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때 <시지프신화><이방인>단 두편으로 까뮈에 빠졌다. <시지프 신화>의 사상과 철학을 소설로 묘사한 게 <이방인>이라 할수 있을만큼 두 작품은 한 세트로 보였다. 까뮈는 명징하다. 군더더기가 없고 정직하다. 두 작품의 첫문장만 봐도 느낄 수 있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 시지프 신화 오늘 엄마가 죽었다. - 이방인 시지프 신화 요점 정리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는 것, 그것은 보이지 않게 마음속이 침식당하여 골병이 들기 시작한다는 말이다.
설사 시원찮은 이유들을 가지고서라도 설명할 수 있다면 그 세계는 낯익은 세계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돌연 환상과 빛을 잃은 세계 속에서 인간은 스스로 이방인이 되었음을 느낀다.
이 낯선 세계로의 유적에는 구원이 없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잃어버린 고향의 추억도 약속된 땅의 희망도 없기 때문이다. 인간과 그의 삶, 배우와 무대장치 사이의 절연, 이것이 다름 아닌 부조리의 감정이다.
물론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행위를 그만두지 않고 계속하는 데는 여러가지 이유들이 있다. 그중 첫째 가는 이유가 습관이다. 고의적으로 죽음을 택한다는 것은 이와 같은 습관의 가소로운 면, 살아야할 심각한 이유의 결여, 법석을 떨어가며 살아가는 일상의 어처구니없는 성격, 그리고 고통의 무용성을 본능적으로나마 인정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삶의 부조리는 과연 희망이라든가 자살 같은 길을 통해서 삶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요구하는 것일까? 이것이야말로 모든 군더더기를 치워버리고서 밝히고 추적하고 해명해야 할 문제인 것이다.
모든 위대한 행동, 모든 위대한 사상의 발단은 어이없게도 하찮은 것이다. 위대한 작품들은 흔히 어느 길모퉁이를 돌아가다가 혹은 어느 식당에서 북소리를 듣다가 착상한 것이다. 부조리도 이와 마찬가지다. 부조리한 세계는 그 어느 것보다도 이런 보잘것없는 탄생 과정에서 고귀함을 이끌어낸다. 어떤 상황들에 있어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하는 것이 혹자의 경우 가장일 수도 있다. 연애하는 사람들은 이런 경우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만약 그 대답이 솔직한 것이라면, 그리고 그 대답이 저 야릇한 영혼의 상태, 텅 빈 공허가 웅변적이 되고, 일상의 판에 박힌 행복의 연쇄가 끊어지면서 마음이 그 줄을 다시 이어줄 고리를 찾으려 하나 헛일이 되는 야릇한 생태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그때 그 대답은 바로 부조리의 첫 징후인 것이다.
아침에 기상, 전차를 타고 출근, 사무실 혹은 공장에서 보내는 네 시간, 식사, 전차, 네 시간의 노동, 식사, 수면 그리고 똑같은 리듬으로 반복되는 월화수목금토, 이 행로는 대개의 경우 어렵지 않게 이어진다. 다만 어느 날 문득, '왜?'라는 의문이 솟아오르고 놀라움이 동반된 권태의 느낌 속에서 모든 일이 시작된다. '시작된다'라는 말은 중요하다. 권태는 기계적인 생활의 여러 행동들이 끝날 때 느껴지는 것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의식이 활동을 개시한다는 것을 뜻한다. 권태는 의식을 깨워 일으키며 그에 뒤따르는 과정을 야기시킨다. 뒤따르는 과정이란 아무 생각 없이 생활의 연쇄 속으로 되돌아오는 것 일 수도 있고 아니면 결정적인 각성일 수도 있따. 각성 끝에 시간과 더불어 결말이 오는데 그것은 자살일 수도 있고 아니면 원상 회복일 수도 있다. 권태 그 자체는 어딘가 좀 메스꺼운 데가 있다. 여기서 나는 이 권태가 이로운 것이라고 결론지어야만 하겠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의식에 의하여 시작되며, 의식에 의한 것이 아니면 그 무엇도 가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지적은 전혀 독창적일 것이 없다. 그렇지만 자명한 것이다. 부조리의 기원을 간략하게 인식해볼 수 있는 기회로서는 당분간 이것으로 충분하다. 하이데거의 포현을 빌리건대, 단순한 '관심'이 모든 것의 기원인 것이다.
