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고 성장하고, 선교사가 되다 (1859-1884년) (1) 믿음의 가족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조선에서는 원두우(元杜尤) 목사로 더 널리 불렸던 한국 개신교 초 기의 개척 선교사 언더우드는 1859년 7월 19일, 존 언더우드(John Underwood)와 엘리자베스 그랜트 메어(Elizabeth Grant Mair)의 아 들로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존과 엘리자베스는 3남 2녀, 총 다섯 명의 자녀를 둔 다복한 부부 였는데, 언더우드는 그들의 넷째 아이로, 위로 누나 한 명과 형 두 명 이, 아래로는 여동생이 한 명 있었다. ▲알렉산더 와우 박사, 언더우드의 진외증조부. 언더우드의 가문에는 두 가지 이력이 이어져 내려오는데, 하나는 설교자의 이력이요, 다른 하나는 과학자의 이력이다. 언더우드의 할아버지인 토머스 언더우드는 런던에서 출판사와 서점을 운영한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는데, 그는 스코틀랜드 출신이자 런던에서 장로교회 설교가로 명성을 떨치던 알렉산더 와우(Alexander Waugh, 1754~1827) 박사의 딸 메리 이스턴 와우와 결혼했다. 언더우드의 할머니 말이다. 할머니 메리의 아버지, 즉 언더우드의 진외증조부였던 알렉산더 와우 박사는 런던선교회(London Missionary Society)의 심사위원회 위원장이었고, 영국 성서공회의 위원이었으며, 스코틀랜드 병원협회·아일랜드 복음협회·기독교 전도문서회·노예제반대협회 등의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던 장로교회의 어른으로서, 어린 언더우드에게 는 가문의 자랑이요, 본받을 모범이었다. 와우 박사가 28년간 위원장직을 맡은 런던선교회는 1795년 영국에서 설립된 초교파적 해외 선교단체였다. 개신교는 가톨릭과 달리 성공회, 장로회, 회중교회, 침례회, 감리회 등 다양한 교파들로 나누어져 있어서 당시 하나의 개신교 교파·교단이 해외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란 경제적으로 쉽지 않았다. 하지만 서유럽의 식민지 확장과 더불어 18세기 말~19세기 초에 바야흐로 개신교의 위대한 선교 시대가 열리자 ‘복음을 전하는 위대한 사역을 증진시키기 위해’ 여러 개신교 교파들이 모여 런던선교회를 조직했고, 남태평양의 타히티로 첫 선교사를 파송했다. 그 후 아프리카와 중국에도 선교사를 파송했는데, 그 유명한 중국의 첫 개신교 선교사로 1807년 마카오 땅을 밟은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과 역사상 가장 뛰어난 중국학자로 평가받는 제임스 레그(James Legge)도 런던선교회 소속이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제너럴 셔먼호 사건으로 1866년 대동강변에서 유명을 달리한 로버트 저메인 토머스(Robert Jermain Thomas) 목사도 런던선교회 소속이었다. 런던선교회를 이끌어간 중심 사상은 복음 사역을 위해 교파의 다름을 초월하여 연합한다는, 에큐메니컬(Ecumenical) 사상이다. 알렉산더 와우 박사는 런던 웰스가 교회에서 시무하던 장로교회 목사였지만, 교파연합운동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는 물론 장로회, 감리회, 침례회, 회중교회 등이 연합한 하나의 연합선교회를 이루는 데 힘쓰면서, 이를 위해 1795년 그 선교회의 ‘기본강령’을 기초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와우 박사가 기초했다는 기본강령이 바로 런던선교회의 기본 강령이었다. 런던선교회는 1966년 영연방 선교협회와 합병되면서 그 이름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170여 년간 교파연합 선교단체로서 전 세계 선교지에 선교사를 파송하며 피와 땀으로 역사를 써 내려갔다. 그런데 그 설립 정신이 언더우드의 선조인 와우 박사의 에큐메니컬 사상이었던 것은, 후손으로서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이러한 알렉산더 와우 박사의 설교가이자 선교운동가로서의 이력은 그 후손들에게 이어져 언더우드의 삼촌인 에드워드 존스는 목사로서 런던선교회의 총무직을 맡았다. 