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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의 밤>
- 권보드래 (돌베개, 2019)
제4부
3장 낭만 : 문학청년, 불량의 반시대성
- 3.1운동 세대로서의 [백조]동인 : 생기발랄한 [창조](김동인, 이동원, 주요한), 침착 음울한 [폐허](염상섭, 오상순, 황석우)와 구별되는 [백조]의 특색은 보헤미안과 유사하며, 창조파의 밝은 면과 폐허파의 방랑적 면을 합친 것.
- 이광수 류의 계몽주의, 동인지 시대의 순문학주의, 신경향파와 KAPF문학이라는 문학사의 일반적 해석에서 [백조]의 의미는 각별.
- [백조]동인은 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3.1운동 경험한 세대에 속함. 당시 휘문고보과 배재고보에 재학했던 인원이 중심으로, 3.1운동을 일종의 성인식으로 경험한 청년들의 세대적 특이성이 명백. 대부분 유학 중이었던 [창조], [폐허] 동인과 달리 1919년 당시 국내 중등학교에 재학 중이었던 [백조] 동인들은 시위 행렬에 동참해 시내를 누볐고, 유치장에 갇혀 며칠을 보냈으며, 이후 여러 달 학교가 휴교중인 동안 또래들과 어울리며 성년을 맞았다.
- 배재고보 3년생, 김기진의 봄: 1919년 3월 1일, 4학년 진급을 앞두고 잇던 배재고보생 김기진은 다른 학생들처럼 탑골공원 독립선언식에 참석. 반장의 하숙집으로 가서 동지들과 함께 [독립신문]을 만들기도 했고 3월 5일 아침에는 대한문 앞으로 모이라는 쪽지를 거리에서 나눠주기도 했다. 당연히 당일 남대문 앞 학생 시위에 참가했지만 일본놈 경관이 불문곡직 붙들어버리는 통에 꼼짝없이 경찰서로 끌려가고 말았다. 단순 가담자로 분류 사흘 만에 유치장에서 풀려난 후에는 낙향하여 여러 달을 보냈다. 가을에 휴교령이 해제되기까지 김기진과 그 주변의 분위기는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그해 9월 제 2학기가 시작되고 모두 학교로 돌아오기까지 6개월 동안에 나뿐만 아니라 모든 학생들의 정신이 크게 변했다. 머리를 깍지 않고 담배를 피우며 술을 마시는 것이 표면상의 변화된 점이라면, 선생님 앞에서 자기 의견을 주장하며 굽히지 않고 맞서는 버릇이 내면 정신의 변화였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는 것을 따져가지고 학생들이 모두 옳다고 생각하기 전에는 선생님의 명령이라도 굴복할 수 없다는 것이 두드러진 경향으로 나타났다.”
- 1900년대 신소설과 역사전기물의 유행을 지나, 1910년대 번안 가정소설과 이광수, 최남선의 이른바 2인 문단시대를 넘어, 3.1운동 직후인 1920년대 초기 문학에 서북출신-일본유학생의 역할을 중요하게 보는 것이 통설이지만, 이후 문학사 전개에서는 서울 시내 고등보통학교, 특히 휘문고보와 배재고보의 역할이 적지 않다. 휘문고보의 박종화, 정지용, 홍사용, 배재고보의 김기진, 나도향, 박영희, 박용철, 박팔양, 송영, 최승일 등 이 무렵의 재학생들은 몇 해 지나지 않아 문단의 중진으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이들 대다수는 3.1운동에 적극 참여했고 일부는 옥고까지 치렀다.
- 3.1운동은 좌우를 막론하고 이후 운동의 수원지였을 뿐 아니라 사상 지식 문화의 발원지였다. 개인과 공동체의 생에서 도드라진 불회귀점으로서, 3.1운동은 1910년대의 문화 변동을 계승하면서도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장을 열어젖혔다.
3.1운동 이전, 전근대적 왕조-가족-촌락 유대가 끊기고 1900년대식 애국주의도 불가능해졌던 1910년대에, 개인은 저마다의 생물학적 실존을 움켜쥐고 홀로 남겨졌던 바 있다. 당연히 ‘죽음’을 화두로 한 1910년대의 문학 텍스트는 적지 않다. 생의 고독과 비애와 허무란 1910년대를 짙게 지배한 정념이다. ‘생의 공포’가 지배하는 가운데 작가는 세계란 냄새 나는 동물원에 불과하며 인간은 우리에 갇힌 수인이라는 니힐한 결론에 이른다.
