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리좀적 사유의 수필, 탈중심에 감응하는 활어,
- 행위소-네트워크 이론(ANT)을 중심으로
수필는 중심이 아니라 흐름이며, 주체가 아니라 관계이며,
표현이 아니라 감응이다.
권대근
문학박사, 중국 하북미술대학 교수(객좌)
Ⅰ. 서론
— 중심에서 흐름으로, 정념으로 변하는 수필
수필은 오랫동안 ‘자기 고백의 장르’, ‘개인의 중심적 사유의 기록’이라는 관념 아래 놓여 있었다. 그러나 동시대 문학적 감각은 더 이상 주체의 심상만을 좇지 않는다. 세계는 더 촘촘한 얽힘과 감응 속에서 움직이며, 인간만의 시선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다중적 에너지들이 글쓰기의 무의지한 틈에서 솟아오른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듯, “사유는 나무가 아니라 리좀이다” -즉 단일한 원천에서 발원하는 것이 아니라 수평적 확산과 돌발적 연결로 이루어지는 “흐름”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수필은 더 이상 “중심”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수필은 주체가 아니라 관계이며, 표현이 아니라 감응이고, 닫힌 구조가 아니라 연결의 생성이다. 브뤼노 라투르의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NT)은 인간/비인간의 위계를 무너뜨리며, 사물 기계 환경 언어 감정 등이 동등한 수준에서 서로를 ‘행위하게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는 수필창작의 새로운 논리를 제시한다. 수필은 더 이상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물 상황 감정 환경 비인간 존재들과의 접속이 발생시키는 ‘사건’의 기록으로 변모한다.
본 평론은 이러한 시각에서, 리좀적 사유, ANT, 탈중심적 글쓰기, 감응의 언어라는 네 가지 축을 통해 수필창작의 새로운 방법론을 제안하고자 한다.
Ⅱ. 본론
— 리좀과 네트워크로 이루어지는 수필의 재구성
1. 리좀적 사유
- 수필은 직선이 아니라 생장하는 뿌리이다
리좀은 위계 없는 underground network이다. 중심이 없고 주변도 없다. 시작도 끝도 없다. 이 개념은 수필창작에서 결정적 전환점을 마련한다. 수필은 전통적으로 ‘화자 중심 서술’에 의존해왔다. ‘내가 느꼈다’, ‘내가 보았다’, ‘내가 해석했다’라는 1인칭의 권력이 글을 이끌어왔다. 그러나 리좀적 수필에서는 사유의 방향이 바뀐다.
예를 들어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자전적 서사의 외피를 두르지만, 실제로는 ‘시간 기억 공간 사물의 덩어리들이 서로 연결되며 생성하는 감각의 뿌리망’이다. 사건은 직선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기억은 이곳저곳을 뚫고 새롭게 연결되며, 작가는 그 연결의 흐름을 따라갈 뿐이다.
리좀적 수필창작은 다음의 관점을 따른다. 주제를 먼저 두지 않는다. 중심 문장을 만들지 않는다. 사유의 발화점을 글이 스스로 찾도록 둔다. 사물 환경 타자의 개입을 허용한다. 리좀적 글쓰기란 곧 ‘주체의 훈육된 서술을 내려놓는 실험’이다. 글은 ‘나의 생각’이 아니라 ‘흐름의 움직임’이 된다.
2. ANT(행위자-네트워크 이론)
- 수필 속 비인간의 발화
라투르는 “인간은 더 이상 유일한 행위자가 아니다”라고 단언한다. 행위는 인간과 비인간이 얽혀 있는 네트워크의 산물이다. 이는 수필창작의 감각을 근본적으로 바꾼다. 예를 들어 김훈의 산문 <자전거 여행>을 보자. 자전거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행위적 주체’로 등장한다. 자전거는 바람 저항을 통해 몸의 움직임을 규정하고, 길의 굴곡을 감각하게 만들고, 작가의 사유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휘어놓는다. 즉 자전거와 길과 바람과 신체가 서로를 행위하게 하는 네트워크가 형성된다.
