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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원으로 살펴 본 한국인의 산악관 고찰
-오악과
진산을 중심으로-
Ⅰ. 들 머 리
한국은 국토의 약 2/3가 산지로 이루어져 있으나, 높은 산이 적고, 평균고도는 482m로, 아시아의 평균고도인 960m에 비해 매우 낮은 편이다.
우리 나라는 예로부터 산을 신성시하여 십이종산(十二宗山), 오악(五岳), 4대 명산(名山) 등을 정하고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특히 지역에 따라 진산(鎭山)을 정해 고을에서 춘추로 제사를 지내고, 높은 산에는 백(白), 불(佛), 천(天), 황(皇), 왕(王), 용(龍), 금강(金剛) 같은 글자를 택하여 산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또 신격화된 산이나 산에 사는 신을 산신령(山神靈)이라 부르는데, 노인이나 호랑이로 인식된다. 이 때 호랑이는 산신령의 심부름꾼이나 탈것으로 배정될 때가 많다. 산신은 풍요나 여성의 원리보다 남성성향을 나타내고 있다.
산치성(山致誠)이나 산신제에서는 태양신에 접근하려는 높은 곳, 곧 산마루 제단을 통해 음덕에 감사하고 제화초복(際禍招福)을 기원한다. 또 산의 절벽이나 큰 바위에 생남하기를 기원하는데, 이는 자연신에 대한 민속적 신앙이며, 자연 숭앙의 한 형태이다.
산은 취락 형성의 터전으로 '배산임수(背山臨水)'라 하여 산을 등지고 물을 바라보는 지형이 부락의 적지로 인식되어 왔으며 산골짜기에는 마을이 형성되어 '골→고을'로 의미가 담겨 있다. 또 고을의 어원은 고구려의 땅이름 표기인 홀(忽)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견해도 있다.
본 연구에서는 우리 나라와 중국의 오악과 진산을 중심으로 조사 정리하여 한국인의 산악관을 여러 측면에서 고찰하고자 한다.
Ⅱ. 오악(五岳·五嶽)사상
우리 나라에는 삼신(三神) 사상에서의 산악신앙을 비롯, 오악사상, 진산에 제사하는 풍습이 있다.
중국 고대의 제왕들은 오악을 여러 신들이 거주하는 곳이라고 믿고, 오악에서 봉선(封禪)과 제사 등의 성대한 의식을 거행했다.
'오악(五嶽)'이란 말은 한(漢)나라 무제(武帝 ; BC 156∼BC87) 때 처음 등장했으며, 당나라 현종(玄宗)은 5악을 왕(王)으로 봉했다. 송(宋)의 진종(眞宗)은 제(帝)로 봉했고, 명(明)의 태조(太祖)는 5악을 높여 신(神)으로 삼았다.
(1) 삼국시대의 오악
우리 나라의 최고(最古)의 사서인 <삼국사기>제32 잡지 제1 제사편 '제37대 선덕왕에 이르러는 사직단을 세웠으며, 또 그 사전(祀典)에 나타난 것이다. 국내의 산천 뿐이요, 천신(天神), 지신(地神)에는 미치지 아니했다' 하고, 또 천자(天子)는 천(天,神) 지(地,祇)와 천하의 명산대천을 제사하되, 제후는 사직과 자기 영역내에 있는 명산 대천만을 제사한다'고 하였으며, 제사를 지내는 삼산(三山)과 오악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 대사(大祀) - 삼산(三山)
나력(奈歷) ; 경주의 낭산(狼山)
골화(骨火) ; 영천 남동의 금강산
혈례(穴禮) ; 청도의 오례산
▷ 중사(中祀) -
(가) 오악(五岳)
동악 - 토함산(吐含山)
서악 - 계룡산(鷄龍山)
남악 - 지리산(地理山)
북악 - 태백산(太伯山)
중악 - 부악(父岳 ; 팔공산)
(나)
4진(四鎭),
(다)
사해(四海),
(라) 4독(四 )
(마) 기타(其他) 속리산, 청해진 등
▷ 소사(小祀) ;
상악(霜岳 ; 고성), 설악(雪岳 ; 간성), 화악(花岳 ; 가평),감악(紺岳 ; 파주), 부아악(負兒岳 ; 북한산), 월나악(월奈岳 ; 영암), 무진악(武珍岳 ; 광주), 서다산(西多山 ; 장수), 월형산(월兄山 ; 청풍), 도서성(道西城 ; 진천), 동노악(冬老岳 ; 무주), 죽지(竹旨 ; 영주), 웅지(熊只 ; 창원), 악발(岳髮 ; 울진), 우화(于火 ; 경주), 삼지(三岐 ; 청도), 훼황(卉黃 ; 경주), 고허(古墟호 ; 경주), 가아악(嘉阿岳 ; 보은), 파지곡원악(派只谷原岳) ; 미상), 비약악(非藥岳 ; 영일군), 가림성(加林城 ; 부여군), 가량악(加良岳 ; 진주), 서술(西述 ; 경주)
위에서 큰 제사인 대사는 중국에서 지내기 때문에 신라는 제후국으로 자처하여 국도 중심의 가장 주요한 신산삼소(神山三所)를 대사에 넣었다.
삼산의 이름은 <삼국유사> 권1 '김유신조'에도 보이는데, 나림(奈林), 골화, 혈례(穴禮) 등 3소 호국지신(護國之神)이라 하였다.
이는 즉 국토의 수호신 산으로 석일(昔일) 삼한 부락국가시대의 소도(蘇塗; 神色)의 유풍인 듯하며 동시에 후일 고려시대의 삼소(三蘇 ; 좌소, 우소, 북소)와도 마찬가지로 추정된다.
한 부락이나 국가의 수호신은 대개 산악을 본거지로 하여 숭봉(崇奉)되므로 수호신과 산과는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고려의 삼소는 개성을 중심으로 하여 주위의 3개의 신산을 지정하였고, 삼한시대의 소도 역시 부락의 신산 혹은 신산밑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소도는 솟터(소터)의 대음(對音)으로, 제사지역 전체를 포함한 의미의 말로 볼 것이며, 삼소의 소(蘇)도 소도의 소와 같은 말로 우리말의 '수리, 솔, 솟'(高. 上, 神, 山의 뜻)의 차음자로 <삼국유사>권 二 ' 남북여조'에 '군중 유삼산(郡中有三山), 왈일산(曰일山), 오산(吳山), 부산(浮山) 국가 전성시 각유신인(神人), 거기상(居其上) 비상왕래(飛相往來) 조석불절(朝夕不絶)이라 하였다.
이는 백제의 제전(祭典)에 든 3산의 이름을 전하는 귀중한 사료로 세산은 수도였던 부여 주위의 수호신산으로 추정된다.
또 같은 책에 '고구려는 항상 3월 3일에 낙랑의 구릉에 모여 사냥하고 돼지, 사슴을 잡아서 하늘과 산천(山川)에 제사한다'고 적혔으며, <고기(古記)>에 '온조왕은 2월에 단(壇)을 베풀고 천지에 제사 드렸다'고만 적혀 있다.
(2) 고려, 조선시대의 오악
고려시대는 오악이나 산에 대한 기록이 지극히 적고 뚜렷하지 않다.
