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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737
1월16일[연중 제2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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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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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5KVMHBRr-Us
[작은형제회 양두승 미카엘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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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가 자주 빠져들게 되는 무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확대해석, 침소봉대, 과잉 일반화입니다.>
한 가지 기억이 떠오릅니다. 나름 최선을 다해 준비한 강의 시간인데, 제일 앞에 앉아 계신 분이 강의 시간 내내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만지작만지작하고 계셨습니다. 시종일관 그러시니 점점 마음이 불편해졌습니다.
강의 시간에 도대체 뭘 그렇게 열심히 검색하십니까?
게임하고 계십니까? 그랬더니, 그분께서 화들짝 놀라면서, 하시는 말씀! “ 그게 아니라 스마트폰 메모장에 강의 내용 열심히 적고 있었습니다.” 저는 즉시 깨갱하며 그랬습니다. “아! 네 알았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계속 적으세요.”
또 다른 제 착각이랄까, 과잉 일반화 증세가 떠오릅니다. 특강을 끝내고 나오는데, 한 자매님이 유튜브 강의 잘 활용하고 있다고 너무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셨습니다.
어깨가 우쭐해졌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자매님은 잠 안올 때면 즉시 제 유튜브 강의를 트신답니다. 잠 오기 적절한 목소리라 불면증 치료제로 최고랍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적당히 알이 맺히기 시작한 밀밭 사이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계속되는 격무에 무척이나 굶주렸던 제자들은, 그것으로라도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밀이삭을 좀 뜯기 시작했습니다.
눈에 쌍심지를 켜고 지켜보던 바리사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큰소리로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마르코 복음 2장 24절)
바리사이들 역시 저처럼 확대해석 내지는 침소봉대를 한 것입니다. 이미 꼬일대로 꼬인 바리사이들의 마음을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어제에 못지않은 강펀치 하나를 시원하게 날리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코 복음 2장 27~28절)
안식일과 관련된 세부적이고 지엽적인 규정 하나 하나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안식일 제정의 근본 취지를 망각해버린 바리사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질책이 참으로 뜨끔합니다.
안식일은 원래 인간을 비롯한 이 세상 모든 창조물, 심지어 무생물에게까지 휴식과 평화를 누리게 하려는 의도로 생겨났습니다. 주인도 쉬지만, 종도 쉬게 합니다. 사람도 쉬지만, 가축도 쉬게 합니다. 농부도 쉬지만 경작지도 쉬게 합니다.
하느님께서 안식일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은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창조물인 백성들과 모든 피조물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생명과 자유를 경축하는 날인 안식일을 속박의 날, 억압의 날로 변질시켜버린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절대 원치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을 위해서라면서 안식일과 관련된 수많은 규칙과 관습들을 만들었습니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39가지 노동이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곡식을 추수하는 일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고 따진 것은 제자들이 밀 이삭 몇개를 건드린 것인데, 그것을 지나치게 확대해석 및 과잉 일반화를 시켜버린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의 결정적인 실수는 하느님께서 극진히 사랑하시는 인간에 대한 소홀함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섬긴다는 이유로 동료 인간 존재의 가치를 무시했습니다.
신앙 행위 안에서 하느님 사랑도 중요하지만 하느님의 모상인 동료 인간에 대한 사랑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합니다. 인간 존재라는 것이 별 것 아닌 것 같아 보여도 그 안에 하느님의 손길이 닿아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눈에 보이는 하느님이 인간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인간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안식일 논쟁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규정의 적극적인 준수보다도 동료 인간에 대한 사랑을 더 강조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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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rJZIgkwWZu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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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16일 [연중 제2주간 화요일]
마르코 2,23-28
<부부임을 자주 잊을 때 더 부부가 된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에 밀이삭을 뜯어먹는 제자들을 두고 예수님께 따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을 두둔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유대인들에게 안식일 법은 상당히 엄격합니다. 하루 동안 걸을 수 있는 발걸음 숫자가 정해져 있고 엘리베이터 층수도 누를 수 없으며 에어컨이 꺼져도 다시 켤 수도 없습니다. 그들은 율법에 집중하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백성이 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율법에 집중할수록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됩니다. 법에 집중할수록 법을 지키지 못하게 되고 결혼에 집중할수록 결혼생활을 유지하기 힘들어집니다. 경계에 집중할수록 차는 경계선 밖으로 나가려고 합니다.
만약 물고기가 자기를 바라보는 고양이가 무서워 어항 유리가 튼튼한지만 집중하고 있다면 그 안에서 다른 물고기나 환경에 적응할 수 있을까요? 법은 이 어항과 같습니다. 그냥 그 안에 머물면 되지 그것에 신경 쓰면 정작 법을 주신 분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없게 됩니다.
왓챠 드라마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의 줄거리입니다. 창욱은 40대입니다. 그는 번역가와 인문학 강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아내는 출판사 사장이고 남편은 아내의 글솜씨가 맘에 안 들고 남편은 아내가 가정에 소홀한 것 같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습니다.
둘은 얼마간의 별거를 하게 되었고 남자가 아내 없이 사는 것이 너무 편했는지 먼저 이혼장을 들고 왔습니다. 아내도 도장을 찍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때 아내는 말기 대장암 판정을 받습니다. 소화기 문제로 먹는 것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녀는 창욱에게 매일 요리를 해달라고 부탁하는데, 창욱은 라면밖에 할 줄 모릅니다. 창욱은 의리 때문인지 당분간 아내를 위해 요리를 배워가며 하기로 합니다. 창욱은 살면서 단 한 번도 요리해보지 않았지만, 오직 아내의 소중한 한 끼를 위해 좋은 식재료와 건강한 레시피를 개발하는 데 온 힘을 쓰며, 서투르지만 조금씩 가족의 소중한 의미를 깨달아가기 시작합니다.
