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116
5월5일 [부활 제3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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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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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PW4E5Zu5USQ (이한별 도미니코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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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미사의 충만한 은총>
기도하기 힘들다고 하소연하시는 분들, 이런저런 사연으로 힘겨운 시절을 보내고 계시는 분들에게 저는 즉시 매일 미사 참여를 적극적으로 권장합니다. 왜냐하면 미사만큼 좋은 치료제, 미사만큼 좋은 해결책은 다시 또 없기 때문입니다.
미사가 우리에게 건네는 은총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성인·성녀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미사 중에 우리는 영광스럽게도 주님께서 마련하신 만찬상에 초대됩니다. 미사 중에 우리는 수많은 성인·성녀들, 천사들, 꿈속에서도 조차 그리운 사랑했던 사람들의 영혼들과 만나며 하나 됩니다.
이토록 부당하고 보잘것없는 죄인들 속으로 거듭 임하시고 현존하시는 거룩하신 주님의 몸을 모심을 통해 우리 역시 거룩하고 빛나는 존재로 재탄생합니다. 이보다 더 큰 영예와 영광이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봉독한 요한복음서 역시 성체성사의 놀라운 은총에 대해서 명확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복음 6장 51절)
성체성사를 통해서 유한한 우리는 무한하신 하느님의 존재에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 썩어 없어질 우리였는데 영원불멸하신 하느님의 존재에 스며듭니다. 주님의 거룩한 몸을 모심으로 인해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건너갑니다. 바로 성체성사가 매일 우리에게 건네는 은총입니다.
“매일 우리의 밥이 되어 오시는 주님, 당신 성체를 통해 매일 우리를 구원하시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기적을 찾아, 특별한 그 무엇을 찾아 이곳저곳 기웃거리지만 사실 매일 거행되는 사랑의 성체성사보다 더 큰 기적은 없음을 우리가 깨닫게 해 주십시오.
우리 부족한 죄인들을 향한 극진한 사랑이 되풀이되는 매일의 성체성사를 그저 해치워야만 하는 숙제처럼 여기는 우리를 용서하십시오.
우리가 매일 드리는 미사가 마치 마지막 미사이듯 정성을 다하게 도와주십시오. 매일 봉헌되는 미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가장 큰 선물임을 알게 도와주십시오.
매일의 미사가 우리가 하느님께 바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기도임을 알게 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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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Pv46YSTF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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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빵’이 되려면: 이웃을 하느님처럼!>
사람이 창조자의 삶을 살아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자면 반드시 ‘생명의 빵’이 되어야만 합니다. 생명이 빵이 되는 것이 창조자의 삶이고 남의 생명을 먹는 삶이 피조물의 삶입니다. 피조물은 죽지만 창조자는 영원히 삽니다. 예수님은 창조자로 어떻게 피조물이 창조자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지 몸소 생명의 빵이 되시며 보여주셨습니다.
어제는 생명의 빵이 되는 사람은 자신을 내어주어야 하는 대상을 ‘아버지께서 보내주셨다’라는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도 이와 관련된 것인데, 나에게 보내주신 이를 대하는 방식이 곧 아버지를 대하는 방식과 같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그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요한 6,44-45)
나에게 맡겨지는 이는 이미 주님께서 나에게 그 사람을 보내주시기 위해 낳으시고 기르시고 가르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 안에는 이미 그 사람을 보내주신 분이 들어있다고 보아도 됩니다. 이렇게 그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곧 그 사람을 보낸 이를 대하는 방식과 같아집니다.
이옥란(67세) 씨에게는 여섯 살 유치원생 윤하라고 하는 유치원 딸이 있습니다. 폐지를 주워 팔고 쪽방촌에서 사는데 윤하는 고급 승용차를 타고 아이들을 데리러 오는 부잣집 아이들이 다니는 유치원에 다닙니다. 윤하는 엄마가 리어커에 자신을 태우고 가도 밝고 똑똑한 아이입니다. 할머니라 불리는 엄마를 너무나 따릅니다.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요?
이옥란 씨는 가끔 한 건물을 기웃거립니다. 그리고 한 사람을 보자 급히 몸을 돌려 다른 곳으로 피합니다. 이옥란 씨가 가끔 찾아가 멀리서 얼굴만 바라보는 사람은 45세 민지원 씨입니다. 민지원 씨는 변호사로서 잘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실 이옥란 씨의 친딸은 민지원 씨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엄마라고 하는 사람이 지원 씨를 찾아와 3천만 원만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원 씨는 3천만 원이 애들 장난이냐며 돌아섭니다. 그러자 이옥란 씨는 그 어머니를 찾아가 통장을 주며 어려움이 있으면 지원이보다 자신에게 알려달라고 합니다. 통장을 받은 엄마는 지원이는 자기 딸이라며 다시는 나타나지 말라고 소리칩니다. 이옥란 씨는 이렇게 누구에게나 죄인입니다.
멀리서만 딸을 지켜보던 이옥란 씨는 자신도 모르게 지원 씨에게 다가갔고 급기야 자신이 친엄마라 고백합니다. 딸은 매우 화를 내며 자신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는지 아느냐며 매몰차게 친엄마를 몰아세우고는 떠납니다.
이옥란 씨가 몸이 아파 누워있을 때 제작진은 민지원 씨에게 전화를 걸어 엄마가 아프다고 합니다. 민지원 씨는 엄마가 있는 쪽방촌에 처음으로 찾아옵니다. 그러나 손녀딸로 보이는 윤하를 보고는 또 화가 치밉니다. 자기는 남의 집에 버려놓고 결혼해서 손녀딸을 키우고 있는 엄마가 가증스러워 보였던 것입니다.
사실 윤하는 딸도 손녀딸도 아닙니다. 쪽방촌 이웃인 술집 여자가 맡겨놓고 나중에 찾으러 온다고 하고 도망친 것입니다. 이옥란 씨는 스물두 살 때 아기를 갖습니다. 남자는 도망쳤습니다. 친정에서 쫓겨나서 어린 나이에 아기를 키울 수 있는 형편이 못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살았던 시골 마을 제일 큰 부잣집에 아기를 몰래 놓고 나왔던 것입니다. 그 집엔 아이가 없었고 덕분이 하늘이 내려준 딸이라 믿고 지원이란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잘 키웠습니다.