<고려사, 권제54, '지제편'에 '고려 명종(明宗, 1131∼1202) 11년 4월, 신유일에 능묘와 악(岳-나라의 동서남북 중앙의 명산), 독(瀆-나라의 동서남북의 큰 강둑) 및 여러 신사에 비를 빌었다고 적혔으나, 구체적인 산이름은 적혀 있지 않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세종 때에 집현전 학자인 양성지(梁誠之, 1415∼1482)는 국토의 악(嶽), 진(鎭), 해(海), 독(瀆)과 명산대천에 대한 국가의 치제(致祭) 대상을 전면적으로 개편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는 신라시대부터 오악 숭배가 있었고, 고려시대에도 산, 바다, 하천에 치제가 있었다.
조선 개국 이후에는 가역의 확대와 정치 세력의 변동에 대응하여 산, 바다, 뚝이 정비-개편되어 오례(五禮) 가운데 길례(吉禮)로 정립되었는데, 태종-세종대에 4악, 3해, 7뚝을 중사(中祀)에 편입시키고, 25개의 명산, 대천을 소사(小祀)에 편제했다. 이것은 고려시대에 비하면 대상이 늘어나고 비교적 정비되었으나 고려적 잔재를 모두 청산하지 못하고 미급하였다.
양성지는 이러한 한계성을 극복, 조선적인 사전(祀典)으로 면목을 일신하려 하였는데, '일대(一代)가 일어남에는 일대의 제도가 있어야 한다'는 대전제 아래 5악, 5진, 4해, 8산의 새로운 사전 개편안을 제시했다. 이 중 옛것을 계승한 것이 17개이고, 나머지 7개 중 4개는 이제(移祭), 13개는 새로이 추가했다.
이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종전의 기전(祀典 ; 五禮 - 吉禮)
4악(四岳) ; 중악 - 삼각산(한성)
서악 - 송악산(개성)
남악 - 지리산(남원)
북악 - 비백산(정평)
14명산 ; 치악산(강원도), 계룡산(충청도), 목멱산(서울남산), 죽령산, 우불산, 주흘산, 전주성황, 금성산, 오관산, 송림, 우이산, 감악산, 의관령, 영흥성황
3해(三海) ; 동해(양양), 동남해(나주),남서해(풍천)
7독(七瀆) ; 웅진(금강), 가야진(낙동강), 한강(경기도), 덕진(경기도), 평양강(대동강), 압록강, 두만강
▷ 양성지 개편안 (*는 새로 추가됨)
5악 : 삼각산(중악), 지리산(남악), 구월산*(서악), 금강산*(동악), 장백산(북악, 백두산)
8명산 ; 목멱산, 감악산, 관악산, 계룡산, 치악산, 의관령, 축령산, 오대산*
4해 ; 동해신 - 강릉, 남해신 -순천, 서해신 - 인천 원도, 북해신 - 갑산
4독 ; 동독 - 옹진(경기도), 남동 - 한강, 서독 -대동강, 북독 -두만강
양성지의 사전 개편안은 우선 사전(祀典)이 개성을 중심으로 설정한 것과는 다르게 서울을 중심으로 하였기 때문에 방위가 달라졌으며, 종전의 사전이 중남부의 명산대천에 치우쳤던 것을 탈피하여 전국 각지를 고르게 망라하였다. 즉, 산악으론 구월산, 장백산, 금강산, 태백산, 묘향산 등이 새로 추가되고, 하천은 낙동강, 섬진강이 새로 추가된 대신 압록강이 빠졌다.
종전의 4악, 14명산, 3해, 7독을 5악, 8명산, 4해, 4독 등으로 바꾼 것도 중국 옛 제도에 규정된 사전과 일치되는 것으로서, 그의 자주적인 의식이 반영된 것을 볼 수 있다.
또 양성지는 다섯 개의 진산(鎭山)-5진(鎭)을 국가의 수호진산으로 선정하였는데, 그 산이름은 다음과 같다.
중진-
백악산(한성부),
동진-
태백산(강원도)
서진-
송악산(경기도)
남진-
금성산(전라도)
북진- 묘향산(함길도)
(3) 서산대사의 사산평(四山評)과 원주 동악단
* 서산대사의 사산평
근세조선 선조 때의 이름난 스님인 서산대사는 우리 나라 4개의 명산을 평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을 남겼다. 그는 산의 규모가 큰 것을 '장(壯)이라고 평하고 산의 모양이 수려함을 '수(秀)라고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 구월산-불장불수(不壯不秀)
▷ 지리산-장이불수(壯而不秀)
▷ 금강산-수이불장(秀而不壯)
▷ 묘향산-장이수(壯而秀)
즉, 구월산은 크지도 못하고 경치도 좋지 않고, 지리산은 규모는 크지만 모양이 뛰어나지 못하고, 단지 묘향산은 산의 규모도 크고 산의 모양도 수려해서 네 산 중에서 가장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서산대사가 묘향산에서 수도하고 생활하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공평하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 원주의 동악단
치악산은 서쪽 기슭, 원주시 행구동에는 동악단(東岳檀)이 자리하고, 그 유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원주 시내에서 약 6km 지점에 위치한 국향사(國香寺)는 신라 때 무착(無着)대사가 창건한 절로, 본래는 보문암(普門庵)이란 조그마한 암자였다. 조선 2대 임금인 정종의 둘째딸 희희공주가 불치의 병을 앓다가 물 맑고 경치 좋은 이 곳에서 백일기도 요양 끝에 병이 낫자, 정종은 사찰을 크게 세우고 절 이름을 '국향사'라 고쳐 부르게 하고, 병이 완쾌된 것은 치악산 산신령이 보살펴 준 덕이라고 하여 동악단을 쌓도록 했다. 그리고 봄-가을로 호국대제인 동악제를 봉행하도록 했는데, 이 때 조정에서는 향과 제문을 내렸으며, 원주를 비롯한 횡성, 영월, 평창, 정선, 여주, 제천 등 7개 고을의 수령들이 모여 제를 지냈다고 한다.
노송으로 울창하게 둘러싸인 동악단은 1982년, 국향사의 신도회에서 옛동악제를 부활시키고자 복원하였는데, 원주, 원성지역의 문화제 행사인 '치악문화제'를 개최할 때, 이 곳에서 봉제(奉祭)로 시행하고 있다.
Ⅲ. 고을의 진산(鎭山)
앞에서 살펴본 <삼국사기> 제사편에 '제후는 사직과 자기 영역내에 있는 명산 대천만을 제사한다'고 적혔을 뿐 고을의 진산에 관한 구체적인 글은 찾아보기 힘들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옛날 온 나라 및 국도(國都)와 각 고을의 뒤에 있는 큰 산은 그 곳을 진호(鎭護)하는 주산(主山)으로 정하여 제사하던 산'을 뜻한다.
따라서 전국적인 규모에서는 오악이나 삼산 또는 명산을 포함하는 개념인 각 지역적 규모에서는 고을에 제일 높거나 명산을 주산으로 지정한 산을 이른다. 각 고을의 여러 명산 중에서 주산으로 지정된 진산은 춘추로, 그 고을에서 제사를 지낸다.
각 고을의 진산 기록은 1458년(단종2)에 발간된 <세종실록>지리지에 일부 지역만 적혔는데, 예거하면 다음과 같다.
▷ 광주목(廣州牧) ; 검단산(黔丹山) - 주 동쪽에 있는데, 주민들이 진산이라 칭한다.
▷ 과천현 ; 진산은 관악(冠嶽)이다.
▷ 안산현 ; 진산은 추암(鷲岩)이다.
그러나, 1486년에 발간된 <동국여지승람>에는 각 고을의 진산이 빠짐없이 적혀 있으며, 경기지역 고을의 진산을 조사한 결과 다음과 같다.
