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태李秉泰(1688년~1733년)
본관은 한산(韓山). 아버지는 진사 이협(李浹)이다. 부인은 부여 현감 박필진의 딸이다.
이병태 선생은 영조의 탕평책을 배척하다가 파직되었다.
1730년 경상도 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이에 응하지 않아 파직되고 이듬해 또 우부승지에 임명되었으나 응하지 않아, 왕의 노여움을 사서 합천 군수(陜川郡守)로 좌천되었다.
합천 군수로 재직할 때 한발로 식량난에 허덕이는 수많은 백성을 구제하기도 하였으나, 수토병(水土病)에 걸려 임지에서 죽었다.
청백리에 녹선(錄選)되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이병태는 사후(死後)에 청백리 녹선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이 보이며 다음과 같다.
“정조 20년 고전번역원db에서 발췌하였다.
병진(1796) 5월 9일(계축)
이병태·윤용 등 5인이 청백리로 선발되다
故 부제학 이병태(李秉泰), 판서 윤용(尹容), 판돈녕부사 정형복(鄭亨復), 좌윤 한덕필(韓德弼), 절도사 허정(許晶)이 청백리로 선발되었다.
우의정 윤시동이 아뢰기를,
“선조에서 청백리를 천거할 때에도 비록 사례를 자세히 갖추어 초계(抄啓)하지는 못하였으나, 정묘년 9월에 와서 풍원 부원군(豊原府院君) 조현명(趙顯命)이 우의정으로서 고 부제학 이병태, 고 판서 윤용, 고 판돈녕 정형복, 고 좌윤 한덕필, 고 병사 허정의 청백한 명성이 조정의 관리들 사이에 자자하다고 진달하고, 살아 있는 이는 품계를 올려 주고 작고한 이는 후손을 서용하자고 건의 요청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이는 모두 2품 이상으로서 논의하여 천거한 대상에 든 이들로서 이미 초계하는 과정을 거쳤으니 지금에 다시 거론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5인은 선조의 청백리 녹선안(淸白吏錄選案)으로 참고하는 것이 사리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따랐다.”
이병태의 선정비는 합천 대야성 비석군과 해인사에 있다.
이병태가 합천군수로 부임하는 것은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번병(藩屛) 번병은 지방관을 말한다.
이 되었고, 도곡집(陶谷集) 도곡 이의현 (1669~1745) 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덕재(德哉), 호는 도곡(陶谷), 조선 후기에, 형조판서,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에는 좌천되었다는 만사(輓詞) 만장이라고도 하며,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글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의 기록도 있다.
도고집에 실린 만사(輓詞)
“경연에 고전번역원db에서 발췌하였다.
서 계책을 진달하던 논사는 의논하고 생각하는 것으로, 특히 제왕이 학사(學士)들과 학문을 강론하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망자인 이병태가 홍문관 부제학으로 경연에 참여하여 강학하였음을 이른 것이다.
날에 논사하였고 / 論思講幄陳謨日
번병으로 좌천되었을 때에는 속박에서 벗어났네 / 掉脫藩維削跡時
세도가 분분히 어지러워도 자신은 그대로이니 / 世道百紛吾自在
사달이 본래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하네 / 要知舍達本如斯“
사각이 높이 사각은 역사를 기록하는 부서로 춘추관(春秋館)을 가리키며,
열려 많은 인재들 모였는데 / 史閣高開集衆賢
삼장의 온전한 삼장(三長)은 사가(史家)가 갖추어야 할 세 가지 뛰어난 자질로 재지(才智)ㆍ학문(學問)ㆍ식견(識見)을 말한다. 당(唐)나라의 사학가 유지기(劉知幾)가 “역사를 기록하는 데는 삼장을 구비해야 한다.” 하였다. 《舊唐書 卷102 劉子玄列傳》
재주와 식견을 그대에게서 보았네 / 三長才識見君全
청아한 이야기와 좋은 말을 공무의 여가에 펴니 / 淸談軟語公餘展
어긋나지 않고 서로 통하는 마음 기뻐하였노라 / 洞徹心期喜不愆
근래에 새벽별(샛별)처럼 벗과 멀리 떨어져 서로 만나지 못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당(唐)나라 시인 유우석(劉禹錫)의 〈송장관부거시서(送張盥赴擧詩序)〉에 “옛날에 함께 급제했던 벗들과 어울려 노닐 적에는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서 마치 병풍처럼 대로(大路)를 휩쓸고 다녔는데, 지금은 마냥 쓸쓸하기가 새벽별이 서로 멀리서 바라보는 것 같다.〔同年友 當其盛時 連轡擧鑣 亘絶九衢 今來落落 如晨星之相望〕”라고 보인다.
