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등포 조금 올라가는 길에 있는 한산촌입니다.
한산촌 사람들/ 고희 범
전남 무안군 삼향면 왕산리 야트막한 야산에는 20년 전까지 결핵환자 요양시설인 '한산촌'이 있었다. 한산촌은 국내 결핵환자들이 줄어들고 인근에 국립목포결핵병원이 들어서면서 35년 역사를 뒤로 하고 문을 닫았다. 설립자인 여성숙 선생이 개신교 수녀회인 '한국디아코니아자매회'에 한산촌의 부지와 건물을 모두 기부해 이곳에는 이 수녀회가 운영하는 노인요양원이 들어섰다.
여 선생은 목포에 결핵전문인 목포의원을 개업한 뒤 1965년 목포 시내에서 20분 거리인 이곳에 한산촌을 설립해 입원환자들을 돌보면서 결혼도 하지 않은 채 결핵환자들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벌거숭이 야산에 한두그루씩 나무를 심고, 환자들의 숙소를 한두채씩 지어가면서 가꾸어 놓은 한산촌은 이제 울창한 숲과 현대식 건물들로 채워졌다.
35년동안 한산촌을 거쳐 간 사람들은 600여명에 이른다. 한산촌 입촌환자들은 1960~70년대만 해도 결핵치료약이 파스, 아이나 정도 밖에 없어 최소한 1~2년 이상 요양생활을 해야 했다. 1970년대 중반 이후에야 마이암부톨, 리팜신 같은 고성능 신약이 개발되면서 치료기간이 짧아져 80년대 들어서는 한산촌 요양 기간이 2~6개월로 줄어들었다.
특히 1년 이상 장기요양을 하고 결핵 완치 판정을 받은 뒤 돌아간 사람들은 여성숙 선생과 이곳 한산촌을 잊지 못한다. 과거에는 결핵이 무서운 병이어서 한산촌에서 목숨을 건진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으니 그럴 법한 일이다. 거기다 여 선생의 어머니 같은 따뜻한 사랑과, 동료환자들과 나눈 동병상련의 우애를 온몸으로 느끼는 나날을 한산촌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이 '한산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매년 한차례 이곳을 찾는다.
올해는 여 선생의 93회 생신을 이틀 앞둔 10월30일 모임이 열렸다. 매년 20여명이 모였는데 이번에는 12명이 참석했다.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한산촌 시절 이야기며 각자의 근황 소개 등으로 밤새 이야기꽃을 피웠다. 요양 당시에는 절대 금기사항이던 술도 마시면서.

93회 생신을 맞은 여성숙 선생. 한산촌을 찾은 회원들에게 가까이 다가오라고 손짓하고 있다.
한산촌의 생활수칙은 엄격해 음주나 흡연 등의 금기를 어기면 퇴촌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대부분 상당한 반성의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실질적인 퇴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며칠동안 목포 주변을 돌아다니다 슬그머니 돌아와 다시는 사고를 치지 않겠다고 서약하는 것으로 해결된 경우가 있는가 하면, 하루종일 재래식 화장실의 똥을 치운 끝에 온몸에서 냄새를 풍겨 '분(糞)남이'라는 별명을 얻는 것으로 퇴촌 결정이 취소된 사례 등등 온갖 사연이 전설처럼 전해진다.
나는 지난 1985년 폐결핵 진단을 받고 한산촌에서 2개월 반 동안 요양했다. 이 기간은 나에게 참으로 유익했다. 만 10년 동안 기자생활을 하면서 조금도 쉬지 못한 채 너무 바쁘게 살아오다 마침내 맘껏 휴식할 수 있었던 것이 그 첫째이다. 한산촌에서 지낸 2개월 반은 나에게 더 없이 행복한 시간이었다.
