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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공업고등학교 3학년2학기 어느날, ----------------------------------------
난 학교 철조망을 넘었다. 구미역에서 열차를타고 대전으로 간다, 순천역에 도착하니, 고향에 온 느낌이다. 이곳엔 내가 좋아하는 몇친구들도 있다. 내가 없어진 기숙사, 그리고 학교는 어떻게 되었을가까 몹시 궁금하다. 오랫만에 자유를 얻은것같다.
이제 집으로가야한다, 집에가서 부모님께 무어라고 말을할까. 내가 학교에서 도망왔다고하면 아버님 어머님께선 어떡 하실까. 대통령 학교에 입학했다고 온동네 잔치까지 벌였던 것들은 ......., 자네아들 출세 했다고 모두가, 울 아버지를 부러워 햇던 것들은, 아들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녁에 제일큰 장독위에 생수를 올려놓고 천지신명께 기도 올리실 어머님은, 잠싯동안 순천역앞 의자에 멍하니 걸터앉아 온갖 상념에 빠졌다.
역전엔 학생복을 입은 남녀 학생들이 각자 집으로가기위해 기차표를 사고, 남녀 학생들 끼리끼리 모여서 낄낄대기도하고, 학생들이 장난치며 자유롭게 노니는 모습이 무척이나 부럽다.
자유롭게 집을 오가면서 학교를 마치면 친구들과 어울려 놀수있고 여자친구들과 어울려 교제도하고, 빵집에들려서 군것질도 할수 있는 분위기와는 대조적인, 금오공고의 생활은 이를 감히 생각 할수 없다.
벌교행 버스를 탔다. 어둑할즈음에 집엘 들어가야한다. 방학도 아닌데 동네사람이나 아는 사람을 만나면 설명하기 곤란하다. 벌교에서 고흥가는 완행버스를 타면 동강에서 내려준다. 내가 가는 대서행 버스를 타게되면 모두가 아는사람이라서, 일부러 동강에 내려 걷기로했다. 동강에 내릴때가 저녁9시쯤 되었나보다. 저녁식사 시간이 지났지만 긴장한 탓인지 아무것도 먹고싶지가 않다. 동강에서 집에까진 약 20리정도된다.
집에도착할 무렵엔 어둠이 짖게갈린 자정이 다될무렵이다. 대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니 모두가 잔다. 인기척을하고, 저에요 햇더니. 어머니가 일어나시면서, 누구냐 하신다. 태석이요, 아니 이시간에 먼일이냐,,,하시더니 . 예말이요, 예말이요 하시면서 아버지를 깨우신다. 내가 공부했던 작은방으로 들어갔다. 평소엔 아무도 사용을 하지 않은지 냉기가 흐른다. 그래 이시간에 우째왔냐. 하시면서 어머님의 근심어린 모습이 역력하다.
어머니, 아버지께선 나의 표정이 수상쩍음을 이미 간파 하신듯 , 그래 무슨일있냐. 어디 말해봐라 하신다. 난 아무말도 할수 없어 그냥 목이메인체 눈물만 흘렸다.
잠시후 난, 학교에서 도망왔어요 라고 했다. 군대 5년 가기싫고, 더이상 학교생활을 할수 없다고 했다. 다른 학교엔 갈수 없으니 검정고사를 치러서 대학진학을 하겠다고 했다. 이런저런 설명을 했지만, 부모님은, 검정고사가 무엇인지, 대학진학이 어떻게 되는지, 아실리가 없다
내가 여러 얘길 하는동안 부모님께서는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실지 난 이미 알고 있다. 이놈이 학교를 그만둔다면, 동네방네 소문나서 태석이가 출세 했다더니 그 학교에서 쫒겨 났는갑데, 재관이(울 아부지) 그친구 새끼자랑 엄청시리 해쌌더니 참말로 속상허것네. 그렇잖아도, 일부 동네사람들과 편이갈려 관계가 좋지않은 싯점에, 몇몇 동네사람들은 아버지의 기가 꺾이실것에 흡족한 미소를 지을 사람들도 있을 것임이 자명하고.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께서 힘없으신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래 알었다 , 근데 니가 학교를 그만두면 낼부터 사람들을 우째보것냐. 참 깝깝허다 하시면서 애써 참으시는 눈물을 흘리신다.
난 울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신걸 처음본다, 늘 강인하시고, 언제나 무섭게만 느껴졌던 아버지셨다.
한동안 말이 없다. 난 내가 단호하게 말씀드리지 못하고 있음을 안다. 단지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고만 해도 부모님께선 엄청난 충격을 받으실 거라는걸 알고있다. 내가 학교를 그만 둔다고 하면, 혹 아버지께서, 그래 그놈의 학교 소문만 무성했지 꼭 좋은 학교만은 아닌것 같더라. 니 생각이 그렇다면 그만두고 다른 방도를 찾아보자. 이렇게 말씀 하실걸 조금은 기대 했지만, 기대는 빗나갔다.
난 어릴적부터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는건, 자식된 도리가 아니라는걸 알고, 부모님께 나름대로 효도했다. 그리고 장남인 내가 부모님께 잘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박혀있다. 학교생활하면서도 재미없고 늘 탈출하고픈 생각밖에 없었지만 부모님께는 꼬박꼬박 편지쓰는걸 잊지 않았다. 편지에는 늘 학교생활 재미잇고 잘있다고만 했었지. 불편하다는 말은 한번도 해본적이 없다.