▷ 한성부 - 삼각산(경성의 진산)
▷ 개성부 - 송악
▷ 광주목 - 검단산
▷ 여주목 - 북성산
▷ 이천도호부 - 설봉산
▷ 양지현 - 정수산
▷ 과천현 - 관악산
▷ 수원도호부 - 발점산
▷ 부평도호부 - 계양산
▷ 남양도호부 - 비봉산
▷ 인천도호부 - 소래산
▷ 안성군 - 비봉산
▷ 진위현 - 부산
▷ 양천현 - 성산
▷ 김포현 - 북성산
▷ 금천현 - 삼성산
▷ 양성현 - 천덕산
▷ 통진현 - 비아산
▷ 양주목 - 불곡산
▷ 판주목 - 성산
▷ 장단도호부 - 망해산
▷ 강화도호부 - 고려산
진산이 적혀 있지 않은 고을은 고양, 양근, 지평. 용인, 영평, 포천, 적성, 교하, 가평, 풍덕, 삭녕, 마천, 연천, 교동 등 14개 고을이다.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총 36개 고을 중에서 61%인 22개 고을에는 진산이 적혀 있고, 39%인 14개 고을에는 진산이 적혀 있지 않다. 그러나 한 고을에 1개처 이상의 진산은 적혀 있지 않다.
Ⅳ. 마무리
우리 나라는 옛부터 산악을 숭배하고 경외하는 산악신앙이 있어 왔으며, 명산대천을 비롯 오악, 삼산, 진산을 지정하여 제사 드리는 풍습이 있었다.
국가에선 나라의 도읍지를 중심으로 중앙과 동서남북에 명산을 선정하여 5악이라 칭하고, 국가에서 제사를 지냈으며, 이 오악은 국가의 영토 변천에 따라 바뀌어 왔다.
중국 한나라 때부터 시작된 오악사상은 우리 나라 삼국시대부터 현재까지 이어오는 우리 민족의 산악관(山岳觀)이었다. 각 고을에서는 고을 안의 명산 중에서 주산(主山)을 선정하여 진산으로 삼고, 고을에서 춘추로 제향하였다.
각 고을의 진산이나 국가적인 오악에서 제사를 드리는 목적은 자연을 사랑하고 고을의 백성들이나 국민들에게 화(禍)를 제거하고 복(福)을 구하는 제화초복을 기원하는 한 의식이다. 그리고 위정자의 측면에서 보면 나라나 고을을 다스리는데 화(禍)가 일어나지 않고 국태민안을 기원하며 참여자의 일체감, 화합심을 일으키게 하는 방편일 수도 있다.
이러한 선조들의 산악관을 이어받아 산악에 대한 경외심과 산악을 아끼고 가꾸어 나가려는 마음을 가다듬어야 하겠다. 이러한 생각과 훼손되지 않고 아름다운 산과 숲, 자연을 우리 후손에게 물려 주어야 하겠다. ///
한국땅이름학회 학술 발표회 001207
<발표문 2>
우리의 땅이름에 불교가 끼친 영향
한국땅이름학회 이사 이우용
우리 나라에 불교(佛敎)나 유교(儒敎)와 같은 외래종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우리 조상들은 하늘을 숭배하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은 그의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에서 태양. 하늘. 신을 숭배하는 우리의 고대문화를 '밝' 사상이라고 정의하였다. 이런 고유 민족종교의 바탕은 하늘에는 밝은 세계가 있어서 빛과 더운 기운을 가진 태양이 최고 주재신(最高 主宰神; 하느님)으로 세상을 안돈(安頓)하게 한다는 사상이며, 이러한 생각은 하늘은 아버지이고 땅은 어머니이며, 그 사이에 있는 인간이 하늘을 따르고 자연에 순응하며 사는 것을 최고의 덕목으로 하는, 다시 말하면 천-지-인(天-地-人)의 조화를 이루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제천(祭天) 의식을 행하였다.
이러한 하늘과 인간세계가 통하는 곳이 바로 큰 산이라고 생각하였다.
즉, 큰 산의 봉우리를 통하여 하늘나라의 하느님과 인간이 통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큰 산봉우리는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 신의 영역으로 보아서 신성하게 여겼다. 따라서, 큰 산을 '밝달' (삼국사기 고구려 지명에는 산을 達(달)로 적고 있다)이라고 했으며, 제천에 있는 '박달재'도 이러한 지명의 흔적으로 보인다.
'밝'을 의역(意譯)한 대자(對字)로서 '白'을 써서 '밝달'을 '백산(白山)'이라고 기록하였고, 우리 나라에는 태백산(太白山), 소백산(小白山), 함백산(咸白山) 등 '白'자 계열의 산이 도처에 많다. 이러한 산은 태양신에게 제사지내던 곳이었으며 이 소신산(小神山) 중 태백산, 즉 백두산이 가장 중심적인 곳으로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민족 신앙의 터는 산수 수려한 큰 산밑에 자리잡게 되었으며, 이러한 곳이 삼한시대 제의(祭儀)가 행해지던 소도(蘇塗)터이다. 이런 소도에 대한 기록은 국내 사서인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없으며, 중국 사서인 《삼국지》 위서(魏書) 한전(韓傳)에
“귀신을 믿으므로 국읍(國邑)에서는 각기 한 사람을 뽑아 천신(天神)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는데, 이 사람을 천군(天君)이라 부른다. 이들 여러 나라에서는 각각 별읍(別邑)이 있는데, 이 곳을 소도라고 한다. 큰 나무를 세우고 거기에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긴다. 도망자가 그 속에 들어가면 모두 돌려 보내지 않아 도둑질하기를 좋아한다. 그들이 소도를 세운 뜻은 마치 부도(浮屠)를 세운 것과 같으나 그 행해진 바 선악은 달랐다”
라고 하였다.
소도는 청동기시대인 부족국가 때에, 제정일치(祭政一致)의 제의(祭儀)가 행해지던 신성 지역이며 읍간 경계표라 할 수 있는데, 성읍(城邑)국가에서 철기문화를 가진 고대 왕권국가(王權國家)로 발전한 삼국시대에 외래종교인 불교를 새로운 정치 지배 이념으로 받아들이고, 전통 신앙 중심인 소도 지역에 불교사찰을 창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큰 사찰인 경우 거의 창건 연기설화(緣起說話)가 있는데, 그 중 하나인 부석사의 경우를 살펴보자.
〈삼국유사〉에 부석사 창건 설화가 수록되어 있다.
의상이 화엄의 대교(大敎)를 펼수 있는 땅을 찾아 봉황산에 이르렀으나, 도둑의 무리 500명이 그 땅에 살고 있으므로, 의상을 사모하던 선묘가 변한 용(龍)이 다시 커다란 바위로 변하여 공중에 떠서 도둑의 무리를 위협함으로써, 그들을 모두 몰아내고 절을 창건할 수 있었다. 의상은 용이 바위로 변하여 절을 지을 수 있었다고 해서 절이름을 '부석사('浮石寺)'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지금도 무량수전(無量壽殿)뒤에 부석(浮石)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는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기록되어 있다. 도둑의 무리 500명이 살았다고 하는 땅은 삼한시대의 소도로 추정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민족 고유 신앙은 그 터를 왕권의 뒷받침을 받고 있는 불교에 내주고 백성들 생활 속에 민속신앙으로 뿌리내리게 되었다.'
전국에는 관음산,(봉)(觀音山,(峰)) 문수산,(봉)(文殊山,(峰)), 보현산,(봉)(普賢山,(峰)) 등의 불교에 영향을 받은 지명이 많이 있고, 또한 불교식 지명이 아니더라도 산이름과 산 밑에 있는 절이름이 동일한 경우에 산이름과 절이름 중 어느 이름이 먼저 생겼는가? 그 유래는 무엇인가? 하는 점을 본 발표자는 항상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산 동남쪽 기슭에 있던 성주사(聖住寺)의 예를 보고자 한다.
