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냉장고 여자☆☆]의 앞표지(우)와 뒤표지(좌)
============ ============
[냉장고 여자]
김영탁 시집 / 황금알시선 143 / 도서출판 황금알(2017.03.31) / 값 15,000원
================= =================
냉장고 여자
김영탁
그녀가 내 집에 온 지 10년이 넘었다
우리는 결혼식도 안 하고 간편하게 동거했다
그녀는 지상의 태양들을 가져온 내 식탐을 나무라지 않고,
차가운 인내심으로 잘 받아주었다
홀아비가 처녀를 데리고 산다고,
주변의 지인들은 손가락질하며 입방아를 찧으며 쑥덕거렸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냉장고 여자를 냉녀冷女라 부르지 않고,
빙녀氷女, 또는 애빙녀愛氷女라고 부르며 서로 말없이 잘 지냈다
보다 못한 친척들이나 지인들이 이 이상한 동거를 해결하기 위해
내 집으로 달려오면, 그녀는 냉장고 안으로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기에
실제로 그녀를 본 사람은 없다
물론 나도 그녀를 찾아 헤매다가
그녀의 고향인 저 머나먼 설산雪山이나 안나푸르나엘 갔나 하고
냉동실 문을 열어봤지만, 차가운 숨결만 느꼈을 뿐이다
그녀와 동거한 지 10년이 넘는, 어느 날부터
그녀는 밤마다 흐느껴 우는 것이었다
나는 거실로 나가서 냉장고 문을 열고 그녀를 찾아보지만,
언제나처럼 그녀는 보이지 않고 울음소리만 들린다
내 욕심으로 그녀를 너무 오랫동안 묶어두었고,
살아오면서 내가 그녀의 속을 무던히도 썩인 탓일 것이다
10년 세월에 그녀는 내가 가져다준,
언젠가 썩어 없어질 것들을 말없이 잘 받아주었다
더러는 냉장고 문을 열고 할인점에서 산 채소를 잔뜩 집어넣고
며칠이고 집을 비운 사이 채소가 문드러져 그녀의 속을 썩인 경우가 많았다
먹다 남은 순대나 홍어를 싸 오면 냉장고에 집어넣고 잊어버린 통에
역시 그녀의 속을 속절없이 썩였다
그녀의 고향으로 가는 입구인 냉동실엔
몇 년째 냉동 상태로 썩어가는 떡국과 돼지고기와 소머리가 잠을 자고 있다
아마 그녀는 뜬 눈으로 잠을 자면서 태양의 악몽을 꾸지는 않았는지
이제 그녀의 흐느낌은 앓는 신음까지 내며 집안을 흔들었다
그래 보내줘야지, 미련없이
이별이라는 비장한 마음으로 그녀의 문을 열자
태양의 자식들은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리고,
마지막 차가운 숨결 한줄기가 내 얼굴을 스친다
여름, 한다
김영탁
땀을 뻘뻘 흘리며 궁창에 퍼져 놀고 있는
푸른 잎들을 어찌 세어 볼 수 있으리
차라리 실타래처럼 가는 강들이 모여
시퍼런 강물을 출렁이며 느리게 흐르는
어쩔 수 없는 푸른 잎이여
한 소절 바람이라도 불면 강물을 출렁이며, 잎은
그대가 쳐놓은 통발 속으로 헤엄쳐 들어가네
아직까지 얼어있던 고드름의 기억을 풀어헤치며
그대의 궁륭에서 달콤하게 놀다
