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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여덞의 소녀여
"로맨스인가요, 불륜인가요?"
그녀가 물었다.
왜 나를 질책하는지, 난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왜 그런 식으로 말하는거야?"
"당신 부인이 불쌍해서요."
"넌 그런 말할 자격 없어."
"선생님도요. 그러고 보니 우린 공범자네요."
".....역시 우리 사랑은 죄일까?"
까르륵 웃으며 가운을 벗는 그녀.
도자기 같은 매끄러운 피부, (식상한 표현이긴 해도) 그건 그녀의 매력이다.
속옷을 챙겨 입으며 그녀가 말한다.
"죄든 뭐든, 어쨌든 선생님은 '사랑'이라고 하시네요."
그럼 이건 사랑이 아니니?
아니, 네 말대로 정말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난 단지 단순한 육체 관계에 발 묶인 노예 아닐까.
"내일 뵈요, 선생님. 부인에게 잘 하시구요."
-
"야, 너 요즘 소문이 심상치 않던데."
"소문이라니?"
소문, 그 한 단어에 내 심장은 철렁 내려앉았다.
영훈이 자식이 웃으며 말했다.
"왜, 그 있잖아. 너 학생중에 이지애라고, 몸매 쭉 빠진 애."
"그 애과 왜?"
"야, 다 알아, 임마! 사실 소문이라는건 거짓말이고~ 내가 어제 우연히 봤지.
그 여자애랑 너랑 호텔 들어가는거."
"...잘못 봤겠지."
"야, 이 새끼, 부랄친구한테 숨기기냐! 이 의리 없는 자식아."
영훈이는 장난치며 말했지만 그 사실을 들켰단 사실에 내 심정은 착잡하기만 하다.
어쩌다가 들켰지?
다음부터는 더 조심해야 겠어.
영훈이를 못 믿는게 아니다.
함부로 나불댈 녀석은 더더욱 아니고.
하지만 앞으로 학원 안에서 지애와 계속 얼굴 마주할 텐데, 어떻게 신경 안 쓸수가 있겠어?
자꾸 내 옆구를 찔러대는 영훈이를 보며 난 힘겹게 입을 땠다.
"....얘기하지 말아줄래."
"나 못 믿냐? 이십 팔년 우정!"
"알아. 믿는데. 그래도 말하지 말아줄래."
"짜식, 소심하기는. 근데...언제부터 만난거야?"
"..그냥. 얼마 안됐어. 두세달쯤."
"흐-응. 오래된건 아니지만 짧은건 또 아니네. 근데, 어떠디?"
"뭐가?"
"뭐긴 뭐냐, 뻔하지. 어때, 열 여덞 탱탱한 애 잡아잡순 소감이?"
"...말투가 뭐 그러냐."
"걔 속은 어떻디? 딱 보면 어리지 않게 몸매가 아주 그냥 끝내주던데. 팔 다리 길쭉하고~"
"...."
"걔 처녀였냐? 아, 진짜 그랬음."
"-그만해. 나, 장난 아니야. 진심이야. 진심인 것 같애."
"너...정말이야?"
"미쳤나봐. 나, 걔만 보면 가슴이 아파. 단순히 좋아서 두근거리는게 아니라, 가슴이 아파.
여기가 저려. 내 옆에만 있어주면 모두다 버리고 걔가 뭘하든, 그냥 내 옆에만 있어주면 좋을 것 같아."
"너...야..진짜....너..참..말 문이 막힌다. 막혀. 너 지금 스물 여덞이야! 걘 열 여덞이고!
그 뿐만인 줄 알아? 걘 미성년자! 아직 고등학교도 졸업 안한 어린 계집애!
더 웃긴건, 니가 유부남이란거야. 너 결혼한지 이년도 안되서 이게 뭐니? 그럴거면 결혼은 왜 했어?"
"그러게 말야..."
"...어떻게 그런 대답이 나오냐. 여기선...여기선...아 씨발. 됐어. 너 지금 제정신 아냐!
너 당장 걔랑 끝내. 그냥 불장난에 동조해줬음 됐어. 니가 왜 그 불에 데여?!"
나도 모르겠어.
영훈아.
나 정말 미쳤나봐.
그래도 어떡해?
사랑하는데.
이렇게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픈데.
걔가 아니면 안돼.
이혼이든, 사직서든, 사람들이 욕을 하든 상관없어.
난 그 애만 있어면 돼.
-
"우리, 같이 죽을까?"
"네? 뭐라구요?"
난 진심이야.
-라고 되새기며 우린 언제나처럼 호텔 안에서 만남을 가졌다.
그녀는 믿기 어렵다는 얼굴로 날 쳐다봤다.
"진심이예요?"
"응."
"선생님, 지금 내 나이가 몇 살인 줄 알아요? 난 아직 살 날이 오십년도 더 남았다구요.
아직 반도 못 살았는데, 이대로 죽을 순 없죠."
"싫으니?"
"...싫다기 보단."
그녀는 적절한 말을 찾는 듯, 눈을 굴렸다.
하지만 곧 포기하고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하다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럼 우리 같이 도망갈까요?"
"정말?"
"네. 아니면 선생님 이혼하구요, 같이 살림 차려요. 난 뭐 자퇴하죠."
그렇게 쉽게 얘기해도 되는걸까,
그렇게 쉽게 꿈꾸듯 말해도 되는거니?
너도 결국 소녀구나.
어쩐지 안심이 됐다.
"그럴까? 정말?"
"네. 그래요. 정말."
우린 약속을 한걸까?
하지만 약속, 이란 단언 입에 꺼내지도 않았는걸.