옥란 씨는 서울로 올라와 일하며 몇 번이고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딸을 한 번이라도 만나고 죽겠다는 심정으로 굳은 일을 하며 돈을 모았습니다. 비록 쪽방촌에 살지만, 윤하를 남부럽지 않은 비싼 유치원에 보내고 원하는 것을 다 해줄 수 있었던 것이 어느 정도는 재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을 알게 된 지원 씨는 윤하를 보며 엄마가 지금까지 자신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을 버린 죄책감을 버려진 윤하를 통해 채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 지원 씨는 부잣집에서 자랐지만 부모가 아이를 낳자 구박 덩이로 바뀌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갖은 궂은일을 다 해야 했습니다. 양어머니는 시험 전날에도 일부러 아이에게 일과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지원 씨는 우연히 옆집 어른들에게 자신이 친딸이 아님을 듣게 되었고 지원 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독립하여 수많은 아르바이트를 하며 변호사가 된 것입니다. 자기를 키워준 부모의 가세는 기울었고 이제는 지원 씨에게 와서 돈을 구걸하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지원 씨는 자신을 버린 어머니와 키운 어머니 중 누구를 택할까요? 지원 씨의 선택은 친엄마입니다. 친엄마는 자신이 아이를 버린 경험이 있기에 버려진 아이를 대하는 모습이 곧 자기 친딸을 대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반면 지원 씨를 키워준 엄마는 지원 씨를 버려진 아이를 자기가 키워준다는 생각으로 키웠습니다. 이런 마음 안에는 그 버린 어머니에 관한 판단이 들어있습니다. 지원 씨의 친엄마를 죄인으로 여긴 것입니다.
지원 씨가 엄마가 차려주는 밥을 먹으며 오열하는 모습은 코끝을 찡하게 합니다. 얼마나 먹고 싶은 밥이었을까요? 지원 씨의 친어머니는 윤하를 대하는 모습으로 지원 씨를 어떻게 대했을 것인지를 지원 씨가 믿게 했습니다. 이옥란 씨는 딸을 버렸지만 진정으로 생명의 빵으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카카오 TV ‘모큐멘터리 진짜 사랑 5’에 소개된 사연입니다.
여기에 달린 댓글 중 하나입니다. “지원 씨 양부모한테 아무 것도 해주지 마세요. 그들은 지원 씨한테 부모 역할을 제대로 안 했어요. 차라리 고아원에 버렸으면 거기서 고등학교까지 공부시켜주고 적어도 집안일 다 시키지는 않았겠죠. 그리고 나중에 돈도 안 뜯어가고요. 어차피 고등학교까지만 살고 나와 혼자 알바하며 이 악물고 공부한 건데 양부모가 왜 지원 씨한테 돈을 요구하나요? 앞으로는 절대 아무것도 해 주지 마세요. 고마운 사람들 아닙니다. 지원 씨와 윤아 그리고 어머니, 늘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이 댓글에 많은 동감을 표시했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대하는 방식은 그 사람을 나에게 보내주신 하느님을 대하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에게 주이진 이들을 대하는 방식으로 내가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 나에게 보내주신 사람을 좋지 않게 대해서 그 사람을 보내주신 하느님을 죄인으로 만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나에게 맡겨진 이들이 귀찮은 존재라면 나는 그 사람을 보내신 주님을 귀찮은 존재라 여기는 것입니다. 지원 씨의 양부모는 지원 씨를 처음엔 하늘이 보내주었다고 여겼지만, 나중에는 지원이를 키우며 그 하늘을 원망하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 아이에게 생명의 빵이 될 수 없습니다. 아이의 피를 빨아먹는 모기가 됩니다. 그러면 모기로 심판받게 됩니다.
교회에 맡겨진 이들은 하느님께서 그 교회에 머물 수 있도록 이미 교육하시고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을 마치 교회가 대신 키워주는 것처럼 여겨서는 교회가 그들에게 생명의 빵이 될 수 없습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내어주며 나는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더라도 그들을 하느님처럼 대해야 합니다.
신자들을 하느님처럼 대하지 않는 교회는 그래서 생명의 빵이 될 수 없고 그러면 나중에 하느님도 고마움보다는 질책을 하실 것입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 되기 위해 나에게 오는 이들을 그 보내주신 하느님처럼 보려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나에게 오는 사람마다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하느님!”이라고 해 보십시오. 내가 생명의 빵이 되고 있을 것입니다. 내가 이웃을 대하는 방식이 그 사람을 나에게 보내주신 분을 대하는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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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6,44-51: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 갈 수 없다. 그런데 그리스도께 가는 것도 아버지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그리스도께 갈 수 없다. 우리는 믿음이라는 선물 덕분에 그리스도께로 왔다. 그러나 아직 목적지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 가는 길에 있는 존재들이다. 이 하느님께 이끌리는 것은 사랑에 의해서 이끌린 것이다. 이러한 갈망을 가지고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아버지께서 이끄시는 방법은 강요가 아니라 진리를 가르치심으로써 이끄신다. 이 이끄심은 하느님의 일이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45절) 즉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로 온다. 그것을 누구에게서 배우느냐? 바로 아드님에게서 배운다. 그분은 말씀이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말씀’으로 가르치시는 것이다. 아드님은 그 말씀을 듣는 이를 끌어당기신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47절) 이 영원한 생명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영원한 생명이 죽음을 취하셨다. 생명이 죽음을 죽이도록 생명께서 돌아가셨다. 이 영원한 생명께서 당신께서 취하신 육에도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 그분은 죽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 그분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48절) 하느님께서는 살아 계신 당신의 ‘말씀’을 시켜 모든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시고 당신의 ‘말씀’을 우리에게 양식이요 생명으로 주신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언제나 갈망으로 배고파한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을 사랑하는 이들이 이 음식을 갈망할 때, 그들은 한층 더 흡족해질 것이다. 우리는 이 빵을 통하여 그분과 한 몸, ‘그분 몸의 지체’(에페 5,30)가 된다.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50절) 이 빵은 성체성사이다. 성체성사는 우리를 하늘의 빵이 되게 하시며 생명을 주신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51절) 그분은 아버지의 완전한 빵으로서 우리에게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오셨다. 우리가 당신의 삶을 통하여 배우고 하느님의 말씀을 먹고 마실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 아버지의 영인 불사의 빵을 우리 안에 담을 수 있게 하셨다. 우리는 기도하며 하느님께 청해야 한다. 그 빵을 청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과 한 몸이 되어야 한다. 많은 밀알이 모이고 갈리고 섞여서 하나가 되어 빵이 되듯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빵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야 한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51절) 주님은 모든 사람의 생명을 위해 당신의 몸을 바치셨고, 그 몸을 통하여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다. 생명을 주신 말씀은 육안에 머무르고 계셨기에 그 육을 생명을 주는 것으로 만드셨다. 그러기에 그분의 몸은 그것을 먹는 모든 이에게 생명을 주신다. 그 몸은 죽어가는 사람들에게서 죽음을 몰아내고, 말씀으로 완전히 충만해진 그 몸은 부패를 사라지게 한다. 이 성체성사를 잘 준비하고 영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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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 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요한 6,44-45)