물론 아내는 죽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사랑해주는 남편과 아들을 바라보며 슬프지만, 괜찮게 죽습니다. 이 모든 것은 부부임을 잊고 사랑에 집중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부부라면 여자가 음식을 하고 남자가 돈을 버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평소 삶은 이 반대였습니다. 남편이 가정일을 열심히 한 것은 아니지만, 바깥일에만 열중하는 아내에게 불만을 품었었습니다. 아내도 자신보다 돈을 못 버는 남편에게 불만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는 ‘부부는 이래야 한다’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부부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선일 뿐입니다. 차의 양쪽 차선에 집중하면 차가 뒤뚱거리다 결국엔 차선을 넘습니다. 운전을 잘하려면 차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중앙을 봐야 합니다. 그러면 차선을 넘는 일이 없습니다. 부부가 되었다면 더는 부부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만 생각하면 됩니다. 상대를 어떻게 행복하게 해줄까만을.
결혼은 왜 하는 것일까요? 더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식으면 어떨까요? 사람은 결혼이란 틀에 맞추기 위해 살아갑니다. 이것이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사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모든 것은 사랑을 지향합니다. 이 지향을 잊으면 안식일 법을 위해 사람이 희생하다 결국엔 지쳐 그것마저도 지킬 수 없게 됩니다.
모든 율법은 금붕어에게는 어항과 같고 운전자에게는 차선과 같습니다. 그 안에 들어와 있다면 그것을 만들어준 이유, 곧 사랑만을 생각하며 행복하게 살면 됩니다. 그러면 선을 넘지 않습니다. 율법주의자가 되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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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천동설’과 ‘지동설’이 있습니다. 인류는 550년 전까지는 ‘천동설’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매일 일출(Sunrise)와 일몰(Sunset)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해와 달 그리고 별이 움직이는 것이 보이지, 지구가 움직인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구를 중심으로 모든 천체가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것이 ‘천동설’입니다. 이는 상식이고, 자명한 이치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과학자들은 천동설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발견하였습니다. 천동설을 통해 별들의 움직임을 바라볼 때 몇 가지 문제점이 발생하게 되었는데 별의 ‘연주 시차’가 그것이었습니다. 별의 연주 시차란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 운동하기 때문에 별을 바라보았을 때, 별의 위치가 상대적으로 바뀌어 보이는 현상을 말하는 것으로, 지구가 천동설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가만히 있다면 연주 시차가 나타날 리가 없기 때문에 천동설로는 연주 시차를 설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구의 운동으로 생기는 현상 중 대표적인 것은 계절 변화인데, 계절의 변화는 지구의 자전축이 기울어진 상태로 공전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인류가 우주선을 발사하면서 우리는 아름다운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동설’은 지구 중심이라는 사고의 폭을 우주로 향할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이런 주장을 한 사람이 코페르니쿠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발상의 전환을 말할 때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코페르니쿠스의 발상의 전환보다, 1500년 전에 이미 발상의 전환을 보여주신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지구로 오셨습니다. 왕이 사는 곳이 궁궐이 되듯이, 하느님의 아들이 사는 곳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런 면에서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셨고, 하느님의 아들이 지구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치와 기준을 넘어서는 말씀을 많이 하십니다. 성공, 재력, 권력, 명예, 능력, 지위, 업적은 우리들이 추구하는 가치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다른 이야기를 많이 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이 더 쉽다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서 섬기라고도 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하는 부자 청년에게는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웃에게 주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가난한 사람, 박해를 받는 사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시는 행복의 기준은 세상 사람들의 기준과는 달랐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은 획일적인 가치와 제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앙은 기존의 전통과 관습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성찰하고 실천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시는지요? 어떻게 해석하고 싶으신지요? 교회의 법과 규정은 별로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까요? ‘안식일의 규정은 최소한의 것이지 좀 더 사랑을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고, 잘못한 이를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해석을 할까요? 저는 두 번째 의견에 저의 한 표를 던지고 싶습니다. 교회는 60년 전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 하였습니다. 공의회는 교회의 많은 규정과 법들에 대해서 새로운 해석을 하였고, 시대에 맞도록 바꾸었습니다. 전례, 신학, 타종교에 대한 교회의 시각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60년이 지난 지금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정들에 대한 해석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와 같은 변화와 쇄신이 어떤 결과들을 가져왔는지에 대한 평가도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교황님께서도 우리가 빠지기 쉬운 유혹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우리가 교회의 전통과 관습을 너무 쉽게 버리려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것들이 분명 도움이 되고 필요한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을 너무 절대시 하면 혼란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 새로운 것들도 언젠가는 지나간 것들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해석 기준은 좀 더 온전한 마음과 정성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안식일 규정과 법을 넘어 이웃을 위한 헌신과 사랑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이미 그를 배척하였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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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2,23-28: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창조해 주셨다. 인간이 노력하면 그 결실을 얻을 수 있게 해 주셨다. 본래 안식일의 의미는 하느님께 이 모든 것을 감사드리고 계속 그 축복을 비는 날이었다. 생명의 하느님께 그러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그 근본정신이다. 안식일이라서 일을 하는 것이라고 하여 생명이나 생명 유지에 필요한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바로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이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은 선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선행을 베푸는 것이다. 