그녀와 단 한번도 약속을 한 적이 없다.
그도 그렇듯, 약속이란게 존재할 사이가 아니니까.
내일을 내다볼 수 없는 사이니까.
난 결심했다. 아내에게 얘기하기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고, 이혼하고 싶다고.
아내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
딩-동.
탁탁탁탁.
달칵-.
"오빠, 왔어? 왠일로 초인종이야, 헤헤."
"응. 오늘은 그냥..니가 마중 나온 모습이 보고 싶어서."
"뭐야-, 싱겁게. 저녁 먹었어?"
"아니."
"배고프겠다! 같이 먹자. 나도 아직 안 먹었어."
내가 언제, 초인종을 누르고 그녀가 마중 나오는 모습을 보았더라?
내가 언제, 그녀와 함께 마지막으로 저녁을 먹었더라?
마지막으로 그녀가 수줍게 웃는 모습을 보았더라?
도대체 어디서 부터 방향을 잃은 것일까.
"맛있어?"
"어? 응."
"같이 먹을 줄 알았으면 오빠가 좋아하는거 많이 해뒀을 텐데. 내일은 집에서 먹을거야, 저녁?"
"어?....어. 먹어야지."
"그럼 내가 오빠가 좋아하는 순두부 찌개 해둘게."
아이처럼 기뻐하는 그녀를 보면서 가슴이 아팠다.
난 도대체 그동안 뭐였지?
변명할 만한 무언가가 있기는 한가?
아내, 라는 존재가 어느 순간 부턴가 '두번째'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내겐 아이같은 웃음도 함께하는 저녁도 그 마중도 더이상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그 아이같은 웃음으로,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해주겠다며 말하는 내 아내를 보는 순간 난 충격 받았다.
이건-,
충격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잃어버렸던 가슴 저편의 무언가를 되찾은 것 같았다.
그것은 뜨겁고, 편안하고, 동적이었다.
-
"결국에 우린 불륜이었나요?"
나이보다 성숙하고 '여자'같던 그녀.
'그녀'라는 단어가 누구보다 어울렸다.
그런 그녀를 사랑했다.
가슴이 저미도록.
"응, 그랬나봐."
"-학원 그만 두지 마세요."
"하지만 이미 사직서도 냈는걸. 하하. 걱정마. 다른 곳에서 더 좋은 조건으로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으니까."
"그만두지 마세요. 어차피 우리 사이, 아무도 모르잖아요?"
"아무도 몰라도 우리가 알잖아. 남 손가락질 받는 것보다 당사자끼리 서로 얼굴 마주치는게
더 가슴아프지 않을까. 앞으로 학원에서 계속 얼굴 마주치면 생각보다 힘들거야.
이래뵈도 우리 사랑했으니까."
"...네.사랑했어요."
"나보다 니가 더 걱정이야. 하지만 넌 강하니까 괜찮겠지? 괜한 걱정이라고 네가 웃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는 비웃지 않았다.
"미안해...별 소릴 다해놓고 너한테 상처만 줘서."
"선생님...가지마세요. 전 괜찮아요. 저 걱정하지 마세요. 전 괜찮으니까, 학원 그만두지 마요.
제발....선생님...그냥 얼굴만....
........
그냥 얼굴만 보게 해주세요....그거면 되요..."
내 예상은 모두 빗나갔다.
그녀는 날 비웃지 않았다.
화내지도, 겁쟁이라고 비난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강하지 않았다.
"...미안해.."
"미안이라고...말하지 마세요. 난 괜찮으니까, 학원 그만 두지 마세요.."
그건 열 여덞, 어린 소녀의 고집같은 거였다.
그녀는 내게 맞추기 위해 어설픈 어른 여자 흉내도 내보았고 멋진말도 유혹도 연습해보는
어린 소녀에 불과했다.
그녀는 어렸다.
그리고 약했다.
그건 어쩐지 날 안심하게 해주었다.
그것은 굉장히 모순적인 감정이었다.
그것은 그녀의 새출발을 암시하고 그녀의 봄꽃같은 새 사랑,
앞으로 웃을 것이다, 란 안심이었다.
그녀를 대할 때마다 또래 아이들보다 성숙하고 어른스러운 면이 걱정스러웠다, 항상.
하지만 앞으로 그녀는 자신의 자리를 찾아갈 것이고 그곳에 자리잡아,
언젠가는 날 떠올리며 이런 사랑도 있었지, 라며 웃을 날도 오겠지.
누구보다 아름답고 똑똑하고 매력적인 그녀니까.
그녀는 잘 해나갈 것이다.
눈물이 반쯤 맻힌 얼굴로 빨개진 눈으로 슬픈 얼굴로 그녀는 날 쳐다보았다.
그 시선이 내 심장을 미어지게 만들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난 입술을 떼었다.
"안녕."
그렇게 영원한 이별을 고했다.
그건 그녀와 나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지금 이 날을 되돌아 보면,
난 과연 후회할까, 옳은 선택이었다고 만족할까.
그건 시간에 맡기기로 하자.
어쨌든 스물 여덞, 내 심장을 철저히 뭉개버린 젊은 날의 불장난는 그렇게 끝났다.
사랑했던 열 여덞 소녀의 기억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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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글 잘 쓰셔서 부러워요~ ~
고맙습니다. 잘 쓰기는요;;
부러워요;ㅁ;.. 이렇게 주인공의 감정을 사실적으로 묘사한게 말입죠;ㅁ;.. 정말 글 잘쓰십니다아;ㅁ;
고맙습니다^ㅅ^ 그렇게 거창하게 말씀해 주시다니, 몸둘바를 모르겠어요!!^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