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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장마황조전 중 조운전
- [삼국지] 권36 촉서6 관장마황조(관우,장비,마초,황충,조운) 전 중에서 조운전 + 관장마황조 진수 평입니다. 원문은 한적전자문헌에서 인용하고 중화서국 점교본(1971)을 참조해 오탈자를 수정했습니다.
趙雲字子龍,常山眞定人也.本屬公孫瓚,瓚遣先主爲田楷拒袁紹,雲遂隨從,爲先主主騎.[一]及先主爲曹公所追於當陽長阪,棄妻子南走,雲身抱弱子,即後主也,保護甘夫人,即後主母也,皆得免難.遷爲牙門將軍.先主入蜀,雲留荊州.[二]
[一]雲別傳曰:雲身長八尺,姿顔雄偉,爲本郡所擧,將義從吏兵詣公孫瓚.時袁紹稱冀州牧,瓚深憂州人之從紹也,善雲來附,嘲雲曰:「聞貴州人皆願袁氏,君何獨迴心,迷而能反乎?」雲答曰:「天下訩訩,未知孰是,民有倒縣之厄,鄙州論議,從仁政所在,不爲忽袁公私明將軍也.」遂與瓚征討.時先主亦依託瓚,每接納雲,雲得深自結託.雲以兄喪,辭瓚暫歸,先主知其不反,捉手而別,雲辭曰:「終不背德也.」先主就袁紹,雲見於鄴.先主與雲同床眠臥,密遣雲合募得數百人,皆稱劉左將軍部曲,紹不能知.遂隨先主至荊州.
[二]雲別傳曰:初,先主之敗,有人言雲已北去者,先主以手戟擿之曰:「子龍不棄我走也.」頃之,雲至.從平江南,以爲偏將軍,領桂陽太守,代趙範.範寡嫂曰樊氏,有國色,範欲以配雲.雲辭曰:「相與同姓,卿兄猶我兄.」固辭不許.時有人勸雲納之,雲曰:「範迫降耳,心未可測;天下女不少.」遂不取.範果逃走,雲無纖介.先是,與夏侯惇戰於博望,生獲夏侯蘭.蘭是雲鄉里人,少小相知,雲白先主活之,薦蘭明於法律,以爲軍正.雲不用自近,其愼慮類如此.先主入益州,雲領留營司馬.此時先主孫夫人以權妹驕豪,多將吳吏兵,縱橫不法.先主以雲嚴重,必能整齊,特任掌內事.權聞備西征,大遣舟船迎妹,而夫人內欲將後主還吳,雲與張飛勒兵截江,乃得後主還.
조운(趙雲)은 자(字)가 자룡(子龍)이고 (기주) 상산(常山) 진정(眞定) 사람이다. 본래 공손찬(公孫瓚)에 속했는데 공손찬이 선주(先主-유비劉備)를 보내 전해(田楷)를 위해(도와) 원소(袁紹)를 막게 하니 조운이 이에 수종(隨從)하여 선주(先主)를 위해 기병을 지휘했다. [1]
[1] 운별전(雲別傳) (조운별전) – 조운은 신장이 8척에 자안(姿顏-용모)이 웅위(雄偉)하고 본군(本郡-출신 군)에서 천거되었는데 의종(義從-대의로서 좇는? or 이민족 귀순집단?) 이병(吏兵-관리와 병사)들을 거느리고 공손찬에게로 나아갔다. 당시 원소가 기주목(冀州牧)을 칭하여 공손찬은 기주인들이 원소를 따르는 것을 심히 우려하였으니 조운이 귀부해 온 것에 기뻐하여 조운을 놀리며(嘲) 말했다, “듣기로 귀주(貴州-그대 주, 즉 기주) 사람들은 모두 원씨(袁氏)를 원한다던데 그대는 어찌 홀로 마음을 돌리고 미혹되어 이에 반(反)하는 것이오?” 