아이스크림처럼 녹아서 흐물거리는데,
이제 막 신혼을 지나 무르익는 여름신부여
푸른 강물에 날마다 뒷물하며
떠오르는 해를 품다가 밤엔 달을 삼키며
더러는 별빛으로 궁창에 수를 놓네
여름 궁전은 자꾸만 볼록해지고
해가 지고 뜨는 나발소리 듣기도 좋아라
동강과 서강이 만나 흐르는 두물머리 밤엔
이젠 무섭지도 않는 귀신들이 등불을 들고
무사히 강을 건너갔다는 소식도
아침 해를 알리는 나발소리가 전해 오고
나는 하루가 다르게 배 불러오는
여름 궁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발소리가 아직 쟁쟁하게 재어진 돼지목살을
석쇠에 올려놓고 굵은 소금을 치며 소주잔을 따르는데,
그저 통발을 거두어주지 않길 바랄 뿐이네
미안해요
김영탁
아무리 당신을 껴안아도 마음은 늘
해골을 안는 것 같아요
바람이 뼈 사이로 빠져나가고
늘 허기져서 하얀 소금꽃이 피고
통속적으로,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부질없는 건 다 알고 있잖아요
이제 더는 어쩌지 못하여
바람의 종착지까지 달려봤지만,
뙤약볕 염전은 말라가고
겨우 피어난 소금꽃에
미안해요, 아직도
다시, 바람이 불어온다고요
바람이 바이칼의 눈동자를 후려 파서
독수리 편으로 보내왔기에
당신이라는 해골에 눈동자를 심었어요
드디어 나의 불꽃을
당신의 눈물로 끌 수 있었네요
잘 자라는 당신을 바라보며
미안해요, 여전히
참 잘했어요
김영탁
나선형 계단을 따라 회오리치는 바람은
얼굴을 붉히며 헉헉거리며
올라가다 문고리를 흔들고,
바람은 문 앞에서 말한다
빨리 문 열어달라고, 아니면
정중하게 나와서 환영해 달라고,
문은 열리지 않고 인기척도 없는 게
외출 중이겠지, 고개를 끄덕이고
끄덕인 김에 문고리에게
다음에 오겠다고 인사하고는
느리게, 느리게 흐르는 계단을 따라
바람은 계단을 묶으면서
내려간다
왼손을 위한 협주곡
김영탁
오른손이 바닥을 치자
음지쪽 고사리로 움츠려 있던 왼손이
새싹으로 돋아나 말풍선을 만드네
눈길에서 언제나 벗어나 있던
음지의 말이 튀어나와
귀를 간질이고 잡아당기네
왼손이 이끄는 대로 유랑하는 발길은
용문龍門을 지나 별빛 쏟아지는 사막으로 갈 거라네
용녀龍女의 젖가슴 위에서 흔들리는 신용문객잔新龍門客棧
왼손으로 문을 열면,
외팔이 악사의 마골호 켜는 소리에
오른손은 희미한 옛사랑의 통증을 느낄 거라네
악사와 독주를 마시고 이별하겠지
하얀 사막의 밤을 지나
별빛이 점점 여명으로 스러지고
사막의 물이 마른 걸 보니
용녀는 떠나갔을 거라네
드디어 나도밤나무 앞에 서서
죽은 가지를 오른손으로 삼고
살아서 뻗어 있는 가지를 왼손으로 삼아
그녀가 떠나간 쪽으로 돌다가, 다시
그녀가 올 거라는 기다림 쪽으로
돌아가면, 희미한 옛사랑의 오른손이
위로하는 술잔에 왼손은 독주를
철철 넘치게 올리고 나도 이제
나도밤나무 하나쯤 안아 보고
싶어질 거라네
* 오스트리아의 피아니스트 파울 비트겐슈타인을 위해서 모리스 라벨이 작곡한 음악과 김승희 시집 왼손을 위한 협주곡에서 제목을 빌려 옴.