서로 떨어져 있었으니 / 年來落落似晨星
잠깐씩 만날 때마다 반가운 눈빛이었네 / 乍値逢迎眼輒靑
묵은 자취 야성에서 쓴 편지 한 장을 / 陳迹冶城書一紙
때때로 거듭 펴 보며 남은 향기 취하노라 / 時時披復挹餘馨
이병태 비는 다른 선정비와 조금 다른 명문이 보인다.
비제(碑題)는 읍선생 邑先生(읍선생)은 예전에 그 고을의 수령으로 있었던 사람의 다른 표현
으로 시작하고 끝부분은 거사대(去思臺)라 되어 있다.
비제 :邑先生副提學李公秉泰淸白去思臺
후면:
英廟辛亥 公以承宣黜補
莅郡三載 淸白聞于世 朝廷錄 其後郡人
感其澤 粤二年甲寅 立祠而祀之
後辛酉 因朝禁而撤焉 民無以寓慕
今上己亥 築之臺而表之石 庸伸去思之忱云爾
崇禎三己亥九月十二日 立
풀이:
영묘(英廟 영조(英祖)) 신해년(1731, 영조 7년)에 공(公)이 승선(承宣 승지(承旨))으로 출보(黜補)되어 합천군(陝川郡)에 부임한 지 3년 만에 청렴결백(淸廉潔白)하다고 세간에 소문이 나고, 조정(朝廷)에서 녹선(錄選)하였다.
그 뒤에 고을 사람들이 그 은택(恩澤)에 감동하여 2년 뒤 갑인년(1734, 영조 10)에 사당 생사당은 故 군수 이병태(李秉泰)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갑인년(甲寅年) 2월에 창건하였다.
(祠堂)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는데, 그 뒤 신유년(1741, 영조 17년)에 조정에서 금지(禁止)함으로 인하여 철거(撤去)되었다.
백성들이 흠모(欽慕)하는 마음을 깃들일 곳이 없어서 금상(今上 정조(正祖)) 기해년(1779)에 대(臺)를 쌓고 비석(碑石)으로 표시하여 떠난 분을 사모(思慕)하는 정성을 펴게 되었다.
숭정(崇禎) 3번째 기해년(1779년) 9월 12일에 세움.
우측 측면
臺碑 대비
監役都監 有學 金鼎國 柳奎昌 감역도감 유학 김정국 유규창
都監官 前千棇 조선 시대,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총융청, 관리영, 진무영 등에 속해 있던 정삼품의 무관직
李能白 兼書寫 도감관 전천총 이능백 겸 서사
磨石 監官 嘉善 金遠鶴 마석 감관 가선 김원학
色吏 攝戶長 李敏復 색리 섭호장 이민복
합천 해인사에 있는 군수 이병태 선생의 선정비에는, “郡守李公秉泰沒世不忘碑(군수이공병태몰세불망비)”라 되어 있다.
선정비에서 일반적인 표현은 “영세”라고 하는 데 비해 여기는 “沒世(몰세)”라는 표현을 썼다.
합천 해인사에 있는 선정비의 명문은 다음과 같다.
上之七年辛亥 韓山李公秉泰 以原任弘文館副提學 出補是郡 公淸儉好修君子也
以躬先之 不令而行 趁三年 政敎大化 是年公有事于京師 以疾卒 郡之人士 號泣咨嗟 咸曰公我父母也 其可忘耶 求其所以享之者
宜莫若祠 求其所以不朽者 宜莫若碑 遂建祠于邑也 邑城之外 又樹碑于十二坊 於是伽耶山之海印寺 亦刻石塚 辭以爲永久之 遂爲之銘曰
嗟惟李公 超類絶倫 氷蘖其姿 恬雅其人 列宮宇朝 爲經幄臣 及貶于南 値歲大凶 牛刀割鶴 游刃有容 凡厥庶民 緇徒居臣 一口而稱 罔不悅服 民曰樂哉 公我父母 爾耕我稼 安此田畝 吏曰可畏 公淸若水 毋犯于睾 惟公之使 吏民旣化 問其空門 不役不賦 亦公之恩 瞻彼塵土 擧世彌縫 公乃不然 惟義是從 德其多矣 百世可忘 公來京師 奄忽云亡 訃傳千里山野 一邑相告涕洟 罔不哀感 庶令來世 記公徽蹟 邑建祠宇 坊■二碑 伽耶之陽 亦黃絹辭 非私于公 山門之思
崇禎後再甲寅五月 日
풀이:
금상(今上 영조 (英祖 )) 7년 신해(1731, 영조 7)에 한산(韓山) 이공 병태(李公秉泰)가 원임 홍문관 부제학(原任 弘文館副提學)으로 나가서 이 군(郡, 경남 합천군 (陝川郡 ))에 보임(補任)되었는데, 공(公)은 청렴하고 검소하며 수행(修行)을 좋아하는 군자(君子)이니, 직접 먼저 하니 명령하지 않아도 시행되었다.