이 말씀에서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으면”입니다.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는, “내가 주는 구원과 생명을 받지 못한다.”입니다. ‘아무도’ 라는 말은 예외가 없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라는 말씀은, 충실하게 응답하는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표현만 보면,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으로, 또 이끌어 주지 않으시는 사람도 따로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아니고,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이끌어 주시는 분입니다.(마태 18,14)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는 사람’과 ‘이끌어 주지 않으시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구원받을 사람’이 미리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닙니다. ‘구원의 부르심’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데,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과 응답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가르침은, 하느님께서는 ‘나’를 구원하기를 바라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고, 동시에 ‘나’를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부르심에 관해서 말할 때, “하느님께서는 ‘저런 사람도’ 부르셨다.”가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나 같은 사람도’ 부르셨다.”라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나의 구원’을, 또 ‘나의 응답’을 당연한 일로 생각하고, ‘저런 사람’의 구원과 응답을 특별한 일로 생각하는 것,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위선자들의 교만입니다. 예수님께서 ‘나 같은 사람’도 구원하려고 애쓰신다는 것을 믿는 겸손한 믿음과 그것에 대해서 감사드리는 마음에서 진정한 응답이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라는 말씀도,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신다.”라는 뜻입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복음과 말씀들과 가르침들을 받아들여서 실천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아버지의 말씀’은 곧 ‘예수님의 말씀’입니다.(요한 3,34) “나에게 온다.”는 “내가 주는 구원과 생명을 받을 수 있다.”입니다. ‘누구나’라는 말은, 자격을 갖추기만 하면, 억울하게 탈락하는 일 없이 모두 구원받게 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온 이 말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요한 6,46)
이 말씀은,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뜻입니다.(요한 14,6) 예수님이 없어도 하느님과 직접 통할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종파가 있는데, 우리는 그들을 ‘이단’이라고 부릅니다. 또 메시아가 없어도 인간이 자기의 힘으로 수행을 해서 구원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종교가 있는데, 그런 종교는 그냥 ‘다른 종교’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47-51)
하느님께서 광야에서 주신 ‘만나’는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한 양식이 아니었고, 광야에서 살아남게 하기 위한 양식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만일에 이스라엘이 ‘만나’만 보지 않고, ‘만나’를 주신 하느님을 제대로 섬겼다면, 또 ‘육신의 배고픔’만 생각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추구했다면, 결과가 다르게 되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라는 말에는, ‘만나’를 통해서도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갈 수 있었다는 암시가 들어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만나’가 내릴 때의 장면을 보면, 이스라엘은 ‘만나’ 덕분에 굶어죽지 않게 된 것을 기뻐하지도 않았고, ‘만나’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지도 않았습니다. 나중에는 ‘만나’가 지긋지긋하다고 불평했습니다.(민수 11,6.공동번역) 그들의 멸망은 그들 스스로 자초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성체’를 받아먹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그런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라는 말씀은, “나를 믿고, 나의 가르침대로 산 사람에게는 내가 영원한 생명을 주겠다.”라는 뜻입니다. (믿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삶’으로 믿음을 실천해야 합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라는 말씀을, “나는 생명의 주님이다.”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에 대한 ‘생살여탈권’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원천은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아버지와 예수님은 하나이기 때문에 생명의 원천은 예수님입니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서 예수님과 일치를 이룬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성체를 먹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라는 말씀은, 당신이 ‘영원한 생명’의 원천이라는 계시입니다. “이 빵을 먹으면”은, 뜻으로는 “이 빵을 먹어야만”(예수님과 일치를 이루어야만)입니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라는 말씀은,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겠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나의 살이다.”는 “나 자신이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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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제가 강의를 하면서 즐겨 부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제목은 ‘영원한 사랑’입니다. 가사의 내용이 아름답기에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아침을 기다리는 새벽별처럼/ 내 마음 깊은 그곳에/ 고요히 밝아오는 빛의 향기로/ 우리 사랑은 영원히/ 어둠이 깊을수록 더욱 빛나는/ 내 마음 깊은 그곳에/ 마르지 않는 샘물 되어 흐르오./ 우리 사랑은 영원히/ 때로는 외로움에 눈물지어도/ 그대 나에게 등불이 되어/ 말없는 눈빛으로 기도해/ 영원한 사랑을 위해/ 나 이제 당신 위해 꽃을 드려요/ 눈빛 순결한 사랑의/ 고요한 두 마음이 두 손을 모아/ 영원한 사랑을 위해” 저는 ‘아침을 기다리는 새벽별처럼’이라는 가사가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영원한 사랑은 ‘갈망’이 있어야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요즘 우리는 복음에서 ‘영원한 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것을 수학적인 공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물리적인 법칙으로 알아내는 것도 어려운 것 같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수학적인 계산으로 답을 찾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물리적인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곁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도 물어보십니다. ‘여러분들도 내 곁을 떠날 것입니까?’ 베드로 사도는 대답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님 곁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사랑’에서 시작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 때문에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사랑 때문에 외아들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인가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영원한 생명을 살았습니다. 