성주사는 임진왜란 때 전소된 뒤 중건되지 못하여 현재는 폐사 터만 남아 있지만, 문화재로는 성주사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朗慧和尙白월 光塔碑)와 4기(四基)의 석탑과 석등, 석불입상, 당간지주가 남아 있다. 성주사는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백제 법왕 때에 창건된 오합사(烏合寺)가 이 사찰이라는 사실은 1960년부터 수집된 기왓조각에서 확인되고 있는데, 백제 멸망 직전에 큰 적마가 나타나서 밤낮으로 여섯 번이나 절을 돌아다니면서 백제의 멸망을 예시해 주었다는 전설이 있는 것을 보면, 백제 시대에도 중요한 사찰의 하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신라 문성왕 때 당나라에서 귀국한 무염국사(無染國師)가 이 절을 중창하고 주지가 되어, 선도(禪道)를 선양하여, 선문구산(禪門九山)의 하나인 성주산파(聖住山派)의 중심 사찰이 되게 하였다. '성주사'라는 이름은 '성인(聖人)이 거쳐하는 곳'이라 하여 왕이 하사하였다는 기록이 있 . 이를 미루어 보면 성주사라는 사찰 이름을 좇아서 '성주산'이라는 산이름이 생긴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옛날에는 지금과 같이 모든 산마다 이름이 생기기 전이라, 큰 사찰이 건립되면, 그대로 산이름이 된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산이름은 불교의 영향이 지대하였으며, 이 외에도 불교의 영향을 받은 지명을 몇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자 한다.
1) 보살(菩薩) 신앙의 영향
불교가 창시된 후 자기 힘으로 구원을 이룬다는 소승(小乘)불교와 불타(佛陀)나 보살의 은공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대승(大乘)불교로 갈라졌다.
소승불교는 동남아 방면에 퍼졌고, 대승불교는 우리 나라를 포함한 동북아 여러 나라에 퍼졌다. 대승불교는 종래의 수행관(修行觀)에 있어서 자기해탈(解脫)을 주장하는 대신 대중의 구원을 선행시킬 것을 주장하였고, 열반(涅槃)의 상태에 안주해 버리는 소승불교의 최고 성자 아라한 대신에 보살이라는 새로운 인간상을 제시하였다.
보살은 범어로 보디사트바(Bodhisattva)의 음역(音譯)인 보리살타(菩提薩 )의 준말로, 대승경전에는 관세음(觀世音:관음;(觀音))보살, 문수(文殊)보살, 보현(普賢)보살, 지장(地藏)보살, 미륵보살 (미륵보살은 다음에서 별도 설명) 등 수많은 보살이 있으나, 이들은 석가모니가 아니며, 별개의 개성을 가진 개개 인격으로서, 과거와 미래에 다수의 부처가 있다는 다불사상(多佛思想)을 낳게 하였다.
이러한 보살 중 대자대비(大慈大悲)를 서원(誓願)하는 관세음 보살을 신앙대상으로 하는 관음신앙과 석가모니불을 좌우에서 협시(脇侍:좌우에서 가까이 모심)하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신앙대상으로 하는 문수, 보현 신앙이 삼국시대 이래 전승되었다.
문수보살은 여래(如來)의 왼편에서 부처님의 지덕(智德)과 체덕(體德)을 맡고, 보현보살은 오른쪽에서 이덕(理德)과 정덕(定德), 행덕(行德)을 맡고 있어, 일체 보살의 으뜸이 되었다. 그래서 양 보살은 언제나 여래께서 중생을 제도(濟度)하는 일을 돕고, 널리 선양하기 때문에, 이러한 보살을 신앙대상으로 하여 관음사, 문수사, 보현사가 오래 전부터 창건되었으며,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찰 이름이 산이름이 되고 마을이름이 되어, 행정지명으로까지 남아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북한산 문수사 뒤에 있는 봉우리가 문수봉이며, 그 동남쪽의 것이 보현봉이다. 우리 나라의 문수신앙은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慈藏律師)에 의해서 정착되었다. 《화엄경》에 의하면 중국 산서성(山西省) 청량산(淸凉山 :일명 五臺山)을 문수보살의 상주처(常住處)라고 하였는데, 자장은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부처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가지고 와서 중국의 청량산과 비슷한 지형인 오대산 중대(中臺)에 적멸보궁(寂滅寶宮)을 건립하고 문수신앙의 중심 도량으로 만들었다. 그 후에 이 영향으로 전국적으로 '청량산'이라는 지명이 생기게 되었고, 오대산도 문수신앙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2)
미륵신앙
한국 불교에서 '미륵신앙의 성지'로 존숭(尊崇)되고 있는 금산사(金山寺)는 전북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모악산 서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행정구역 이름도 절이름을 좇아서 금산면, 금산리라고 한 것을 보면 무척 오래된 유서깊은 도량(道場)인 것을 알 수 있다. 금산사 앞에 큰 사하촌(寺下村)이 있는데, 마을이름이 용화동(龍華洞)이니, 미륵불을 모시는 미륵신앙의 중심지다운 마을이름이다. 미륵불은 부처님으로부터 미래에 부처가 될 수기(受記)를 받은 후, 현재는 도솔천(兜率天)에 계시다가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56억 7천만 년 뒤에 다시 이 세상에 나타나서 용화수(龍華樹)밑에서 성도(成道)한 다음, 중생을 구제한다늗 미래불이니, 미륵보살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부지런히 덕을 닦고 노력하면, 이 세상을 떠날 때 도솔천에 태어나서 미륵보살을 만날 뿐 아니라 미래의 세상에 미륵이 성불할 때 그를 좇아 염부제(閻浮提:현세의 인간세계를 뜻함)에 내려와서 제일 먼저 미륵불의 법회에 참석하여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미륵신앙에서 보이는 여러 지명이 민중의 염원을 담아서 나타내고 있다. 도솔산, 도솔봉, 두솔산, 두솔봉은 미륵이 현재 천인(天人)들을 위하여 설법하고 있는 도솔천에 태어나고자 하는 염원이며, 미륵산, 미륵도, 용화산, 용화동 등은 미륵보살이 보다 빨리 지상에 강림하고자 하는 염원을 담은 지명이다. 또한 미륵불이 하생(下生)하여 교화하는 용화회에 참여하여 미륵불에게 향을 공양할 수 있기를 발원한 것이 향목(香木)을 해변에 묻어 두는 풍속으로 행하여지고 있어 미륵하생 신앙의 뿌리깊음을 말해주고 있다. 강원도 고성 삼일포 매향비(高城 三일浦 埋香碑) 및 사천 매향비(泗川 埋香碑) 등에 이러한 것이 잘 나타나 있으며, 최근의 미 공군 사격연습장으로 문제가 되고 있은 매향리(화성군,우정면)도 미륵신앙이 배어있는 지명이다.
3) 사자산(獅子山)
전국적으로 사자산, 사자봉, 사자암(절,바위) 등 사자를 뜻하는 지명이 많다.
사자는 호랑이와 함께 고양이과의 동물중 가장 강력한 동물이며, 예로부터 고상하고 용기있고 싸움 또한 잘하여 사람들로부터 "백수(百獸)의 왕"으로 불려왔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사자를 신의 불가사의한 힘과 왕의 위엄을 상징하는 동물로 생각 하였으며, 아시리아나 그리스사람들은 여신 옆에 반드시 사자를 그려넣기도 하였다.