그는 시간에 속해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사로잡는 공포로 미루어 보아 거기에 최악의 적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 는 내일을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전 존재를 다하여 거부했어야 마땅할 내일을. 이러한 육체의 반항이 바로 부조리다.
인간들 역시 비인간적인 것을 분비한다. 명철성이 살아나는 어떤 순간에는, 인간들이 하는 행동의 기계적인 면과 의미 없는 무언극으로 인하여 그들 주위의 모든 것이 다 어리석게만 보인다. 한 사내가 유리 칸막이 저쪽에서 전화를 걸고 있다. 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무언극 같은 그의 뜻모를 몸짓은 보인다. 이쯤되면 저 사람은 무엇 때문에 살아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겨나게 된다. 인간 자신에게서 엿보이는 비인간성을 접하면서 느끼는 이 막연한 불안, 우리 존재 자체의 모습 앞에서 경험하는 측량할 길 없는 추락, 이 시대의 어느 작가가 말한 바 있는 '구토', 이것도 또한 부조리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때 거울 속에서 우리를 만나러 오는 그 이방인, 우리 자신의 사진 속에서 다시 보는 친근하면서도 불안스러운 형제, 이것 또한 부조리이다.
빰을 때려도 자국이 나지 않는 무기력한 육체에서 영혼은 사라지고 없다. 죽음이라는 모험의 초보적이고도 결정적인 측면이 부조리의 감정의 내용을 이룬다. 이 숙명을 비추는 죽음의 조명 아래서 무용성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인간의 조건을 관장하는 피비린내나는 수학 앞에서는 그 어떤 도덕도 그 어떤 노력도 이미 선험적인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
인간의 입장에서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세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환원시켜서 거기에 인간의 낙인을 찍어놓는 것이다.
정신이 조금이라도 깨어나 움직이기 시작하면 이 세계는 금이 가고 무너진다.
무수한 조각들로 파열된 광채들이 인식 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 것을 가지고서 우리에게 마음의 평화를 안겨다줄 친숙하고도 고요한 표면을 재구성한다는 것은 바라지도 말아야 한다.
이 세계는 그 자체로 놓고 볼 때 합리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이 전부다. 그러나 부조리한 것은 바로 비합리와, 명확함에 이르려는 필사적인 열망의 맞대면인 것이다. 인간의 가장깊은 곳에는 명확함을 얻고자 하는 호소가 메아리치고 있다. 부조리는 인간과 세계에 똑같이 관련되어 있다 .지금으로서는 이 부조리만이 그들을 이어주는 유일한 매듭이다.
이런 면에서 여러 가지 틍직들 중 으뜸가는 특징은 바로 삼위일체(인간의 열망, 세계의 침묵, 그 양자의 관계인 부조리)가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이다. 세 가지 중 어느 한 항목이라도 파괴하면 그것은 전체를 파괴하는 것이 된다. 인간의 정신 밖으로 벗어나면 부조리는 있을 수 없다. 그러기에 모든 것이 다 그러하듯이 부조리 역시 죽음과 더불어 끝이 난다. 그러나 세계 밖으로 벗어나도 부조리란 있을 수 없다. 바로 이 기초적인 표준에 의거함으로써 나는 부조리의 개념이 본질적인 것이며 그것이 나의 진리 가운데 가장 으뜸가는 것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이 정신과 이 세계는 서로 부둥켜안지 못한 채 서로 힘 겨루듯이 밀며 버티고 있는 것이다.
나의 추론은 추론을 유발시킨 자명함 자체에 충실하고자 원한다. 그 자명함이란 곧 부조리이다. 욕망하는 정신과 실망만 안겨주는 세계 사이의 절연, 통일에의 향수, 지리멸렬의 우주, 그리고 그 양자를 한데 비끄러매놓는 모순이 바로 부조리다.