왜냐하면, 법이라는 것은 인간이 존재한 다음에 생긴 것이며, 그 법은 인간의 삶을 위한 것으로 만들어진 것이지, 법이 먼저 생기고 나중에 인간이 생겨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다가 밀 이삭을 자르자 바리사이들이 안식일 법을 어겼다고 항의를 하고 예수께서 그에 대한 답을 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27절). 이 말씀으로 바리사이들의 비난에 대해 대답을 하신다. 하느님께서는 먼저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다음에 안식일을 정하셨다는 천지창조 사화(창세 1,26-2,4)의 이야기와 같다. 이 말씀은 안식일의 의미 자체를 밝히는 원칙적인 답변이다. 법보다도 사람을 중요시하는 인본주의적 법이념을 내세우셨다. 법률 만능주의가 아니라 인권을, 안식일 법보다 인간애를 앞세우셨다.(참조: 마르 3,1-6; 루카 13,10-17; 14,1-6; 요한 5,1-8; 9,1-41) 그리고 하느님의 전권을 받으신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신다.(28절)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떤가? 주일을 안식일 본래의 의미대로 지키며 살아가야 하는데, 주일을 지키는 것을 강박관념 때문에, 주일을 지키지 않는 것은 죄가 되고, 하느님으로부터 어떤 벌을 받을까 두려워서 아무런 느낌이 없이 미사에 참여한다면, 그것은 현대적인 율법주의일 것이다. 진정으로 하느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그러면서 우리 자신을 주님께 봉헌하는 제사를 지내는 날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주일을 살아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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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바리사이들은 배가 고파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한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합니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그런데 성경 어디를 찾아보아도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은 것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규정은 없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정하여 놓은 규정입니다. 그들은 마치 “안식일의 주인”이 되어, 그들이 정하여 놓은 규정으로 하느님을 자비가 전혀 없으신 분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하느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을수록, 교회 안에서 중요한 직분을 받을수록 꼭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자신이 결코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사이들처럼 하느님과 이웃을 더욱 사랑하도록 주어진 법으로 이웃들을 죄인으로, 그리고 하느님을 자비가 전혀 없으신 분으로 전락시키게 됩니다.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을 때까지 모든 과정을 주관하고 계십니다.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이미 그를 배척하였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 “바로 이 아이다. 일어나 이 아이에게 기름을 부어라.”
교회에서 받은 모든 직분과 규정, 그리고 교회의 모든 일의 주인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맡겨 주신 일을 성실하게 한 다음에,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10)라고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자신이 주인이 되려는 이들에게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며 오늘 하루를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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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길을 내고 가면서 밀 이삭을 뜯기 시작하였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에브야타르 대사제 때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고 함께 있는 이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마르 2,23-26)
마태오복음을 보면,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마태 12,1) 바리사이들은 제자들의 ‘배고픔’은 보지 않고,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다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배고픔을 먼저 보라는 뜻으로 다윗이 배가 고파서 율법을 어긴 일을 말씀하십니다. 그 일은 사무엘 상권 2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 다윗이 율법을 어긴 일에 대해서 유대인들은 다윗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배고픈 사정은 똑같은데, 바리사이들은 왜 다윗이 한 일은 비난하지 않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한 일은 비난했을까? 다윗은 율법을 어겨도 되고 일반 서민들은 어기면 안 되는가? 율법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다윗을 비난하지 않았다면 서민들에 대해서도 비난하면 안 됩니다. (서민들을 비난하려면 다윗이 율법을 어긴 일을 먼저 비난해야 합니다.)
2)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이 무엇인지부터 살펴보아야 합니다. 신명기에 있는 십계명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명령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여라. 엿새 동안 일하면서 네 할 일을 다 하여라.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의 하느님을 위한 안식일이다. 그날 너의 아들과 딸, 너의 남종과 여종, 너의 소와 나귀, 그리고 너의 모든 집짐승과 네 동네에 사는 이방인은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여 너의 남종과 여종도 너와 똑같이 쉬게 해야 한다. 너는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를 하였고, 주 너의 하느님이 강한 손과 뻗은 팔로 너를 그곳에서 이끌어 내었음을 기억하여라. 그 때문에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는 것이다."(신명 5,12-15)
십계명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안식일은 모든 사람이 함께 쉬는 날”이라는 점입니다. 내가 쉬는 것도 중요하지만, 남을 쉬게 해 주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만일에 어떤 사장이 주일을 지키기 위해서 일을 멈추고 미사 참례를 하면서도, 자기 공장의 노동자들에게는 주일에도 일을 하라고 시켰다면, 그래서 노동자들이 하루 종일 일하느라고 주일을 지키지 못했다면, 주일을 안 지킨 사람은 노동자들이 아니라 사장입니다. 먹고사는 데에 지장이 없는 사람이 주일에 일하지 않고 쉬는 것은 당연한데, 주일에도 일하지 않으면 굶주릴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주일을 지키지 못하는 것을 비난하면 안 됩니다. (먹고살기 위해서 주일에도 쉬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교회와 사회가 모두 나서서 그 사람이 쉴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합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하느님의 계명은 “안식일에는 굶어라.”가 결코 아닙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 주셨을 때,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주님이 너희에게 안식일을 주었다. 그래서 엿샛날에는 너희에게 이틀 치 양식을 준다. 그러니 이렛날에는 저마다 제자리에 머무르고, 아무도 자기가 있는 곳을 떠나 밖으로 나가지 마라."(탈출 16,29)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안식일에 일을 하지 않아도 굶는 일이 없도록 미리 배려해 주셨습니다. 바로 이 ‘배려’와 ‘사랑’이 안식일 율법의 근본정신입니다. 따라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은 ‘사랑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안식일이든지 다른 날이든지 간에 자기 이익을 위해서 남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사람은, 또 굶주리는 사람들의 사정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고 사랑 실천도 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죄를 짓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는 일하지 마라.”라는 규정 자체를 폐지하신 것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말씀의 뜻은, “남의 사정도 모르면서 함부로 비난하지 마라.”이지 “각자 알아서 마음대로 행동하여라.”가 아니라는 것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남을 함부로 비난해도 안 되고, 자기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지나치게 너그러워도 안 됩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마태 7,3-5)
