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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 앞에 일부가 牛가 붙어 좀 조정되잖아요. 그러면 희생할 때 희(犧)예요. 내 것을 내놓는 거죠. 義라는 것은 다른 게 아니고 내놓을 것을 내놓는 거예요. 내 것을 내놓을 수 있는 게 의예요. 정의(正義)! 내 것 안 내놓고 남의 것을 뺐어 오기 위한 정의는 없어요. 의라는 것이 있다면, 오늘날 쓰이는 정의 즉 저스티스(justice)의 개념이 아니에요. 저스티스의 개념이 아니고 이것은 새크리파이스(sacrifice)의 개념이에요. 희생의 개념이에요.
그래서 信近於義(신근어의), 믿음이라는 것이 희생에 기반하고 있다면, 내 것을 내놓는 거에 기반하고 있다면, 내 말(言)은 복(復) 즉 재생될 것이다! 현실화될 것이다! 말이 재생된다는 것은 행위로 살아난다는 거죠. 복(復)이라는 것은 광복절(光復節)과 부활할 때 쓰는 것처럼 되살아난다는 거죠.
그래서 말은 되살아날 것이다! 행동으로 살아날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이 내 것을 내놓는 것에 기초한다면, 그 말은 이루어질 것이다!
공(恭), 함께 논의하는 것이라고 그랬지 않았습니까? 지난번에 나왔었죠. 온량공검양(溫良恭儉 讓)하시니! 따뜻하게 베푸시고(溫), 남을 위해서 다리를 놓던 마음으로 또한 배려하시고(良), 그리고 함께 늘 협의하시고(恭), 하나 됨을 늘 지향하시고(儉), 힘든 일이 있으면 먼저 팔 걷어붙이고 나오셨다(讓)!
그래서 자격을 저절로 얻었다! 이건 누가 주고 말고 하는 문제가 아니다는 거죠.
이런 얘기가 나왔잖아요. 그때 공(恭)이죠. 恭近於禮(공근어례)! 함께 협의하는 것이 컴프라미스(compromise)가 아니라 禮에 가깝다면, 공동체 풍성한 축제장에서 이루어진 그 약속과 가깝다면! 그러니까 협의를 했다고 해서 다 되는 게 아니라는 거죠. 우리 도둑질 할래 등 우리 뭐 할래 한 것이 컴프라미스일 수 있는데, 그런 컴프라미스가 아니라 ‘함께 협의함이 시대의 문화’에 가깝다면! 적어도 그 일이 이루어지던 안 이루어지던 치욕은 멀리 할 수 있다! 遠恥辱也(원치욕야)라는 거죠.
因不失其親(인불실기친), 그로 말미암아서 내 몸에 체화되는 그 상황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내 몸에 그러한 것이 체화되는 것을 상실하지 않는다면, 亦可宗也(역가종야)! 정말 삶의 대들보라 할 것이다! 삶에서 대들보 하나쯤은 생겼다 할 것이다!
인불실기친(因不失其親)은 ‘친한 사람을 잃어버린다’ 이게 아니에요. 친한 사람일지라도 예가 아니면 잃어버리는 거예요. 내 몸에 체화되는 것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마루라고 할 수 있다!
마루(宗)라는 것은 이렇게(宗) 맞추고 있는 거죠. 집 기둥과 들보들이죠. 그래서 집의 어떤 버팀목이라 할 수 있죠. “그로 말미암아 자신의 몸에 체화되는 상황을 잃지 않는다면 대들보가 생겼다 할 만하다.”
이건 쉽게 넘어가고요. 앞에 원칙을 얘기해 놓거나 추상적이니까, 그림을 계속 그려 나가시는 겁니다.
14장입니다.
子曰 君子食無求飽 居無求安 敏於事而愼於言 就有道而正焉 可謂好學也已.
자왈, 군자(君子)는 그냥 군자라고만 읽겠습니다.
군자는 먹는 것에 있어서 배부름을 구하지 않는다(食無求飽). 배부르려고 애쓰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배부른 것이 아니라 함께 먹는 것을 원한다는 얘기인 거죠. ‘먹는데 배부름을 구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누가 먹었나?’ ‘딴 사람은 챙겨 먹었나?’ 그걸 구한다는 거죠. 배부르면 같이 배부르는 거죠. 그래도 남는 게 있으면 남을 수도 있는 것이죠.