느닷없는 나로 인해서 부모님께서 충격받지 않도록 하려 했으나. 이렇게라도 부모님의 의도를 슬쩍 파악 할 수 밖에 없었다.
난 단념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결정했다. 나의 앞으로의 일생이, 진로가 어찌되든 ,부모님께서 이곳에 사시는동안 부모님이 다른 사람들한테 조금이라도 기가 꺽이신다면, 이것은 나의 잘못이다.
우리 동네는 예로부터 남양송씨가 사는 자자일촌 이다. 이곳에 오직 타성인 여산송씨는 우리집 밖에 없다, 아버님의 고향은 원래 이곳이 아니다. 고흥군 점암면 사정리, 아버님이 태어나신 부락은 여산송씨의 집성촌이다. 아버지께선 군입대 입영 영장을 받으시고, 군대를 가지 않으실 생각에 이곳으로 피신을 하셨다. 당시 아버님의 고모부 되시는 분이 도의원 (송동석)이셨는데, 도의원이신 고모부집으로 기피를 하신것이다. 당시 순경들이 아버지가 이곳에 있는것을 알았지만 도의원이신 고모부의 덕분에 잡혀 가시진 않았다한다. 그럭저럭 이곳에서 어머님을 만나 결혼하시다보니 이곳에 정착 하시게 되었다. 인물도 좋으시고 힘도쎄셔서 장수 같으신 아버님을 동네사람들은 모두가 좋아하진 않았다. 무식한 동네사람들을 마음대로 부려먹는 동네의 우두머리격인 사람과는 늘 앙숙이었다. 좋은게 좋고 힘있는 사람이 하는 모든짓들을 눈감고 계시는 아버지의 성격이 아닌탓에. 친구되는 그사람과는 늘 마음속으로 투쟁을 하고 계심을 잘안다. 내가 학교를 그만 뒀다는말을 그사람이 들으면 아마도 무척 기뻐할 것임도 난 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부모님께서 나로인하여 기쁨이 되어야할터인데, 걱정과 실의에찬 나날이 되신다면 이건 자식으로서 할짓이 아님을 느꼈다.
난 이렇게 말씀 드렸다.
아버지 어머니, 제가 학교에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내손을 잡으시고 한참동안 우시는 부모님께 난 뭐라 드릴 말씀이 없었다. 내 생각이 너무 단순했다. 군대5년 친구들도 가는데 난 친구들보다 뭐 특별한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잠도 자지않고 동이트지않을무렵 집을 나섰다. 어머니께서 호주머니에 돈을 넣어주시면서 ,학교가서 혼나면 어떡하냐. 가서 편지해라 하신다. 마음아파하실 부모님 생각을 하니, 하염없이 눈물이 난다, 어둑한길을 걸으면서 정신없이 울었다.
어젯밤 내렸던 동강에 오니 날이 밝는다. 버스를 타고 벌교정류장에 내리니 , , 온갖 바다에서난 해물 고막 등 한광주리씩 머리에 이고 장을 보러 오는 할머니 아주머니들로 가득하다. 배가고프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날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을수 있다, 아는사람 만나면 인사하기도 귀찮다. 순천에가서 뭘 사먹기로하고 버스표를 사서 순천으로 왔다. 시외버스정류장옆 기사식당에서 김치찌게를 시켜 먹었다. 오랫만에 밥을 먹은것같다.
부산으로가서 동래 온천장으로 갔다, 동래 온천장엔 이모님이 계신다. 늘 잘해주시고 어머니만큼 우리 모두에게 아낌없이 베풀어 주시는 이모다. 이모님께는 그냥 일이있어 집에들렸다가 구미학교로 가는거라고했다. 초밥집으로 날 데려 가시더니 맛있는 초밥과 회를 사주신다. 필요한거 없느냐,면서 이것저것 사주실려고 애를 쓰신다. 이모부께선 이곳 온천장 소위 건달이면서 고속버스 매표소장을 하고 계신다. 그래서난 방학끝나고 학교에 갈땐 늘 이곳에서 늘 공짜로 구미행 버스를탄다. 운전수옆 안내양 앉는 자리가 내좌석이다.
이제 학교로 다시 가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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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태석이 얼굴 떠올리며 글을 읽고 나름대로 많은 생각을 해보네. 근데 2장은 언제올리나?
부모님의 뜻을 저버리지 않고 살아온 친구가 부럽구만 지금의 내아들이 부모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릴수 있는 자식이었으면 하는 생각 들게 하는 마음이 간절 하네
태석이 니 글을 보니 가슴 찡하게 공감이 간다. 나 역시 부모님 짐 지우지 않을려고 여상고를 선택했고 (상고 나와서 빨리 은행에 취직하여 돈벌려고 말이야), 또 대학도 다른 대학은 돈도 많이 들고 4년이나 공부를 해야 되는데, 교대는 학비도 국비여서 거의 들지 않고 2년만 다니면 되서 교대를 선택하는 것도 나름대로 부모님에 대한 효도, 가족들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지. 그런게 아마 그 시절 우리들의 자화상이지.
지난 세월을 뒤돌아 보면 한가지 애환은 다 가지고 있지 얺을까 싶다 나 또 한 얼마 전 까지 늦은 공부를 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