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非스포츠 게시판 전주이씨 진안대군파
Dunleavy Clippers 추천 0 조회 1,270 09.03.23 18:15 댓글 16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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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9.03.23 19:04

    첫댓글 조선 개국에서 태조의 군사력은 견고한 기반이었지만, 정몽주가 그에 대응할 수 있는 정치력을 가지고 대립했기 때문에 실제로 태종이 살해하지 않았다면 고려라는 왕조가 더 이어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태종이 조선 개국에 기여한 정도로 치면 태조의 모든 적자들중 으뜸입니다. 태종의 권력욕과 하고자 했던 일들을 보면 어떤 직위에서라도 국가에 공적을 쌓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왕자들이나 왕실 인사들이 주요직위를 계속해서 잡는 일은 태종시대를 제외하면 예종때까지 상당히 오래시간 지속되었습니다.

  • 09.03.23 20:05

    태조는 원래 왕위를 두번째 부인에게서 얻은 막내에게 물려주려고 하였죠. 이를 빌미로 태종이 들고 일어서서 정국을 장악한 거구요. 태조가 막내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던것을 두고 이성계가 북방민족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실제로 그랬기도 하구요.태조 이성계의 활동지역이자 기반지역이었던 조선 북동부 지역은 여진의 지역이었는데, 여진 등의 북방민족들은 원래 왕위를 막내에게 물려줍니다. 태종이 훗날 장자인 양녕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은 것도 이러한 영향이 어느정도는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 북방유목민족은 왕위를 물려준다기 보다는 기존 족장 내지는 왕의 사망시 영역분할을 하게됩니다 그 과정에서 장자는 가장 먼곳으로 차남은 그 다음, 그 뒤의 아들이 또 그다음으로 해서 막내가 자기들의 근거지를 차지하게 되는 관례죠 근거지를 차지하는게 왕위를 계승하는게 아닙니다 이성계가 여진족과 관계가 깊은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특성으로 왕위를 물려주지는 않았다고 봐야합니다

  • 1차, 2차 왕자의 난은 태종 이방원의 권력욕을 논하기에는 부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장자인 이방우가 스스로 떠난 이후 적자계승권에 대한 명분은 뚜렷이 약화되었고, 조선을 개국하는데 있어 이성계는 물론이고 그 신하들을 통틀어 이방원 이상의 공을 세운 인물은 거의 없다고 봐도 과언은 아니라고 봅니다 정몽주의 살해부터(루게릭님 말씀처럼 이 살해가 사실상 고려의 마지막이었죠) 그 이전에 이성계가 낙마로 인한 중상으로 반대세력에 의해 그 세력이 무너질때도 이방원의 적극적인 움직임이 그걸 만회할 기회를 갖게 했었죠 그런 이방원은 오히려 적자계승권이 무너진 상황에서 어리디 어린 동생에게 세자 자리를

  • 빼앗기게 됩니다. 하지만 이 후에 이방원의 행적을 보면 뚜렷히 무언가를 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당시 사병과 왕자들의 군권은 이방원만이 아닌 다른 왕자들과 신하들도 모두 가지고 있던 상황이었죠 오히려 당시 실세였던 정도전 파가 이성계의 건강상의 이유 , 또 명으로부터의 요동정벌을 내세우며 왕자들의 군권과 세력을 약화시키려고 했었죠 실제로 왕자의난 전에 왕자들이 가졌던 병권이 차례로 몰수 되었고

  • 곧 사병혁파까지 논의되면서 왕자들은 실질적으로 정도전파로부터 목숨의 위협까지 받게 되었죠 그런 과정에서 이성계의 건강이 악화되었다며 왕자들의 입궐을 요구하였고, 여동생의 남편의 밀고로 인해 그게 왕자들을 구금하려는 의도가 있음을 파악하고 그 길로 자신들이 가진 사병으로 난을 일으킨게 1차 왕자의 난이죠 1차 왕자의 난이후 실질적으로 방원이 핵심권력자로 떠오르게 되면서 마치 권력을 위한 쿠테타로 보여지지만 그 내면은 달랐다고 생각합니다