(주일에도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정에 대한 판단 기준은 각자의 양심일 수밖에 없는데, 우리는 자신의 양심이 항상 예리하게 살아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 2,27-28)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안식일을 정하신 것은, 사람들을 쉬게 해 주기 위해서”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에게서 하루를 빼앗기 위해서 안식일을 정하신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루의 안식을 온전히 사람들에게 주려고 정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을 지키는 것은 하느님께 ‘하루’ 라는 시간을 봉헌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하루’ 라는 시간을 온전히 얻는 일이기도 합니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주일을 지키지 못했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정말로 못 지킨 것인지, 아니면 안 지킨 것인지...... 반대로 주일을 잘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몸만 지키고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잘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형식이 아니라 마음과 정성입니다. ‘사랑’이 신앙생활의 근본정신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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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인간은 일하는 기계도, 의무에 종속된 노예도 아니기에 쉼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 세워 주신 안식일은 본디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말한 대로, “우리 인간이 하느님 안에서 쉬기까지 참된 평화란 없다.”는 고백을 기억하게 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내 육신을 쉬게 하는 데 잠이 필요하듯, 내 영혼은 경쟁과 적자생존의 굴레에서 벗어나 어느 것에도 매임 없이 자신을 비웠을 때 얻게 되는 하느님의 안식을 필요로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생존을 위한 필요를 제외하고는 누구나 하느님 안에 쉴 권리와 의무가 있다는 것이 안식일의 제정 이유임을 확인해 주고자 하십니다.
제자들이 배고픔을 해결하려고 밀 이삭을 뜯어 먹거나, 다윗 일행이 배가 고파 하느님의 집에서 제사 빵을 먹은 것을 두고, 단순히 율법을 지키지 않았기에 그들이 죄인으로 취급받아야 한다는 바리사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사람을 위해 안식일을 세워 주신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생긴 것이 아님을 일깨워 주십니다.
하느님을 믿는 우리는 결코 하느님께 종속된 노예와 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우리 구원을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지옥 불에 대한 두려움이나 죄의식에 빠져 하느님의 영 안에 누리는 기쁨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붓자 주님의 영이 줄곧 그에게 머물렀다고 합니다. 우리도 세례성사를 통하여 기름부음을 받았기에 우리 영은 언제나 하느님 안에 머뭅니다. 혹시 내가 스스로 세운 규정이나 계명에 얽매여 하느님 안에 누리는 영의 자유와 기쁨을 가두고 옹졸하게 살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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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배고프면 밥을 먹고 목마르면 물을 마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인간 사회가 아무리 발전한다 하여도, 인간의 본성과 기본 욕구를 가로막고 바꾸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인간의 제도와 법규들은 인간의 본성과 욕구를 가장 인간답게 드러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게으른 사람이라 밥을 먹을 권리가 없다는 둥, 모자란 사람이라 좋은 것을 누릴 이유가 없다는 둥, 제 기준으로 세상을 마구 단죄하고 규정하는 이들이 많을수록, 그 사회는 천박해지고 비인간적인 폭력이 난무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 함께 숨 쉬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서로 챙겨 주고 보듬어 주는 것이, 인간이 지음받았을 때의 본성이자 욕구여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되짚어 보아야 합니다. 본디 안식일은 나 말고 다른 이가 있음을 기억하는 날입니다(신명 5장 참조)
무엇보다 서로의 사회적 지위가 다르고 경제적 처지가 다름을 기억하는 것이 안식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각자가 저마다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하나의 잣대로 세상을 규정하고 줄 세우기를 좋아하였습니다.(창세 11장 참조)
안식일 법을 어기는 것은, 다름과 차이를 존중하지 않은 채, 제 기준을 절대화하는 완고함에서 비롯됩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를 바라십니다. 서로가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인간, 그 인간은 하나이자 둘이고, 둘이지만 서로 하나가 되어 살아갑니다. 일방적으로 하나나 둘로만 규정해 버리는 일은 없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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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2, 27)
저는 오늘 복음을 들을 때면, 1986년 맨 처음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하던 당시 밀밭 사이를 지나갔던 때의 장면이 생각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의 일행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길이 아닌 밀밭을 가로질러 가십니다. 견물생심이란 표현처럼 제자들은 배가 고파서인지 아니면 단지 심심풀이로 한 것인지 모르지만, 밀 이삭을 뜯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그 장면을 어떻게 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일행 중에 미행하고 감시한 사람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빌미를 잡았다고 생각해서 예수님께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2,24)라고 추궁하였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자식의 잘못은 부모의 탓이고, 제자의 잘못은 스승의 탓이라고 보았기에, 그들이 안식일 법을 어긴 것은 스승이 잘못 교육한 탓이라 판단해서 그 스승이신 예수님에게 올가미를 씌우려는 의도에서 이렇게 예수님께 질문을 한 것이겠지요.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범한 것은 제자들이었지만, 스승의 얼굴에, 명성에 먹칠을 하고 잘못을 한 제자들 때문에 예수님은 바리사이에게서 불편한 질문을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추궁 아닌 추궁과 같은 질문에 답변하시기보다, 오히려 그들에게 먼저 과거의 사례를 언급하시면서 오히려 미묘한 역질문을 던지십니다. 그들이 그토록 존중하며 모시는 다윗의 예를 들면서, 즉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정작 안식일에 그 일을 한 사람에게 생존을 위해 정말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면 어떤 판단을 해야 할 것인가를 물으셨던 것입니다. (2,25~26참조) 곧 사람이 죽고 사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 어쩔 수 없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다면 어떻게 이를 받아들일 것인가를 물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응답하시겠습니까?