ANT적 수필은 다음의 질문을 던진다. 지금 이 수필을 움직이는 것은 누구인가? 혹은 무엇인가? 내 사유는 어떤 비인간 행위자의 작용에 의해 발생하는가? 사물의 시선은 이 수필을 어떻게 ‘변형’하는가? 비인간 행위자의 개입은 수필의 구조를 해체한다. ‘나’는 더 이상 중심적 화자가 아니라, 네트워크의 한 요소로 위치가 재배치된다. 이는 문학에서 오래전부터 불려온 목소리와 맞닿아 있다. 월터 벤야민이 말하듯, “사물은 그것을 바라보는 자를 바라보고 있다.” 이때 수필은 ‘인간의 설명이 아닌, 사물의 응답이 남긴 기록’이 된다.
3. 탈중심 수필창작론
- “나”의 권위를 해체하는 글쓰기
수필의 가장 뿌리 깊은 전통은 ‘자기 서술’이다. 그러나 현대의 감응적 글쓰기에서는 ‘나’가 더 이상 유일한 진실의 원천이 아니다. 나를 중심에서 제거하는 순간, 수필은 비로소 세계와 접속한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나는 감정보다도 모호함을 신뢰한다”고 말했듯, 탈중심의 글쓰기는 명확한 주체 대신 관계적 상황을 신뢰한다. 수필은 더 이상 자아의 정주지가 아니라, 감각이 스쳐 가는 “소멸하는 공간”이 된다.
탈중심 수필의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감정의 명료한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나의 입장을 강조하지 않는다. 해석이 아니라 현상을 드러낸다. 나보다 사건 자체의 변화에 글의 무게를 둔다. 예컨대 피터 한트케의 『소망 없는 불행』에서 화자는 어머니의 죽음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주변 사물 날씨 상황 거리의 움직임을 기록한다. 화자가 중심이 아니라, ‘죽음과 주변 환경의 관계망’이 글을 이끈다. 탈중심 수필은 결국 “나를 최소화함으로써 세계를 최대화하는 글쓰기”이다.
4. 감응하는 언어
—관계 속에서 울리는 문장의 리듬
수필이 리좀적이고 탈중심적이라는 말은 곧 언어가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감응의 매체가 된다는 뜻이다. 진정한 수필 문장은 설명이 아니라 현상을 ‘울리게’ 한다. 모리스 메를로퐁티가 “언어는 세계에 손을 뻗는 육체”라고 말한 것처럼, 감응하는 언어는 사물을 만지고, 사물에 만져지며, 그 접촉에서 생성된 정념의 떨림을 기록한다.
감응하는 언어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비유는 사물과 인간이 서로를 감각하게 만드는 매개로 사용된다. 언어는 고정된 의미가 아니라, 관계에서 생성되는 의미를 지향한다. 문장의 리듬은 사물의 리듬에 맞춘다. 뉘앙스, 떨림, 미세한 감촉의 언어를 중시한다.
정현종의 시 <섬>의 유명한 구절,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 그 섬에 가고 싶다” 이 문장은 설명이 아니라 ‘존재 간의 거리와 감응’을 진동시키는 언어다. 수필에서도 이러한 감응적 문장은 세계의 보이지 않는 결을 드러낸다.
Ⅲ. 창작론을 적용한 송명화의 <차라리 묵언>분석
- 위의 창작론을 뒤에 제시된 수필 <차라리 묵언>에 적용
1. 리좀적 사유의 관점
이 수필은 ‘하나의 사건’, 채소밭이 사라진 사건을 직선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기억 출근길 비 학교 교정 나무 도시계획 자연풍경 저수지 시의 인용 등 여러 요소로 사유가 비선형적으로 뻗어간다. 이는 리좀적 구조에 가깝다. 채소밭 → 비 내리는 아침 → 교정의 바람 → 도시계획 → 들판 → 저수지 → 시적 사유, 이 연결은 논리적이라기보다 감각적 생성적이다. 하나의 뿌리에서 새 뿌리로 계속 번지는 리좀적 사유의 전형이다.
