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22:17]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한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 예수 당시 유대 지방의 납세 문제는 민감한 문제였다. 갈릴리 지방의 분봉왕 헤롯은 종교적으로는 유대인이었으므로 그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은 종교적인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유대 지방은 아켈라오가 폐위되고 황제의 직속령으로 재편성되어 황제가 임명하는 총독이 다스리게 되자 유대 백성들은 로마 황제인 가이사에게 직접 세금을 바치는 격이 되었다. 한편 이때 가이사는 A.D. 12-37년에 로마를 통치한 티베리우스 황제였다. 그리고 로마 정부는 매 14년마다 한 번씩 그 각 지방에서 바쳐야 하는 세금의 총량을 결정하기 위해 인구 조사를 실시했다
이스라엘에서는 바벧론 유수때부터 이방 지배자들에게 조공을 바치는 일이 문제된 적이 없었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인구 조사를 즈음하여 갈릴리 사람 유다가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이신데 이방 왕들에게 세금을 바쳐 그를 인정한다면 이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반란은 진압되었어도 가이사에 대한 납세의 적법성 문제는 계속 신학적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더욱이 하나님의 선민이 예루살렘성전이 있는 유대 땅의 소출(所出)에서 십일조를 성전에 바치면서 그 동일한 소출에서 떼어 이방인 왕의 통치아래 있다는 표로 세를 바치는 것을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꺼림직하게 여겼다.과격분자들인 열심당은 그 일을 수치로 여겼다.
그러나 헤롯당은 헤롯가문을 재흥시켜 헤롯 대왕의 호시절로 돌이키려고 로마 제국에 협력하면서 납세도 적극 권장하던 자들이었다. 어쨌든 지금 예수는 궁지에 빠졌다. 납세를 찬성하면 열심당과 바리새인들과 일반 백성들로부터 외면을 당하여 그들이 환영하는 메시야가 될 수 없고,
납세를 반대하면 헤롯당원과 사두개인들, 로마 총독과 헤롯 왕으로부터 정치범으로 몰리게 되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의 생각에 예수가 로마에 대한 납세를 찬성하지 않으실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사실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서 살려는 그들에게도 그 문제는 큰 고민이었다. 여하튼 바리새인들의 사악함은 하나님의 도에 참된 예수의 견해 중에서
율법에 열심인 자신들과 일치되리라고 예상한 점을 이용한 데 있다. 왜냐하면 이 문제가 예수를 옭아매기에 충분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세 - 로마 제국이 강요하는 세금은 토지세와 소득세와 인두세가 있었다. 여기의 '세'(켄소스)는 인두세로서,
로마 정부는 자기들의 통치를 받은 속주에서 남자는 14세 이상부터, 그리고 여자는 12세 이상부터 65세에 해당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부과하였다. 한편 라틴어의 Census라는 말은 바로 이 인두세에서 유래하였다.
[마 22:18]
예수께서 저희의 악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예수께서 저희의 악함을 아시고 - 예수는 그들의 정중하고 호의적이며, 간절한 물음 속에 있는 살의와 사악함을 보셨다. 이에 대해 마가는 '외식함', 누가는 '간계'라고 표현했다(막 12:15;눅 20:23). 그들의 입으로 말한 바 '외모를 보지 않으시는' 예수는 당신을 시험코자 하는 그들의 중심을 다 아셨고 그것을 백성들 앞에 드러내셨다. 예수는 그 질문이 가지고 있는 함정과 덫을 바로 아셨던 것이다.
[마 22:19]예수께서 저희의 악함을 아시고 - 셋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셋돈 데나리온 하나 - 이 세금은 로마 황제가 발행하는 은화로 바쳐야 했다. 고대사회에서 화폐는 왕권의 상징으로 어떤 왕이 왕위에 오르면 즉시 자기 자신의 화폐를 발행했다. 왕위를 노리는 자까지도 자기의 왕직의 실재성을 과시하기 위해 화폐를 발행했다
이것이 데나리온인데, 당시 가장 널리 유통되던 화폐였고, 거기에는 재임 중인 황제의 이름과 칭호가 찍혀 있어서 황제의 재산임을 나타냈다. 그 가치는 성인 남자의 하루 품삯이었고, 로마 군인의 하루 품삯이었다. 세금은 매년 일인당 한 데나리온을 내야 했다.
[마 22:20]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 이 데나리온 주화의 한 면에는 황제의 신성을 표시하는 월계관을 쓰고 있는 황제 티베리우스의 두상과 '존엄한 신의 존엄한 아들 티베리우스가이사'라는 글이 새겨져 있으며, 다른 면에는 '지극히 높은 사제', 폰티펙스막시무스)라는 라틴어 글과 신들의 평화를 나타내는
홀과 감람나무 가지를 각각 왼손과 오른손에 쥐고서 신들의 보좌에 앉아 있는 황제의 어머니의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그러니 이런 이방인의 우상숭배적인 화폐가 유대인들에게 얼마나 큰 혐오감을 일으켰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로마 정부는 이 화폐를 쓰게 함으로 자기들이 지배하는 권세를 피지배민들로 하여금 피부로 느끼게 하고 인각시키는 것이었다. 랍비들은 큰 나라를 이루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아브라함에게 대한 약속은 구체적으로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모습이 새겨진 화폐가 세계에 통용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초기의 헤롯가에는 유대인의 종교관 때문에 이러한 형상 새기는 일을 피했으나 분봉왕 빌립이 이것을 유대 주화에 도입했다. 그 뒤로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이 일을 행했던 것이다.