조운이 대답했다, “천하가 흉흉하여 누가 옳은지 알 수 없으나 백성들이 도현지액(倒縣之厄-거꾸로 매달리는 것과 같은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여 비주(鄙州-자신의 주를 겸칭)에서 논의하기를 어진 정치가 있는 곳을 따르기로 하였으니 (그런 뜻에서 귀부한 것으로) 원공(袁公)을 소홀히 하며 명장군(明將軍)을 사사로이 따르자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하여 공손찬과 함께 정토(征討)했다. 당시 선주(先主) 또한 공손찬에게 의탁하고 있었는데 늘 조운을 접납(接納)하니 조운이 심히 (선주와) 결탁(結託)하게 되었다. 조운의 형이 죽자 공손찬에게 말해 잠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선주는 그가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알고 손을 맞잡으며 (애틋하게) 작별했다. 조운이 말했다, “끝내 덕(德)을 저버리지는 않겠습니다.” 선주가 원소(袁紹)에게로 가자 조운이 업(鄴)에서 그를 만났다. (※) 선주는 조운과 함께 같은 침상에서 잠잤으며, 은밀히 조운을 보내 무리를 모으게 해 수백명을 얻었는데 이들이 모두 유좌장군(劉左將軍-좌장군 유비)의 부곡(部曲)이라 칭했으나 원소는 이를 알지 못했다. 그리고는 선주를 따라 형주(荊州)에 이르렀다.
※ 삼국지집해 / 조운이 유비를 따른 시점 – 하작 왈, 본전(本傳-조운전 본문)에서는 선주가 평원상(平原相)일 때 조운이 이미 그를 수종하며 기병을 이끌었다 했는데, 별전(別傳)에서는 (선주가) 원소에게로 나아갔을 때 조운이 그를 업에서 만났다 하니 즉 건안 5년(200년) 뒤의 일이 된다. 이는 (본전과) 어긋나므로 믿을 수 없다. (何焯曰 本傳先主爲平原相時 雲已隨從主騎 別傳謂就袁紹 雲見於鄴則在建安五年後 此違反不可信也) / 서로 직접적으로 배치되는 사안은 아니고 별전의 기술이 본전(최초 수행 이후 – 형주 사이)의 공백을 메꿔주고 보완해 주는 경우로 볼 수 있다 생각됩니다.
선주(先主)가 당양(當陽) 장판(長阪)에서 조공(曹公-조조)에게 추격당해 처자를 버리고 남쪽으로 달아나자, 조운이 몸소 어린 아이를 품에 안았으니 즉 후주(後主-유선劉禪)이고 감부인(甘夫人)을 보호했으니 즉 후주의 모친이었으며 이들이 모두 위난을 면할 수 있었다. 아문장군(牙門將軍)으로 올랐다. 선주가 촉(蜀)으로 들어갈 때 조운은 형주(荊州)에 남았다. [2]
[2] 조운별전 – 당초 선주(先主)가 패했을 때 조운이 이미 북쪽으로 떠났다고 말하는 자가 있었다. 선주가 수극(手戟)을 내던지며 말했다, “자룡(子龍)이 나를 버리고 달아 났을리 없다.” 얼마 뒤 조운이 도착했다. 강남(江南)을 평정하는데 종군하여 편장군(偏將軍)이 되고 계양태수(桂陽太守)를 겸하여 (기존의 계양태수였던) 조범(趙範)을 대신했다. 홀몸이 된 조범의 형수 번씨(樊氏)가 국색(國色-뛰어난 미모)이 있었는데, 조범이 그녀를 조운에게 짝지어주려 했다. 조운이 사양하며 말했다, “우리가 서로 동성(同姓)이니 경의 형이 곧 내 형과 같소.” 