스테파노 부제, 바오로 사도, 신앙의 선조들은 이런 삶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이분들에게 물리적인 방식의 영원한 생명은 별 의미가 없었습니다. 수학적인 방식의 영원한 생명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지나간 과거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게는, 오지도 않은 앞날을 걱정하는 사람에게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충실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지금의 충실한 삶이 과거가 되는 것이고, 지금의 행복한 삶이 미래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시간과 공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영원한 삶은 신앙 안에서 지금을 충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사랑과 갈망이 만나서 영원한 생명을 살아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물건들을 모아서 아이티에 있는 ‘꽃동네’로 보내는 자매님이 있습니다. 귀찮은 일입니다.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 일을 몇 년째 하고 있습니다. 자매님의 사랑과 갈망은 굶주리고, 병들어가는 아이티의 고통 받는 이들에게 생명의 빵이 되고 있습니다. 물리학적인 시간, 생물학적인 시간은 유한합니다. 그러나 순간을 말씀 안에서 충실하게 사는 사람은 신앙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끝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그 끝은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순간을 영원처럼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언제나 감사하십시오. 매일 기도하십시오. 항상 기뻐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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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김우정 베드로 신부님]
<감사만 하기에도 모자란 인생>
언젠가 부모님의 손을 본 적이 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자녀들을 키우느라 고생하시며 마음속에 있는 많은 고민과 어려움을 남몰래 짊어지신 부모님의 손을 보면서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어렸을 때는 그것도 모르고 투정과 응석만 부렸던 것을 돌아보면서 ‘그때는 내 생각만 했구나.’ 하고 뉘우칩니다.
사제로서 많은 사람들 앞에 서 있다 보니 부모님의 마음이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다시금 바라보게 됩니다. 누군가를 이끄는 책임자의 위치에 서게 되면 그 자리에서만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다른 이들이 그것을 이해해 주지 않거나 무관심하다 해도 묵묵히 자신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많은 이들이 지금껏 그렇게 해왔고, 또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이 바라보던 입장과는 다른 것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주님께서도 아무것도 모르고, 때로는 알려고도 하지 않는 이들을 위해 생명의 빵으로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부모님의 손에 굳은살이 박혀있듯이 그분의 손과 발과 옆구리에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내어 주신 못자국이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헌신하신 그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오늘도 그분의 몸인 성체를 받아 모십니다. 그분의 눈에 아직도 우리는 응석받이입니다. 때문에 그분은 모든 어려움과 고통을 감내하시면서 우리 곁에 묵묵히 서 계시고, 우리를 지켜주시고 이끌어 주십니다.
성당에 가면 우리는 하루 종일 잠들거나 눈도 감지 않으시고 감실에서 우리를 바라보시며 모든 것을 들어주기 위해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을 뵐 수 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감사드려야 합니다.
감사하기에도 모자란 인생이고, 감사하기에도 모자란 시간입니다. 그런데 때로 다른 것을 넘보고 주님께 불만과 답답함을 표시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혹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 대신에 다른 것을 자꾸만 넘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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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인생은 결코 홀로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의 내가 되기까지 나를 지켜 주고 이끌어 준 부모와 가족, 친구들이 있듯이, 우리의 남은 인생도 누군가의 도움과 손길 없이는 완성되지 않습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믿음은 들음에서 온다.”고 말한 것처럼, 누군가가 내가 믿어야 할 복음을 전해 주지 않는다면 믿음은 생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이 공감을 일으켜야 참된 믿음이 됩니다.
오늘 사도행전에 나오는 필리포스와 에티오피아 사람의 대화는 믿음이 공감을 통해 성장한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필리포스가 이사야서를 읽고 있는 에티오피아 사람에게 말을 건네자 그는,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 준 필리포스에게, “누가 나를 이끌어 주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대화를 이끌어 갑니다. 이 대화는 결국 주저 없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기쁨에 가득 찬 한 인간의 변화를 이끌어 냅니다.
모든 만남에는 관심과 공감이 전제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성경에 적힌 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게 하시는 하느님의 생명을 전하는 일입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영혼의 배고픔을 채워 주는 생명이 하느님으로부터 오며, 그 표징인 생명의 빵이 바로 예수님 자신임을 선언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먼저 자신의 몸을 내어 주셨고, 이제 우리가 그분과의 대화에 응답할 차례입니다. 나는 얼마나 예수님을 간절히 바라고, 그리워하며, 기쁘게 모시고 있는지 되돌아볼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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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오로수도회 故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오늘 복음을 통해서 다시 한번 깨달은 것은 모든 것을 주도하시는 분은 내가 아니라 하느님이시라는 것이다. 하느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보살피신다. 하느님은 알파요, 오메가이시다. 즉 시작이요, 마침이시다. 모든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시작해서 하느님한테 끝나는 것이다.
영성생활은 이러한 진리를 깨닫고 나의 모든 삶을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대로 따라 가도록 노력하는 생활이다. 즉 내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느님이시며 하느님은 나의 머리카락까지 모든 것을 낱낱이 섭리하시는 분이시며 보살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이끌어 주시는 대로 따라가는 생활이다.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단 한발작도 나아갈 수 없다.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단 한 순간도 숨을 계속해서 쉴 수 없다. 그것이 인간이다. 인간의 한계이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손에 달려 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 그것이 피조물의 한계이다.
하느님은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도록 이끌어주셨고 거룩한 사람을 살도록 이끌어 주신다.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오도록 이끌어 주신다. 따라서 우리는 이끌어 주시는 대로 따라 가는 존재이지 내가 앞장서서 하느님을 이끌어 가는 창조주가 아니다.