또한 한산촌 생활은 죽음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곳에서 만난 30대의 결핵내성환자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였다. 결핵이 재발하면서 그동안 복용해온 치료약에 내성이 생겨버린 결핵환자의 경우 새로운 약이 개발되지 않는 한 치료가 불가능한 상태로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게 된다. 미모의 그 여성환자는 끝내 한산촌을 떠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강원도 오지에서 농사를 지으며 지내다 죽음을 맞았다.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기를 거부한 그녀의 마지막 삶은 숭고하기까지 했다.
무엇보다 여 선생을 만난 것은 나에게 큰 행운이었다. 평생을 바쳐 사랑을 실천한 여 선생은 자신을 드러내기를 극도로 꺼리셨다. 다른 사람들의 칭송도 무척 부담스러워 하셨다. 언론 보도는 물론, 여러 기관에서 수여하려는 상도 모두 거부했다. 다만 1988년 인도주의실천의사회가 수여한 상을 받은 것이 유일하다. 여 선생의 마지막 꿈은 의료장비가 갖춰진 의료선으로 결핵 발생율이 높은 섬 지역을 순회진료하는 것이었으나 이를 이루지 못했다. 여 선생은 현재 한산촌 구내에 있는 주택에서 생활하고 있다.

한산촌 내 여 선생 자택 거실을 가득 메운 한산회원들이 기념촬영에 바쁘다.
주말 밤 여 선생을 모시고 한산회원들이 나눈 정담을 소개한다.
김양안 (피부과 전문의) : 전남 순천에서 운영하던 병원의 운영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 후배에게 병원을 넘기고 최근 두달 동안 쉬고 있다. 서울로 병원을 옮기라는 권유도 많이 받았으나 노무현 대통령의 얘기대로 시골에도 사람이 살아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에 서울로 가지 않았다. 좀 쉬고 나서 다시 개업할지 여부를 결정할 생각이다. 지금은 전남 함평에 마련해둔 농장을 가꾸는 일에 흠뻑 빠져있다. 지난 4월에는 영국에서 유방암 수술 전문의로 일하고 있는 아들이 동료 의사와 결혼해 영국인 의사 며느리를 얻었다.
신중현 (양계업) : 경기도 양평에서 양계장을 30년 동안 운영했고 시설도 전국 최고 수준이지만 지금도 닭을 잘 기르지 못한다는 느낌이다. 지난 10년 동안 정부 지원금을 받아 계분 비료 제조사업을 병행해 왔는데 앞으로 양계장은 접고 본격적으로 최고급 유기질 비료사업을 하기로 했다. 일본 수출이 목표다. 이렇게 된 데는 옆에 앉아 있는 강대식 형의 조언이 결정적인 것이었다. 내가 진로를 고민하고 있을 때 "현재 하고 있는 사업과 연계되는 일을 찾아보라"고 조언했는데 닭과 관련된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찾은 것이다. 마진이 가장 높은 사업이 물 장사와 똥 장사다.(일동 웃음)
문미옥 (어린이집 운영) : 올 봄 초기 위암 진단을 받고 수술했다. 수술한 뒤 식습관을 고치지 못해 회복기에 고생했지만 지금 괜찮다. 별로 걱정하지 않고 있다.
김경숙 (주부, 전직 공무원) : 갱년기를 잘 보내 건강한 노년을 맞기 위해 또래들과 함께 운동을 하는 등 건강관리에 시간을 많이 보내는 편이다. 주 1회 성당에서 성경공부도 한다. 남자들은 부인들이 이전과는 다른 욕구나 태도를 보일 때 유의해야 한다. 갱년기 여성들이 겪는 어려움을 남편들이 외면하면 여자들이 큰 상처를 받는다. 자칫하면 우울증이 올 수도 있었던 내 경험으로 미루어 남편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소준섭 (부동산 임대업) : 여러 사람으로부터 얼굴이 좋아졌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화를 누르려는 노력의 결과인지 모르겠다. 불교에 입문한 지 4년이 됐다. 그동안 경전도 많이 읽고 불교 모임에도 자주 나갔지만 큰 감동이 없었다. 얼마 전 "어떤 문제든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것"이라는 조언을 듣고 스스로 비우는 작업을 계속했다. 화두라고 할까, "나는 누구인가"를 아직도 묻고 있다.