굳게 사양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당시 그녀를 맞아들이도록 권하는 사람이 있자 조운이 말했다, “조범이 급박하게 항복했으니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없소. 천하에 여자가 적지 않소” 그리고는 그녀를 취하지 않았다. 조범이 과연 도주하였으나 조운은 조금도 연루되지 않았다. 그 이전에 하후돈(夏侯惇)과 박망(博望)에서 싸워 하후란(夏侯蘭)을 사로잡았었는데, 하후란은 조운의 향리인(鄉里人)으로 소소하게 서로 아는 사이였다. 조운은 선주에게 그를 살려주도록 청하고 하후란이 법률에 밝다고 천거하여 군정(軍正)으로 삼게 했으나 조운이 이로써 그를 가까이 하지는 않았으니 그의 신려(愼慮-신중하고 사려깊음)함이 이와 같았다. 선주가 익주(益州)로 들어가며 조운에게 유영사마(留營司馬)를 겸하게 했다. 이때 선주의 손부인(孫夫人)은 손권(孫權)의 여동생으로 교호(驕豪-교만하고 횡포함)하여 오(吳)의 관리와 병사들을 여럿 거느리고 거침없이 법을 어겼다. 선주는 조운이 엄중(嚴重)하니 필시 이를 정제(整齊)할 수 있으리라 여겨 특별히 내부의 일을 맡겨 관장하게 했다. 손권은 유비가 서쪽을 정벌한다는 말을 듣고 배들을 대거 보내 여동생을 영접하게 했는데, (손)부인이 은밀히 후주(後主-유선)를 데리고 오(吳)로 돌아가려 하니 조운이 장비와 함께 군사를 이끌고 강을 가로막고는 후주를 구해 돌아왔다.
先主自葭萌還攻劉璋,召諸葛亮.亮率雲與張飛等俱泝江西上,平定郡縣.至江州,分遣雲從外水上江陽,與亮會于成都.成都既定,以雲爲翊軍將軍.[一]建興元年,爲中護軍、征南將軍,封永昌亭侯,遷鎭東將軍.五年,隨諸葛亮駐漢中.明年,亮出軍,揚聲由斜谷道,曹眞遣大衆當之.亮令雲與鄧芝往拒,而身攻祁山.雲﹑芝兵弱敵彊,失利於箕谷,然斂衆固守,不至大敗.軍退,貶爲鎭軍將軍.[二]
[一]雲別傳曰:益州既定,時議欲以成都中屋舍及城外園地桑田分賜諸將.雲駮之曰:「霍去病以匈奴未滅,無用家爲,令國賊非但匈奴,未可求安也.須天下都定,各反桑梓,歸耕本土,乃其宜耳.益州人民,初罹兵革,田宅皆可歸還,今安居復業,然後可役調,得其歡心.」先主即從之.夏侯淵敗,曹公爭漢中地,運米北山下,數千萬囊.黃忠以爲可取,雲兵隨忠取米.忠過期不還,雲將數十騎輕行出圍,迎視忠等.値曹公揚兵大出,雲爲公前鋒所擊,方戰,其大衆至,勢偪,遂前突其陳,且鬭且卻.公軍敗,已復合,雲陷敵,還趣圍.將張著被創,雲復馳馬還營迎著.公軍追至圍,此時沔陽長張翼在雲圍內,翼欲閉門拒守,而雲入營,更大開門,偃旗息鼓.公軍疑雲有伏兵,引去.雲雷鼓震天,惟以戎弩於後射公軍,公軍驚駭,自相蹂踐,墮漢水中死者甚多.先主明旦自來至雲營圍視昨戰處,曰:「子龍一身都是膽也.」作樂飲宴至暝,軍中號雲爲虎威將軍.孫權襲荊州,先主大怒,欲討權.雲諫曰:「國賊是曹操,非孫權也,且先滅魏,則吳自服.操身雖斃,子丕篡盜,當因衆心,早圖關中,居河﹑渭上流以討凶逆,關東義士必裹糧策馬以迎王師.不應置魏,先與吳戰;兵勢一交,不得卒解.」先主不聽,遂東征,留雲督江州.先主失利於秭歸,雲進兵至永安,吳軍已退.
[二]雲別傳曰:亮曰:「街亭軍退,兵將不復相錄,箕谷軍退,兵將初不相失,何故?」芝答曰:「雲身自斷後,軍資什物,略無所棄,兵將無緣相失.」雲有軍資餘絹,亮使分賜將士,雲曰:「軍事無利,何爲有賜?其物請悉入赤岸府庫,須十月爲冬賜.」亮大善之.