그래서 식무구포(食無求飽)의 뜻은 뒤집어서 뒷면을 보라는 얘기입니다. 먹는 데 있어서 배부름을 구하는 게 아니라, 먹는 것이 있다면 같이 먹고 있는지? 누구는 굶지 않고 있는지? 하는 것을 살피라는 얘기죠.
거무구안(居無求安)! 사는 데 있어서 편안함을 구하지 않는다! 즉 편안한 걸 싫어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딴 사람은 불편한가? 얼어 죽지는 않고 있는가? 입을 옷이나 있는가? 하는 것을 본다는 거죠.
그러니까 공도의 길을 가는 사람은,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먹고 있는지?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잠은 자고 있는지? 하는 것을 보는 것이다!
敏於事而愼於言(민어사이신어언)! 주어진 사(事)에 민첩하며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함부로 단언하지 않는다! 취유도(就有道)! 방법이 있는, 길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서, 그 길에 따라서 자신을 바룬다(就有道而正焉(취유도이정언)! 그 길을 바루는 것은 자신만이 아닐 수도 있죠.
이 정도 하면, “아! 배우기를 좋아한다 할 만하다(可謂好學也已).”
그러니까 밥 먹을 때 배울 것은 ‘남이 배고픈지 아닌지’ 하는 것을 살피는 것이고요. 식사 예절이라면 테이블 매너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밥을 먹을 때 내 동포들은 굶고 있지 않나 살피는 것이라는 거죠. 실제로 많은 분들이 그래요. ‘혼자 밥 먹다가 우리 어머니는 밥 먹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면 배운 사람이거든요.
15장입니다. 내용이 조금 깁니다.
子貢曰 貧而無諂 富而無驕 何如? 子曰 可也,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 子貢曰 詩云 如切如磋 如琢如磨 其斯之謂與? 子曰 賜也 始可與言詩已矣 告諸往而知來者.
자공왈, 빈(貧)과 부(富)의 문제가 나옵니다. 빈(貧) 이 글자는 어느 시점부터 바뀌었는데요. 부(富)는 우리가 알기가 쉽죠. 글자 한번 보죠.
부(富)는 한 집 안에 입(口)이 있죠. 입이 여러 개가 되고, 그 집 안에 입이 있으면 먹을 밥도 있는 거죠. 이게 富죠. 부라는 것은 먹을 인구(口)가 있고, 먹고 살 땅(田)이 있고 그러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빈(貧)이라는 건 뭐냐? 貧이라는 글자를 보면 글자 아래에 있는 건 조개(貝)죠. 위에 있는 것은 쪼개는 거예요. 재물을 쪼개는 거예요. 재물을 나눠 가지는 것을 말하는 거예요. 엄밀하게 오늘날 생각하는 푸어(poor)의 개념이 아니에요. 재물을 나눠 가지는 거예요. 재물을 나누니까 내 몫이 줄어들었죠. 또 쪼개면 또 줄어들었죠.
그러다 보니까 나중에 의미 번역이 이게 가난해진 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이때 가난하다는 것의 개념은 여기 있는 걸 내 혼자 안 먹고, 나눠 쓰고 나눠 쓰고 나눠 쓰고 해서 한없이 나누어 쓰다 보면 가진 게 없는 거죠. 엄밀하게 貧에 담긴 뜻은 나누어 쓰는 거예요.
나눠 쓰는 것 자체를 드디어 경멸하는 시대가 온 거죠. 그래서 貧이라는 개념을 그냥 (우리가 오늘날 생각하는) 너무너무 가난하다는 개념으로 생각해버리는 거죠. 간난(艱難), 어려울 간(艱) 어려울 난(難)해서 간난한 사람으로 생각하는데요. 간난한 게 아니라 나누어 주다 보니 이렇게 된 거예요. 나누어 쓰다 보니 줄어드는 현상, 나누어 줌으로써 내 것이 줄어드는 현상을 貧이라 그래요. 어쨌든 이미 춘추시대에도 뜻이 이렇게 바뀌어 버렸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죠.