초기 기독교의 그림에서도 예수나 성인을 나타낼 때 사자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호랑이는 확실히 아시아에서만 분포된 맹수임에 틀림없지만 사자는 아프리카는 물론 유럽, 서아시아, 인도 등 더운 지방에 걸쳐 많이 살고 있었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서식하지 않는 동물이었다. 예전에 우리 나라 사람들은 사자를 실물(實物)로서 본적이 있는 동물은 아니었다. '사자'야말로 불교의 전래와 함께 온 동물이다.
불교의 교조(敎祖)인 석가모니(釋迦牟尼, BC563-483)는 북인도 히말라야 산기슭에 있는 카필라(kapila)왕국의 석가족의 왕자로서, 본래의 성(姓)은 고타마(Gautama)이며, 출가 전의 이름은 싯다르타(Siddhartha)였다. 석가모니는 샤키아무니(Sakyamuni)를 한자로 적은 이름인데, '석가'는 종족 이름이고 '모니'는 성자(聖者)라는 뜻으로서, 곧 석가족 출신의 성자라는 뜻이다. 즉, 사자는 석가족이 숭배하는 동물이며, 석가의 모든 말씀인 법문(法文)은 다른 진리보다 우뚝선 불변의 진리이가 때문에, 사자는 석가모니를 나타내는 상징 동물이고, 또한 사자는 불교를 상징하는 동물이다.
사자산 중 대표적인 산은 강원도 영월, 평창, 횡성에 걸쳐 있는 높이 1,167m의 산으로,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창건하였다는 흥녕사(興寧寺)가 있었는데 구산선문(九山禪門)중의 하나로서 이른바 사자산파(獅子山派)를 배출한산이다. 현재 이 곳에는 법흥사(法興寺)가 있는데, 법흥사의 적멸보궁은 법흥사의 본존(本尊)으로서 석가모니불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5대 적멸보궁의 하나이다.
4) 가야산(伽倻山)
가야산은 전국적으로 7개 정도 발견되는데, 대표적인 것은 해인사를 품고 있은 경상남도 합천과 성주에 걸쳐 있는 산과, 충청도 예산과 서산에 걸쳐 있는 산이다. 합천 가야산의 이름은 가야산 외에도 우두산(牛頭山), 설산(雪山), 상왕산(象王山), 중향산(衆香山), 기달산( ?山) 등 여섯 가지가 있고, 예산 가야산도 상왕산, 서우산 등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가야산 지명의 유래에 대하여, 가야산이 있는 합천 고령지방은 1~2세기경에 일어난 대가야국의 땅으로, 신라에 멸망한 뒤로 처음에는 대가야군으로 불렸고, 또 이 산이 대가야 지방을 대표하는 산으로, 가야국 기원에 관한 전설이 있는 까닭에, 옛날 가야 지방이라는 역사적 명칭에서 '가야산'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는 설(說)이 있으나, 가야산의 정상인 주봉(主峰)이 상왕봉(象王峰)이고, 또다른 이름이 상왕산, 설산인 것을 보면 불교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범어에서 '가야'는 코끼리(象)를 뜻하는 말이고, '상왕'은 《열반경》에서 모든 부처를 말하는 것이다. 또한, '가야'는 인도 남부의 도시 가야(Gaya)를 음역한 것으로, 그 남쪽 30리에 부처님이 성도(成道)한 땅, 즉 불교의 성지 부다가야(Buddagaya)의 주요 설법터로 신성시되던 가야산에서 그 이름을 가져온 것으로 사료된다. 가야산을 상왕산, 상왕봉이라고 같이 부르는 것은 부처님 계신 산이라고 믿고, 또 부처님께서 오시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은 불교신앙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불교는 외국에서 들어온 종교이긴 하지만, 우리 땅이름(특히 산이름)에 끼친 영향은 무척 크다. ///
99년도 학술발표회
'서울' 명칭의 역사적 변화에 대한 고찰
이우용(李宇鎔)
우리 서울은 600년 이상을 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 중심지로 발달해온,세계적으로도 유래가 흔치 않은 역사적 고도이다. 이런 서울의 지명 변천을 보면 조선 건국과 함께 수도로 확정된 이후에는 [漢陽,漢城,京城,서울]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 지명은 자연 부락 지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漢字로 표기할 수 있는데, 유독 [서울]이라는 지명만은 한자가 없어서, 중국에서는 아직도 [漢城],[ 城]으로 표기하고 있다. 서울 대학교를 漢城大學校로 기록하며, 성북구 삼선동에 있는 본래의 漢城大學校와 혼동이 되어, 우편물을 잘못 배달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필자는 예전 강 이름을 고찰해 보면서 [한강]이 [한양, 한성]에서 유래한 것으로 생각하여 그 뿌리가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지금은 지천을 빼고는, 하구에서 발원지 까지를 [한강], [금강], [낙동강]이라고 부르지만 예전에는 [금강]은 공주부근 에서만 불렀고, 강경 앞강은 [진강]이라고 불렀으며, 예전에는 상주를 조선의 낙양이라고 했고 낙양 동쪽을 흐르는 강이기 때문에 [낙동강]이라고 이름지었다.
서울에서도 [용산강], [마포강], [서강]과 같이 한강津앞, 즉 지금의 한남동 앞에 흐르는 강만을 좁게 불러서 [한강]이라고 했으며 [한강]이 한양 바로 남쪽을 흐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 생각이 잘못 됐다는 걸 깨달아 [한강]과 [한양, 한성]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천되고 기록되었는지를 살펴서 어느 이름이 딴 이름에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 그 이름의 뿌리를 찾고자 한다.
한강은 강의 길이는 나라에서 네 번째이지만, 유역의 면적은 압록강 다음이며, 그 유역을 포함하고 있는 땅의 지정학적 중요성이 매우 크고 국토의 중심 무대에 자리잡고 있음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한강이 기록에 처음 언급되는 대목은 삼국사기 권 23 백제 본기 1 에 나온다. 온조왕의 열 신하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기를 건의하는 내용 중 "생각컨데 이 河南의 땅은 北은 漢水를 띠고, 東은 高岳에 의지하였으며 南은 沃澤을 바라보고 西로는 大海를 격하였으니, 그 天險의 地利가 얻기 어려운 地勢라 여기에 都邑을 이루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고 나오는데, 이때 [漢水]가 처음으로 언급된다. 물론 한수 이전에도 帶水(漢書 地理誌), 阿利水(광개토 대왕비)로 되어있고, 또 寒水로 적은 기록도 있지만, 漢水가 한양이나 한성의 지명이 나오기 전에 기록된 이름이며, 이 이름을 한양의 뿌리로 보아야 타당할 것이다. 한수의 '한'은 소리 빌리기(音借)하여 '漢'을 썼지만, 본래는 우리 고유의 말로
①'크다' 는 뜻을 나타내는 '∼길/∼글'
②'바르다' 와 시간적으로 '한창'의 뜻을 나타내는 '∼가운데/∼복판/∼낮/∼밤중/∼겨울'
③'가득하다'는 '∼사발/∼껏'
④'같다'는 '∼패/∼마을/∼집 식구/∼술밥'과 같이 크고, 바르고, 중요하고, 신성하다는 뜻을 나타내는 말로 한수는 크고 중요한 강이라는 뜻이다. 中國에서도 江과 河는 揚子江과 黃河에만 쓰고 나머지는 水로 이름 했으니 漢水라 함은 당연 하였을 것이다.