선주(先主)가 가맹(葭萌)에서 환군해 유장(劉璋)을 공격하고 제갈량(諸葛亮)을 불렀다. 제갈량이 조운과 장비(張飛) 등을 이끌고 강을 거슬러 서쪽으로 올라가며 군현들을 평정했다. 강주(江州)에 도착하자 조운을 나누어 보내 외수(外水)를 따라 강양(江陽)으로 올라가게(서진하게) 하니 성도(成都)에서 제갈량과 합류했다. 성도가 평정된 뒤 조운을 익군장군(翊軍將軍)으로 삼았다. [1]
[1] 조운별전 – 익주가 평정된 뒤 당시 사람들이 의논하여 성도의 옥사(屋舍-가옥)와 성 바깥의 원지(園地-과수원), 상전(桑田-뽕밭)을 제장들에게 나누어주고자 했다. 조운이 이를 반대하며 말했다, “ (한무제가 집을 하사하자) 곽거병(霍去病)은 흉노(匈奴)를 아직 멸하지 못했으니 집이 쓸모없다고 하였는데 또한 국적(國賊)이 비단 흉노만이 아니니 아직 안락을 구해서는 안됩니다. 천하가 모두 평정될 때를 기다려 각자 상자(桑梓-고향)로 되돌아가 본래 땅에서 농사짓는 것이 마땅합니다. 익주(益州)의 인민(人民)들은 처음 병혁(兵革-전란,전쟁)을 겪었으니 전택(田宅-논밭과 집)들을 모두 되돌려주고 이제 이에 안거(安居)하며 생업에 복귀하게 한 뒤에 부역하게 하고 조(調)를 거둔다면 그들의 환심(歡心)을 얻을 것입니다.” 이에 선주가 이를 따랐다.
하후연(夏侯淵)이 패하자 조공(曹公-조조)이 (와서) 한중 땅을 다투었고 북산(北山) 아래에 군량(米)을 운반하여 수천만 포대에 달했다. 황충(黃忠)이 가히 이를 탈취할 수 있다 하였고 조운의 군대가 황충을 수행해 군량을 탈취하려 했다. (※) 황충이 기한을 넘겨도 돌아오지 않자 조운이 수십 기(騎)를 거느리고 가벼운 차림으로 위(圍-군사시설의 일종)를 나와 황충 등을 마중하며 상황을 살펴보려 했다. 때마침 조공(曹公)이 양병(揚兵-거병;군세를 떨침)하여 대거 출전하니 조운이 조공의 전봉(前鋒)에 의해 공격받아 바야흐로 싸우는데 적의 대군이 도착하여 형세가 핍박되자 적진에 전돌(前突-돌진)하고 한편으론 싸우며 한편으론 물러섰다. 조공의 군(조조군)이 패했다가 다시 합치니 조운이 적을 무너뜨리고는 위(圍)로 달려 되돌아왔다. 장수 장저(張著)가 상처를 입자 조운이 다시 말을 달려 (적의) 영(營)으로 되돌아가 장저를 맞이했다. 조공의 군이 추격해 위(圍)에 이르렀다. 이때 면양장(沔陽長) 장익(張翼)이 (※) 조운의 위(圍) 안에 있었는데 장익이 문을 닫고 막아 지키려 하였으나 조운이 영(營)으로 들어와서 다시 문을 활짝 열고는 깃발을 내리고 북치는 것을 멈추었다. 조공의 군은 조운이 복병을 두었을까 의심하여 군을 이끌고 물러났다. 조운이 하늘을 뒤흔들 듯 북을 울리며 오로지 뒤에서 조공의 군에게 융노(戎弩)를 쏘아대니 조공의 군이 놀라고 어지러워져 자기들끼리 서로 짓밟았고 한수(漢水)에 떨어져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선주(先主)가 다음날 아침 조운의 영위(營圍)로 친히 와서 전날 싸운 곳을 둘러보고 말했다, “자룡(子龍)은 일신이 모두 담덩어리(膽)로다.” 음악과 술자리를 베풀어 저녁까지 이어졌고, 군중(軍中)에서는 조운을 일컬어 호위장군(虎威將軍-범 같은 위용을 갖춘 장군)이라 했다.