굴참나무
김영탁
저녁 아궁이에
노을이 타고 있을 때
쪼개진 굴참나무 장작에서
바다 냄새가 한창이다
카바이드 불빛 아래
굴을 까던
연인의 손이
비리다
뭉크의 절규
김영탁
기처 지나가는 소리에
쇠종이 절규했다
기차는 멀리 사라지고
쇠종만 울었다
가만히 들어보니
거짓말이라고 했다
구름 편지
김영탁
구름 편지 받아보신 적이 있는지요
스치는 바람에 실려 오는 건 다 아시겠지만
가끔 빨랫줄에 걸리기도 하고,
빈 참치 통조림 캔 속에 들어오기도 하고,
잠자는 아기 손에 잡히기도 하고,
고양이털에 날려 오기도 하고,
드디어 발바닥을 떠받들며 푸른 바다까지,
끝임 없이 구름 편지가 와요
구름 편지는 비처럼 내려 씨앗처럼 자라나요
씨앗은 빨리 자라나 빨랫줄을 들어올리고,
씨앗은 뾰족하여 통조림 캔을 뚫고 참치를 바다로 보내고,
씨앗은 딱딱해져 아기를 태우고 목마처럼 달리고,
고양이는 구름을 돌돌 말아 먹고,
드디어 씨앗은 너무 빨리 자라나 하늘까지 올라가요
아, 그렇다고 하늘을 바라보니
편지가 둥둥 떠 있다고 말하지 마세요
그냥 끝없이
끝없는 구름 편지가 와요
불리할 게 없는
김영탁
알제리계 프랑스인이 흐린 목로로 다가와
백 달러를 주면 두 장으로 만들어 준다고,
비밀이라고, 특수 기계가 있는데,
물에 넣어서 분리하면 열두 겹으로 나누어진다고,
앞뒤를 똑같이 복사하여
붙이면 이백 달러가 된다고,
믿으라고, 당신이 착해 보여서
특별히 알려주는 것이니,
마음에 있으면, 아침에 쿠알라룸푸르호텔로
백 달러를 갖고 오라고,
불리할 게 없는,
알제리계 프랑스인이 가고 난 뒤,
무어 양식과 중국식이 혼합된 목로에,
차이나 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눈빛은,
표범처럼 검게 반짝거리고,
가무잡잡한 그녀 몸에서 고무나무 상처 냄새가 나고,
그녀도 백 달러만 주면 술은 서비스라고,
오늘밤 은밀한 곳까지 새겨진 문신을 보여줄 수 있다고,
벨벳 모자를 쓴 늙은 중국인이 다가와
가짜 달걀을 모자에서 하나씩 꺼내다가 아예,
마대 자루에 모자를 거꾸로 세우자, 달걀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데, 이 벨벳 모자를 백 달러에 사라고,
그러면 당신은 떼돈을 번다고, 단
오늘은 모자를 건드리면 안 된다고,
불리할 게 없는,
백 달러밖에 없는 걸 어떻게 알고,
내일 알제리계 프랑스인을 찾아가야 하나,
늙은 벨벳 모자를 바꿔치기해야 하나,
오늘 표범 같은 여자와 정글을 달리며,
그녀의 몸에 새겨진 문신을 읽어야 할까,
불리할 게 없는,
떨림
김영탁
국민학교 때 금자金子가 국어 교과서를 읽으면 떨렸다
그 목소리와 몸이 얼마나 떨리는지
김씨金氏 미곡상米穀商 도라꾸 조수가 시동 걸려고
엔진 구멍에 쇠파이프를 넣고
온몸을 시계 방향으로 잡아 돌리면
더벅머리 조수도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사람이 먼저 시동이 걸리고, 이윽고
도라꾸는 우당탕거리며 시동이 걸리는데
그때 도라꾸 떠는 모습은 금자에게 훨씬 못 미쳤다
얼마나 떨리는지 책상과 의자가 떨고,
이어서 흑판과 주전자도 떨고,
전교생과 교감 교장까지 떨고,
드디어 국민학교도 떨고
나무와 새가 떨고
바람도 떤다
그 이후 떨림은 사라지고