또한 서울의 예전 지명을 살펴보면 [삼국사기]에 근초고왕이 371년에 백제의 도읍을 [漢山]으로 옮긴 것으로 되어있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전국을 九州로 편성할 때 서울 지역이 漢山州에 편입되었으며, 우리 지명을 중국식으로 바꾼 경덕왕 때 한산주는 漢州로 개칭되었다. 이 때부터 서울 부근은 漢陽郡이라 하여 한주에 소속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때 처음으로 [漢陽]이라는 지명이 등장하는데, 이 것은 중국의 오랜 고도인 洛陽이 洛水 북쪽에 있어 된 것 같이 漢水 북쪽에 있어서 [漢陽]이 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중국식 지명에 [山南水北曰陽], [일之所照曰之陽]과 같이 산 남쪽 이거나 강 북쪽에 있는 곳을 [陽]이라 하고 그 반대의 경우는 [陰]이라 한 곳이 많고, 우리의 경우에도 [陽]자가 들어간 지명은 英陽, 南陽, 咸陽, 岳陽등 많다. 단지 우리 지명에는 陰의 경우는 英祖 전에 경상도에 山陰과 安陰이 있었는데, 열두살의 어린 소녀가 혼인전에 임신한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 땅이름의 음기가 세어서 그리된 때문이라 하여 그 지명을 산청과 안의로 바꾸었다. 그 외에는 별로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서울 지명이 고려시대에는 楊州로 개칭되었다가 1067(문종21) 다시 南京으로 승격되어, 西京,東京과 함께 三京이 되었다. 1308년 지위가 격하되어 한양부가 되었다. 조선 개국과 함께 1394년 (태조 3년) 새도읍지로 결정되었고, 도읍지로 천도한 이듬해 漢城府로 바뀌었다, <성(城)>은 도읍의 내성을 말하며 주위에 城을 쌓은 도읍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조선시대 내내 <한성> 보다는 <한양> 으로 친근하게 불렀다. 즉 <한수>에서 뿌리를 두고 <한양>이 되었고, 수도로써 자리를 잡게 되면서 <한성>이 된 것은 역사의 기록을 보아도 시대적으로 일목요연하게 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 후 일제 강점기에는 한성을 <京城>으로 바꾸고, 경기도에 편입시켜서 일국의 수도로써 지위를 강등시켰으나 <京城>은 수도를 뜻하는 <서울> 이라는 우리의 말과 같은 뜻이고, 中國에도 <수도>의 뜻으로 <경성>을 쓰고 있다.
지금 <서울>이라는 지명은 대한민국 수도로서 지역적 개념의 고유명사로 정착되었으나, 원래는 수도나 도읍을 뜻하는 보통 명사였다. 서울을 나타내는 한자로는 首都, 都, 京, 首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서울>이라는 말은 초기 城邑 국가 시절 나라 이름과 도읍지의 명칭으로 쇠벌, 서라벌 (徐羅伐,徐那伐)에서 유래하며, 그 뜻은 동쪽에 있는 땅이라는 뜻으로 시는 동쪽, 벌은 벌판을 뜻한다. 신라나 사로(斯盧,) 서라벌의 뜻이 변한 것으로 국어 학자들은 '시벌>새블>셔불 >셔울>서울'로 정리하고 있다.
이 후부터 서울이 국가의 수도이면 모두 다 그 명칭을 사용한 예는 다음에서도 알 수 있다. 통일 신라 말에 궁예가 건국한 태봉의 수도를 철원이라고 하였다. 鐵原은 (시벌> 쇠벌)을 이두(吏讀)식으로 한자를 표기한 것이다. 鐵은 쇠의 뜻을 빌어서 표기한 것이고 原은 언덕이나, 벌판이니 鐵原은 곧 쇠벌이고 고려시대 開京도 松都라 한것도 松은 솔을 뜻하며 <서울>을 音을 빌어 표시한 것으로 볼 수 있으니, 전부 '수도'라는 뜻을 나타내는 원래의 우리말인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망과 함깨 9월 8일 미군이 서울에 입성하여 군정을 실시하면서, 경성의 개명 문제가 대두되었다. 1946년 8월 15일 광복 1주년을 맞이하여, 미군정 당국은 미국식 도시 자치 헌장<HOME RULE CHARTER>를 본받아 시헌장(市憲章)을 만들고 그 이름을 <서울시 헌장>으로 하였다. 이 때 처음으로 <서울>이라는 공식 명칭이 생기게 되었고 1개월 후인 9월 28일에 경성부 명칭을 <서울시>로 개칭하고 경기도 관할에서 독립시켰다. 참고로 이 때는 미소의 대립으로 냉전이 시작된 때로 동서 분단 국가인 동독지역에 있던 동독수도 베를린을 연합국이 분할 점령한 데에서 보듯, 소련 군정이 <서울>의 분할안을 요청할 것에 대비하여 남한과 독립된 자치시를 염두에 두고, 서둘러 자치 헌장을 작성하여 그 이름을 <서울>로 붙이면서 <서울>이라는 지명이 확정된 것이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과 동시에 독립국가 수립이 있은 후에 1949년 8월 15일 서울의 공식명칭을 <서울 특별시>로 확정하여, 보통명사가 우리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유 명사로 다시 탄생한 것이다.
한경 에세이
강길부(전 건설교통부 차관. 현 국회의원)
매창뜸
서해안 고속도로 중 가장 난공사 구간인 서해대교가 지난 10일에 개통, 인천에서 당진까지 쭉 뻗은 길이 생겼다.
이미 97년에 개통된 무안~목포길에 이어 나머지 구간도 한창 공사 중에 있어 내년 말이면 당진에서 서천 그리고 서천에서 무안까지의 길도 뚫려 모두 3백53㎞에 달하는 서해의 대동맥이 활기에 넘치게 될 것이다.
서해안 고속도로의 중간지점 쯤에 위치한 부안(扶安)은 넓은 평야와 해수욕장이 있어 예로부터 살기 좋은 땅으로 일러 왔다. 부안 봉덕리라는 곳에 공동묘지가 하나 있는데, 여기에는 이 고장의 빼어난 여류 시인 이매창의 무덤이 있다. 부안 사람들은 그의 무덤이 있는 곳을 공동묘지라 부르지 않고 '매창의 뜸'이라 부른다.
매창은 선조 6년(573년) 부안 현리 이양종의 딸로 태어나 38세에 죽었다.
개성의 황진이와 더불어 명기로 꼽혔으며, 유희경, 이귀, 허균 같은 당대 명사 풍류객의 지극한 아낌과 사랑을 받았던 만큼 심지가 깊고 절개도 곧았다. 이런 매창이 시를 읊고 거문고를 타던 너럭바위 금대(琴臺)가 있는 상소산 기슭 서림공원에는 매창의 시비가 있다.
그의 시는 사랑으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끝을 맺는데, 결국 그는 거문고를 안고 사랑을 부르다가 죽었다.
이러한 매창의 시를 누구보다 아끼고 높이 평가한 사람은 바로 '홍길동전'의 허균이었다. 그는 부안 산하에서 매창을 만나 목련꽃같은 우정을 나누었다. 서경덕을 유혹하다 실패하고 사제지간이 된 황진이와 달리 매창은 남녀간에는 자신을 한 걸음 물러서서 피차 소중히 아껴 주어야만 정(情)이 곱게 간직된다는 교훈을 주는 증취객(贈醉客)이라는 시 한 수를 전하고 있다.