손권이 형주(荊州)를 습격하자 선주가 대노해 손권을 치려 했다. 조운이 간언하며 말했다, “국적(國賊)은 조조(曹操)이지 손권(孫權)이 아니며 게다가 먼저 위(魏)를 멸하면 오(吳)는 저절로 복종해올 것입니다. 조조는 비록 죽었으나 그의 아들인 조비가 찬도(篡盜-찬탈)했으니 응당 중심(衆心-뭇사람들의 마음)에 의거해 조속히 관중(關中)을 도모해야 합니다. 하수와 위수 상류를 점거해 흉역한 자들을 토벌하면 필시 관동(關東)의 의사(義士)들이 양식을 싸매고 말을 채찍질해 달려와 왕사(王師-천자의 군대)를 영접할 것입니다. 위(魏)를 내버려두고 먼저 오(吳)와 싸워서는 안됩니다. 병세(兵勢)가 한번 엇갈려 교전하게 되면 급히 풀 수 없습니다.” 선주가 이를 들어주지 않고 마침내 동쪽을 정벌했고 조운을 남겨 강주를 감독하게 했다. (독강주督江州) 선주가 자귀(秭歸)에서 실리(失利)하자 조운이 진병해 영안(永安)에 도착했는데 오군(吳軍)은 이미 물러난 뒤였다.
※ 삼국지집해 / 雲兵隨忠取米 – 관본고증 왈, [태평어람]에는 (雲兵이 아니라) “雲遣兵”이라 적혀 있어 “遣” 자가 더 있다.(官本考證曰,御覽作雲遣兵,多「遣」字) / [태평어람] 권309에서는 촉지(→바로 조운별전의 이 대목)를 인용하며 “(蜀志 曰) 黃忠以爲可取,趙雲遣兵隨忠取米”라 적고 있습니다. 현재 전해지는 삼국지 상의 글자와 태평어람에서 인용된 글자가 서로 다른 셈인데, 태평어람에 따라 풀면 “조운이 군대를 보내 황충을 수행해 군량을 탈취하게 했다.”가 됩니다. 태평어람 관련대목 (권309)은 아래와 같습니다. (원문출처) 위의 조운별전 기사(한중전투 부분)가 축약 정리되어 있는 형태인데, 글자가 서로 다르다고 할 만한 부분은 2군데(아래 밑줄로 표시)이며 그외에는 모두 같으므로 해석은 생략합니다. 원문 출처에 간체로 되어있는 것을 번체로 고쳤습니다.
蜀志》曰:夏侯淵敗,曹公爭漢中地,運米北山下, 數千萬囊。黃忠以爲可取,趙雲遣兵隨忠取米。忠過期不還,雲將數十人輕行出圍,迎視忠等。值曹公揚兵大出,雲势逼,且鬭且却,入營更大開門 ,偃旗鼓。公軍至,疑有伏兵。雲雷鼓, 於後射公, 公軍驚駭,自相蹂踐,墮漢水死者甚多。先主明旦自來至雲營,圍視昨戰處,曰:“子龍一身都爲膽。”(子龍,趙雲字也。) 作樂飲宴至暝。
※ 삼국지집해 / 沔陽長張翼 – 전대흔 왈, 면양(沔陽)은 응당 강양(江陽)으로 적어야 한다. (錢大昕曰, 沔陽當作江陽) / 장익이 건안 말에 강양장(江陽長)을 지냈다고 한 <장익전> 기사를 감안한 것으로 보입니다. (建安末, 擧孝廉, 爲江陽長, 徙涪陵令, 遷梓潼太守, 累遷至廣漢、蜀郡太守. / 삼국지 권45 장익전)
건흥 원년(223년), 중호군(中護軍), 정남장군(征南將軍)으로 임명하고 영창정후(永昌亭侯)에 봉했다가 진동장군(鎭東將軍)으로 올렸다.
