榮親은 고려• 조선 시대 과거(科擧)에 급제하거나 서울에 와 관직(官職)에 임명된 사람이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나 친척들을 뵙고 잔치 따위를 베풀어 그들에게 영광을 돌리는 행사다.
한편 돌아간 부모에 대한 경우 고려에서는 양부모(養父母)나 처부모(妻父母)를 대신하기도 하고, 이들도 없을 경우는 백부모(伯父母)나 숙부모(叔父母)를 대신하기도 하였는데, 조선에 들어와서는 돌아간 부모의 분묘를 찾아가기도 했다.
이런 영친의 본래의 의미가 조선 중기에 와서는 며느리가 남편의 부모를 모시는 의미로 변질 되었다.
즉, 시집 살이를 뜻하게 되었다.
丈家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조선 중기까지는 결혼을 하면 남자가 처가살이를 했다.
匠家를 간다는 말이 바로 거기서 유래가 되었다.
그 흔적을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강릉의 사대부 집안 율곡 이이의 어머니 신사임당과 허균의 누이 허난설헌이다.
율곡 이이의 아버지가 처가살이를 한 곳이 바로 오죽헌이다. 丈家를 간 셈이다. 거기서 신사임당은 율곡을 낳았다.
허균과 허난설헌의 아버지 허엽이 강릉 부사로 있을 때, 허균과 허난설헌을 낳은 곳이 허균 생가 터이다.
공교롭게도 오죽헌과 허균 생가는 경포대 호수를 마주 하고, 오죽헌은 북쪽에 허균 생가는 남쪽에 있다.
신사임당은 처가살이(장가)의 마지막 세대이고
허난설헌은 영친(시집살이) 첫 세대다.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은 30 년을 사이에 두고, 신사임당은 여유롭게 자신의 집에서 그림을 그렸으며, 허난설헌은 남편을 따라 서울로 가서 모진 시집살이를 하면서 눈물겨운 시를 썼던 것이다.
만약 허난설헌이 신사임당과 같은 처지였다면, 우리나라 여성 문학의 판도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언뜻 보면 대단히 봉건 사회였던 우리 나라가 조선 중기까지는 여자들이 그리 차별받는 사회가 아니었다. 오히려 모계사회의 전통이 남아 있었다.
조선을 건국하고 권력을 확립해 가는 과정에서 성리학의 이념에 따라,새로운 사회질서를 만들면서 ‘경국대전’을 완성 하고 三綱의 夫爲婦綱남성위주의 사회를 만들어 가는데 처가살이(장가)가 걸림돌이었다.
왕족에서는 이미 처가살이를 금지했는데, 사대부에서는 남아 있었다.
그것을 조선 중기 부터 금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의 예술적 영감과 토양은 전혀 다르다.
신사임당은 친정에서 하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그림을 그렸지만, 허난설헌은 모진 시집살이를 하면서 시를 썼다.
실제로 허난설헌의 시에는 그런 아픔이 고스란히 배어져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