강대식 (목사) : 한산촌에 입촌한 것은 대학 3학년 때인 23살 때였다. 구도를 위한 방황이 그때 시작됐다. 길을 찾아 헤매다 이것이 길이다 싶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가 보면 결국 그건 길이 아니었다. 그래서 길 많이 바꿨다. 끊임없이 모색하면서 63세가 됐다. 지난 2년 동안 관상동맥이 막혀 심장수술을 받고, 요관에 암이 생겨 신장 제거 수술을 받는 등 수술을 네번이나 받았다. 최근에는 방광으로 전이됐다는 판정을 받았다. 상황이 진전되면 방광을 제거해야 되는 것이다. 끔찍한 일이었다. 그런데 어떤 목사를 소개받았다. 대체의학을 공부한 이 분이 진단해보고 나서 암세포가 이미 위, 폐, 간, 갑상선으로 전이됐다고 했다. 이 분의 지시대로 동물성 식품을 딱 끊고 채식만 했다. 심지어 김치에 젓갈도 넣지 않는 채식이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번씩 한약재인 함초 등을 섞어 만든 '비파고'를 여러 곳에 붙이는 치료를 받았다. 4주만에 병원에 갔는데 흔적도 없이 치료가 됐다고 하더라. 너무도 놀라운 일이었다. 나 말고도 병원에서 포기한 암환자들이 치료되는 것을 여러 건 목격했다. 주변에 암환자가 있으면 나에게 연락해라.
윤용국 (무역업) : 엊저녁에 음식을 먹다 혀를 씹었는데 피가 날 정도로 상처가 생겼다. 말을 조심하라는 경고라고 생각했다. (일동 웃음). 새벽 4시40분에 일어나 체조를 하고 새벽기도회에 갔다가 집 근처의 남산으로 가서 운동을 한다. 하루 종일 컨디션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YOUNG OLD'라는 말이 있다. 젊은 노인이라는 뜻일 거다. 목표에 계속 도전함으로써 젊음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요즘은 젊은 시절과는 달리 일의 성취 보다는 더불어 살고, 나누고 베푸는 생활에 도전하고 있다.
홍성담 (판화가) : 아침 8시 작업실에 나가 저녁 7시까지 그림만 그린다. 지난 여름에는 3개월 동안 1500매 짜리 소설 한편을 썼다. <동행-유다와 예수>라는 제목이다. 인터넷 신문인 <가톨릭뉴스 지금 여기>에 10월부터 연재를 시작했다. '가롯 유다가 본 예수전'이다. 이 소설 쓰면서 1년여 동안 있었던 한산촌 생활이 많이 생각났다.
(미술작품에 샤마니즘적인 요소가 많은 이유는 무엇이냐는 좌중의 질문을 받고) 세계의 문화는 3개의 섹터로 나눌 수 있다. 유럽과 아시아, 아메리카다. 라틴 아메리카의 경우 특별한 리얼리즘을 보여준다.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 같은 작품이 대표적이다. 환상적 리얼리즘, 마술적 리얼리즘이라고 부를 수 있다. 아시아의 문화적 원형질은 샤머니즘과 애니미즘이다. 한국에 외래종교가 들어오면 샤머니즘적으로 변질되는 것도 종교인들의 문제라기 보다 우리의 문화적 원형질이 샤머니즘이기 때문이다. 나는 작품을 통해 아시아성, 특히 동아시아성의 문화적 양식을 구축하는 것을 과제로 생각하고 있다.