건흥 5년(227년), 제갈량을 수행해 한중(漢中)에 주둔했다.
그 이듬해(228년), 제갈량이 출군하여 야곡도(斜谷道)를 거친다고 양성(揚聲-널리 소문냄)하자 조진(曹眞)이 대군을 보내 이를 당적했다. 제갈량은 조운과 등지(鄧芝)로 하여금 가서 막게 하고 자신은 기산(祁山)을 공격했다. 조운, 등지의 군사들은 약하고 적은 강하여 기곡(箕谷)에서 실리(失利-불리함,싸움에 짐)했으나 군사들을 거두어 굳게 지켰으므로 대패(大敗)에 이르지는 않았다. 군이 퇴각한 뒤 진군장군(鎭軍將軍)으로 강등되었다. [2]
[2] 조운별전 – 제갈량이 말했다, “가정(街亭)의 군이 퇴각할 때는 병장(兵將-병졸과 장령)들을 다시 서로 수습하지 못했는데 기곡(箕谷)의 군이 퇴각할 때는 병장(兵將)들이 처음처럼 잃은 바가 없으니 어찌된 까닭이오?” 등지(鄧芝)가 대답했다, “조운이 몸소 뒤를 끊고 군자(軍資-군수물자)와 집물(什物-집기)조차 함부로 버린 일이 거의 없으니 병장(兵將)들을 잃을 까닭이 없었습니다.” 조운의 군자(軍資)에 여유분의 비단(絹)이 있어 제갈량이 장사(將士-장졸)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니 조운이 말했다, “군사에 이로움이 없었는데(이기지 못했는데) 어찌 하사품이 있을 수 있습니까? 청컨대 그 물건들은 모두 적안(赤岸)의 부고(府庫)에 넣어두었다 10월이 되길 기다려 겨울 하사품으로 삼으십시오.” 제갈량이 이를 매우 옳게 여겼다.
七年卒,追諡順平侯. 初,先主時,惟法正見諡;後主時,諸葛亮功德蓋世,蔣琬﹑費禕荷國之重,亦見諡;陳祗寵待,特加殊奬,夏侯霸遠來歸國,故復得諡;於是關羽﹑張飛﹑馬超﹑龐統﹑黃忠及雲乃追諡,時論以爲榮.[一]雲子統嗣,官至虎賁中郎,督行領軍.次子廣,牙門將,隨姜維沓中,臨陳戰死.
[一]雲別傳載後主詔曰:「雲昔從先帝,功積既著.朕以幼沖,涉塗艱難,賴恃忠順,濟於危險.夫諡所以敍元勳也,外議雲宜諡.」大將軍姜維等議,以爲雲昔從先帝,勞績既著,經營天下,遵奉法度,功效可書.當陽之役,義貫金石. 忠以衞上,君念其賞,禮以厚下,臣忘其死.死者有知,足以不朽;生者感恩,足以殞身.謹按諡法,柔賢慈惠曰順,執事有班曰平,克定禍亂曰平,應諡雲曰順平侯.
건흥 7년(229년)에 죽었다. 시호를 추증해 순평후(順平侯)라 했다.
※ <후주전>에 의하면 조운의 시호 추증은 경요 4년=261년의 일
당초 선주(先主) 때에는 오직 법정(法正)만이 시호를 받았다. 후주(後主) 때에는 제갈량(諸葛亮)은 공덕이 세상을 덮고 장완(蔣琬), 비의(費禕)는 국가의 중임을 떠맡았으니 또한 시호를 받았다. 진지(陳祗)는 총애를 받아 특별히 수장(殊奬-특별한 포장)이 더해졌고 하후패(夏侯霸)는 멀리 와서 국가에 귀부했으므로 또한 시호를 받았다. 그러다 관우, 장비, 마초, 방통, 황충과 조운이 시호를 추증받았으니 시론(時論)에서는 이를 영예로운 일로 여겼다. [1]
※ 법정, 제갈량, 장완, 비의, 진지, 하후패는 죽은 뒤에 바로 시호를 받았으며, 그 뒤 이미 오래전에 죽은 관우, 장비, 마초, 방통, 황충(경요3년)과 조운(경요4년)에게 특별히 시호를 추증한 것입니다. 한편 하후패에 관해서는 기록이 거의 없고 언제 죽었는지도 알 수 없는데, 조운전 이 대목을 시간순서대로 기술한 것으로 보면 진지가 죽은 경요 원년(258년) ~ 관우 등이 시호를 추증받은 경요 3년(260년) 사이에 죽은 것으로 보입니다.