하느님은 오늘도 나를 당신께로 이끌어 주신다. 즉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완전한 사람이 되도록 이끌어 주신다. 영성생활을 하는 사람이 우선적으로 깨달아야 하는 것은 이런 원리를 깨닫는 것이고 거기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나를 이끌어 주시는 분이 아버지이시라면 이제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아버지 앞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는 무엇인가? 어떤 자세로 나를 이끌어 주시는 분을 따라 가야 하는가? 신앙생활은 무엇인가? 영성 생활은 무엇인가? 나를 이끌어 주시는 분을 따라 가는 생활이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부터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 "나를 따라 오너라"고 부르셨다.
성바오로도 "성령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으니 우리는 성령의 지도를 따라서 살아가야 합니다."(갈라 5,25)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로마 8,14)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과 우리와의 관계를 목자와 양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신 것이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 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요한 10, 14-15. 27-28)
그럼 어떻게 따라 가야 하는가? 오늘 복음에서 요한이 그 자세를 가르쳐 주고 있다. 오늘 복음을 잘 살펴보면 단계적으로 제시해준 말씀이 있는데 그 말씀들을 찾아보면 "나에게 오는 사람...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 믿는 사람... 먹는 사람"이라는 말씀으로 표현되어 있다.
나를 이끌어 주시는 아버지 앞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첫 번째 자세는 아버지께 가는 자세요, 두 번째 자세는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자세요, 세 번째 자세는 듣고 배운 것을 믿는 자세요, 네 번째 자세는 듣고 배운 것을 먹는 자세이다.
우리가 아버지께 가기 위한 첫 번째 자세를 취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름이 있어야 한다. 배고픈 사람이 밥을 찾아 나서고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아 나서듯이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이들만이 아버지께 나아가는 자세를 취한다. 아버지께 나아간다고 하더라도 주리고 목마름이 없다면 적극적이지 못하고 매우 소극적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이들!"(마태 5, 6)이라고 하셨다. 나에게는 아버지께 가는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는가? 아버지께 가야 한다는 주리고 목마름이 있는가?
두 번째 자세는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자세이다. 이것 또한 아버지의 말씀에 대한 주리고 목마름이 없다면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다.
우리가 아버지의 말씀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는 주림과 목마름이 없기 때문이다. 배고프지 않은 사람에게 음식이 반갑지 않고 목마름이 없는 사람에게 물의 필요성을 못 느끼듯이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름이 없는 사람이라면 아버지의 말씀을 들어도 그 고마움을 느낄 수 없으리라.
맛을 못 느끼는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보고 맛 들여라. 아버지의 말씀은 진 꿀보다 더 달도다." 라는 그 말을 이해하겠는가?
아버지의 말씀을 배우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아버지께 나아갈 수 없다. 배우지 않는데 어떻게 알고 아버지께 나아가겠는가? 배움이 없이는 절대로 신앙생활을 할 수 없고 영성 생활을 발전시킬 수 없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것은 아버지께 나아가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절대적이다.
세 번째는 배운 것을 믿어야 한다. 믿음이 없는 배움은 지식은 많아졌을지 몰라도 아버지께 가는 것과는 무관하다.
성서를 공부한 학자들이라고 해서 또 신학자들이라고 해서 다 믿음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학문적으로는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전혀 영적이지 못하다. 배움은 우리의 믿음을 성장시켜 주는 배움이어야 한다.
어떤 배움이든 우리를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는 대로 잘 따라 가게 하는 믿음을 갖게 해주는 배움이어야 한다. 우리가 이것저것 많은 것을 배운다고 하지만 과연 그런 것들이 우리의 믿음을 성장시켜주는 것인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오히려 우리의 믿음을 저해하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
네 번째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빵인 아버지의 말씀을 먹어야 한다. 아무리 진수성찬이라도 내가 먹지 않으면 나의 피가 되고 살이 될 수 없다. 먹어야 산다. 먹어야 영양가를 공급받는다. 먹어야 힘이 나고 우리는 그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을 주는 빵인 말씀을 먹는 사람만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다. 이것이 나를 이끌어 주시는 아버지께 나아가는 방법이요, 단계이다.
나를 이끌어 주시는 분을 따른다는 것은 추상적인 것도 아니며 그렇게 쉬운 일도 아니다. 애매한 일도 아니다. 그 길은 분명하다.
영성생활은 항상 수동적인 자세를 취해야 한다. 즉 내가 주도하는 생활이 아니라 나를 이끌어 주시는 분에게 나를 의탁하는 삶이다.
그렇다고 피상적인 자세는 아니다. 수동적이지만 적극적인 수동 자세이어야 한다. 좋은 자세가 마리아의 자세이다.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의 말씀을 듣고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자세는 수동적인 자세이다. 그러나 수동적이지만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도록 마리아는 혼신의 삶을 사셨다.
한도 자기주장을 내세우지 않으셨고 아무리 고통스러운 순간이라도 그리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지라도 말씀 하신 대로 이루어지도록 그 말씀에 충실하셨다. 이것이 영성생활을 하는 수동적인 자세이다.
수동적이지만 적극적인 자세요,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는 생활을 하기 위해 자기주장을 내세우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자세요, 실천하는 삶이다.
나를 아버지께로 이끌어 주시는 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그분을 바라보는데, 그리고 그분의 소리를 듣는데, 그분의 손길을 얻는데 모든 관심을 두어야 한다.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래서 늘 깨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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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요즈음 계속해서 빵에 대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 빵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요,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요, 믿는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예언서의 말씀을 일깨워줍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44)
여기서, “마지막 날”은 육체적 숨이 멈추는 날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만나기 직전의 날을 말해줍니다. 곧 생명의 주님을 만나면 이전의 자신이 죽고 나날이 변화되는 새로운 날이 시작됨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지상에서의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임을 말해줌과 동시에,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세상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는 일이요, “아버지”께로 이끄심임을 말해줍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여기서, “살아있는”이란 말은 당신의 실재성을 말합니다. 곧 죽어있지 않고 살아있다는 실재성입니다. 그 실재는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 생명의 빵이요, 건너와 관계를 맺는 활동 중인 빵임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하면, 곧 자신을 죽여 타인을 살리고 있는 활동 중인 빵입니다. 그러니 “살아있는 빵”은 동시에 “살리는 빵”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곧 먹는 이 안에서 부활하는 빵입니다.
