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5일 짬 내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죽음은 독침 같다(1코린 15,55). 보이지 않는 데서부터 날아오는 독침을 피할 수 없다. 사고는 예고하고 발생하지 않는다. 어제와 같은 오늘이었는데 그의 마지막 날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매일 죽음의 독침을 경계하며 불안하게 살 수는 없다. 선종(善終)의 은혜를 구하는 이유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 저에게 선종하는 은혜를 주시어 죽음을 맞는 순간에도 영원한 천상 행복을 생각하고 주님을 그리워하며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아멘.’
하느님 앞으로 갈 때는 여기 있는 것 중에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고, 나를 죽도록 사랑했던 이들도 함께 그 강을 건너지 못한다. 어느날 갑자기 혼자서 툭 하고 세상에 태어나고 떠날 때도 혼자다. 외로운 인생길에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라고 노래하지만 여기서 즐거움만 쫓는다면 내 삶은 너무 허무하다. 세속적인 쾌락 속은 텅 비어 아무것도 없는 줄 아주 잘 알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아니면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없으니 그 허무함을 애써 외면하는 것이다. 선종을 위한 기도에서처럼 죽는 순간까지도 하느님과 그분의 나라를 그리워해야 한다. 그러면 나의 인생은 참된 의미로 가득 찬다. 나를 구하시려고 외아들을 내어주기까지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믿고 바라고 사랑하게 된 건 참으로 감사할 일이다.
시작이 있으니 그 끝이 있는 게 당연하다. 자연의 모든 게 다 그러한데 그의 일부인 내 육체만 그러지 않을 거라고 할 수 없지 않은가.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살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그런 어리석은 생각에 지배당하고 만다. 내가 악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날은 날아오는 독침처럼 내게 온다. 어제와 같은 오늘이 마지막 날이 되기도 한다. 노아가 방주 문을 닫는 날이 그랬고, 소돔과 고모라 땅에 재앙이 닥친 날도 그랬다(루카 17,27-28). 유황과 불이 쏟아지는 곳에 누가 살아남고 무엇이 남아 있겠는가. 그런데도 롯의 아내는 그 뒤를 돌아다봐서 그대로 소금기둥이 됐다(창세 19,26). 천사가 미리 알려주고 피하게 해줬는데도 말이다.
구약에서 독수리와 같은 맹금은 심판 장면에 자주 나타난다. 동물의 사체를 먹는 독수리는 뛰어난 시각과 후각 능력으로 멀리서도 사체를 찾아낸다고 한다. 마지막 날 심판이 어디서 이루어지냐는 질문에 예수님은 즉답을 피하시고 그 대신 이렇게 대답하셨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루카 17,37).” 독수리가 멀리서도 사체를 찾아내는 거처럼 아무도 죽음과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이 세상에서 세속의 가치대로, 세상사에 함몰돼서 살아가는 이들,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루카 17,33).” 반대로 저 하늘 높이 유유히 나는 독수리를 영적인 존재로 여긴다면 그들이 뭔가 찾아 땅으로 내려온 그곳은 바로 예수님의 죽음이 있는 곳, 제단이고 주님의 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제단으로 모인다.
예수님, 언제나 하느님만 생각하면 지낼 수는 없습니다. 먹고 사느라 이것저것 해야 할 것도 고민해야 할 것도 많습니다. 그래도 잠시 짬 날 때 하늘을 올려다보며 제가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왜 이러고 사는지 생각합니다. 주님, 주님이 아니면 사는 이유가 없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제 신앙을 지켜주시고 제 발걸음을 아드님께로 인도해 주소서. 아멘. |
첫댓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
저에게 선종하는 은혜를 주시어 죽음을 맞는 순간에도
영원한 천상 행복을 생각하고 주님을 그리워하며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