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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고대사회와한국사회의여성
2016201034 철학과 박기정
우리의 현재는 예전과는 혁명적으로 변화하였지만, 전통적 문화는 알게 모르게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곳에 자리잡아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글에서는 그 중 한국 여성의 삶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전통적 문화에 의해 규정된 여성의 삶, 그 예를 들자면 명절이면 기혼 여성에게 무거운 짐으로 다가오는 명절 스트레스, 그리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개별 집안마다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고부간 갈등의 문제 정도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전통적 가족양식과 연관되어 있는 한국 여성의 구체적 삶의 모습이다.
또 흔히들 ‘여자 팔자는 뒤웅박’, ‘아들은 두어야 노후 내지는 사후에까지도 편안할 수 있다’는 말을 하는데, 이 역시 우리 곁에서 우리 삶의 일부를 장악하고 있는 전통적 가치관의 흔적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통적 가치관의 상당 부분은 유교적 문화와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여성의 억압적인 지위, 역할 등에 대해 관심이 높아지는 만큼 유교 문화에 대한 관심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으로 다가온다.
우리가 여성 문제를 고민할 때 떠올리는 제반 문제들, 예컨대 남존여비, 남아 선호 사상, 가부장적 가치관, 그리고 일부 기혼 여성이 겪고 있는 시댁과 고부간의 갈등 등의 문제가 유교 문화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 부정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우리가 유교를 통해 현재를 분석해야만 하는 이유는 유교적 문화가 아직도 우리의 삶의 저변에 자리잡고 있으며, 이 때문에 유교적 문화에 대한 검열 혹은 재정립의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즉, 유교를 통하여 여성 문제를 접근하려는 여러 시도들은 유교가 한국 여성의 삶을 사회적, 문화적 측면에서 상당 부분 규정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페미니즘을 논의하면서 유교를 언급해야 함의 의미는 우리 문화의 뿌리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유교 문화의 그림자가 긍정적으로 혹은 부정적으로 읽혀질 수 있는 부분을 찾아내고, 그것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야 할 바람직한 삶의 청사진을 그려낼 수 있는 것에 있다.
지금 우리가 언급할 문제는 한국 여성들에게 억압적인 지위, 역할이 강제되는 상황이며, 이러한 문제를 유교적 문화를 바탕으로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방안을 논의할 것이다. 유교와 여성 억압에 대한 논의를 풀어가기 위해 두 가지의 방향이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유교의 본래 특성 자체가 남성 중심의 계급적 사회를 토대로 하며, 이러한 특성 속에서 남성, 가부장, 통치자 계급이 아닌 여성, 소인, 가족 구성원, 피통치자 계급은 논의의 중심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유교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 ‘내성외왕’, 그리고 ‘수기치인’ 등이 강조되는 사상 속에서 여성이 올바른 주체로 설 수 있는 기회는 사실상 어렵다는 논의를 하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내용을 견지하는 입장에서는, 유교 문화 안에서 여성 억압적 측면을 올바르게 드러내어 설명해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것의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이끌어내게 된다.
또 다른 방향은 유교적 인간관계에 주목하여 현대 사회에서 나타나는 인간관계의 잘못된 양상을 치료할 수 있다는 입장에 대한 논의이다. 본문에서는 이러한 입장에서, 유교적 인간관계가 고립적이고 개별적인 인간이 강조되는 서구의 인간관계가 아니라 인간간의 관계성이 강조된다는 측면에 주목하여, 여성 문제를 다루는 데에서도 여성의 권리나 지위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거론하기보다는 남성과의 관계, 다른 가족 구성원과의 관계를 통해 여성 삶의 긍정적 또는 부정적 측면을 설명해내려는 결론을 이끌어 낼 것이다.
우리가 페미니즘 내에서 유교를 문제 삼는 기본적인 바탕은 아마도 우리의 현실적 삶에 깔려 있는 다양한 형태의 가부장적 이념이 유교 내지는 유교적 전통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일 것이다. 아버지, 맏아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전통 유교의 가부장적 원리 안에서 여성의 지위는 상대적으로 낮은 것일 수밖에 없었음은 틀림 없다.