‘죽음’이 문학적 주제의 핵심이 된 순간, 개체들은 저마다의 자유와 공허 속에서 씨름해야 했던 시절은 근대 한국에서 오래 가지 않는다. 3.1운동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죽음을 직시하면서도 신생에의 의지와 공동체적 감성, 개조에의 의지를 키워내게 됐기 때문이다.
- 3.1운동 이후 언론 출판 공간의 개방 속에서 ‘조선인 사회’가 형성되었다. 그것은 기만적 유사-사회에 불과했지만, 입법권도 선거권도 없는 식민지 사회에 불과했지만, 형용모순인 채로나마 ‘자유’의 여지를 부여하는 듯 보였다.
- 3.1운동 이후 새 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부임하고 이른바 ‘문화통치’가 선언된 이래 열린 출판, 문화와 교육의 공간 속에서 민족적 열정은 유감없이 분출되어 나왔다. 이전에 학교에 대한 흉흉한 소문이 떠돌아 매 50호당 1인씩 뽑기로 돼 있는 군비생 차출도 어려웠던 것이, 3.1운동 후에는 보통학교 시험제도를 마련해야 할 정도로 입학 열기가 일었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사신문]이 발행 허가를 얻은 것을 시작으로 각종 잡지가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고, 언론의 권리는 새 시대의 특징이 되었다.
- 이 상황에서 경제나 정치도 제약 속에서나마 다소의 진전을 보였다. 물산장려운동이라든가 청년회, 소작인조합, 노동조합 등 각종 단체의 신흥이 대표적 현상이다. 그러나 청년 대중이 가장 열렬하게 호응한 것은 다름 아닌 문화, 예술 분야에서의 실험과 성취였다. 스스로 후진이라 여기는 처지로서 가장 역전 가능성이 높은 분야가 문화 쪽이기 때문이기도 했겠고, 신채호가 일갈한 대로 문예가로 행사하면 혁명이나 다른 운동같이 체수와 포살의 위험이 없기 때문일 터. 신채호는 1920년대 초중반 학생 사회가 적막해진 이유를, 학생들이 신문예의 마취제를 먹은 후에 혁명의 칼을 던지고 문예의 붓을 잡으며, 희생 유혈의 관념을 버리고 신시, 신소설의 저작에 고심하는 까닭이라고 통매했다.
자유에 세계성, 게다가 피 흘리지 않아도 좋은 신천지라니, 그렇다면 [백조]를 포함한 이른바 동인지 문학의 주역들은 3.1운동의 기억을 다 잊었던 것일까. 문학사적 상식이 설명하듯 3.1운동 후 정치적 절망 때문에 문화라는 반대축으로 도피한 것일까.
2000년대 이래 이 같은 설명틀에 대한 이견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3.1운동 전후 문학을 조명할 때 연구자들은 문학청년들의 아나키즘적 사회주의적 사상 및 활동을 발굴해내는가 하면 동인지 문학의 개인성 추구가 사회적 공공성 기획의 일환임을 주장했다. 이들 연구가 공통적으로 지적하듯 1920년대 초반의 문학 정신은 퇴폐와 좌절이라는 말로써 요약해버리기에는 훨씬 복잡한 기원과 구조를 갖고 있다.
- 3.1운동을 통해 가장 흔하게 목격되는 단어 중 하나는 ‘자유’다. “조선청년독립단은 아 2000만 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득한 세계만국의 전에 독립을 기성하기를 선언하노라”(2.8독립선언서). “아의 고유한 자유권을 호전하여 생왕의 낙을 포향”하리라 다짐(기미독립선언서)
황해도 해주 50대의 농민이 그러했듯, 신민화 이후 생활이 개선됐는데 왜 독립을 바라느냐고 묻는 심문관에 대해 참여자들은 “타력적 진보는 그 쾌함이 무엇이며 피동적 일시의 안전은 무슨 만족이 있을손가”라고 질타하곤 했다. “세계의 대세상 사람은 자유이어야 한다.”
