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왜 로마서 9장을 해석하지 못하면서도 『하나님이 절대주권으로 예정하셨다고요?』라는 책을 썼는가?
(3) 칼빈의 5대 교리는 서로 의존적이라서 하나가 틀리면 다 틀린 것이 된다.
데이비드 포슨은 "그리스도의 신앙과 관련된 어떤 조항도 독립적으로 생각할 수 없다. 서로 다른 교리들은 상호 관련을 맺고 있어서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는다."고 말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무엇보다 칼빈주의 5대 교리에 딱 들어맞는 말입니다. 칼빈이 주장한 5대 교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2.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3.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
4.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5.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첫 글자를 따서 '튤립'(TULIP)이라고 하는데, 칼빈의 5대 교리는 하나의 사슬처럼 서로 매우 의존적입니다. 이 5가지 교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흐름 속에 있습니다. 먼저, 전적 타락되었기 때문에 무조건적 선택이 되었습니다. 칼빈주의자들은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고 부패했기 때문에 스스로 구원을 받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전적 무능력 상태에 있다고 봅니다. 구원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역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택자와 버릴 자를 하나님이 결정하신다고 믿습니다. 또 무조건 선택이 되었기 때문에 제한적 속죄가 있습니다. 택한 자만 구원하시려고 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은 그들만을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또, 제한적 속죄 때문에 불가항력적 은혜가 발생합니다. 그들은 성령께서 십자가의 구속을 적용하시는 대상은 제한 속죄의 대상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선택된 자만을 위해서 죽으셨기 때문에 성령은 그들만을 위해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강제적으로 ... 마지막으로, 불가항력적 은혜 때문에 궁극적 견인이 됩니다. 불가항력적으로 주어진 은혜를 받은 택한 자들은 결코 구원이 상실되지 않는다고 그들은 생각합니다. 때문에 짐 패커(Jim Packer) 박사는 이 다섯 가지가 서로 완전히 결합된 체계이며 서로가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나머지를 무효화시키지 않고는 그 어떤 것도 빠뜨릴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역으로, 칼빈주의 5대 교리 중 하나가 틀리면 나머지도 틀린 것이 된다는 뜻이 됩니다. 서로가 의존적이라서 하나가 비진리면 다른 것들도 진리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불가항력적 은혜'가 사실이 아니며 비성경적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으로 이미 예정론이 거짓이라는 것이 증명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더 결정적인 것이 있습니다. 바로 견인의 교리입니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견인의 교리 역시 비진리라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장로교의 유력한 학자들까지 이것을 인정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고린도전서 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칼빈주의자들은 이 구절에 나오는 '버림'이 구원이 아니라 상급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바른 해석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최대한 간략히 설명해드릴 테니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고린도에서는 매 2년마다 고대 올림픽경기에 버금가는 이스뜨미안(Isthmian Games)이라는 경기가 열렸습니다. 바울은 이 장(고린도전서 9장)에서 이스뜨미안 경기의 종목들 중 육상과 권투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이 점은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지금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즉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것', '그들이 받는 상인 썩을 면류관' 둘 다 비유입니다. '달음박질'이 바울이 실제로 달리기를 했다는말이 아닌 것처럼 '상'도 실제로 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달음질처럼 '상'도 비유입니다.
그럼 '상'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바울은 스스로 '상'을 "썩지 아니할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고린도전서 9: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많은 이들이 "썩지 아니할 것"이 '썩지 않는 면류관'을 뜻한다고 속단합니다. 그러나 다시 읽어보십시오! 바울은 분명히 '썩지 않는 면류관'이라고 하지 않고 '썩지 아니할 것'이라고 썼습니다. 이것은 사활적으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상의 의미를 정확힝 보여준 것이기 때문입니다. 상의 의미는 '썩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럼 이 '썩지 아니할 것'은 무엇일까요?
