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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가 40주년을 맞았습니다. 시작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이야기는 80년대 초반까지 거슬러 갑니다. 몇몇 대학생이 모여 책을 읽고 시대를 고민하며 문집 〈온전한 지성〉을 펴내던 일종의 스터디 모임이었습니다. 그러다가 1983년 여름 기독교학문연구회라는 조직으로 결성됐는데 손봉호 교수, 강영안 교수, 송인규 교수 등도 함께 있었어요. 대구 지역에서도 고 김영길 총장과 양승훈 교수 등이 스터디 모임 조직을 본격화해 기독교대학설립동역회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후에 이 두 모임을 2009년에 통합해서 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가 됐습니다. 여기에 손봉호 교수, 송자 총장, 정근모 교수 등 대학 총장급만 8-9명이 계셨고, 스터디 모임 초창기부터 오랫동안 한국 교회 지식인들에게 기독교 세계관 형성을 위해 지원했던 웨슬리 웬투워스 선교사 등도 역할을 해 주셨습니다.
초창기 기독교세계관이라는 의식이 어떻게 대두됐는지요? 어쩌면 80년대라는 한국의 시대적 상황도 배경이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저희에게 있어서 70-80년대 모임의 주요 동력 한편에는 반운동권 의식이 있고, 또 한편에는 일종의 자괴감이 있었습니다.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인 관심이 있었지만 그 당시 복음주의 교회들은 정치 자리에는 나가면 안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런 보이지 않는 균열이 있었습니다. 또 교회 안에 트라우마처럼 남은 사건도 있습니다. 새문안교회 대학부에서 청년들이 예배드리는 도중 경찰에 잡혀가는 사건도 있었고요. 그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뭔가를 해야 되는데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후에 스터디 모임이 확대되면서 만나 보니 일반 대학에서 온 친구들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발견한 것이 복음주의, 특별히 개혁주의 칼뱅주의에 대한 공부였습니다. 신학생이었던 저도 칼뱅의 《기독교강요》가 정말 궁금했어요. 그렇게 《기독교강요》를 같이 읽는 것이 출발점이 됐습니다. 특히 그중 제네바 정부에 대한 내용을 보면서 당시 교회가 말하는 것과 다르다는 점도 깨닫게 됐습니다. 그렇게 세상을 보는 기독교적 눈을 키워 온 것입니다.
현재 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의 사역을 소개해 주십시오.
(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는 온라인 회원을 포함해 약 7천 명의 회원이 있습니다. 유료 회원은 대략 900명입니다. 25개 교회에서도 정기 후원을 해 주고 있습니다. 특히 유료회원 중에는 일반학문 학자가 많습니다. 신학자도 있지만 저희 모임이 신학자만의 모임은 아닙니다. 저희는 계간지 〈신앙과학문〉을 발간하는데, 학술 등재지 중에서 수위에 속하는 매우 공신력 있는 학술지입니다. 이런 장이 있기에 회원들이 기독교적 관점으로 자신의 학문 영역에서 연구한 글을 기고하고, 엄격하고 공정한 과정을 거쳐 글을 싣습니다. 더불어 기관지 〈신앙과삶〉을 격월 발간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이슈나 주제를 각 기독교 전문가들이 대략 1-2쪽의 글로 써서 기고하며 기독교적 관점을 계속 풍성하게 하고 있습니다.
또 정기 학회를 매년 서울과 지방에서 각각 1회씩 2차례 개최합니다. 현재는 일종의 학술단체로서 대학원생과 소장학자 모임을 정기적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서울대에서 대학원생들이 모여 1박 2일 동안 책 모임과 전문가 특강 및 토론을 했습니다. 일종의 북 클럽과 멘토링 프로그램인데, 요한계시록 종말론에 관한 서적을 카이스트 학생이 발제하고 서울대 학생이 논평하고, 다음날은 이필찬 전 웨신대 교수가 특강을 하고 토론을 진행했습니다. 3년 전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7-8회 진행했는데, 앞으로도 매년 한두 번씩은 모임을 가지려고 합니다.
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40년의 시간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한국과 같은 상황에서 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같은 단체가 40년을 지속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외에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이 같은 학문적인 열기가 체계화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마크 놀 교수가 지적한 대로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이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복음주의 내에서 지성적 노력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복음주의 내에서 지성적인 모임을 지속성 있게 가져간다면, 저는 이것이 복음주의자들을 내실 있게 만들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소위 진보적 신학 쪽에서는 그런 인프라를 잘 갖추고 학교도 만들지만 복음주의 쪽에서는 많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복음주의 운동 속에서 끈끈하면서 지속성 있게 지성 운동을 가져온 이들이 분명 존재합니다.
예를 들면 영국의 존 스토트 목사가 설립한 국제랭함파트너십(Langham Partnership)입니다. 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역시 한국의 복음주의자들이 복음적인 신앙에 근거해서 지성 운동을 지속적으로 해 왔음을 보여 주는 것이고,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가 해 온 40년의 연구와 연구 내용의 나눔은 그 영향력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복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려는 교회나 기독교 단체들에게 중요한 이슈를 제공할 것 같습니다.