[마 22:21]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 '가이사'(카이사르)는 최초의 로마 황제 율리우스 가이사, B.C. 100-44의 성이었으나 나중에는 '황제'의 공식 직함 명칭이 되었다. 예수의 질문은 너무 당연하고 무해하게 보여서 바리새인들은 거침없이 대답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항상 질문자의 입에서 대답을 이끌어내셨다.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 예수께서는 바리새인의 입에서 나온 같은 말로 대답하신다. 데나리온의 화상과 글이 가이사의 것이면, 그 주화는 가이사의 것이다. 그들 모두가 가지고 다니던 데나리온 주화는 로마 황제의 주화였고, 그것은 곧 이스라엘이 로마 황제의 통치 아래 있음을 분명히 증거하는 것이었다.
예수는 그들의 입으로 그 주화가 황제의 소유임을 말하게 하셨다. 한편 랍비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화폐 주조의 권리가 한 나라의 통치자에게 있음을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이 통치 권력의 증거가 되어 있었고, 거기에 저항하는 것은 불법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께서도 하나님의 뜻으로 로마의 지배 아래에 있다면 로마에 세금을 바칠 뿐만 아니라
그 법을 준수하고 합당한 요구에 응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임을 강조하셨다. 예수의 이 첫 대답은 문자적으로는 반민족적이고 친로마적인 입장이었으나 뒷 말씀과 연결될 때는 참으로 기이하고 심오한 도(道)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십일조와 성전세와 헌물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당시 하던 관례대로이다. 그러나 문제는 주화가 황제의 소유이므로 황제에게 바쳐야 한다면 하나님의 소유에서 제외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만물에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인각되어 있는뎨,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받으실만큼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고 있는가? 예수는 상황의 본질을 정확히 아셨다.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하나님께 합법적인가를 물은 그들이 실은 하나님께 바쳐야 할 것을 하나님께 전혀 바치지 않고 있었다. 실로 그들은 의와 인 신은 버렸던 것이다 그들의 문제는 바로 그것이었다. 그들이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로 바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들은 가이사의 것도 가이사에게 돌리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멸망당하고 만다. 결국 주후70년, 성전이 파괴되고 성전세 반세겔까지 로마정부의 강요로 로마에 있는 쥬피터 카피돌리누스에 바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에 그 영역과 경계를 정하신 말씀이시다.
교회는 이스라엘 민족만이 아니라 온 세상에서 하나님의 분명한 형상을 찾아 하나님께로 돌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영역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생명과 권세가 나타나 있어서 복음을 믿는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어, 하나님의 소유가 되기 때문이다. 이 복음의 통치권은 예수의 속죄의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의 것이 최초로 하나님께 온전히 돌려짐으로 세워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가이사의 것을 제외한 당신의 것을 받으신다. 하나님이 주시고 받으시는 것에 비하면 가이사가 주고 받는 것은 얼마나 시시한가? 교회는 하나님께 받고 하나님께 드리기 위한 질서이고, 시민 생활은 가이사에게 받고 가이사에게 바치는 질서이다.
어느 요구도 다른 요구를 방해하지 않는다. 가이사가 자기의 것만을 요구할 때는 그에게 시민으로서 복종하는 것이다. 여기에 근거해서 바울은 롬 13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시민 생활을 가르친다. 그러나 교회는 가이사가 하나님의 것까지 요구했을 때는 육체를 줄지언정 하나님께 속한 영광을 가이사에게 바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것이 더 포괄적이고 우월하기 때문이다.
바치라는 17절의 ' 바치다'와는 다르다. 이것은 마땅히 돌려 주어야 할 것을 돌려 준다는 의미이다. 똑같은 동사가 21:41에서 농부가 제때에 주인에게 소출을 바치는 것에 대해서 사용되었다. 그러나 D.A. Carson은 가이사가 실제적으로 그들에게 준 것이 없기 때문에 '돌려주다' 혹은 '지불하다'란 의미보다 그냥 '주다'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가이사가 눈에 보이게 준 것은 없어도 그의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권세를 위임 받아서 하는 일이어서 거기에 해당하는 존경과 두려움과 세를 마땅히 바쳐야 하기 때문에(롬 13:1-7) 어떤 대가를 '지불하다'는 의미로는 쓰일 수 있을 것이다.
[마 22:22]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기이히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
기이히 여겨 - 그들은 예수에게 이런류의 해답이 나오리라고는 상상치 못했다. 그 대답은 바리새인과 헤롯당원들의 협공을 피하면서 도리어 그들의 부패한 심장을 찌른 것이다. 그들은 도리어 '하나님의 것'이라는 무거운 짐을 안게 되었다. 그들은 압도당하여, 즉 '기이히 여겨'(에다우마산) 놀라고 감탄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 말을 전해 들은 그들의 선생들은 눅 23:2에서 예수의 이 말씀을 왜곡하여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지 말라고 선동했다고 고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