언더우드 대에 이르러서는 조선 선교사 언더우드뿐 아니라, 그의 사촌들 가운데에도 인도에 두 명, 아프리카에 한 명, 오스트레일리아에 한 명, 브라질에 한 명 등 총 여섯 명이 해외 선교사로 나간, 명실상부한 선교사 집안이었다. 또 다른 집안의 이력은 바로 과학자의 이력인데, 언더우드의 아버지 존 언더우드는 발명가이자 제조 화학자로서 뛰어난 과학자였다. 당시 영국의 위대한 물리학자 겸 화학자였던 마이클 페러데이(Michael Faraday)의 제자로 서서히 그 과학적 재능에 두각을 나타낸 존 언더우드는, 글씨를 변조할 수 없는 안전수표용지, 75장을 한 번에 복사할 수 있는 잉크, 복사가 가능한 인쇄 잉크 등을 최초로 발명하는 등 발명가로서 명성을 떨쳐 빅토리아 여왕의 부군인 앨버트 공에게 직접 메달과 훈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존 언더우드는 타자기 리본의 품질을 개량·생산하는 공장 및 다이아몬드 세공 공장을 차리는 등 실업가로서도 자질을 드러냈다. 그의 과학자적·실업가적 자질은 후손들에게도 전해져 훗날 언더우드의 큰형인 존 T. 언더우드는 아버지가 개량한 타자기 리본을 바탕으로 하여 잉크, 타자기 부속품을 만들고, 나아가서는 ‘언더우드 타자기’를 완성시켜 자신만의 회사를 설립한다. 사촌인 아더 언더우드 박사도 과학자로 이름을 떨쳤다고 알려져 있다. 언더우드도 대학 시절 늘 자연과학 과목에서 뛰어난 성적을 받았고, 선교사 훈련을 위해 1년간 의학 공부를 한 바 있으며, 내한 후에는 제중원이라는 왕립병원에서 화학과 물리를 가르쳤는데, 이것도 집안에 흐르는 과학자의 이력이 전달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언더우드 가문의 가풍 가운데 언더우드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실한 종’이 되어야한다는 깊은 기독교 신앙과 그리스도인의 성품이었다. 언더우드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알렉산더 와우 박사의 영향 아래 신실한 신앙인의 삶을 살았던 것은 물론이거니와 언더우드의 아버지, 어머니도 헌신적인 신앙을 보여주었다. ▲아버지 존 언더우드. 아버지 존 언더우드는 바쁜 사업 가운데에서도 교회 활동에 헌신적이었다. 아무리 바빠도 일요일 오전은 교회의 여러 예배와 모임에 참석했고, 오후에는 아이들 곁에서 성경 이야기를 함께 나누었다. 아이들이 교회를 즐겁고 편안한 곳으로 느낄 수 있도록 교회에 어린이 의자를 놓아주고, 집에 오는 길에는 그날 들은 설교 내용과 성경 본문을 질문하여 아이들이 그 말씀을 다시 새겨보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나가도록 이끌었다. 어머니 엘리자베스 언더우드도 온화한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아이들을 사랑으로 품었다. 독일어와 프랑스어 교사로도 재직한 바 있을 정도로 뛰어난 학식을 겸비한 여성이기도 했던 어머니 엘리자베스는 주변인 누구도 그녀가 목소리 높여 화내는 것을 단 한 번도 본 적 없다고 할 정도로 온화하고 다정다감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었다. ▲어머니 엘리자버스 그랜트 언더우드. 언더우드의 큰형 존 T. 언더우드와 작은형 프레드 W. 언더우드 역시 깊은 믿음을 지녀 동생에게 본을 보였다. 형제들은 주일 오후에 늘 교회 놀이를 했는데, 형들은 동생 언더우드가 설교자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항상 양보해주었다. 아이들은 히브리서 전체를 비롯한 성경의 많은 부분을 외우고 있었다. 언더우드가 평생에 보인 교회에 대한 헌신과 온화한 그리스도인의 성품은 바로 그런 가족의 유산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글은 한국교회총연합에서 발행한 <한국교회 선교사 전기 시리즈>의 "개척자 언더우드" 내용입니다. #풀가스펠뉴스 #한교총 #한국교회총연합 #언더우드 #선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