유교적 가부장제가 형성되는 모습은 중국 주나라의 문화가 마련되어 가는 과정 속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주나라의 예 문화를 그대로 실현하고자 하였던 공자의 노력을 통하여 강력한 가부장적 힘을 실은 주나라의 예의 모습이 유교에 온전히 반영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고대 중국 사회에서 모계제의 흔적이 존재했었는가의 문제는 주나라 이전의 사적이 모호하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단편적으로 보이는 중국 고대의 문화를 반영하고 있는 여러 문헌들을 통해 추정해볼 수 있다고 한다. 그 중 여성주의 인식과 연관하여 흥미로운 것은 ‘옛날에는 임금이란 존재 없이 백성들끼리만 모여 살았고, 그때는 자기를 낳은 어머니는 알았으나 아비가 누구인지는 알지 못하였으며, 친척, 형제, 부처, 남녀의 구별이 없었다’라고 ‘여씨춘추’나 ‘장자’ 등에 나타난 기록이다. 아비가 누군지 몰랐다는 사실은 고대 중국 사회에서의 혼인 제도가 지금의 일부일처제와는 다른 형태였다는 것과 모계제 사회가 존재했을 수도 있다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또 중국의 설화 중 감천설화(하늘과 감응하여 아이를 출산하였다는 설화)는 아버지 없이 태어난 위대한 시조들의 출생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외에도 은대 문화를 담고 있는 오래된 문헌들 안에서 태양신을 동모로, 달신을 서모로 일컫는다거나, 선비에 대한 제사가 일반적이었다는 것, 그리고 중국의 인류를 창조하였다고 전해지는 여신인 여와의 제사가 성대히 치러졌다는 것에서 모계적 사회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물론 신화적 설화가 신빙성 없는 자료라거나 또는 감천설화 자체가 오히려 강력한 가부장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려는 제도적 장치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시의 지도자에게 강력한 권력을 부여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서, 인간의 아들이 아닌 하늘의 아들임을 강조하였다는 주장 역시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계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기 위한 근거로 당시에 존재하지도 않았을 모계제의 사회에 대해서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문화적 배경과는 상당히 다른 부계적, 남성 중심적인 가부장제 이념들이 발생하게 되는 시기는 은나라 말, 주나라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가장 큰 부족이었던 은족을 정벌하고 주나라를 세운 희씨 부족은 혈연 집단 그리고 친친 이념을 통해 강력한 봉건적 유대 장치를 마련하였고, 이는 주나라 왕을 전체 조상의 우두머리로 삼음으로써 혈족 관계를 통한 가부장적 장치인 종법 제도에 의해 유지되고 강화되는 형식을 취하였다.
주대에 가부장적 종족 지배에 대한 보다 확실한 장치는 조상 숭배 의식의 부각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조상 숭배 의식은 주나라의 가부장적 종족 지배의 종법 제도와의 긴밀한 연관되어 있었으며, 조상 숭배 의식으로부터 파생되어 나오는 일종의 강력한 종교적 권위는 종법 봉건제를 확고히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다른 토테미즘, 샤머니즘적인 신들을 모두 포섭하는 조상신의 권위와 위신 앞에서 중국 고대인들은 여러 가지 재앙으로부터 자신을 비롯한 자손의 안녕을 비는 예식을 거행하였다. 모든 제사 집단인 종에서는 종족 구성원들의 우두머리인 종자의 권위가 다른 종족 구성원들에 비하여 우월하였는데, 그것은 종자만이 조상에 대한 제사에서 제물을 바칠 있었기 때문이었다. 종자는 정실 부인에게서 낳은 맏아들로 이어지며, 이로부터 맏아들과 다른 아들들은 물론 정실 자식과 첩에게서 얻는 서자의 지위가 크게 달라지는 양상을 맞이하게 되었다. 또한 이 같은 사실들은 아들을 낳아 대를 잇고 가계를 이어야 한다는 임무를 통해 여성의 몸이 출산의 도구로 사용되고, 대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축첩을 하는 것이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상황을 발생시키게 되었다. 이렇듯 처와 첩의 지위가 다르게 자리 잡게 됨에 따라서 또 다른 여성 억압이 시작되게 되었으며, 대가족 종법 제도가 정착되어감에 따라 남성은 가정과 사회에서 그 지위가 상승하였고 상대적으로 여성의 지위는 하락하였다. 특히 모든 계승의 문제와 상속의 문제가 적장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사회 제도들은 남성을 중히 여기고 여성을 경시하는 풍조 내지는 남아 선호 사상 등의 관념을 성숙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유교의 핵심 개념 중 하나는 충효이다. 부모에 대한 효가 가장 가치 있는 윤리 덕목으로 될 때, 그리고 가부장적 문화가 그대로 존재할 때, 그 안에서 며느리가 되는 여성의 삶은 억압적인 것으로 다가온다. 기혼 여성에게 효 의식은 자신을 낳아준 부모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남편의 부모를 향한 것으로 되며 그것은 자발적인 선택 아니라 강요되는 강제가 된다. 시부모들은 며느리를 아들의 배우자로서의 여성이라는 인식보다는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할, 그리고 자신들에게 효도해야 할 대상으로 본다.