제가 이사장으로 섬기면서 결정하고 진행한 것이 그간의 모든 연구와 자료에 대한 공개였습니다. 홈페이지(www.worldview.or.kr) 자료실에 있는 출간물은 모두 내려받아 볼 수 있게 해 놓았습니다. 꽤 볼 만합니다. 저희가 매번 현실감 있는 이슈들을 다루려고 애쓰기 때문에 현실적이고 폭넓은 주제에 대해 도움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최근에는 “외국인 유학생, 선교의 기회인가 교육의 위기인가?”(7-8월호), “로잔정신과 한국 교회”(3-4월호), “기독교 세계관 연구 40년과 위기의 시대”(5-6월호) 등을 주제로 다뤘습니다.
더불어 앞서 말씀드린 북 클럽 프로그램으로도 도움을 드릴 수 있습니다. 관심 있는 교회는 이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동안 제가 서울 삼일교회, 대전 새로남교회, 일산교회에서 4주 또는 6주 과정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했습니다.
그동안 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를 이끌어 오시면서 현대의 시간 속에서도 기독교 세계관 운동 차원에서 마주하는 고민도 있을 것 같습니다.
세계관 운동도 길을 잃을 수 있습니다. 세계관 운동을 열심히 하던 제 후배가 제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기독교 세계관 운동하는 사람들을 보면 세계관은 있는지 모르겠는데, 안목이 없어.” 의미인즉슨, 세상 속 문화하고 접촉(engagement)하는 센스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치명적인 문제입니다. 대개 신앙에 충실하고 이런 운동에 열정을 갖는 사람들이 현실적인 안목이 조금 뒤처지거나 고답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흔히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지닌 틀이 있습니다. 보통 ‘창조 타락 구속 - 하나님 나라’의 네 부분으로 나눠서 강의하는데 그건 편의상 나눈 것이지 그것만이 기독교 세계관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만 반복하니 현실성이 떨어지고 고답적이 되는 겁니다. 최근에는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명분으로 공격적인 형태의 이념화된 모습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일종의 고답적인 우파적 사고에 함몰된 경우입니다.
이는 신학적 기초가 약하고 제대로 된 기독교 역사적 전통에 충실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기독교 신학적 기초를 탄탄히 하고, 그 전통에 충실하면서 현장성에 강한 사람이 돼야 합니다. 성경과 문화를 잇는다는 것은 실은 상당히 복합적인 훈련이 필요한 일입니다. 개인의 경건도, 세상의 흐름에 대한 학문적 이해도, 이를 연결하는 현장 센스도 필요합니다. 이런 면에서 저는 ‘안경’이라는 메타포를 좋아합니다. 성경을 안경이라는 메타포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 안경을 잘 갖추고 이를 통해 오늘의 현장을 보는 것입니다.
만약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단어 자체가 고답적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단어에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념적으로 오염시킬 것 같다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오늘의 시대 속에서 오히려 실생활에서 다가서게 하는 설명이 더 필요합니다. 저는 안경이라는 메타포로 설명하지만 제 미국인 친구는 ‘기어 박스’로 설명합니다. 즉 성경이 엔진이고, 실생활이 달리는 바퀴라면 변속이 가능해야 합니다. 때로는 창조를 강조하고, 어떤 때는 구속의 은혜를 강조하도록 기어를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강영안 교수는 최근 두란노에서 출간한 《생각한다는 것》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생각하며 살아가기라는 방식으로 오늘에 맞게 기독교 세계관을 다시 설명합니다. 고답적이 되고 심지어 오염되는 양상도 보이는 오늘의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성경이 녹아든 일상을 품는 새로운 시도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면에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성경 구절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라는 고린도전서 10:31 말씀입니다.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성인을 대상으로 기독교적 관점을 분별하고 정립하게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인식의 초기 형성 과정에 있는 어린아이들이 기독교적 세계관을 형성하는 것이 중요해 보이는데, 이에 대한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제가 운동 초기에 마주했던 자괴감 중 하나가 이런 것입니다. 당시 운동권에도 나름 세계관이 있었고, 거기서 6개월 공부 한 다음에 이전에 가졌던 세계관과 행동이 완전히 바뀌는 것을 봤어요. 그렇게 치면 우리는 교회에서 20년 성경 공부를 했는데,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기도와 전도 외에 없습니다. 물론 지금은 과거처럼 기독교 세계관 운동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돌아보면, 교회가 매주 사람을 모아 가르치는 것이 당장에는 좀 부족해 보일지 몰라도 신앙을 끝까지 지키는 비율은 더 높았습니다. 그럼에도 몇 가지 대안은 필요합니다.
먼저 아이들의 세계관 형성을 위해 부모가 ‘세계관 교육을 하자’는 식이 아니라 부모가 아이들과 책을 같이 읽으면서 또는 영화를 보면서 함께 나누고 대화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요즘에는 기독교 대안학교도 많아졌습니다. 어린이 기독교 세계관 교육을 위한 교과서도 꽤 많이 나왔습니다. 교회에서도 성경학교와 같은 프로그램에 창조론 캠프 등을 접목하면 좋을 것입니다.