빈이무첨(貧而無諂)! 쪼개주고 쪼개주고 해서 남은 것이 적어 쓸 것이 모자라는, 그런 상태에서도 무첨(無諂) 즉 어디엔 가 아첨하지 않고! 부이무교(富而無驕)! 식구도 있고 먹을 게 넘쳐도 교만하지 않고 거들먹거리지 않는다! 이것은 그대로 해석하면 됩니다. 글자를 살펴볼 필요도 없고요. “이 정도면 어떻습니까?”
자공이 물었습니다. “쓸 게 없는데도 누구한테 가서 굽실거리지 않고, 쓸 게 넘치는데도 어디 가서 거만 떨지 않는다면 어떻습니까?” 공자가 대답합니다. “가야(可也)!” 괜찮지! 그렇지만 미약(未若)하다! 뭐보다 못하다! 한 걸음 더 나가지 않으면 의미는 없다! 한 걸음 더 나가라고 합니다.
가진 게 없더라도 중요한 것은 공도요,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공도다! 그러니까 뒤에 있는 거예요. 뭐만 못하냐? “未若貧而樂(미약빈이락)” 아무리 나눠 쓰고 모자라도 낙도(樂道)죠. 그러니까 그 길이죠. 공도를 가는 그 길이죠. 그 길을 즐기는 것! 그 길을 즐기는 것만 못하고, 낙(樂)자에 대해서는 첫 시간에 말씀을 드렸으니까요.
“富而好禮者也(부이호례자야)” 부유하든 말든 교만하고 안 하고 하는 지가 아니라, 부유하면서도 그 시대의 문화를 좋아하는 것만 못하지! 그러니까 빈부의 문제를 들어서 사람이 이러고 저러고 하는 것을 갖고 나눈다면 나름대로 의미는 있겠으나, 그 목적지는 가난하든 富하든, 이 시대 문화가 무엇이냐? 내가 해야 될 도리가 무엇이냐? 거기에 집중하는 것이 답이라는 거죠.
중간에서 이 정도 괜찮다고 말할 뿐이지, 거기에 멈춰서는 안 된다! 그건 호학(好學)이 아니라는 거죠. 배움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자공이 이제 드디어 한마디 합니다. 子貢曰 詩云(시운) 如切如磋(여절여차) 如琢如磨(여탁여마) 其斯之謂與(기사지위여)? “시에 이렇게 읊었네요. 자르듯, 쪼개듯, 쪼듯, 갈듯!” 자르면 한 번 더 이렇게 쪼개야겠죠. 한 번 자르고 나서는 또 쪼개고 그래서 섬세해져서 걸림이 없는 상태까지 말하는 겁니다.
자르고, 쪼개고, 쪼고, 갈고 해서 먼지가 될 때까지! 내 안에 있는 편견과 괜찮다고 하는 모든 정당하다는 생각! 내 정의라고 하는 것이 먼지가 되어 날아갈 때까지! 갈면 먼지가 되죠. 먼지가 내려들 때까지! 이런 구절이 있는데 이런 뜻일까요? “기사지위어(其斯之謂與)” 이런 것을 일컬음 일까요?
子曰 賜也(사야) 始可與言詩已矣(시가여언시이의) 告諸往而知來者(고저왕이지래자).
자왈, 사야! 사(賜)는 자공을 말하죠. 자공아! 시가여언시이의(始可與言詩已矣). 너와 더불어 드디어 시를 얘기할 수 있겠구나! 옛날 걸 일러주니 다가올 것도 아는구나(告諸往而知來者)!
그러니까 이는 1장의 시간 확장의 문제를 다시 한번 얘기한 거죠. 결국 내게 시간이 확장된다는 의미는, 배움이 끝이 없다는 얘기이고, 그래서 우주처럼 하지만, 우주가 그리 된 이유는 어느 별 하나가 특별히 내 별을 위해서 하고 걸림이 되지 않았기 때문인 거죠.
