심장을 타격할 수 있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세 발의 총알이 이토의 폐와 복부에 박혔고,이토의 수행원과 궁내대신 비서관 등에게 총상을 입혔다. 거사 직후 러시아 헌병장교에게 붙잡히면서 안중근은 “대한독립 만세" 를 외쳤다. 러시아 헌병대에 붙잡힌 안중근은 이후 일본 영사관으로 넘겨졌다가 뤼순 감옥에 수감되었고 1910년 3월 26일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재판 과정에서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에 대해 조선의 왕비를 살해한 죄,조선의 황제를 폐위시킨 죄,한국의 군대를 해산시킨 죄 동양 평화를 교란한 죄 등 열다섯 가지를 열거하며,“한국 의병의 참모중장” 자격으로 “동양 평화”를 위해 이토를 죽였음을 분명하 했다.
평 가
안중근 의거가 국내외에 끼친 영향은 매우컸다. 한국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함으로써 일제에 저항하던 애국지사들을 고무시켰으며,한국 국민의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그리고 항일 의열투쟁사에서 가장전형적인 본보기가 되어 일제하에서 거듭되는 의열투쟁의 연원이 되었다. 그의 의거는 오늘날까지 민족정기를 상징한다.
중국은 저격 사건 이후 안중근 의사를 민족 영웅에 버금가는 반열에 올려놓는가 하면 관련 연구와 각종 기념 활동 사업을 활발하게 벌여왔다. 하얼빈의 학자들은 “안중근 의사 추모 열기가 정작 한국보다 더 뜨겁고 다°고 할 정도이다. 학창 시절 안중근 연극에 출연한 바 있다고 밝힌 저우언라이 전 총리는 “중국과 한국이 손잡고 함께 벌인 항일투쟁은 바로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저격하면서부터 시작됐다”고 강조했다. 일본에서도 안중근 추모 모임이 있고,여러 종류의 전기가 출간된 바 있다.
한편, 과거에는 안중근을 단순한 테러리스트로 보는 시각이 강했지만,근래에는 동양의 평화를 부르짖은 사상가로 접근하는 새로운 평가 작업이 시도되고 있다. 사형 집행으로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투쟁이론을 정립할 만큼 투철한 사상가였으며 철저한 평화주의자였던 그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수단이 권총이었다는 것이다.
국채보상운동
일제는 한국 정부로 하여금 일본에서 차관을 도입하게 했다.1907년 한국 정부가 젊어진 외채는 총 1,300만 원이었으며, 당시 한국 정부는 이를 갚을 능력이 없었다. 이에 전 국민이 나서 국채를 상환하고 국권을 회복하자는 것이 국채보상운동이다.1907년 2월 대구 광문사(廣文社)의 회원 서상돈(徐相敦)이 처음 제의했다. 운동은 전 국민의 호응 속에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나,일제의 방해로 좌절되었다.
作成者 黃圭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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