또 필요한 것이 기독교 신앙 공동체를 살려 내는 것입니다. 세속주의, 물질주의 같은 세상의 가치관과 기독교인 개개인의 싸움은 이미 진 싸움입니다. 그 싸움을 신앙인 개인으로 하려면 엄청난 희생만 치르게 됩니다. 모든 사회 시스템이 세속적인 세계관으로 형성돼 있는 세계 속에서 살아야 하는데 신앙인이 홀로 싸워서는 이기기 어렵습니다. 주일 하루라도, 아니면 적어도 내 삶의 영역이 되는 가정과 교회에서라도 공동체 의식으로 살아가는 비전이 있다면 승산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공동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복음의 중심에 교회라는 공동체를 두셔서 이 안에 들어오면 생각이 변하고, 새로운 가치관이 형성되며, 다른 비전을 갖게 하셨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이런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교회 자체가 부정적인 모습을 좀 줄여 가야 합니다. 요즘 교회에 대한 사회 인식이 너무 나빠서 세계관 교육은 고사하고 신앙에 대한 자긍심도 가질 수 없게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근대 사회의 특징은 확대 사회였습니다. 기독교 세계관 운동도 이 확대 사회 속에서 그 위치를 잡아 온 것 같습니다. 그러나 최근 세계, 특히 한국 사회는 경제적으로나 인구학적으로 축소 사회로, 사회적으로도 열린 모습보다는 대립과 분리, 단절의 양상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확대 사회를 걸어온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이제는 어떤 걸음을 걸어야 한다고 보십니까?
요즘 제일 관심이 있는 세계관과의 씨름이라면 최근의 ‘세속화’ 경향에 대한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교회를 떠난 세속화의 개념이었다면, 최근에 보이는 모습은 신을 안 믿는 것이 너무 자연스러워지는 세속화입니다. 한국 문화에서 이런 급속한 탈종교 현상이 벌어지는 내면에는 이와 같은 더 깊은 차원의 세속화가 너무 자연스러워졌다는 데 있습니다. 예전에는 뭔가가 잘못되면 내가 전생에 뭘 잘못했나 생각하거나, 신앙인의 경우에는 하나님이 왜 이러시는가 등의 질문을 했습니다. 이제는 초자연적인 세계 또는 초월적인 세계에 대한 의식이 옅어지고 있습니다.
얼마 전 강의 중에 대학생들에게 물었어요. 우리가 왜 세상에 있고, 어디에서 왔는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생각해 본 적 없어요”라는 답변을 듣고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대답에는 생각하면 뭐하냐는 무관심과 그런 생각을 안 해도 그냥 돌아가는 세상이라는 의식이 깊이 겻들어 있습니다. 이제까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인간의 생각에는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 있으며, 결국 죽음을 앞두고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를 생각할 것이라고 여겼는데, 아예 무관심한 것입니다. 정말 무서운 세속화는 바로 ‘무관심’입니다. 무관심해도 살 수 있는 세상 그리고 그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이 우스운 사람이 되는 세속화입니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확장되고 있으며, 세계화로 지구는 하나가 되고 있습니다. 모든 문화 관습에 대해서 열릴 수밖에 없는 다원주의 사회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 소위 말하는 트라이벌이즘(Tribalism)적인 축소/폐쇄적 모습도 나오고 서로 부딪히는 것 같습니다. 이념적으로는 이 모든 것이 한 사람 속에 있습니다. 즉 온갖 잡다한 세계관이 부분 부분 섞여 있어 이 모든 것을 다 허용해야 될 것 같은데 불안하니까 하나에 그냥 올인하는 모습입니다. 심지어 기독교인도 이런 모습을 보입니다. 기독교 진리의 풍성함을 잃은 채 하나의 반대적 이념에 사로잡히는 거죠. 상대주의를 피하려다 일종의 독단주의에 빠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상대주의와 독단주의, 이 둘이 유일한 선택지는 아닙니다.
기독교인이 이렇게 되는 이유는 철학 훈련이 없기 때문입니다. 앉아서 고민도 하고, 남의 얘기도 들어주면서 외연을 넓혀야 합니다. 성경 해석에도 수백 가지가 있습니다. 고민하고, 듣고, 씨름하면서 지금 여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헌신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철학을 공부하지 않더라도 인생을 진지하게 돌아보면서 여러 선택지 속에서 책임감을 갖고 씨름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요즘은 AI 등 과학기술이 발전하여 내가 생각하지 않아도 나 대신 기계가 많은 걸 해 주는 시대입니다. 저는 거기에 함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책임적인 선택과 응답을 하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고 책임도 주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희망은 무엇입니까?
동역회가 지속되는 것이 큰 소망입니다. 복음적인 신앙 위에 분명히 서면서도 지나치지 않게 교회 공동체를 세워 가는 기독교세계관운동이 이어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