3년이 지나자 정교(政敎)가 크게 변화되었다.
이 해에 공(公)이 경사(京師 한양 (漢陽 ))에 볼일이 있어서 갔다가 질병으로 돌아갔으니 군(郡)의 인사(人士)들이 부르짖고 울먹이며 탄식하며, 모두 말하기를 “공(公)은 우리 부모와 같은 분이니 잊을 수 있겠는가.
흠향하는 소이(所以)를 구하는 것은 마땅히 사당(祠堂)을 세우는 것만 같음이 없고, 영구히 없어지지 않게 함을 구하는 것은 마땅히 비석(碑石)을 세우는 것만 같음이 없다 하고, 드디어 읍(邑)에 사당을 세웠다.
또 읍의 성(城) 밖 12방(坊)에 비석을 세웠으니, 가야산(伽耶山)의 해인사(海印寺)에도 바위에 새겨서 영구하게 전할 말을 적고,
드디어 아래와 같이 명(銘)을 지었다.
嗟惟李公 超類絶倫 아, 이공(李公)은 무리들 가운데서 아주 뛰어나
氷蘖 빙얼(冰蘖)’은 청고(淸苦)한 지절(志節)을 말한다. 청빈한 생활로 얼음을 마시고 나무의 움을 먹는다는 ‘음빙식얼(飮氷食蘖)’이라는 말에서 유래한다.
其姿 恬雅其人 얼음 같은 자태에 담박한 분이셨네.
列宮宇朝 爲經幄臣 조정에 나열하여 경연(經筵)의 신하되셨네.
及貶于南 値歲大凶 남쪽으로 좌천(左遷)되어 큰 흉년을 만났네.
牛刀割鶴 ‘우도할계(牛刀割鷄)’는 공자가, 제자 자유(子游)가 무성(武城)의 수령(守令)이 되어 예악(禮樂)으로 고을을 다스리는 것을 보고 “닭을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리오.”라고 한 데서 온 말로, 무슨 일을 함에 있어 그 힘이 매우 넉넉함을 뜻한다. 《論語 陽貨》 여기서는 이공이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도, 큰 고을로 가지 못하고 합천이라는 작은 고을에 수령으로 내려온 것을 뜻한다.
‘유인(游刃)’은 능수능란한 포정(庖丁)의 칼날 솜씨를 의미한다. 《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에 “두께가 없는 칼날을 틈이 있는 소의 살 속에 집어넣으면 그 공간이 널찍하여 여유작작하게 칼날을 놀릴 수 있다.[刀刃者無厚 以無厚入有閒 恢恢乎其於遊刃 必有餘地矣]”는 백정의 말이 실려 있다.
游刃有容 소잡는 큰 칼로 닭을 잡았으니 국량이 넉넉하여 용납함이 있으니
凡厥庶民 緇徒居臣 여러 백성들과 승려들이 살았네.
一口而稱 罔不悅服 한 입으로 칭찬하며 기쁜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음이 없었네.
民曰樂哉 公我父母 백성들이 ‘즐겁구나, 공은 우리 부모와 같도다.
------생략-----
저 진흙을 바라보니 온 세상이 이리저리 꾸며대는데,
公乃不然 惟義是從 공은 그렇지 않아 오직 의리(義理)를 따르셨네.
德其多矣 百世可忘 덕이 훌륭했으니 오랫동안 잊을 수 있겠는가.
公來京師 奄忽云亡 공께서 경사에 오셨다가 갑자기 사망하셨다 하네.
訃傳千里 山野一邑 부고(訃告)가 천리 전달되니 온 고을 산과 들판이
相告涕洟 罔不哀感 서로 알리고 눈물 흘리며 애통하지 않음이 없었네.
庶令來世 記公徽蹟 오는 세상으로 하여금 공의 아름다운 자취
를 기억하게 하기 위하여
邑建祠宇 坊■二碑 읍에 사당을 세우고 열두 마을 발견 된 비는 해인사 뿐이다.
에 비석을 세웠네.
伽耶之陽 亦黃絹辭 가야산 남쪽에 절묘한 말로 지었으니
非私于公 山門之思 공에게 사심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산문 사람들의 생각이라네.
숭정(崇禎) 뒤에 두 번 째 갑인년(1794년) 5월 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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