갈라디아서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로마서 2: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디모데후서 1: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고린도전서 15: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제 아시겠습니까? 이 용례들을 볼 때 '썩지 아니할 것'은 상이나 면류관이 아니라 영생 혹은 궁극적인 구원입니다. 김세윤 교수님도 이 장에서의 '상'이 '구원'이라 했고 '그리스도인은 썩지 않는 영원한 구원을 얻기 위해 달리는 자들'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한 '버림'은 누가 뭐래도 실제로 버림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방금 말한 해석이 옳다는 것은 그 뒤 거듭 확증이 됩니다.
먼저, 바울은 이 고백에서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즉 복음 전파를 통해서 구원 받는 사람과 자신의 영혼이 버림받는 것을 대조했습니다. 그러므로 '버림'이 영혼이 버림받는 것을 뜻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버림'이 실제로 버림받는 것을 뜻한다는 것은 앞의 문맥에도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9:23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이처럼 바울은 "복음에 참여"하기 위해(23) 즉 '자기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바로 뒤 24-27절 말씀은 복음에 참여하기 위해 즉 궁극적인 구원에 참여하기 위해 한 일을 기록한 것임이 분명합니다.
또한, 바울이 말한 '버림'이 실제로 버림받는 것을 뜻한다는 것은 뒤의 문맥에도 분명히 나타납니다. 고린도전서 9장 27절의 고백을 한 후 연이어 10장에서 바울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 중의 다수가 멸망받았으며, 그것이 말세를 만난 우리의 거울과 경계로 기록되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그들이 행한 악을 우상숭배, 음행, 주를 시험, 원망 4가지로 적시했습니다(고전10:7-10). 그 후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0:11-12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버림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있다는 말이지요! 이것은 그 의미가 명백하기 때문에 심지어 구원받은 사람도 버림받을 수 있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백석대 홍인규 교수님조차 이 구절에 관해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고 정기적으로 성찬에 참여하며 많은 성령의 은사들을 경험하였다 할지라도, 죄를 고집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가 없다. ...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 곧 '우리 조상들'이 많은 신령한 체험에도 불구하고 멸망한 것처럼, 그들도 넘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따라서 바울이 말한 '버림'(고전9:27)이 실제로 버림받는 것을 의미함이 분명합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저는 여러 해 전부터 학자들의 책을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놀란 것은 총신대 이한수 교수님까지도 이것을 인정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 단어('버림'-저자 주)가 단순히 주님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사람이 얻을 상급을 상실하는 정도를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고(고전3:15 참조) 또 어떤 학자들은 이 단어가 하나님이 주신 직분에 부적격한 자로 판명되어 자격을 상실하는 일을 지칭하는 것을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단어가 바울서신에서 사용될 때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완전히 내버리는 것과 관련하여 사용될 때가 많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후서 13:5에서 동일한 단어를 사용할 때 그것을 '버리우는 일'로 번역하였다. ... 다시 말해서 사람이 자신이 믿음 안에 있는가를 확증하지 못하면 그는 버리운 자인 것이다. ... 따라서 본문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을 버리실 수 있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한수 교수님뿐만이 아닙니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신학자 김세윤 교수님을 비롯해서 양용의, 권연경, 백석대 총장을 지낸 최갑종 교수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실력 있는 학자들이 구원받은 사람이 버림받을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놀랍게도 이분들의 배경이 대부분 장로교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면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구원받은 사람도 버림받을 수 있다는 것이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성경적인 명백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번 구원이 영원한 구원이 아니면 절대주권에 의한 예정론도 진리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둘 다 맞든지, 둘 다 틀리든지 둘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드리면, 구원받은 사람이 버림받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선택이 칼빈이 주장한 그런 식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도 버림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버림받을 사람이 구원받았다는 것은 예지예정의 입장에서 선택받은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선택받은 자가 아닌데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예정이 칼빈이 주장하는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왜냐하면 칼빈의 예정론에 의하면 선택받은 사람만 구원받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칼빈의 예정론이 틀린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자 중에 버림받는 자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칼빈이 주장한 절대주권에 의한 예정론이 비진리라는 것을 확실히 아셨지요! 그래서 제가 로마서 9장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을 때도 "하나님이 절대주권으로 예정하셨다고요?" 즉 택도 아닌 소리 하지도 말라는 투로 예정론을 반대하는 책을 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