[1] [조운별전]에 기재된 후주(後主)의 조서에서 이르길, “조운이 지난 날 선제(先帝-예전 황제 즉 유비)를 뒤따르며 공적(功積)이 이미 현저했고, 짐이 나이어려 간난(艱難)을 겪을 때 그의 충순(忠順)에 힘입어 위험에서 구제되었다. 무릇 시호는 그 으뜸되는 공을 잘 드러내야 하는 법이니 바깥에서 조운에게 합당한 시호에 관해 의논하도록 하라.”고 했다. 대장군 강유(姜維) 등이 의논하여 말했다, “조운이 지난 날 선제(先帝)를 뒤따르며 노적(勞績-공적)이 이미 현저했고 천하를 경영하며 법도를 준봉했으니 그의 공효(功效)가 가히 기록될 만하며 당양(當陽) 싸움에서는 의로움이 금석(金石)을 꿰뚫듯 하였습니다. 충(忠)으로 윗사람을 보위하면 임금이 그에게 상줄 것을 생각하고 예(禮)로써 아랫사람을 후대하면 신하는 자신이 죽을 것을 잊게 되니, 죽은 자에게 지각이 있다면 족히 불후(不朽)할 것이고 산 자들은 은혜에 감격하여 족히 몸바칠 것입니다. 삼가 시법(諡法)을 살펴보건대, 유현자혜(柔賢慈惠)를 순(順)이라 하고 집사유반(執事有班)을 평(平)이라 하며 극정화란(克定禍亂)을 평(平)이라 하니 조운의 시호로는 순평후(順平侯)가 마땅합니다.”
조운의 아들 조통(趙統)이 후사를 이었고 관직이 호분중랑(虎賁中郎), 독행령군(督行領軍)에 이르렀다. 차자(次子-차남) 조광(趙廣)은 아문장(牙門將)으로 강유(姜維)를 수행해 답중(沓中)에서 싸움에 임하다 전사했다.
評曰:關羽﹑張飛皆稱萬人之敵,爲世虎臣.羽報效曹公,飛義釋嚴顔,並有國士之風.然羽剛而自矜,飛暴而無恩,以短取敗,理數之常也.馬超阻戎負勇,以覆其族,惜哉!能因窮致泰,不猶愈乎!黃忠﹑趙雲彊摯壯猛,並作爪牙,其灌﹑滕之徒歟?
평한다. 관우, 장비는 모두 만인지적(萬人之敵)이라 칭해진 당세의 호신(虎臣-범 같은 신하)이었다. 관우는 조공(曹公)에게 보효(報效-힘써 보답함)하고 장비는 의(義)로써 엄안(嚴顔)을 놓아주었으니 아울러 국사(國士)의 풍모가 있었다. 그러나 관우는 강이자긍(剛而自矜-굳세고 자부심이 강함)하고 장비는 폭이무은(暴而無恩-난폭하고 은혜롭지 않음)하여 자신의 단점으로써 패망하게 되었으니 이수(理數-도리,이치)의 상례로다. 마초는 융족과 용력에 의지해 자신의 일족을 망쳤으니 애석하구나! 곤궁함에 처하여 이로 인해 태평함으로 나아갔다면 더 낫지 않았겠는가! 황충, 조운은 강지장맹(彊摯壯猛-굳세고 사납고 씩씩하고 용맹함)하여 아울러 조아(爪牙-발톱과 어금니. 용맹한 무장을 비유)가 되었으니 관(灌-관영灌嬰), 등(滕-등공 하후영夏侯嬰)의 무리로다.
[출처] 관장마황조전 중 조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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