  • 2차 왕자의 난의 경우는 방원의 형 방간이 권력을 탐해서 일으킨 난임에도 이방원은 형과 조카의 목숨을 끝까지 보존해주었었죠 태종 이방원은 왕권과 조선을 강하게 할 목적이 있었을지언정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 움직인 인물이라고 보기엔 왕이 되기까지의 과정과 왕이 된 이후의 과정을 봐도 이해하기 힘들다고 생각되네요

  • 09.03.23 21:07

    그건 사건을 조각내서 보는데서 오는 해석의 괴리가 아닐까 싶네요. 앞선 사건을 수동적으로 대처했다가 권력의 핵심으로 등장했다고 해서 그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형과 싸움까지 한다는 것은 태종을 너무 유순하게 보는 것입니다. 태종은 문무겸비의 기재였고, 정도전, 권람등 당대의 명사들이 모두 인정한 바입니다. 더구나 개국할 때 가장 적극적으로 태조를 돕고 부추긴 것도 태종입니다. // 1차 왕자의 난은 막 건국된 조선의 정치체제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두고 정도전과 태종이하 여러 호족간의 대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09.03.23 21:13

    간결하게 말하면 정도전은 재상중심의 정치이고, 태종은 군주중심의 정치를 원한 것입니다. 그러나 초기부터 군주중심이었다고 하기는 어렵고, 왕실을 능멸하는 것으로도 보일 수 있는 권위와 권력을 불일치에 대해 태종이 불만을 품은 것이었고, 여기에 더해 사병혁파와 삼군부의 설치로 인해 호족들이 자신들의 기반을 잃을 위기에 놓여 양 세력이 이해관계가 일치한 것입니다. 그래서 정도전이 실각하는 것이고요. 이후부터는 태종이 확실히 왕권을 강화해야 된다는 것에 목표로 하고 권력을 획득하려고 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 09.03.23 21:16

    다만 태종을 잔혹한 군주로만 묘사하는 것은 확실히 무리가 있습니다.

  • 루게릭님의 말씀에 동감합니다 표현력의 부족으로 제가 생각하는 바를 제대로 전달하지를 못했네요(글쓸때부터 힘들더라니;;) 태종의 유순함이나 수동적인 입장을 부각시키려던게 아니었는데 어째 그런 부분이 너무 부각되버렸네요

  • 09.03.23 21:40

    표현력 부족이라니요. ^^'' 제가 글을 달 수 있는 것은 순전히 앞서 글쓴 분의 문장이 온전하기 때문인데요. 제가 적은 것은 약간의 수정입니다. 역사라는 것이 결과까지 다 나온 시대에서 보기에는 모든게 일사천리처럼 보이지만 당사자들에게는 매번이 선택의 기로이죠. 글의 뉘앙스에 저도 공감합니다.

  • 감사합니다 사실 댓글 쓰면서 제가 좀 글을 이상하다고 느끼고 있어서(쓰다가 지우고를 꽤 여러번 반복했네요) 잘 정리해 주신 댓글을 보고 명쾌한 느낌이 들었거든요^^ 가슴이 뻥 뚫린 느낌이 들었었습니다

  • 09.03.23 20:13

    그리고 태조의 자식들중에서 유일하게 문과에 급제한 이가 태종 이방원입니다. 이런 이방원을 통해 이성계가 정국을 장악할수 있었던 기반을 다질 수 있었죠. 또한 당시 이성계의 반대세력이던 정몽주 등에게 살해당할 위협을 직접적으로 구한것도 이방원입니다. 여러모로 이방원 외에 이방원 만한 인물은 없었다고 여겨집니다.

  • 09.03.23 20:30

    뜬금없지만 저희조상님이시네요-_-ㅋ 저희 아버지 고향이 충주..음성쪽인데 이성계의 큰아들이란 말만 듣고 자세한 건 모르고 있었네요 ㅋ 병으로 돌아가셨다는 말 밖엔 못들었는데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 09.03.24 01:08

    제친한친구가 이파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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