계급 상하간의 철저한 유대 장치를 마련함을 통해 전체 사회 구성원의 질서 유지를 도모하려는 주대의 정치적 의식은 유교의 핵심 내용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가족 내의 질서 유지는 전체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필수 조건이었는데, 효제, 충신 등이 강조되는 유교적 개념들은 이러한 의식과 긴밀하게 부합된다. 유교에서 부모에 대한 효는 나의 몸을 낳아두고, 나의 몸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부모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시작한다. 유교에서 효 의식의 출발은 바로 내 몸과 머리카락, 피부를 소중히 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고 하는데, 이는 나의 몸은 부모님에게서 물려받은 것이고 부모님의 몸과 직간접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나의 집안이 나의 몸에서 끝나게 하지 않을 의무가 있으며, 이를 위해 아들을 낳아 대를 이어야 할 막중한 책임이 강요된다. 또한 혼인하지 않거나 혼인하였어도 대를 잇지 못하는 것은 가장 큰 불효의 조건이 되며, 심지어는 대를 이을 아들을 낳지 못하였는데도 첩을 들이지 않는 행위는 부모와 조상에 대한 큰 불효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유교 사회에서 효는 국가의 충과 연관되어 설명되었고, 이러한 충효의 덕목은 봉건 사회 내의 모든 인간관계와 질서, 예컨대 부부, 장유, 붕우 등의 관계를 규정하는 기초가 되었다.
이렇게 가족 내에서 효가 강조되고 그 효가 국가와 사회에 대한 충으로 연결되는 사회안에서, 그리고 그 효의 내용이 부모 봉양, 대 잇기, 순수 혈통 지키기 등으로 요약되는 사회 안에서 여성은 시부모의 편안한 노후를 책임져야 할, 집안의 대를 잇는 아들을 낳아야 할, 한 가문의 순수한 혈통을 지켜야 할 그런 몸으로 살아가도록 강요받는다.
다음으로, 언급하는 바는 유교의 조화 사상이다. 유교에서 말하는 ‘화(和)’의 의미는 모든 것이 같을 것을 강조하진 않지만 각자가 가지고 있는 특성이 서로 어우러질 수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유교의 조화 이론은 현대의 페미니즘 안에서 결코 단순하게 논의되지 않는다.