이 빵은 다름 아닌 신성의 “당신의 살” 입니다. 살아있는 살이요, 떼어 나누어지는 살입니다. 그리하여 먹는 이에게서 살아있는 살이 되고, 우리의 살을 당신과 한 몸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몸이 되고, 당신의 생명이 됩니다. 곧 영원한 생명이 되게 합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신비입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살은 우리의 생명을 변화시키는 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증여를 통해서, 우리 안에서 죽음을 몰아내고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변화시키십니다. 우리를 당신의 몸이 되게 하시고, 당신 생명이 되게 하시고, 당신 신성에 들게 하고, 우리에게서 부활하십니다.
그러나 이 생명의 빵을 먹을 것인지 거부할 것이지는 우리 스스로가 응답해야 할 몫입니다. 만약 먹지 않는다면 이루어지지 않는 일입니다. 이를 알면서도 먹지 않는다면 참으로 어리석음은 일입니다.
오늘도 분명, 우리는 살아있는 이 빵을, 하느님의 참된 사랑을 받아먹습니다. 곧 “그분의 살”을 먹습니다. 하느님의 이 큰 사랑 안에서 우리는 생명을 얻어 살아갑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생명이 제 삶으로 피어나게 하소서.
당신께서 먹혀서 저를 살리듯 저도 먹혀서 타인을 살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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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주님!
오늘도 당신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당신 자신을 쪼개어 떼어주십니다.
오늘 제가 저 자신을 위한 빵이 아니라, 세상에 건네주는 빵이 되게 하소서!
다름 아닌, 내가 만든 빵이 아니라 당신이 주신 빵을 건네주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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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생명의 밥>
요한 6,44-51 (생명의 빵)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 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온 이 말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생명의 밥>
먹히니
생명의 밥
먹으니
생명의 밥
먹혀야
생명의 밥
먹어야
생명의 밥
먹었으니
먹혀야
생명의 밥
살리니
생명의 밥
사니
생명의 밥
살려야
생명의 밥
살아야
생명의 밥
살았으니
살려야
생명의 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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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신앙은 선물>
저의 어린 시절 신앙생활은 신부님께서 상주하지 않으시는 공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아무것도 몰랐지만, 주일이면 성당에 가라고 하시는 어머니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때로는 가기 싫어도 꾸중을 듣지 않기 위해서 갔고, 밭에 나가서 풀을 뽑는다든지 집안일을 도와야 하는 때가 되면 그것이 하기 싫어서 성당에 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에게는 본이, 아니게 열심히 기도하는 착실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이제는 잘 보이려고 정말 열심히 하였습니다. 주일이면 일찍 나서서 청소도 하고 주변 정돈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공소회장님이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신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아직 먼 미래의 일이었지만 저는 지금 신부가 되었습니다. 함께 어울리며 지내던 공소회장님 아들도 신부가 되었고, 한 자매는 수녀님이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작은 시골 공소였지만 결코, 작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웃을 통하여 저를 신앙으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 이끌리는 것은 선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한순간, 순간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하여 우리를 신앙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믿음은 미처 나도 모르게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물론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을 요구하셨지만 강하게 이끌어 주신 것은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요한 6,4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먼저 불러주셨기에 응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부름을 주님의 초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야말로 은총입니다. 일상의 평범한 삶 안에서 나를 부르시는 하느님 아버지를 만나게 되고 의탁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선물을 통하여 생명의 빵으로 다가오시는 아들 예수님을 새롭게 영접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6,47)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생명의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48,5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빵으로 오신 이유는 우리에 대한 ‘눈높이’ 사랑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드러내는 참 하느님이시고 이 땅에 살과 뼈를 지니신 채 사셨던 분으로 우리 곁에 가까이 계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성체성사를 통하여 영적 양식을 제공하여 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당신 안에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음을 선포하시며 우리를 부르셔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비로소 효과 있는 은총으로 역사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은 하늘이 되었고, 하늘은 이미 여기서 열렸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영국의 위대한 총리 토마스 모어는 매일 미사참례를 하였고 영성체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은 수많은 국정의 임무를 맡은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내가 신경을 써야 할 일은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나는 예수님과 함께할 때 생각을 정리하기가 쉽습니다. 하느님을 거스르게 될 기회들도 많지만 나는 매일 예수님께로부터 힘을 얻어서 그 악의 기회들을 멀리할 수 있습니다. 나는 매우 어려운 문제들을 처리하기 위해 빛과 지혜가 필요한데 매일 영성체를 통해 예수님과 그것을 상의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나의 위대한 스승이십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도 믿음으로 주님을 모심으로써 그 안에서 빛과 지혜를 얻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세속적인 추구에서 벗어나 우리를 진정 살리는 것을 찾기 시작해야 합니다.
“살아있는 생명의 빵’은 살아있는 양식으로 모셔야 합니다. 살아있는 빵을 죽은 양식으로 모셔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미사 때마다 모시는 거룩한 성체는 우리의 영혼과 삶 안으로 모셔야 살아있게 됩니다. 그저 입 안으로 성체의 빵만을 먹으면 결국, 이스라엘처럼 만나를 먹고도 죽은 백성이 됩니다. 우리는 성체를 모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살아야 합니다.”(함께야) 신앙의 삶은 예수님을 닮는 여정입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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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전주교구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님]
사람 사는 세상은 어디나 다 비슷한 데가 있습니다. 특별히 인간관계 안에서 벌어지는 문제는 어디를 가든 비슷한 양상을 띠는 것 같습니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 때문에 행복하기도 하고, 또 바로 그 사람 때문에 살기가 힘들어지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신학교도 마찬가지입니다. 훌륭한 사제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신학교에 들어온 신학생들 또한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문제들로 고민하고 힘들어합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형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급기야는 “어떻게 저런 사람이 사제가 되겠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 돼!”라며 불평을 터뜨리기도 합니다. 일선 본당에서도 이와 비슷한 불평과 험담을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저런 사람이 성당에 나오는 거야?” “저 사람이 어떻게 성체를 모실 수 있지?”