2. ANT적 관점, 비인간 행위자들의 독자적 작동
이 수필에서 강력한 행위자는 인간이 아니라 채소 꽃댕강나무 비 흙 저수지 연잎 개구리 등이다. 채소는 화자의 감정을 구성한다. 꽃댕강나무는 ‘댕강’이라는 음향적 특성을 통해 사건을 설명한다. 비와 바람은 장면의 정서를 변화시키는 행위자다. 들판의 벼, 들꽃, 물속 생물들은 화자의 사유 방향을 바꾼다. 즉 이 글의 중심 행위자는 인간이 아니라 사물과 자연의 집단적 네트워크이다. 글은 그 네트워크의 작용 속에서 전개된다.
3. 탈중심 글쓰기의 관점
이 수필에서 ‘나’는 중심적 서술자가 아니다. ‘나’는 오히려 자연과 사물의 움직임에 반응하는 존재로 기능한다. 나의 감정보다 사물의 변화가 더 크게 서술된다. 결론이나 판단을 단정하지 않는다. “나는 무례한 객이구나”라는 마지막 인식은 ‘나’가 중심에서 밀려나 있을 때 가능한 깨달음이다. 이는 탈중심적 서술의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4. 감응하는 언어의 관점
이 수필의 문장은 대부분 감각적 촉각적 리듬적이다. “빗방울이 발등을 튕기고는 앞장을 섰다.” “익은 벼이삭들은 금빛 윤슬처럼 반짝거린다.” “들국화 몇 송이가 풀덤불에 고명을 얹는다.” “개구리 한 마리가 급히 연잎에서 뛰어내린다.” 이 문장들은 단순한 묘사가 아니라, 사물과 화자가 서로 감응하는 순간의 진동을 담아낸다. 수필이 ‘관계적 울림의 장르’임을 잘 보여주는 예다.
Ⅴ. 새로운 창작론을 요약한 ‘적용형 수필창작 지침’
마지막으로, 위의 논의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재구성된 <리좀, ANT, 탈중심, 감응의 수필창작론>을 제시한다.
1. 리좀적 글쓰기
중심, 주제를 설정하지 않는다. 사유의 가지치기를 허용한다. 기억 감각 사물 시간이 자유롭게 연결되도록 둔다.
2. ANT 기반 글쓰기
사물 환경 동식물의 행위성을 적극 포착한다. 글의 방향을 결정하는 비인간 요소를 탐지한다. ‘인간이 아니라 네트워크가 글을 쓰도록’ 허용한다.
3. 탈중심 글쓰기
‘나’의 판단 설명을 최소화한다. 주체가 아니라 관계를 서술한다. 감정의 결론이 아니라 감정의 흐름을 기록한다.
4. 감응적 언어
촉각 질감 리듬 명암 등 감각적 요소를 중시한다. 의미의 고정이 아닌 의미의 생성 과정에 집중한다. 문장의 리듬을 사물·환경의 리듬에 맞춘다.
Ⅳ 결론
- 수필은 주체의 장르가 아니라 흐름의 장르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동시대적 감각에서 수필은 더 이상 ‘중심’을 전제하지 않는다. 수필은 흐름이며, 관계이며, 감응이다. 그리고 그 흐름의 주인공은 인간일 수도, 사물일 수도, 시간일 수도, 혹은 그들을 엮어내는 네트워크 그 자체일 수도 있다. 들뢰즈가 “글쓰기는 세계와의 접속을 만드는 작업”이라고 말했듯, 수필은 이제 ‘나의 사유’가 아니라 ‘세계와의 관계’가 만들어내는 생성의 기록이 된다.
라투르의 ANT는 그 관계를 설명하고, 리좀적 사유는 그 흐름을 확장하며, 감응하는 언어는 그 생성 순간을 문장으로 붙잡는다. 결국 새로운 수필창작론은 다음 한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수필은 나를 드러내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내가 서로를 변화시키는 과정을 감응적으로 기록하는 글쓰기이다.” 이러한 관점이 확립될 때, 수필은 다시 살아 움직인다. 사유의 리좀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뻗어가고, 비인간의 목소리가 잔물결처럼 스며들며, 언어는 관계의 떨림을 품은 감응적 매체로 진화한다.
수필은 언제나 가장 유연한 장르였지만, 이제 그 유연성은 새로운 시대적 감각을 만나 ‘탈중심의 자유로운 생성’이라는 본래의 힘을 되찾고 있다.