(자공의 이야기는) “’내 안에서 걸릴 수 있는 거리들이, 잘리고 쪼개지고 쪼이고 갈아져서 하나하나 걸림이 없어 먼지처럼 날아갈 때까지, 내 편견과 내 정당함이 없을 때까지’라고 했는데 끝없이 배워야 된다는 뜻이군요!” 그러니까 “맞아!” 한마디로 이렇게 하는 거죠.
16 장입니다. 子曰 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
1장의 세 번째 구절과 관련된 보충이기도 합니다. 자왈, 불환(不患)! 걱정하지 마라! 인지부기지(人之不己知), 다른 사람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마라. 문법은 그냥 얘기하지 않고 그냥 쭉 넘어가겠습니다. 불환인지부기지(不患人之不己知),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 해서 걱정하지 마라.
드디어 지(知)자가 나왔습니다. 知자가 이제 마지막에 나왔는데요. ‘인의예지신’이 다 나왔습니다. 환부지인(患不知人) 내가 남을 모를까 걱정해라. 남을 모른다는 건 뭐죠? 남을 안 배우고 있는 거죠. 남을 알아야 배울 것 아닙니까? 배워야 알 것 아닙니까? 배우지 않고 알 수 있는 남은 없죠.
남을 내 배움의 대상으로 삼아야 남을 아는 거죠. 남이 있으면 그 남으로부터 내가 배우지 않는 것을 걱정해라! 남이 나를 배우니 안 배우니, 그건 걱정하지 마라! 남이 나를 배우든 말든, 내가 남을 안 배우고 있는지 걱정해라!
배우면 알게 된다는 거죠. 안다는 것은 배움이죠. 지(知)라고 하는 것의 정체죠. 지(知)는 곧 학(學)이다! 배워야 안다는 거죠. 배워야 알고 이해한다는 거죠. 이해하려고 하면 배운다는 거죠.
그런 상태가 뭐냐 하면, 남을 따라하고 남을 받아들이는 거죠. 남을 안 받아들이잖아요. 한도 끝도 없어요.
그런데 “다른 사람이 나를 모를까 봐, 나를 배우지 않는다고!” 이렇게 이해하는 거예요. ‘딴 사람이 나를 안 배우네’ 하고 걱정하지 마라! 걱정할 일이 따로 있지, 내가 다른 사람을 배움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있는지, 그걸 걱정하라는 거죠. 다른 모든 사람이 다 내 배움의 대상이다! 비웃음의 대상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숭배의 대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 특히 사람들은 다 내게 배움의 대상일 뿐이다!
그렇게 배우되, 궁극의 목표는 우주처럼 자강불식(自强不息)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속에 하나 걸림 없이 먼지처럼 내 편견이 사라지는 날까지! 이게 따라하기의 궁극의 목표인 거죠. 따라함으로써 마침내 내가 없는 곳에 가는 거죠.
‘여절여차(如切如磋) 여탁여마(如琢如磨)’는 따지고 보면 배우고 익히고 넓히고 강하게 하는 목적이 마침내 나를 강하게 하는 자강불식 같지만, 자강불식의 본모습은 내가 없기 때문에 가능한 거죠.
자강불식은 무아불식(無我不息)인 거죠. 스스로 강해서, 저절로 강해서 쉼이 없는 것을 말하죠. 자강불식의 엄밀한 의미는 무아(無我), 내가 없음으로써 마침내 쉬지 않고 강해진 거죠.
그게 공자가 말한 겁니다. 그렇게 보면 이게 도덕경하고 다른 지, 불교하고 다른 지 그렇죠. 말 표현이 다를 뿐이에요. 이런 얘기를 이제 1장부터 쭉 해왔는데요. 오늘 1장의 짜임새를 말씀드린다고 그랬는데, 짜임새는 다음 번으로 미루고요.
학이 편을 한번 읽어 볼까 합니다. 옛날 식으로 한번 읽어 볼 게요. 오랜만에 저도 10년 가까이 소리 내서 안 읽어봤어요. 그래서 입이 굳어 옛날처럼 소리가 안 나올 수 있으니까 입이 헛 놀더라도 이해하십시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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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마루가 되는 말쑴..
마 고마 하수다래
마마..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