그들이 익히 잘 알고 있는 과거의 사례를 통해서 그들의 마음을 돌리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대한 그들의 안식일 법에 대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이나 관습적인 사고 체계를 일시에 무너뜨리는 말씀을 던지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2,27~28) 이는 곧 하느님께서 안식일을 만드신 근본 의도와 취지를 일깨우시면서 그들의 시선을 돌리고, 마음의 변화를 촉구하고 계신 것이며, 이는 우리에게도 역시 해당합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것이듯이, 안식일의 중심은 사람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당신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후 일곱째 날 쉬신 것처럼 쉬기를 바라셨습니다. 우리는 쉼을 통해 창조주 하느님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하느님의 시선과 마음으로 자신이 한 일을 되돌아보면서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더욱더 자신에게 맡겨진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통해서 사랑으로 일하고 사랑으로 돌볼 수 있도록 하느님 안에서 쉬도록 초대받습니다. 이는 곧 당신과 함께 당신 안에서 쉼을 누리도록 사람에게 기회를 주시고 그 쉼을 통해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자부심을 누리도록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닮아 창조되었기에 우리에게 맡겨진 일을 열성으로 실행해야 하며, 그다음엔 자신이 이룬 일을 즐기면서 그 모든 일과 쉼을 통해 삶의 활기와 생기를 회복해야 합니다. 인간의 일은 시작도 그렇지만 마침도 하느님의 능력과 은총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창조에 참여한 것처럼 그 쉼도 하느님과 더불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주어진 안식일 역시 사랑의 중단이 아닌 사랑의 확인이며 모든 것에 대한 함께 머묾이며 친교의 시간입니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비록 안식일이라 해서, 사랑은, 특히 사람에 대한 사랑은 중단될 수 없기에 하느님 모상 대로 창조되었고 하느님의 자녀라고 불린 사람들이 배고픔으로 힘들어한다면 그 자체가 하느님의 뜻에 어긋난다고 보신 것입니다. 이런 사랑과 자비의 관점에서 안식일을 바라보도록 주님은 바리사이들과 우리 모두에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라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고 사랑이 필요한 사람에게 안식일이라 해서 그들의 요구를 외면한다면, 그들의 필요를 무시한다면, 그것이 진정 하느님께서 바라실 것이며 하느님께 영광 드리는 일일까요? “누가 주님의 마음을 알아 그분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1코 2,16) 하느님의 뜻은 인간을 모든 것으로부터 심지어 율법과 안식일 법일지라도 인간이 당신의 아들과 딸로서 누려야 할 참 자유와 생명을 충만히 살아가는 데 장애가 된다면 기꺼이 폐기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하느님의 깊은 뜻과 배려를 단순히 계명으로만 해석하며 사람이 사람으로서 고귀함을 품위를 누리지 못하기에 높고 단단한 벽을 허물었던 것입니다. 잠시 이런 시선에서 사도 바오로의 권고를 들어 봅시다.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 사랑은 율법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서로 심판하지 맙시다. 오히려 형제 앞에 장애물이나 걸림돌을 놓지 않겠다고 결심하십시오.”(로 12,15: 13,9; 14,13) 하느님께서 당신 모습대로 창조된 사람이 당신 참된 사랑의 품에서 안식을, 사랑을 느끼도록 안식일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을 따라 우리 역시도 안식일을 그분과 함께 그분처럼 지키면서 그분의 사랑을 기억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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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자기 SNS 계정에 사람들은 많은 사진을 올립니다. 맛집을 찾아가 음식 사진을 찍고, 예쁜 카페에 가서 인증사진을 찍는 것도 필수라고 합니다. 멋진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 역시 절대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런 사진을 SNS 계정에 올려서 ‘좋아요’ 버튼이 눌러지면 기뻐합니다. 결국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사진을 올리는 것이 아닐까요? 즉, “나 이렇게 재미있게 살고 있다.”, “나 잘살고 있다.”라는 것을 알리기 위한 것입니다.
저 역시 2,000년 초반부터 인터넷 안에서 활동하며 많은 사진을 올렸습니다. 정보 제공이라는 목적이었지만, 요즘 사람들처럼 잘살고 있음을 알리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비밀 없는 삶이 사제에게 필요하다면서, 사실은 저를 드러낼 수 있는 것만을 인터넷에 올리곤 했습니다.
지금은 제 사진을 잘 올리지 않습니다. 비밀 없는 삶은 사진을 올린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냥 마음에 담는 사진이 더 중요함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를 내려놓으니 훨씬 편안한 마음입니다. 새벽 묵상 글을 올린 뒤에도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확인하지 않습니다. 오탈자가 있다고, 문장이 이상하다며 사람들이 메일이나 쪽지 등을 보내시고 댓글에 글도 남겨주시지만, ‘뭐 어때?’라는 생각으로 잘 확인하지 않습니다.