너도나도 무대 위의 연기파, 떠는 건 없고
날카로운 첫 키스의 떨림도 까마득해져
어쩌다 떠는 건 떤다는 약속으로 떨고
미아리고개 방울도사 복채 받고 떨고
그 떨림은 어디로 사라졌나
번개처럼 지나간 떨림
감별전鑑別傳
김영탁
한밤에 루팡을 때리는 무섬 소리
오냐, 오늘 기필코 어디 만나 보자
팬티 바람에 달려가 보니
감 떨어지는 천둥소리
막을 수도 없는 떫은 어린 감이
별똥별처럼 떨어지고
아득한 시잘 어린 눈동자엔
별똥별이 쏟아지는데
이제야 별 지는 소리 들었는지요
늙은 이발사
김영탁
비 오시는 날 옛날 이발관엘 가네
문을 열면 뽕짝이 흐르고
빛바랜 액자 뒤안 앵두나무 우물가
그림 속 여지는 떠나갔네
내 머리를 깎는 이발사
고수가 목을 따내듯 소리 소문도 없이
음악처럼 머리를 손질하네
정글을 달리던 갈기의 기억은 잘려나가
바닥에 흩어져 못다 한 수다를 떨고,
창을 두드리는 비, 하염없는 비의 혀는
비 맞은 중처럼 중얼거리는 머리카락을 잡고,
앵두나무 우물가 여자 얘기에 여념이 없네
이별 이후 기억이 자라나는 머리는
졸음 속으로 쏟아지다가
머리의 행방을 찾는 또 다른 머리여,
그 머리 어디 갔나 했는데,
머리 허연 이발사 내 머리를 빗질하네
비 오시는 날 옛날 이발관엘 가네
머리를 늙은 이발사에게 내주고
새 머리를 받으면, 난
앵두나무 여자와 이별하고,
양복을 입고 정글을 활개치고 다니네
백 년간의 고독을 지나
나도 허연 백발이 되어
늙은 이발관엘 찾아가면,
비 맞은 중처럼 중얼거리는
머리 자루에 쓸어 담고 떠난 그 이발사,
어디 저편으로 갔다는 소식에
해진 양복을 입고, 난
앵두나무 여자를 그리워할 거라네
두루마기 편지
김영탁
고향에 혼자 사는 어머니 두루마기 사준다고 한다
명절 때나 고향에 갈 때마다
근 3년 동안이나 그렇게 얘기했다
필요 없습니다
요즘 누가 두루마기 입나요
어머니는 인근 안동에 한복 잘하는 집 있다고
직접 맞춰 주려고 한다
입을 일도 없는데 정말 필요 없습니다
요즘 누가 두루마기 입나요
어느 날 아침 9시,
어머니한테 농협이라며 전화가 왔다
농협 직원 바꾸어 줄게 통장번호 부르라고 한다
아예 직접 맞춰 입어라, 하며
백오십만 원을 부쳤다
한 푼, 두 푼 모은 돈
왜 그리 부쳐 주려고 그러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새삼스럽기도 하지만
새장가갈 일도 아닌데
아니, 내가 두루마기 입을 일이나 있나요
아무튼 돈 부치니 꼭 한복 한 벌 하고 두루마기 해 입어라
아마 그럴지도 모르겠다
내가 서울서 발가벗고 다닌다고
벗은 채 막춤이나 추고 다닌다고
이제 어른 되라고 점잖은 어른 되라고
그게 안쓰러워 두루마기 맞춰 주려고 그러셨는지
붉은 단풍은 쉬이 지지 않고
가을 하늘에 한 땀, 한 땀 수놓을 때
고향에 혼자 사는 어머니한테 두루마리 편지가 왔다
인터넷과 스마트폰 시대에
요즘 누가 편지 쓴다고
긴긴 두루마리 편지,
끝없는 편지
아사다 마오
- 생활의 재발견
김영탁
빙판 위에서 연기하는 마오
왜 그렇게 가슴이 조마조마할까
자주 넘어졌던 기억의 불운일까
한국인으로서 당연히
김연아를 응원하면서도
개별적으로 마오가 신경 쓰인다
빙상의 여왕 김연아는
잘하겠지
그보다 마오가 신경 쓰인다
일본인 마오를 응원하지 않았지만,
음악과 함께 빙판 위를 아름답게
수를 놓는 요정 마오!