<수필>
차라리 묵언
송명화
식물을 키우다 보면 뿌듯할 때가 많다. 내 손길에 내 눈길에 반응하는 듯 성숙해가는 그것들은 내 기쁨의 샘이면서, 내 삶의 반려까지 그 지위를 넘보기도 한다. 어느 날 그것이 나도 모르게 댕강 잘려져 버리는 일이 생긴다면 내가 보는 세상은 어떨 것인가. 꽃댕강나무는 어쩌다 내게 밉보였는가.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이름은 본인도 원하지 않았을 것만 같다. 소중한 꽃이 댕강 잘려진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져서다. 공해에 강하고 개화 기간도 긴 꽃댕강나무를 원망하게 된 것은 내 반려 채소들이 당한 피해 때문이었다.
출근길에 매일같이 들르는 밭이 있다. 경보하듯 비딱거리는 바쁜 아침시간이지만 그곳에만 가면 서성대느라 멀리 보이는 횡단보도의 푸른 신호를 서너 번이나 그냥 보내곤 한다. 교육대학 뜰을 장악한 멋진 관상수에 비할까만 일년초 여린 식물이 일으키는 애틋함은 건조한 정서를 어루만지는 윤활유가 된다. 채식을 즐기지만 화초처럼 소중하기만 하였다. 얼마나 자랐을까. 벌레 먹지는 않았을까. 긴 가뭄 뒤에 비까지 내리니 지난 월요일 아침, 집을 나서는 마음가짐이 남달랐다.
서둘러 우산을 폈다. 빗방울이 발등을 튕기고는 앞장을 섰다. 아침마다 내 발길을 부여잡는 손길을 떠올리니 교대 교정을 통과하는 시간이 길게만 느껴진다. 헉헉대던 나무들이 마침내 심호흡을 하고 해갈을 한다. 폭염에 잎 가장자리가 도르르 감겨버린 벚나무 잎이 말갛게 씻기고, 습기를 머금은 소나무 보굿은 온 몸을 느긋하게 편다. 등교하는 부속초등학교 아이들이 모차르트 음악에 맞춰 우산을 흔들어댄다. 공기도 생기가 넘치는 오늘 아침 내 벗들은 얼마나 싱싱해졌을까. 밭 가까운 빌라에 사는 주민이 심었을 것이라 짐작해 보지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올 여름부터 지금까지 나는 아침저녁으로 눈도장을 찍고 그들의 성장을 격려해왔던 터였다.
어디로 갔을까. 교대 테니스장 바깥쪽 담벼락을 따라 폭이 너덧 뼘 되는 빈 땅을 차지하고 살던 채소들은 무슨 일을 당한 것일까. 담장 위쪽으로 이어진 쇠 그물에 마른 수세미줄기 몇 올만 흐느적거릴 뿐 무도, 배추도, 고춧대도, 키 큰 방아도 흔적 없이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 빼곡히 자리 잡은 꽃댕강나무들이 겸연쩍게 나를 본다. 플래카드 걸이가 설치된 부분까지 합쳐서 십 미터 정도 되는 길이의 땅에 제법 수십 포기의 작물이 자라고 있었는데, 행정기관에서 그것들을 빼내고 조경수를 심은 모양이다. 그것들은 내가 뽑아서 어찌하고 싶은 식재료가 아니었다. 그저 볼 때마다 부족하나마 정성스런 눈길을 주는 벗이었는데….
‘씨앗 한 톨에는 우주가 들어있다.’는 말이 있다. 씨앗 하나가 땅에 심겼다. 터 잡은 작은 구역을 등기하고 뿌리를 내어 터전을 일군다. 보드라운 싹이 단단한 땅을 뚫고 세상으로 나와 공기와 햇빛과 물을 한껏 받아들여 나날이 잎을 키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세상에 쓰이고 다시 씨앗을 품어 세대를 이어갈 수 있기를 기원하며 지켜온 삶이 아닌가. 내 벗들이 성숙해질 때까지 조금 더 기다려주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속이 꽉 찬 배추가 되고, 굵은 무가 되고, 보랏빛 방아꽃이 씨앗을 단단하게 갈무리하도록 시간을 줄 수는 없었을까. 식물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의 토지소유권이란 참으로 허무맹랑한 공수표에 불과할 터이지만 또 얼마나 두려운 것일까.