편하게 사는 삶은 나를 드러내는 삶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면서 내면의 나를 성숙시키는 삶이 가장 편안한 삶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겸손을 강조하시고 또 직접 모범을 보여주신 이유도 우리가 이 세상을 편하게 살길 바라는 마음에서 하신 것이 아닐까요? 따라서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은 과감하게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드러내기보다 주님을 드러내는 데 더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길을 내고 가면서 밀 이삭을 뜯어 먹었던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보고서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라고 항의합니다. 크게 문제가 될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다르게 생각합니다. 즉, 자기들은 이렇게 열심히 안식일 법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던 것이고, 그에 반해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형편없는 사람인 것처럼 취급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사람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임을 강조하십니다. 그런데 안식일에서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열심’만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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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
마르코 2,23-28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길을 내고 가면서 밀 이삭을 뜯기 시작하였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에브야타르 대사제 때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고 함께 있는 이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 2,27)
사람이 되신 하느님처럼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사람이
참으로 사람입니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처럼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에게
살갑게 다가가는 사람이
참으로 사람입니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처럼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을
부드럽게 헤아리는 사람이
참으로 사람입니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처럼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을
정성스레 보듬는 사람이
참으로 사람입니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처럼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을
든든하게 살리는 사람이
참으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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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물러진 법>
'놀 때 놀고 일할 때 일하며, 쉬고 싶을 때 마음껏 쉬고 싶습니다. 주일 미사참례의 의무는 주님의 기도 33번으로 가름하고, 휴일을 즐기고 싶습니다.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싶어서 성당을 찾았는데 미사참례의 계명이 오히려 자유를 옭아매는 느낌이 들어 싫습니다. 당분간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해야겠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교회법에서는 “미사참례 계명은 주일이나 의무 축일 당일이나 그 전날 저녁에 어디서든지 가톨릭 예식으로 거행되는 미사에 참례하는 것으로 이행된다.”(교회법 1248조1항)고 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미사가 없는 공소에서는 공소예절(말씀의 전례)에 참례하여야 하고, 공소예절도 참례할 수 없는 경우에는 개인이나 가족끼리 합당한 시간 동안 기도에 몰두하도록 권장합니다.
그래서 부득이한 경우 예수님께서 33살까지 사셨으니까,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 33번을 바치라는 관습이 생겨났습니다. 사실 옛날에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이 한글도 몰랐고, 성경도 라틴어로 된 책만 있었기에 주님의 기도를 대신 바치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디서든 성경을 읽을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가까운 성당에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주님의 기도 33번으로 주일 미사참례 의무를 대신하려 한다면 성숙한 신앙인으로서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 2,28)라고 하셨고,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람이 법조문 보다 우선이라는 말씀입니다. 안식일 계명은 일주일에 한 번은 무조건 쉬어야 함을 내용으로 합니다.
이는 인간이 일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러한 규정은 선과 생명에 도움을 주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기 위해 안식일 규정을 강화하는 가운데, 본래의 의미를 잊고 자구에 매인 나머지 단지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데에 집착하여 규정들을 세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이 선과 생명에 보탬이 되기보다 되레 인간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굴레와 족쇄가 되었고, 예수님께서는 본래의 의미를 회복하려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은 단지 일을 해서는 안 되는 날이 아니라 선과 생명에 도움이 되는 날,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과 함께 쉬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분이 고해성사를 보시면서 “안식에 해서는 안 될 일, 빨래하고, 청소를 하였습니다.” 하고 말씀하시길래 제가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일상생활을 하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규정을 지켜야 하지만 그 의미, 내용, 알맹이를 생각하십시오. 하느님을 섬기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하고 말씀드렸더니 “요즘 법은 왜 그리 물러졌어요?” 하셨습니다.
안식을 취해야 할 주일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영혼의 안식을 취하는 날로 보내야 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단순히 미사참례를 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영적인 양식을 취하고 구체적 사랑을 실천하는 날로 지내야 합니다.
이날은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 주시며 성체성사의 양식으로 배 불리시는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날이어야 합니다. 주일은 분명, 주님의 부활을 경축하는 날이면서도 인간을 사랑하시고 해방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안식일 법을 확대 해석하여 사람에게 무거운 짐을 지게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인간 구원에 방해가 된다면 그것을 철저히 거부하셨습니다.
그것은 분명 하느님의 바람과 상반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라는 말은, 다르게 말하면 예수님의 권위 있는 가르침이 곧 인간을 살린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인간에게 알려주고 하느님의 뜻대로 살도록 가르치는 전권을 가진 자로서 안식일의 주인입니다.(이영헌)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사람을 생각하셨습니다. 사랑을 규제하는 법은 없습니다. 분명, 안식일의 주인은 예수님이지 내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더 적극적인 마음으로 함께 모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며 미사성제에 참여함으로써, 주님의 수난과 부활, 영광을 기념하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즐거움과 휴식의 날이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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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닮(예수님을 닮아감)의 여정>
-날마다 영적승리의 삶-
이런저런 묵상으로 두서없이 강론을 시작합니다. <올해 104세, 시인이 되고 싶다> 1920년생으로 올해 104세되는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의 새해 소망을 밝힌 글 제목입니다. 제가 반세기전 1970년대 20대 청년기 대학시절 안병욱 교수와 쌍벽을 이뤘던 분으로 참 애독했던 글이 바로 이분의 글이었습니다. 시인이 되고 싶다니 참 고상한 소망이요 이 강론을 읽는 모든 분에게 시인이 되라 권하고 싶습니다. 문득 오래전 ‘시인(詩人)’이란 자작시가 생각나네요.
“시인(詩人)이
어디 따로 있나요
사랑하면
누구나 시인이 된답니다
당신 향한
그리움
끊임없이 송이송이 꽃으로 피어나
시(詩)가 됩니다”-1998.5.4
다음은 김형석 명예교수의 새해 소망을 밝힌 글의 요약입니다. 윤동주 시인과 동급생이었다 하니 참 놀랍고 신기합니다.