부좌현 (정당인) : 지난 6.2 지방선거에서 경기도 안산시장으로 출마할 계획이었으나 예선 탈락했다. 1995년 처음 정치에 입문한 뒤 첫번째 도전에서 도의원에 당선돼 정치를 너무 쉽게 생각하게 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정치 하면서 스스로도 권력의지가 없다고 느껴왔다. 그래서 주변에서는 내가 정치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을 하기도 하지만 제대로 된 정치를 함으로써 사회에 도움이 되는 역할을 하는 것이 나의 소명이라고 생각한다. 2012년 총선에 출마할 생각이다.
고희범 (제주포럼C 공동대표) : 평생 정치는 나와 상관없는 영역이라고 여겨왔는데 고향 제주도와 관련된 일을 하다가 분노와 슬픔을 이기지 못해 어려운 결심을 했다. 그러나 지난 6.2 지방선거에서 낙선했다. 선거과정에서 많이 배웠다. 제주포럼C 활동 열심히 하고 있다. 또 마을들 돌아다니면서 구경도 하고 공부도 하고 있다.
김영희 (강대식 목사 부인) : 남편이 2년동안 4번 수술을 받게 되면서 동반자의 소중함을 알게 됐다. 남편도 많이 유연해졌다. 그동안 남편이 방향 바꾸기를 거듭하면서 적응할 만하면 다시 방향을 바꾸고 해서 많이 힘들었다. 그런데 진리에 목말라 하는 남편이 모습이 존경스럽게 느껴진다. 나의 멘토이기도 하다. 남편의 암 투병 과정을 거치면서 오히려 행복을 느끼게 됐다. (이들 부부는 한산촌에서 맺어진 커플이다.)
이영숙 (한국디아코니아자매회 대표) : 여러분의 얘기 들으면서 정말 어려웠던 시절 잘 견디고 지금 이렇게 당당하게 서 있구나 생각하니 자랑스럽고 고맙다. 오랫동안 목포에서 재가복지 일을 해오다 디아코니아자매회의 책임을 맡게 돼 천안으로 옮겼다. 대표라는 자리가 내 자리 같지 않아 힘들었다. 유방에 종양이 생겨 수술을 받았는데 이 과정에서 죽음에 두려움 보다는 동료 자매들에 대한 부담이 컸다.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삶이든, 육체든, 신앙이든 집착하지 않기로 했다. 주어진 일과 만나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 하기로 했다. (이 대표는 80년대 한산촌에서 환자를 돌보다 결핵에 걸리기도 했다.)

한산촌과 여성숙 선생을 잊지 못하는 한산촌 출신들. 홍성담 화백이 사진을 찍느라 빠져 있다.
여성숙 선생은 1년 만에 만난 회원들을 아들 딸 보듯 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여러분을 만날 때마다 반갑고 흡족하다. 다시 만나지 못한다면 서운할 것 같다. 여러분을 보는 것은 마치 내 생애를 보는 것 같다. 여러분을 만나기 전에는 이 모임을 그만 두자고 할 생각이었는데 그만 두자고 하지 않기로 했다. 이제 눈도 귀도 어두워지고 여러분을 만나는 것도 몇번 아니겠다 싶어 젊은 시절 내가 크게 감동했던 헤르만 헷세의 소설 <싯달타>를 한권씩 선물하기로 했다. 이미 읽었겠지만 한권씩 선물하고 싶다."
이날 여 선생은 이번 모임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우리들에게 책과 함께 양말 한 켤레씩을 선물하려고 준비했다고 한다. 그러나 책만 나누어주고 양말은 선물하지 않았다. 양말 선물이 이별을 선언하는 것처럼 느껴지신 모양이다. 여 선생은 전복과 꼬막을 잔뜩 준비해 우리를 대접했다. 그리고 헤어질 때는 일일이 손을 꼭 잡고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다시 만날 기대를 강하게 표시했다.
우리는 1년에 한번 여 선생을 뵙는 게 부족하다는 의견에 따라 봄 가을 두차례 만나기로 의견을 모았다. 여 선생의 건강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