- 3.1운동은 좁디좁은 사적 영역에 유폐된 위축과 비굴을 끝장냈다. 당시 경찰서장을 끌어내고 군수를 공박하고 거리를 시위 행렬로 뒤덮은 기억은 1910년대의 굴종과 주저와 무기력을 몰아내 버렸다. 식민권력에 의해 강요되던 양민의 삶과 동정이나 자선, 혹은 부랑과 일탈의 양상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3.1운동으로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고 갇혀서 고통 받은 것은 사실일지나, 그런 만큼 독립이 수포로 돌아갔을 때의 회의와 좌절도 독했을지나, 거리의 민주주의의 분자 중 하나로서 특히 3.1운동의 청년들은 새로 열린 삶의 지평으로 용감하게 돌진했다. 그것은 선택의 문제라기보다 불가피한 변화였다. 마치 더 행복하지는 못할지라도 더 자유로워졌다는 실존의 주체처럼 3.1운동 세대는 자유의 윤리에 충실한 새로운 존재방식을 모색했다.
4장 후일담 : 죽음, 전략, 재생 그리고 다 못한 말
- 식민시기를 통해 3.1운동의 후일담은 광범위하게. 그러나 국지적 증상으로 존재한다. 몇 푼 월급 때문에 봉기에 불참했다가 벗들로부터 외면당하는 면 서기, 시위대의 폭행을 겪음으로써 보상 격으로 영전의 행운을 잡은 군청 서기, 반대로 봉기 경험 후 운동가로 변신한 면 서기나 금융조합 서기 등 하급 관리직의 체험담에서부터, 그 경험에 자극받아 지식의 세계를 지향하거나 망명지의 정치적 격동으로 뛰어들거나 혹은 멀리 미국이나 유럽으로 흘러간 청년층의 인생유전에까지, 3.1운동은 이후 문학에 깊이 스며 있다.
- 3.1운동이 즉각 독립을 가져오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제는 다 안다. 침략주의, 강권주의에 맞선 평화주의란, 국제 정세를 오인한 결과에 불과했다는 견해가 주류화 된 지 오래다. 3.1운동 이듬해부터 이른바 문화통치가 조선에 시행되기 시작했지만, 그것을 운동의 성과로 인정하는 시각은 대체로 인색한 편이다.
봉기의 시간이 지나가고 나서, 한편으로는 파리평화회의와 워싱턴회의가 끝나고 나서 3.1운동은 완연히 과거의 사건이 된다. 사회주의가 유행의 초점이 되는 가운데 3.1운동 때 경험했던 공동체적 순간이 빠르게 박제화 된다.
- [민족개조론], 변신 또는 배신 : 1921년 11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 열린 워싱턴회의는 제1차 세계대전 후 평화와 개조의 기류를 반영한 마지막 회의로서 적잖은 성과를 거두었지만, 조선인들이 고대했던 독립 문제는 논의되지 않았다. 임시정부에서는 회의에 대표를 파견하는 등 독립을 위한 활동을 전개했으나 한편으로는 그런 국제회의를 불신케 된 사람들도 많았다.
3.1운동 후 여러 달이 지나고 1-2년이 지날 때까지 계속된 독립에의 기대가 이때쯤 좌절됐다고 해도 되겠다. 이때 센세이셔널 했던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은 이 맥락에서 징후적인 글이다. 워싱턴회의 직후인 1922년 5월부터 [개벽]에 연재된 [민족개조론]에서 이광수는, 세계를 향해 요구하던 ‘개조’를 민족 내부로 돌린 것으로서, 그 결정적 전환점은 3.1운동에 대한 ‘반성’의 도입이다.
이광수에 따르면 구화회의나 국제연맹이나 태평양회의는 조선인의 생활개선에는 아무 관계가 없다. 설사 조선인의 생활의 행복이 정치적 독립에 달렸다 하더라도 그 정치적 독립을 국제연맹이나 태평양회의가 소포우편으로 부송할 것이 아니다. 독립의 실 내용은 실력에 의해 쟁취해야 한다.
그러니 만큼 우리는 다시 구원을 우리 밖에 구하는 우를 반복하지 아니할 것이요, 우리의 목적은 요행에서 구하려는 치를 반복치 아니할 것이다. 이 중요한 각성은 3.1운동이라는 과거의 쓰라린 경험을 통해 얻은 것. 3.1운동은 곧 구원을 우리 밖에 구하고 목적을 요행에서 구하려 한 어리석은 행동으로 평가하는 셈.
- 실제로 당시 비판자들이 가장 격렬하게 반발한 지점도 3.1운동에 대한 이광수의 저평가였다. [동아일보]에 반박문을 발표한 일본 유학생 최원순 역시 “그 사실에 대하여 계획도 없고 노력도 없던 일이었다고 명언하는 사가는 전 세계를 통하여 이춘원 이외에는 한 사람도 없을 것”이라고 통렬히 공박. [민족개조론] 비판을 통해 3.1운동의 숭고성을 상기시키려는 것도 비판문들의 중요한 줄기.