이때가 가장 불안하구나
너무 많은 기대와 응원이 무거울까
또 넘어지면서 일어나는 마오의 미소
누구나 한 번씩은 넘어졌던 기억이 있겠지
한번이 뭐야, 셀 수도 없지
지금도 넘어지는데, 그러기에
마오가 빙판에서 넘어지는 건
세상에 넘어진 사람들의 기억
마오, 이제 안 넘어지면 좋겠지만,
또 넘어지면 어때
누구나 모두 언제 넘어질지 모르는데,
아사다가 빙판에 넘어질 때마다
넘어진 기억을 딛고
사람들은 또 일어나는데
연꽃 소식
김영탁
월요일 연꽃이 피는데
그때 만나고 싶어요
쭈글쭈글 주름져 검버섯 핀 그녀의 손이
핸드폰을 꼭 잡고 물기 어린,
떨리는 목소리로 말할 때,
보이지 않는 먼지 가득한 지하철은 시끄럽기만 하고
말이 잘 안 들리는지 똑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네
그녀의 메마른 입술은 전동차 지나가는 소리에 갈라져
메아리치지만 동굴 속 먼 터널로 빨려나가고
흐느끼듯, 연꽃이 피는 다음 월요일에
그때 만나고 싶어요
그녀의 귓가에 붙어 있는 핸드폰이
그녀의 귓구슬 속으로 빨려 들어가자
그녀의 흰머리에서 금세 연꽃이 피어나네요
플라스틱 부처
김영탁
어디서 왔는지 모를
플라스틱으로 만든 애기 주먹만 한 부처
정수리에 상투 구멍을 만들어
언제부터 누가 매달아 놨는지
대웅전大雄殿 가운데 자리도 아닌
백미러에 매달려 흔들거리는
후광後光도 없는 플라스틱 부처, 어느 날
그 행적이 궁금하여
부처의 엉덩이 밑을 바라보니
중국에서 건너오셨구나
가볍고 조잡한 플라스틱 싸구려 중국제라고
그럼 그렇지, 고개를 끄덕이지만
그래도 금물을 들여
번쩍번쩍 금빛의 부처
백미러에 매달려 나를 지그시 바라보시네
내가 운전을 하며 앞차나 옆차에 대고
보행자와 오토바이에 대고
씩씩거리며 쌍말이나 욕을 할 때마다
백미러에 매달린 플라스틱 부처는
말없이 바라보셨네
사람보다 차가 우선이라고 믿던 습관이
횡단보도에서 사람을 깔아뭉갤 뻔했다가
다행히 가벼운 사고에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아이고, 부처님! 두 손을 플라스틱 부처를 향해 비볐네
여기저기 다니며 절했던 우람한 대웅전 부처보다
내가 타고 있는 승용차가 대웅보전大雄寶殿이고 금부처였네
다시 북나무 아래에서
김영탁
사람들이 북
소리에 빠져서 한 사람 한 사람 나무가 되어갈 때,
음악이 흘렀다 음악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와서,
졸고 있는 사람과 책에 눈알이 빠져서 눈알을 찾고 있는 사람과,
나무를 꿈꾸지도 못하고 나무를 못 본 사람들과 나무가 된 모든 사람을,
전동차 천정까지 들어 올렸다가 내렸다가 내동댕이쳤다가,
제자리에 앉혔다가 제자리에 서 있도록 했다가,
북나무 아래로,
음악은 흘러갔다.