'취한 손이 마음 두고
내 치마 잡아 당기는 손길에
비단치마 찢어졌네
그까짓 비단옷이 아까우련만
두려운 건 그대와 나의 정 끊어짐이라네-
사랑이란 뜨거운 정열을 절제와 인내로 승화시킨 매창의 품절이 유난히 빛을 발하는 요즘 세태다. 오늘 아침 그의 시 한수를 읊조리며 내년에는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매창뜸에 가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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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121 서해-영종대교
서해-영종대교
최근 우리나라 건설사에 길이 남을 두 가지 역사(役事)가 탄생했다.
그 하나는 서해안 고속도로의 상징인 서해대교이고, 다른 하나는 인천공항을 연결하는 영종대교다.
서해대교는 길이가 7.3㎞로서 세계 9번째로 긴 다리다.
영종대교는 우리나라 최초의 2층 다리로 위층에는 도로가, 아래층에는 철도가 지나가는 복합기능의 다리다. 두 다리 모두 개통을 앞두고 많은 지역 주민들이 다리를 밟고 건너는 답교(踏橋)놀이를 가졌다. 수백 년 전 성행하던 우리의 전통놀이가 현대의 최첨단 교량에서 재현되는 것을 보니 새삼스레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을 느낀다.
답교놀이는 '음력 정월 대보름날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무병장수와 액땜을 기원하며 다리를 건너갔다 왔다'는 우리 전래의 풍습으로 고려 때부터 시작되었다 한다.
다리밟기에는 일반서민은 물론 상류층인 양반들과 부녀자들도 함께 했다. 정월 대보름 밤에는 사람들이 너무나 몰려 보름 전날과 다음날로 분산해서 진행되기도 했다. 서울 청계천의 복개(覆蓋)로 지금은 없어졌지만 광통교(현 광교)에서 수표교 아래까지 이르는 길은 다리밟기로 가장 유명한 곳이었다. 남녀차별이 유난해서 부녀자들의 외출이 자유롭지 못했던 조선중엽 이후에도 부녀자들은 장옷을 입고 나와 밤거리를 거닐 정도로 유행했다고 한다.
몇 해 전 성수대교를 비롯한 잇단 교량 붕괴사고로 다리에 대한 국민들의 불안이 증폭되었다. 그 후 정부에서는 교량에 대한 유지보수와 관리에 만전을 기하고 있어 이제는 안심하고 다리를 건설 수 있건만 한번 놀란 가슴이 쉽게 가라앉지는 않을 것이다.
21일 개통되는 영종대교는 국내 최초로 '진동실험'이라는 것을 거쳤다. 평소 다리에 부하되는 하중이나 진동량보다 6배 이상에 달하는 충격을 가해 다리가 안전한지를 점검해 보는 실험이다.
서해대교와 영종대교에서 벌어졌던 다리밟기 놀이를 계기로 다리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불안감이 바닷바람과 함께 싹 가셨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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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114 산악 숭배와
산악 숭배와 자연 보호
자연의 위력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었던 원시 사회에서는 자연 숭배의 토속신앙이 싹트고 원시종교가 발생했다.
늘 산과 가까이 있는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숭산사상(崇山思想)이 있어 산을 신성시하고 거기에 신령이 있다고 믿었다. 산신(山神)은 인간 생활에 직접 영향을 주며, 농사의 풍·흉이나 기후까지도 좌우한다고 여겼고, 자식을 못 낳은 여자는 산에 빌어 자식을 얻는다고 믿었다. 따지고 보면 우리 민족의 건국신화인 단군신화도 산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선인들은 신(神)인 하늘과 인간인 땅이 만나는 산봉우리를 신성한 곳으로 여겼다. 고을마다 진산(鎭山)과 주산(主山)에 산신을 모시는 국사당(國師堂)을 세우고, 이 봉우리를 '국사봉(國師峰)'이라고 했다.
조선 태조도 서울에 도읍을 정한 뒤, 경복궁 뒤편인 북쪽에는 북악신사(北岳神祠), 그 앞쪽인 남산에는 목멱신사(木覓神祠)를 세워 서울의 수호신인 호신신장(護身神將)을 그 꼭대기에 모시고, 산의 정기를 모아 국운을 지키는 제사를 임금이 직접 지냈다.
이 외에도 전국 각지에 산재해 있는 2백여개의 국사봉 있었는데, 가뭄이 들거나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고을의 장인들이 국사봉에 모여 극진한 제(祭)를 올렸다.
이렇듯 산을 신성시하고 아끼는 우리 민족 감정은 최근 환경 보전 운동으로 다시 표출되고 있다.
백두대간을 고스란히 지키자는 운동이나, 댐을 건설하지 말자는 국민 감정의 이면에는 다분히 우리 민족의 숭산 사상이 깃들여 있다. 알프스산 스키장에 설치된 수㎞에 달하는 케이블카를 보고 감탄하면서도 북한산에는 결코 케이블카가 들어설 수 없다는 것은, 단순히 자연경관 보호라기보다는 북한산의 정기를 끊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앞서기 때문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우리 국토는 4분의 3이 산이다. 나머지는 논과 밭…. 앞으로 계속해서 집도 짓고 공장도 짓고, 도로도 놓아야 할텐데 필요한 땅을 어디서 마련해야 할지 걱정이다. 논과 밭은 함부로 쓸 수 없다. 그렇다고 산을 함부로 해할 수도 없으니.
옛날에 비해 사람도 늘고 생활 수준도 달라졌으니 산에 대한 우리의 생각도 당연히 바꿔야겠다. 신성(神聖)과 경외(敬畏)에만 머무르지 말고 친근(親近)과 포용(包容)의 자세로 산을 바라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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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107 땅이름과
강길부 <전 건설교통부 차관 k10182@moct.go.kr >
땅이름과 국토 사랑
무릇 모든 것에는 이름이 있다. 이름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땅에도 이름이 있다. 신촌 정읍 대전 울산….
모든 사람은 무엇인가를 떠올리며 특정한 장소를 연상하곤 한다. 아이가 태어나면서 이름을 갖듯이 국토의 모든 지역에는 태고적부터 이름이 있었다. 어떤 이름은 변함없이,또 어떤 이름은 변화무쌍하게 달라져 왔다.
땅이름은 어떤 '곳'을 나타내는 언어적인 약속이지만 그속에는 이름을 붙일 당시의 시대적 상황, 즉 역사 언어 풍속 종교 등이 함축 용해되어 있다. 이렇듯 땅이름은 우리 선조의 생활 모습이 소박하게 표현된 문화유산이자, 우리 말과 역사가 살아 숨쉬고, 당시의 사회상과 문화적 환경을 보여주는 화석같은 것이다.
지금부터 2백~3백년전 조선 영조때 쓰여진 '춘향전'을 읽어 보자. 과거에 급제한 이몽룡은 '숭례문 빠져나와 복사골(지금 도동)에서 말을 갈아 타고 갈울(갈월동) 지나 만초내(서울역 뒤에 흘렀던 만초천) 돌아 한수(한강)를 건너 노들나루(노량진)에 닿으니, 검은들(흑석동)이 어디메오, 동재기(동작동) 지나서니 배나무골(이수역)이로다. 사당고을(사당동)에 접어드니 여우재(狐峴의 이두발음·남태령)가 앞을 가려 선바우(선바위역) 돌고 돌아 열음내(얕은내·과천)가 여기로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렇듯 땅이름은 우리를 2백~3백년전 생생한 역사의 현장으로 안내하게 된다.
우리의 땅이름은 우리의 역사와 함께 변해 왔다.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와 조선 그리고 일제와 해방을 거쳐 오면서 많은 지역들의 땅이름이 바뀌어 왔고, 앞으로도 바뀌어 갈 것이다. 그러나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대부분은 지도에 표기된 땅이름을 그대로 믿고 부를 뿐,그 유래나 정확성 여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는 듯하다.