도시계획에 길든 눈으로 보자면 도로변에 가꾸어진 채소밭이란 용납하기 힘든 조경이었을 수도 있으리라. 꼭 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었다면 미리 언제 식수를 할 계획이니 채소를 가꾸지 말라는 안내판을 붙여주었더라면 어땠을까. 버려진 땅을 파서 씨를 뿌리고 물주고 북 올리며 가꾸어온 사람의 허탈함은 어쩌란 말인가. 아무 연고도 없지만 꽃보다 더 귀하게 마음 주던 나 같은 사람이 또 없지는 않을 텐데. 파헤쳐지는 모습을 보지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할까. 꽃댕강나무를 만나는 출근길은 재미가 없었다. 가지가 부러질 때 댕강 잘 부러지고, 댕강 하는 소리가 나서 그런 이름을 얻었다는데 내 채소들이 댕강댕강 잘려나갔을 순간을 생각하니 나무 이름을 입에 올리기 힘들었다. 텃밭을 가꾸는 시골생활을 꿈꾼 지 얼마인가. 잠시나마 도시를 벗어나고 싶었다.
하얀 들길이 눈에 들어왔다. 차를 세우고 마음이 시키는 대로 들판을 가로질러 먼 마을 쪽으로 걷기 시작하였다. 일렁이는 황금들판보다 더 매혹적인 노란색이 어디 있을까. 풍년이다. 산들바람에 몸을 맡기고 익은 벼이삭들은 금빛 윤슬처럼 반짝거린다. 우연한 만남은 더욱 미쁜 법인가. 개망초, 구절초, 억새, 이름 모를 잡풀까지도 차근차근 다시 들여다본다. 부지런한 농부가 논두렁, 밭두렁까지도 빼곡하게 콩을 심어두었다. 수로 옆 빈터도 잘 다듬어 콩 줄기가 내 허리께에 키를 재고, 내가 좋아하는 들깨는 넙데데한 이파리 한가득 햇살을 담아 향을 빚는다. 붉은 고추가 초록비탈에 방점을 찍는데 들국화 몇 송이가 풀덤불에 고명을 얹는다. 자연은 지금 축제 중이다. 수로를 따라가다 조그마한 저수지를 만났다.
수면 위에 작은 움직임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손바닥을 위로 치켜들어보았지만 빗방울은 아닌 듯하다. 흰 구름 몇 조각만 여유롭게 흐르는 하늘이 저수지 물속에도 들어 있다. 수포를 밀어올리고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물 식구들이다. 연, 생이가래, 검정말도 있을 테고 그 사이를 유영하는 메기도 있을까. 낚싯대 앞에서 강태공은 시간을 잊었는지 미동도 없다. ‘부디 낚싯바늘 근처에는 얼씬도 말아라. 졸고 있는 낚싯대 깨우지 않게.’ 물 식구를 격려하다 내가 이방인임을 깨닫는다. 저수지가 내려다뵈는 언덕에 앉아 나도 풍경 속으로 들어갔다.
내 한 몸
지구를 차지한 게
점이나 될까?
내 일생
세월에다 세워놓으면
점이라 할까?
지금은
점일지라도
금방 점도 아닐 걸….
여기서는 풀잎 하나, 물풀 하나도 주인 아닌 것이 없지 않은가. 서관호 시인의 「묵언」을 외며 사라진 내 벗들을 떠올린다. 점이었다가 금방 점도 아닐 사람이 가는 곳마다 주인 행세를 한다. 뽑고, 옮기고, 죽이고, 자르고, 더럽히고, 짓밟고…. 내게 미움 받은 꽃댕강나무에게 미안해진다. 사람 때문이 아니고서야 댕강하고 비명 지를 일이 뭐가 있겠는가. 하릴없이 돌멩이 하나를 물에 던졌다. 개구리 한 마리가 급히 연잎에서 뛰어내린다. 여기선 내가 무례한 객이구나. 무안해져서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