“지난 연말 문학인들이 모이는 남산 ‘문학의 집, 서울’ 행사에서 내가 좋아하는 시를 낭독했다. 윤동주는 중학교 3학년 같은 반에서 공부한 내 인생의 첫 시인이다. 긴 세월이 지난후에 구상 시인이 마지막 시인이었다. 앞으로 5년의 삶이 더 주어진다면 시를 쓰다 가고 싶다. 아름다움과 사랑이 있는 인생이 더 소중함을 이제야 알았다. 내 새해 소망은 시인이다. 100세가 넘으면 1년이 과거의 10년만큼 소중하다.”
제가 간혹 손님을 맞으면 정갈한(깨끗하고 깔끔한) 음식에 안내하는 수도원 부근의 “남도(南道)의 향(香)’ 음식점입니다. 이름도 시적(詩的)이다 싶었는데 참으로 평범해 보이는 남자 주인이 알고 보니 불자(佛者) 시인이었고 경이로웠습니다. 안에 보물을 숨기고 살아 온 분입니다. 음식점을 찾았던 수도형제가 전해준 시집을 보고 비로소 알았습니다. 그분이 쓴 ‘연꽃받침’이란 시입니다.
“불암산 자락 불암사
수많은 외세
불심으로 이겨내고
처마밑 풍경울림
바람에 실려 구름타고 멀리멀리
불자를 보듬어 주는
보살들의 연꽃받침 속세를 밝게 비추리”
어제 면담성사를 본 자매도 잊지 못합니다. ‘승희(勝喜) 클라라’란 이름 뜻을 풀이하며 격려의 덕담과 더불어 드린 조언입니다.
“영적승리로 빛나는 기쁨을 살라고 승희에 빛을 뜻하는 클라라 성녀 세례명입니다. 그러니 날마다 영적승리로 빛나는 기쁨을 사세요. 이런저런 마음속에 일어나는 감정들은 바다의 파도와 같으니 개의치 마세요. 감정따라, 기분따라, 마음따라 살지 말고, 하느님만을 향해 일상의 평범한 ‘삶의 궤도’ 따라 한결같이 중심과 질서가 잡힌 삶에 항구하세요. 주님과의 관계가 깊어가면서 감정의 파도는 잔잔해지고 마음도 순수해지고 고요해질 것입니다.”
세상이 어지럽고 힘들수록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 사랑 안에 고요히 머무르는 시간과 장소 마련이 필수입니다. 나름대로의 외딴곳, 오솔길을 마련해야 합니다. 문득 오래전 써놓은 ‘너 오솔길 있는가?’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너
밖에든 안에든 오솔길 있는가?
아무도 모르는
임과 나만이 아는 오솔길
임이 그리워 목마를 때 찾는 오솔길
임과 함께 걷는 오솔길
늘 걸어도 늘 그립고 아늑한 오솔길
너 있는가?”-1998.7.28.
저에겐 수십년간 걷는 하늘과 불암산에 활짝 열려있는 배밭사이 오솔길, 하늘길입니다. 26년전 시를 이렇게 강론에 인용하니 참 놀랍고 신기하니 이 또한 주님 은총의 선물입니다. 늘 읽을 때 마다 환희심(歡喜心)을 일으키는 제가 참 좋아하는 시편 성구를 어제 낮기도 성무일도 시간에 만나 기뻤습니다.
“오 내 하느님, 당신 뜻을 행하는 것이 내 기쁨이오니
내 맘속에 당신 법이 새겨져 있나이다.”(시편 40,9)
(To your will, O my God, my delight,
and your law is within my heart)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 마음마다 새겨져 있는 주님의 법, 사랑의 법입니다. 그러니 바로 참기쁨, 참행복은 주님의 법, 사랑의 법에 따른 삶뿐임을 깨닫습니다. 이 길말고는 연목구어(緣木求魚)일뿐 참기쁨, 참행복에 이르는 길은 없습니다. 바로 이를 깨달아 하닮의 여정, 예닮의 여정에 항구하며 날로 주님과 사랑과 신뢰를 깊이했던 주님의 절친(切親)인 성인들이요 주님의 절친이 되는 것은 제 간절한 소망이기도 합니다.
새삼 인간의 본질은 무지도 허무도 탐욕도 아닌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누구나의 마음깊이 새겨져 있는 주님의 법, 사랑의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랑밖엔 답이 없다, 길이 없다’라는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예수님과 바리사이들을 비교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다윗을 비교하는 것이 이해의 핵심입니다. 다윗의 자유로운 처신을 능가하는 예수님의 저 자유로운 처신은, 안식일법을 상대화시키는 저 자유로움은 도대체 어디서 기인할까요? 신기하고도 부럽지 않습니까?
답은 하나입니다. 이분들의 주님과 참으로 깊은 절친 관계에 있기에 저토록 자신감이 넘치고 확신에 가득차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에 대한 주님의 신뢰와 사랑을 철석같이 믿는 자존감 충일한 삶이기에 저리도 추호의 망서림이나 두려움, 불안이 없이 당당합니다. 그대로 주님과 깊은 신뢰와 사랑의 관계를 반영합니다.