오늘 제1독서는 초대 교회 공동체의 일곱 봉사자 가운데 하나였던 필리포스가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세례를 준 사건을 전합니다. 그런데 위에서 말씀드린 다른 사람에 대한 불평을 여기에도 적용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어떻게 이방인에게, 그것도 이방인 여왕을 섬기는 내시에게 세례를 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성경 본문은 그 내시가 하느님을 경배하던 사람이었으며, 그에게 베풀어진 세례가 바로 성령의 인도로 이루어진 사건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이 말씀을 거꾸로 읽으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며 교회 공동체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은 이미 하느님의 이끄심을 받은 이들이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눈에 결코 이해되지 않는 사람이라도, 그래서 받아들이고 함께하는 것이 쉽지 않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교회 공동체 안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은 하느님께서 몸소 선택하신 이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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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요한6,51)
<예언직!>
교회와 교회의 구성원들인 믿는 이들이 해야 할 세 가지 일(사명)은 사제직, 예언직, 왕직입니다.
'사제직은 성화(거룩하게 하는 것)'이고,
'예언직은 선포(이끄는 것)'이고,
'왕직은 봉사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요한6,44-51)에서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요한6,44)
그리고 오늘 독서(사도8,26-40)는 주님의 천사가 보낸 필리포스가 에디오피아의 여왕 칸타케의 내시를 주님께로 이끄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을 읽고 있었던 내시는 "지금 읽으시는 것을 알아듣습니까?"(8,30) 라고 묻는 필리포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나를 이끌어 주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8,31)
'예언직!'
'예언직'에 대해 묵상해 봅니다.
'예언직'은 믿는 모든 이들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그리고 '그 본질'은 '선포'이며 '이끄는 일'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성탄)와 땀과 죽음과 부활을 전하는 일'이며, '너를 구원과 부활로 이끄는 일'입니다.
성직자와 수도자, 그리고 신자로서 각자의 신분에 맞게 주어진 예언직의 사명을 얼마나 잘 수행하고 있는가?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6,51)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하느님과 천사들처럼,
칸타케의 내시를 주님께로 이끈 필리포스처럼,
믿는 우리도 각자에게 주어진 예언직의 사명을 기억하면서 너를 하느님께로, 이제와 영원히 생명을 주는 살아있는 빵(살)이신 성체께로 이끄는 선포자들이 됩시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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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 다니는 자녀를 둔 어떤 형제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워낙 사교육비가 많이 든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형제님께 “형제님 월급으로 세 아이 공부시키는 것이 만만치가 않지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 형제님께서는 웃으며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주는 기쁨을 돈으로 어떻게 환산하겠습니까?”
아이 키우는 비용이 적지 않지만 키우는 기쁨이 훨씬 크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아이 키우는데 기쁨만 있을까요? 고통과 시련도 분명히 있고, 기쁨보다 더 많은 힘듦의 시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녀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오는 작은 기쁨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지요.
커다란 이익을 통해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자그마한 기쁨으로도, 자그마한 사랑으로도, 자그마한 만족으로도 충분히 이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작은 것들을 무시하면서 오지 않을 큰 것만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생명의 빵이십니다. 이 빵은 세상의 빵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순간의 만족을 주는 세상의 빵과는 달리,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영원한 만족을 줍니다. 그런데 이를 이 세상 안에서는 느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현존을 삶의 순간순간에서 느끼는 사람만이 생명의 빵을 체험할 수 있으며, 이런 힘으로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를 먹고 배불리 먹었습니다.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사실로, 하느님께서 직접 주신 만나를 배불리 먹었다는 사실이 커다란 은총이라고 생각했기에, 과거 조상들에 대해 부러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은총을 얻었던 과거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생명의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렇다면 누가 더 큰 은총을 얻게 된 것일까요?
커다란 은총이 주님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일상 삶에서 우리와 함께하는 주님을 느끼고, 또 그 주님과 함께하는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느끼지 못하고, 주님과 함께하지 못하는 사람은 늘 불평불만으로 가득합니다. 세상의 기준만을 내세우면서 자신에게 주어지는 은총이 적다고, 아니 없다고 말하며 힘든 삶이라면서 한숨을 내쉬고 눈물짓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일상의 순간에서도 주님께 감사할 이유를 찾을 수가 있으며, 큰 기쁨과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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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원한 생명>
- 삶은 선물膳物이자 과제課題이다 -
오늘은 어린이날입니다. 나이에 상관없이 하느님 앞에서 마음은 누구나 동심의 어린이입니다. 요즘 나이들어 동요의 진가를 깨닫습니다. 작년 서울대교구 다섯분의 주교님들이 함께 ‘꽃밭에서’ 동요를 부르던 천진한 모습들이 눈에 선합니다. 아주 오래전 약 45년전 초등학교 교사시절 제자들이 즐겨 부르던 동요중 하나입니다.
무엇보다 남녀노소할 것 없이 좋아하는 동요가 어린이날 노래일 것입니다. 예전 5월중 피정오는 신자들이나 또 수도원 산책시 가장 많이 부르는 동요가 어린이날 노래입니다. 아름다운 신록의 계절에 신록의 기쁨 가득 채워 주는 어린이날 노래입니다.
“날아라 새들아, 푸른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벌판을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손잡고 나가자 서로 정답게, 우리가 자라면 나라의 일꾼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참 좋은 성가처럼 느껴지는 동요입니다. 참으로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누리는 믿는 이들에게는 매일이 푸르른 동심의 어린이날입니다. 그 누구도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부단한 회개를 통해 끊임없이 주님께 돌아가 주님과 함께 할 때 영원한 생명의 구원이요 늘 푸른 영혼의 어린이들입니다.
오늘 시간되는 대로 성모성월 신록의 파스카 계절에 어린이날 노래를 흥겹게 불러 보시기 바랍니다.
저 또한 5월중 피정오는 분들에겐 필히 어린이날 노래를 함께 부르려 합니다.