유교에서 말하는 화의 의미란 사실상 ‘차이’이며, 그리고 이러한 차이를 기반으로 한 ‘차별’이 내제되어 있는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에선 유교적 화의 의미를 ‘다양한 차이’를 인정하고 그것들의 조화를 말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펼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차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분명 서로 다른 존재 방식에 대한 ‘동등한 가치’를 인정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서로 다르다는 것을 근거로 서로 ‘다른 가치’를 산출하는 것까지를 용납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유교적 화의 의미를 다양한 차이의 인정이라는 점에서 해석하기 위해서는 유교 사회 안에서 다양하게 나타나는 인간관계의 양상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해 먼저 논의해야 할 것이다. 인간 사회에서 평등, 동등이 진정한 평등으로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것들이 조화를 이루는 관계가 진정한 의미의 평등이라는 발상은 유교의 예 사상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유교에서 예는 여러 종류의 상하간의 올바른 관계의 형식이며, 이런 관계를 조절하는 올바른 길이다. 예컨대 군신, 부자, 부부 관계를 언급하는 삼강과 부자, 군신, 부부, 교우, 장유 관계를 말하는 오륜은 유교 사회 안에서의 인간관계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개념들이다. 이러한 인간관계에서 ‘예’란 그들이 처한 지위에서 그것에 알맞은 행위와 의식을 의미한다. 따라서 유교에서 예스럽다는 것은 서로 다른 사회적 구성원들이 각각 자신의 지위에 맞는 행동 방식을 선택하는 것을 말한다. 즉, 예의 전형이란 사회적 행위자들이 남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에게 맞는 틀 안에 머물면서 조화로운 삶을 영위함을 말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유교에서 예는 다양한 인간관계들을 각자의 위치에 따라 수직적으로 다르게 규정하면서 사회 질서를 창출하거나 또는 재창출하는 역할을 한다고 요약할 수 있다. 예가 유교 사회에서 중요한 이유는 유교 사회에서 인간 관계는 상호 직접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덕목에 의해서 관습적으로 규정된 채로 매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유교 사회에서의 차등적인 인간 관계는 그 사회 안에서는 결코 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데, 그것은 신분에 의해서 차등화 된 사회 구조가 자연 발생적으로 이루어진 역할분담 체계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에 맞는 행위 양식들은 스스로가 선택한 것이거나 또는 자신의 본질로부터 비롯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더 나아가 이러한 의식들은 각자 자신들의 양심으로 인식된다. 때문에 예에 맞는 행위 양식이나 예스러움은 당연하고, 자발적인 것이 된다.
위의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본 그대로 유교를 해석하고 바라본다면 유교에는 현대사회에 적합한 윤리나 페미니즘 안에서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만한 어떤 덕목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유교 문화를 직시하고 그것을 분석해야 하는 것은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유교가 우리 삶의 저변에서 긍정적으로 또는 부정적으로 많은 부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이유에서일 것이다. 유교의 핵심적인 특성이 본질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든 우리는 그것들 안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그것들이 지켜져야 한다는 전통적 사상이 깊게 깔려 있음을 인정하고 그것을 감안하여 본다면, 유교적 문화들을 단순히 내쳐버릴 수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자학자들이 평가한 효 의식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 그것은 우리가 또 다른 맥락에서의 비판을 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해주는 것이며 유교 덕목들에 대해 고정적이고 고착적인 의식을 제거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부여해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에 힘입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새로운 이미지의 유교 덕목을 만드는 것일 것이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언어의 범주로 해방의 언어를 만들려는 노력, 여기에서 우리가 유교를 이해하려는 필요성이 주어진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언어로 또는 자주 말해지고 있는 개념으로서 우리의 삶의 모습을 분석해낸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삶을 더욱 자세히, 깊게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효자, 효부 등에 관한 이야기가 우리 삶에 밀착되어 있는 이야기라면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효부에게 주는 상이 그 사람의 삶을 얼마나 값지게 만들 수 있는 것인가에서부터 동시에 그것이 그 사람의 삶을 얼마나 비인간적으로 만들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꼼꼼히 분석해보아야 할 것이다. 비참하고 어려운 상황에서 어떤 효성스러운 행위를 했느냐가 찬양되는 방식으로만 논의될 것이 아니라 그 행위는 동시에 얼마나 많은 질곡의 삶이었는가에 대한 논의로도 이어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필요성을 충족시키려는 노력은 분명 유교를 부흥시키는 노력이나 유교를 폐기해야 한다는 것과 같은 단순 논리로 끝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현재 자기 자신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발견해야 한다는 필요성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고, 또한 이미 예전부터 마련되어 있는 것에 따라 순전히 기존의 모델을 본뜨는 것만으로 새로운 자기 발견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두 가지 점을 동시에 전제화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첫댓글 상당히 많은 내용을 서술하고 있는데, 극단적 페미니스트의 관점과 서양 중심의 관점이 전제되어 있어서 사실과 다르게 파악, 분석된 부분이 발견됩니다. 和가 차이를 전제로 하여 차별이 내재된 개념이라고 하는 건 상당히 우려스럽습니다. 이것과 반대되는 것은 아쉽게도 평등이 아니라, 전체주의, 또는 몰가치적인 독재이기 때문입니다. 동양철학에서는 그것을 同이라고 해서 '다르지만 어울린다'는 和와 구분하지요. 차이에서 비롯된 차별이 아니라, 차이와 다름을 인정하면서 소수자의 존재와 권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