주님의 신뢰와 사랑을 확신할 뿐만 아니라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고 신뢰했던 두분이요,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은 아버지와 일치의 삶을 사셨기에 예수님은 그대로 하느님 사랑의 반영인 것입니다. 그러니 예닮의 여정은 그대로 하닮의 여정이요, 예수님이야말로 모든 분별의 잣대임이 오늘 복음 말씀이 그대로 입증합니다. 예수님 마음이 하느님 마음이요 예수님 사랑이 하느님 사랑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절대적 법은 ‘사람이 먼저’라는 사랑의 법이요, 사랑의 법 자체인 예수님의 단호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라면 과연 어떻게 처신하였을까 생각하면 곧 답이 나올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예닮의 여정중에 날로 주님과의 관계를 깊이하는 것이 자유와 행복의, 분별의 요체임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참자유, 참행복, 참 분별의 지혜도 주님과의 깊어가는 우정과 함께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안타깝고 아쉽지만 이점에서 실패한 제1독서 사무엘 상권의 사울입니다. 사무엘의 슬퍼하는 마음도 이해가 갑니다. 하느님께서 참 너무하시다는 생각도 듭니다만 우리에게 참 좋은 경고의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주님의 마음은 사울에게서 다윗에게로 떠났고 이 또한 엄중한 현실입니다. 사울의 부주의와 불순종으로 자초한 불행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매순간 주님과의 신뢰와 사랑의 관계를 보살펴야 한다는 진리를 배웁니다. 즉각적인 회개와 실행입니다. 하루하루 연장되는 날은 주님과 사랑을 새로이 깊이하라 주어지는 선물과 같습니다. 살아있을 때 기도와 회개, 공부와 사랑, 찬미와 감사이지 죽으면 모두가 끝입니다. 예닮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과연 여러분의 삶의 여정을 일일일생 하루로, 일년사계로 압축할 때, 어느 시점(時點)에 위치하고 있겠는지요? 이건 제가 참 많이 누누이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이런 성찰이 오늘 지금 여기서 거품이나 환상, 허영이나 교만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게 합니다. 주님과의 사랑과 신뢰의 우정을 깊이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게 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예닮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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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주인이 되어>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우리에게는 세 가지 날이 있습니다.
일요일,
안식일,
주일.
신자인데도 주일이라고 하지 않고 일요일이라고 하고,
그래서 이들은 주일을 일요일로 지내는 사람들입니다.
이 정도만 말씀드려도 무슨 말을 하는지 대충 아시겠지요? 그런데 ‘신자인데 주일을 지내지 않고 안식일로 지내는 사람이 있다,’ 이렇게 얘기하면 그 말이 뭔지, 그 차이가 뭔지 모를 분 있겠습니다.
이것은 ‘구약의 사람’과 ‘신약의 사람’ 차이를 말하는 것이지요. 구약의 사람 곧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안식일을 지냈지만 신약의 사람 곧 주님을 믿는 사람은 주일을 지냈잖습니까?
사실 주일인데도 일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들에겐 주일이 그저 일요일일 뿐입니다.
이 말은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하는 사람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먹고 살 만한데도 욕심 때문에 일하는 사람이나 더 나아가 주일이 주님의 날이라는 의식이 없어 일하는 사람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주일에 일을 쉬는 사람도 많습니다. 요즘 들어 삶의 질을 따지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합니다. 이런 추세를 드러내듯 많은 사람이 주일이면 캠핑카를 끌고 놀러 다닙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에게 주일은 그저 일을 쉬는 것이요,
자기 삶을 넉넉하게하기 위해 그저 일을 쉬는 것이지
하느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정도는 못 됩니다. 이에 비해 하루를 주님 안에서 안식을 취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정도만 돼도 신앙적으로 꽤 훌륭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 말씀은 이것 이상을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루를 일하지 않는 날로 지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주님 안에서 쉬며 하루를 거룩히 지내는 것도 뛰어넘는 말입니다.
의식 혁명입니다. 의식을 완전히 바꾸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씀은 어떤 것도 인간의 주인일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런 주인 의식을 가지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일의 노예가 되지 말고 창조적으로 살고, 욕망의 노예가 되지 말고 사랑하며 살고, 관습이나 습관의 노예가 되지 말고 새 포도주는 새 부대의 정신으로 살고, 주님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나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정신으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이 되어 오심은
사람이 하느님의 아들이 되게 하기 위함이고, 그래서 그 무엇의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 되어 살게 하기 위함임을, 다시 한번 깨닫고 감사드리고 그렇게 살기로 결심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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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2,27)
<안식일의 본질!>
오늘 복음(마르2,23-28)은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다.'라는 말씀입니다.
인간 구원 활동인 예수님 공생활에 대해, 기득권 세력을 누리고 있었던 유다교 종교 지도자들의 본격적인 견제와 방해가 시작됩니다. 그 중심에 서 있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율법 논쟁'입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내려주신 율법과 또 이 율법에 근거하여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세부 율법 규정(613개 규정)들을 삶의 규범으로 여기며 살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안식일 논쟁'입니다. '안식일(주일) 규정'은 십계명 중 제3계명인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라는 계명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때문에 '안식일의 본질'은 '거룩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이 의미는 또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안식일, 곧 거룩한 주님의 날인 주일의 본질'입니다.
안식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밀밭 사이를 지나가다가,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기 시작하자,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마르2,24)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함께 먹은 일을 상기시키시면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2,27-28)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주일을 거룩히 지낸다는 것'이 '단순히 주일 미사에 빠지지 않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가족이 함께 미사에 참석하고, 함께 사랑을 나누면서 지내는 거룩한 주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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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Qx81KYNsu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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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01.16.화.”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 2, 27)
우리가 사랑해야
할 것은 사람이지
안식일 규정이
결코 아닙니다.
언제나 사람들과
함께하시는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잃어버린
단 한 사람을
찾기위해
예수님께서는
먼 길을 나섭니다.
그 어떤 것도
사람의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을 업고 가시는
사람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예수님의 사랑법을
꼭 기억합시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사람을 향해야 할
안식일입니다.
사람을 위한
안식일입니다.
안식일로
하느님을 닮은
사람을
다 닮아
낼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생각하고 실천하는
소중한 하루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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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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