내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을 나는 마땅히 견지해야 한다. 나에게 그처럼 분명하게 나타나 보이는 것이라면 그것이 비록 적대되는 것일지라도 지탱해야한다. 그런데 이 세계와 나의 정신 사이의 갈등과 마찰의 근본을 이루는 것은 바로 그에 대한 나의 의식 자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만약 내가 그것을 견지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항상 새로워지고 항상 긴장을 유지하는 항구적인 의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지금 당장 내가 인식해두어야 할 것은 바로 이 점이다.
희망을 갖지 않는 법 쓰라리고도 멋들어진 내기를 지탱하는 것 구원을 호소하지 않고 사는 것
부조리는 대립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인데 그 대립의 항목들 중 어느 하나를 부정하는 것은 부조리를 기피하는 것이 된다. 의식적인 반항을 폐기하는 것은 곧 문제 자체를 폐기하는 것과 같다.
산다는 것은 곧 부조리를 살려놓는 것이다.
유일하게 일관성 있는 철학적 태도는 곧 반항이다.
우리는 부조리의 경험이 자살과는 거리가 먼 것임을 알 수 있게 된다. 자살은 반항에 뒤이어 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자살은 반항의 논리적 귀결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살은 그 속에 동의의 의미가 전제되어 있으므로 반항과는 정반대다. 자살은 비약과 마찬가지로 극한에 있어서의 수용이다. 모든 것이 탕진되고 인간은 그의 본질의 역사 속으로 되돌아간다. 그의 미래, 그의 하나뿐인 가공할 미래를 식별하고는 그 속으로 뛰어들어가는 것이다. 자살은 그것 나름의 방식으로 부조리를 해소해버린다. 자살은 그것 나름의 방식으로 부조리를 해소해버린다. 자살은 부조리를 바로 죽음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그러나 나는 부조리가 지탱되자면 부조리 자체가 해소되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부조리는 죽음에 대한 의식인 동시에 죽음의 거부라는 점에서 자살에서 벗어난다. 부조리는 사형수의 마지막 생각이 극한에 이르렀을 때, 현기증나는 추락의 막다른 벼랑 끝에서 어쩔 수 없이 바라보게 되는 저 한 가닥의 구두끈이다. 자살자의 반대, 이것은 다름 아닌 사형수이다.
의식과 반항이라는 거부는 포기와는 정반대이다. 인간 가슴속에 깃들인, 환원될 수 없고 정열에 찬 모든 것이 다 함께 그의 삶에 맞서서 이 거부를 고무한다.
희망과 미래를 박탈당했다는 것은 곧 인간의 행동 가능성이 더욱 증대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른 새벽 감옥의 문이 열릴 때 문 앞으로 끌려나온 사형수가 맛보는 기막힌 자유로움, 삶의 순수한 불꽃 이외의 모든 것에 대한 그 엄청난 무관심, 죽음과 부조리야말로 단 하나 온당한 자유의 원리, 즉 인간의 가슴이 경험할 수 있고 체현할 수 있는 자유의 원리임을 우리는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자신의 삶, 반항, 자유를 느낀다는 것, 그것을 최대한 많이 느낀다는 것, 그것이 바로 사는 것이며, 최대한 많이 사는 것이다. 명증한 정신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가치의 척도는 무용해진다.
나는 나의 시대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뚜렷이 의식하기에 이 시대와 일체가 될 것을 결심했다. 내가 개인을 이토록 소중히 여기는 것은 오로지 개인이란 보잘것없고 비천한 존재로 보이기 때문이다.
부조리의 인간은 이렇게 불처럼 뜨거우면서도 얼어붙은 듯 싸늘하고 ,투명하고 한정된 세계, 아무것도 가능한 것이 없으면서도 모든 것이 주어진 세계, 그 한계 밖으로 넘어서면 붕괴와 허무뿐인 하나의 세계를 엿보게 된다. 이리하여 그는 그같은 세계 속에서 살아가기로, 그 세계에서 힘을, 희망의 거부를, 그리고 위안 없는 한 삶의 고집스러운 증언을 이끌어내기로 결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세계 속에서의 삶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당장은 미래에 대한 무관심과 주어진 모든 것을 남김없이 다 소진하겠다는 열정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중 얼마나 뜨겁게 말하는 까뮌가. 그것이 그토록 어렵기에. 시지프 신화에서 잊혀지지 않은 문장이 하나 있다. 어째서 드물게 사랑해야만 많이 사랑하게 된단 말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