대파의 노래
김영탁
밤길에 연인을 위해
파장罷場의 꽃을 사듯이
늦은 밤 대형 마트에서
대파 한 단 샀네
분주한 사람들도 이리저리 집으로 가는 시간,
대파를 꽃다발처럼 들고 밤길을 걷노라면,
대파의 총포에서 쏘아 올린
하양 불꽃은 밤하늘에 퍼지네
허공에 손을 뻗으면 잘 익은 흰 반죽이
물렁거리고 그 바탕에 잠깐,
사랑이라고 쓰면,
대파의 뿌리는 점점 자라서
대궁은 어쩔 수 없이
하늘로 자꾸만 자라만 가네
이리저리 가지 못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대파
늦은 밤, 대파 한 단을 안고
혼자 집으로 돌아왔네
구름 나무
김영탁
구름 편지를 받고
구름의 안부가 궁금했네
구름 나무를 타고 오면 만날 수 있다는 말에
구름 나무 찾으러 세상을 방랑했네
길거리 솜사탕이 희망을 주기도 하고
도회지의 크리스마스트리 불빛에
헛된 암시를 받기도 했네
정글과 오지의 나무를 이정표로 삼기도 했고
사막의 오아시스에 더욱더 갈증만 났네
나무백과사전과 식물도감과 인터넷을
다 뒤져도 구름 나무 없네
그러다 비 오시는 날,
천둥 치고 벼락 떨어지는 날,
동네 옛날 이발관에서 구름 나무 봤네
이발과 면도를 하고 머리를 감고
늙은 이발사의 아내가 서비스로 귀를 후벼주는데
면봉이 귀속을 돌고 천둥소리 났을 때,
단숨에 구름 속으로 들어갔네
곡우穀雨
김영탁
아이들이 사라진 후 애기똥풀만 지천이다
태어나야 할 아기들이
밥도 안 먹고,
이제는 꽃으로 태어나는지,
오래전 지상에서 쓰러졌던
무명의 전사들이 죽었다가
살아난 지상의 풀처럼,
더는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고
언제나 아침 인사처럼
늘 안녕을 묻는다
눈에 밟히는 푸르고 시린 신록이
지상의 어린 영혼들을 순하게 키우고
뻐꾸기 우는 귀울음에 더는 의심하지 말고,
귀갓길에 볍씨를 보지 않기로 한다
여자만灣
- 벌교 참꼬막
김영탁
벌교에 가서 갯벌에 빠져보지 않아도 참꼬막 한 냄비 삶아서 먹어보면 알 수 있다네
단단하고 옹골차게 제 몸을 지키고 있는 참꼬막을 양손 엄지와 검지로 안간힘 쓰지 말고 은근히 누르다 약간 틈이 보이면 날렵하게 힘주어 벌리면 거기 발가벗은 벌교 갯벌이 환하고 진득하게 펼쳐져 있는데, 토실하고 해반들한 몸을 가진 그녀, 나와 그녀의 입술이 포개어지고 우리는 그저 몸을 탐하며 부지런히 사랑에 골몰하네
나는 벌교 참꼬막 같은 여자하고 한적한 소읍에서 부챗살 같은 그녀 옷자락을 살며시 벗기고는 살강거리는 그녀의 속살을 자근거리며 참 살갑게 한 삼 개월 살았으면 좋겠네 아니, 그녀의 뻘밭에 잠겨 땀 뻘뻘 흘리며 부지런히 농사도 짓고 그녀가 주는 속살을 발라먹고 그것도 양에 차지 않아 그녀를 이루고 있는 일억 년 동안 곱게 갈고 갈았던 미립자! 사랑밖에 모르는 미립자 속에 들어가 살고 싶네 아니 그 안에서 한 냄비 끓이면서 아름다운 무덤 하나 생기길 바라네
*여자灣 : 전남 보성군 벌교읍 안에 있는 움푹 들어간 바다
.♣.
=================
■ 시인의 말
두 번째 시집을
돌아가신 아버지께
바칩니다.
2016년 11월
김영탁
.♣.
=============== == = == ===============
김영탁 詩集 [※냉장고 여자※]
[ 해설 ]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시인의
말과 삶
권 온 / 문학평론가
1.