삶은 선물이자 과제입니다.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과제입니다. 누구나 참 유일무이한 소중한 인생입니다. 참으로 모든 이들에게 유일한 구원은 파스카의 주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해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해 죽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의 것이고 죽어도 주님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가 아버지께서 당신 아드님께 보내주신 아버지의 선물이요, 아버지의 선물, 바로 이것이 우리의 신원입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영어 주석의 설명도 은혜롭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향한 아버지의 선물들이다(Disciples are the Father’s gift to Jesus)’, 분명 우리의 신원을 예수님을 향한 ‘아버지의 선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알고 보면 누구나 아버지의 선물이란 존엄한 품위의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선물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의 주님이자 스승이요 평생 도반인 주 예수님과 우정관계를 깊이하는 평생과제가 영원한 생명의 구원에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여기서 주변 형제들을 예수님께 인도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복음 선포의 사명인지 깨닫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아버지의 선물이면서 동시에 주님의 천사가 됩니다. 바로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사람들을 예수님께 인도하는 역할이니 이는 주님 천사나 성령의 역할이기도 합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얼마나 은혜로운 구원의 복음인지요! 우리 영혼의 근원적 배고픔과 목마름을 일거에 해결해 주는 생명의 빵이신 주 예수님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생명의 빵인 주님의 성체를 모심으로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누리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인생 무지와 허무에 대한 근원적 처방도 생명의 빵이신 주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평생을 살아도 자신이 아버지의 선물이란 귀한 품위의 신분도 망각한채 주 예수님도 모르는 무지몽매한 삶을 살다가 인생을 마친다면 얼마나 허망하고 억울하겠는지요!
바로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은 아버지의 선물같은 존재의 에티오피아 내시가 필리포스의 안내에 따라 예수님께 이르는 구원의 과정을 보여줍니다. 주님 천사의 명령에 따라 예루살렘에서 가자로 내려 가다 다시 성령의 지시에 따라 에티오피아 내시에 접근하는 주님의 사람, 필리포스입니다.
이어 필리포스는 내시에게 예수님께 관한 복음을 전함으로 마침내 내시는 세례를 받아 예수님을 만나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체적 묘사입니다.
‘필리포스가 내시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들이 물에서 올라오자 주님의 성령께서 필리포스를 잡아채듯 데려가셨다. 그래서 내시는 그를 더 이상 보지 못하였지만 기뻐하며 제 갈길을 갔다.’
얼마나 신바람 나는 구원의 장면인지요! 필리포스의 인도에 따라 세례를 받음으로 파스카의 예수님과 하나 됨으로 구원의 기쁨으로 충만한 내시는 제 갈길을 갑니다. 주 예수님을 만남으로 존재론적 변화의 구원을 체험한 에티오피아 내시입니다. 이어 모든 고을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주님의 일꾼 필리포스입니다.
결코 비상한 복음 선포가 아닙니다. 일상의 평범한 오늘 지금 여기가 내 복음 선포의 자리입니다. 그러니 복음 선포에 앞서 우선 나부터 평생과제인 주 예수님과 사랑의 우정관계를 깊이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그대로 우리의 삶자체가 존재론적 복음선포가 될 것입니다. 이보다 좋은 복음 선포의 삶도 없을 것입니다.
말그대로 우리는 성령이나 주님의 천사처럼, 주님을 찾는 이웃에게 예수님을 가리키는 희망과 구원의 이정표, 기쁨과 행복의 이정표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과의 우정을 날로 새롭게, 깊게 하시며 당신 복음의 일꾼으로 우리 삶의 자리로 파견하십니다.
“주님을 찬양하세, 그지없이 높으신분. 주님은 나의 힘, 나의 굳셈. 나를 구원하셨네. 알렐루야.”(탈출 15,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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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miHeMCKVzQ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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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요한 6, 51)
한 번도
빵이
되어 본 적이
없는 우리들
시간이다.
빵이 되지 못한
삶은 사랑을
실천하지 않은
삶이다.
모든 사랑은
생명의 빵에서
시작된다.
하늘에서
내려온
기쁜소식은
다름아닌
생명의 빵
사랑의 빵이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하여
아래로
내려오시고
우리는
계속하여
높이높이
올라간다.
내려오지
않고서는
우리를
끌어안을 수
없고 우리가
분명히
볼 수 없다.
온 삶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은
사랑이다.
내려오신
생명의 빵은
무덤이 아니라
살아계신
생명의 빵임을
우리들에게
일깨워 주신다.
생명의 빵은
삶의 맛을
느끼게 하신다.
생명의 빵은
예수님의
일생이다.
끝이 아니라
시작이며
오늘의 빵이
되신다.
빵의 따뜻한
맥박 소리를
듣는다.
십자가의
상처처럼
손가락으로
찔러 보아도
먼저 당신을
열어 보이신다.
사랑하기에
상처가 있고
사랑하기에
상처도
축복이 되고
은총이 된다.
사랑하는
모든 것이
되게하시는
생명의
빵이시다.
우리또한
사랑하는
사랑의 빵이
되게 하시는
생명의 빵이시다.
빵의 고향이
하늘 나라이다.
오늘은 짧고
사랑은
영원하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생명의 빵으로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시며
우리를 다시
살리시는
빵이 되신다.
우리도
빵이
되어야 할
사랑의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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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요한 6, 51)
아름다운 오월을
만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생명의 빵이 있습니다.
살아있는 빵은
만남의 빵입니다.
내려오지 않고서는
만날 수 없고
내려오지 않고서는
소통할 수 없습니다.
내려오는 길이
참된 생명의
길입니다.
내려오시는 사랑이
우리를 성장시키는
참된 사랑이
되었습니다.
내려오신
예수님 사랑으로
하느님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함께 하시기위해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십니다.
하늘에서 내려 온
살아있는 빵은
우리의 허기와
눈물을 닦아줍니다.
살아있는 빵으로
살아있는 생명의
시간이 됩니다.
살아있는 빵으로
사랑받는 자녀임을
알게됩니다.
빵의 사람이며
사랑의 사람입니다.
사랑은 내려와
빵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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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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