최근 국토를 아름답게 가꾸고 보전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땅이름이야 말로 지방문화의 근간이자 내 고장,내 국토를 이해하는 지름길이다. 내 지역에 왜 이런 이름이 붙여졌을까 한번쯤 생각해 보자.
샛골과 이승훈 묘
한국땅이름학회 전 회장 이 형 석
'샛골에서 새를 잡아
장작골에서 장작 피워
담방이에서 담방 담그어
음실에서 음실 음실 먹자'
만수동의 샛골과 담방이 마을, 서창동의 장자골, 운연동의 음실(陰室) 등 4개의 마을이름을 엮어서 민요조로 부르던 땅이름노래가 전해 오고 있다.
만수동에서 으뜸되는 마을인 새골은 조곡(鳥谷)이라고도 부른다. 1842년에 발행된 <경기지>나 1871년 발행<경기읍지>에는 조동면(鳥洞面)으로 기록되어 '새 = 鳥'가 많아서 새골, 또 한문으로 조곡이라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풀(=새=草)이 많아 초곡산(草谷山)이라 부르던 것이 '풀=새→조(鳥)'로 바뀌어졌다는 주장과 샛골은 만수동 반줏골과 산박골 사이에 있어 '사이골→새골→조곡(鳥谷)'으로 변천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충청북도 괴산국과 경상북도 문경군 사이에 있는 새재는 조령(鳥嶺)이라고도 불러 새(鳥)와 관련있는 고개이름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많으나 실제로는 풀(새=억새, 草)이 많아서 유래된 땅이름이다. (동국여지승람에 草山占이라 기록되었음)
남동정수장 뒷편 산을 초곡산(草谷山)이라고도 부르는데 이 산에는 우리 나라 최초의 영세자이며 한국 천주교 창설자 중의 한 사람인 이승훈(李承薰. 1756∼1801) 일가의 애닲은 사연이 서려 있다.
만수동은 옛부터 평창(平昌)이씨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 곳에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고 이승훈을 비롯한 4대에 걸친 5명의 순교자를 배출한 곳이기도 한다.
이승훈은 참판 이동욱(李東郁)의 아들로 서울 중림동에서 태어나 일찌기 문과에 급제(1708)하여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은 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이승훈은 1775년 정약용의 누이와 혼인했으며 천주교도 이벽(李蘗, 1754∼86)을 만나 감화를 받고 천주교에 입교하였으며 1783년 아버지를 따라 청국에 가서 북경 천주교회당에서 교리를 익힌후 그라몽(染棟材)신부로 부터 '조선 교회의 주춧돌이 되라'는 뜻에서 베드루(peter : 盤石)라는 이름과 함께 영세를 받고 한국 최초의 영세자가 되어 천주교 교리서적과 십자가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1785년 서울 명동(明禮洞) 중인(中人) 김범우(金範禹) 집에 한국 최초의 천주교회를 창설,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교리서를 언문으로 번역해 배포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을사추조적발사건이 일어나자 이승훈은 가족들의 권유로 서학을 이단으로 배척하는 척사문(斥邪文)을 짓고 배교했다.
1787년 다시 복교하여 권일신을 주교로 하고 자신은 신부가 되어 성사(聖事)를 집행, 은밀히 포교하던중 1789년, 평택현감을 제수 받았을 때, 다시 배교하였다. 관직에 있으면서 다시 입교하여 활동하던 중 '서학(西學)의 서적을 발간하였다'고 하여 관직을 박탈당하였다.
1794년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謀)가 밀입국하여 포교활동하는 것을 도와주었다가 예산에 유배되었으며 1796년 유배가 풀린후 주자백록동연의(朱子 白鹿洞衍義)를 짓는 등 교회활동을 단절한 입장을 밝혔다.
1801년 순조때 정순(貞純)왕후와 심환지(沈煥之) 등 벽파세력 및 남인의 일부세력은 남인 시파가 천주교와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음을 계기로 사학(邪學)탄압을 내세우면서 신유(辛酉)박해를 일으켜 같은해 2월26일. 정약종, 최창현, 최필공, 홍교만, 홍낙민 등과 함께 연루되어 서소문밖에서 참수형을 당하였다. 문집으로<만천유고>(萬川遺稿)가 있으며 1856년 아들 신규(身逵)의 탄원으로 대역죄는 신원되었다.
4대에 걸친 5명의 순교자 집안.
이승훈의 아들 신규와 손자 재의(在誼)는 고종 3년(1866) 병인양요가 발생한후 천주교에 대한 박해와 더욱 심해진 가운데서도 비밀리에 포교활동을 하다가 1868년 서울 서소문밖에서 참수형을 당하였다.
이승훈의 증손자 연구(蓮龜), 적구(籍龜) 형제는 신미양요때 황해안에 정박중이던 미국 함대에 들어가 우리 나라의 정보를 제공하였음이 발각되어 경기도 관찰사 박영보(朴永輔)의 지휘아래 인천 제물포에서 증조부, 조부, 부친에 이어 참수형을 당하였다.
이들 다섯분의 순교자들은 만수동 남동정수장 북쪽 초곡산(草谷山 : 장수동)에 묻히었는데 이승훈의 유해는 1981년 경기도 광주군, 천주교 성지인 천지암으로 옮겨져 현재는 비석과 터(가묘)만 남아있다.
4대에 걸친 5명의 순교자들 배출한 평창 이씨의 집안! 필자는 비록 천주교 신자는 아니지만 장한 인물, 장한 집안이라고 찬탄하고 칭송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4대에 걸친 5명의 순교자 집안은 우리 나라는 물론, 세계에서도 그 짝을 찾을 수 없는 일로 그 정신, 그 훌륭함은 후세에 까지 길이 빛날 것이다.
그리고 이들 5분의 묘가 인천의 남동구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인천의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다.
'97문화유산의 해를 맞이하여 가천문화재단에서는 남동구, 천주교계, 평창이씨종친회와 함께 6월 현충일을 기하여 이승훈일가의 묘를 참배하고 의롭고 외로운 넔을 위로하는 헌다의식(獻茶儀式)을 개최하려고 준비중에 있다.
장수동 인천대공원 서쪽에 위치한 초곡산의 이승훈일가 묘소로 향하는 산길에는 마치 골고다 언덕이 연상될 수 있는 글들과 시설물들이 설치되어 있어 찾는 이로 하여금 옷깃을 여미는 분위기를 만들어 놓았다.
한가지 덧붙이면, 우리 나라 최초의 천주교신부(神父) 김대건(金大建, 1822∼1846)은 용인사람으로 기해사옥때 순교한 제준(濟俊)의 아들이다.
1846년 선교사의 입국과 주청 선교부와의 통신 연락에 필요한 비밀항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백령도연안을 답사하다가 체포되어 9월 16일 서울 노량진 새남터(沙場)에서 처형을 당하였는데 백령도 진리 백령길병원은 개원 당시 명칭이 김대건의 세례명을 따서 지은 앙드레(Andre)병원이었으며 현재 병원경내에 김대건신부의 석상과 천주교회가 위치하고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 나라 최초의 영세신자이며 한국 최초의 천주교회(명동성당)를 창설한 베드로 이승훈, 한국인으로서 한국 최초의 신부인
앙드레 김대건. 이 두분의 유적이 인천광역시에 남아 있다는 사실은 '97 문화유산의 해를 맞이하여 인천광역시민 누구나 알고 가꾸어 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