비판의 일성을 발한 신상우는 이광수가 꺼내든 문명/야만 이분법을 비판하는 가운데 문명국이라는 유럽 제국에 의해 자행된 각종 학살극을 상기시키며, 그런 문명을 표준삼을 수 없는 만큼 이광수가 사랑하는 부와 강과 지의 가치 역시 비판되어야 한다고 못 박는다. 문명화 정도는 이제 재부와 강력과 지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평등과 안전과 자유에 의해 측정되어야 한다. 이 점에서 3.1운동이야말로 문명화를 선도한 사건이다.
- 이광수가 임시정부 활동을 접고 귀국한 후 쓴 [민족개조론]은 3년 전 [독립신문]의 [개조]와 판이한 글이다. [민족개조론]은 이전의 [개조]에서 보이던 희망과 더불어 위태로이 공존했던 민족적 회의가 집대성한 판본이다. 여기 와서 3.1운동은 구원을 우리 밖에서 구하고 목적을 요행에서 구하려 한 어리석은 행동으로 폄하된다. [민족개조론]이 불러일으킨 파문을 생각한다면, 한편으로는 이광수와 자기 자신과 조선인 일반이 느끼고 있던 균열의 지점을 그만큼 정확하게 파고든 것이라 할 수 있겠다.
- 이광수와 동인지 문학 사이의 관계는 역설적이다. 이광수를 [창조]와 [백조] 동인으로 영입한 데서 알 수 있듯 동인지 문학 세대는 10년쯤 연장인 이광수를 향해 연대의, 적어도 공존의 의지를 갖고 있었다. 그들은 최남선, 이광수가 이끈 [소년]과 [청춘]의 영향 하에 글쓰기를 시작한 세대였고 이광수의 [어린 벗에게], [윤광호]나 [무정]과 [개척자]를 통해 자아의 해방, 정서의 해방을 맛본 세대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광수와 접속하는데서 이들은 주간이니 주필이니 하는 이름을 피하고 동인이라는 평등적 책임을 나눌 것을 고집했으며 한편으로 망명한 이광수의 원고가 뒤늦게 도착했을 때 특별부록을 따로 편집할 정도로 이광수의 위상을 존중하고 그를 조선문학계의 거성이요 기적으로 칭송하는가 하면 권두의 자리를 특설하면서도 그를 혹독하게 비평하는 글에도 지면을 할애했다.
- 이광수 또한 동인 요청을 수락하고도 만만히 그 노선을 따르지 않았다. [백조] 창간호에는 고구려 역사를 소재로 한 시조 [악부]를 주었고, [창조] 제8호에는 새로운 문학 경향을 비판하는 시편과 논설 [문사와 수양]을 투고했다. “근래에는 문사라 하면 학교를 졸업하지 말 것, 두관과 의장을 야릇하게 할 것, 신경쇠약성 빈혈성 용모를 가질 것, 불가측 불합리한 생활을 할 것, 등의 속성을 가진 인물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라는 공격으로 시작한 [문사와 수양]은 지덕체 수양을 강조하는 한편 문사=의사의 상을 정립할 것을 시도하면서, 과거의 무의식적 최소저항주의적 데카당스의 생애를 벗어버릴 것을 요구함으로써 [창조]를 포함한 문학의 새로운 경향 전반을 비판 대상으로 삼고 있다.
- 같은 호에 실린 이광수의 시편 역시 마찬가지 내용을 제언한다. 그는 [창조] 8호에 기고한 3편의 시를 통해 “동무야/우는 소리를 그쳐라 참 듣기가 싫다”고 공박하는가 하면 “너는 청춘이다, 혈기다,/뛸 것이다, 웃을 것이다,/강산이 떠나가도록 희망의 노래를 부를 것이다./그 소화불량성의 불평과,/결핵성의 센티멘털리즘을 버려라”는 명령조를 노골화했다.
“집에는 먹을 것이나 있고 건강은 중이나 되”는 것을 문학자의 조건으로 삼은 [문학에 뜻을 두는 이에게]에 이르면, 1910년대에 때때로 낭만적 해방의 정조를 보여주었던 이광수가 얼마나 보수화되고 있는지를 생생하게 목도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