1998년 시단詩壇에 공식적으로 등장한 김영탁은 2005년 첫 시집『새소리에 몸이 절로 먼 산 보고 인사하네』를 간행한 바 있다. 시집의 제목이 가리키듯이 시인의 시는 자연과 일체화된 풍경을 보여준다. ‘새소리’나 ‘먼 산’에 담긴 자연과 ‘몸’이 가리키는 인간이 ‘인사’라는 행위로 자연스럽게 교감하고 소통하는 장면은 김영탁 첫 시집의 의의를 압축적으로 제시한다.
시인의 삶과 시를 연결하여 바라볼 때 시의 참된 모습이 또렷하게 떠오르는 경우가 있는데, 김영탁의 경우도 그러하다. 형식주의의 관점에서 작품이 내재적 분석에 집중하는 일은 물론 긴요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시의 근원으로서의 시인의 삶을 되돌아보는 일의 중요성은 거듭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김영탁의 시를 이해하려면 시인의 삶을 알아야 한다는 게 이 글의 관점이다. 그의 작품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인공적인 장치로서의 주체主體의 음성音聲이 아닌 시인과의 동질감을 갖는 화자話者의 그것이다. 김영탁의 시에는 소설에 가까운 평범한 일상어의 산문적 진술이 빈번하게 출현한다. 우리는 시인의 이러한 자유분방한 시적 경향을 산문시의 관점에서 수용할 수 있겠다.
시인 김영탁은 계간 문예지『문학청춘』의 발행인이자 출판사 <황금알>의 대표이기도 하다. 그는 타인의 작품을 소개하는 일, 문단文壇의 중심에서 소외된 시인이나 작가의 좋은 작품을 소개하는 일에서 보람을 느낀다. 누가 알아주는 일도 아니고, 돈이 되는 일도 아니지만 그는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 나아가는 중이다. 이제 김영탁의 본연지성이 다시 발휘될 시간이다. 시인의 두 번째 시집『냉장고의 여자』를 만나야 하는 것이다.
2.
지구의 모든 인간이 똑같은 시간에 식사를 같이한다면, 그러니까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북한, 나이지리아의 아이와 여자, 그리고 노인도 빠짐없이 같이 식사를 한다면, 음식의 열기와 뿜어 나오는 수증기, 침샘을 자극하는 음식냄새, 쇠붙이 달그락거리는 소리, 손으로 음식을 집을 때마다 흐느끼는 알맹이들, 쇠붙이가 밀림을 자르는 톱과 불도저처럼 굉음을 울리고, 왁자지껄 수다에 소곤거리는 소금과 모든 인간의 입들이 벌어지며 꿀꺽거리는 소리, 그 사이에 울고 웃는 소리, 그러는 동안 음식들은 몸속에서 춤을 추고, 음식의 열기는 최고조에 달하야 뻥!하고 폭발이 일어나 지구에 있는 핵폭탄이나 어디에 숨겨진 화생 무기도 한방에 지구 밖으로 튕겨날 빅뱅이 일어날 것인데!
저기 있잖아요, 혼자 밥 먹지 마세요
그래도 혼자라고요?
그럼, 우선 점심이라도 같이해요
- 「점심 대폭발」전문
김영탁 시인을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것 중 하나는 그가 서울신문에 연재하고 있는 식도락 칼럼「김영탁의 시식남녀詩食男女」이다. 칼럼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김영탁의 시식남녀」는 시를 쓰는 시인들이 모여서 시를 읽는 마음으로 전국의 음식을 맛보고 그 고장의 흥취를 소개하는 글이다.
시「점심 대폭발」의 핵심어로는 ‘밥’ ‘점심’ ‘음식’ ‘식사’ 등을 꼽을 수 있다. 현대시의 대표적인 경향인 산문시의 기법으로 기술된 1연의 서두 곧 “지구의 모든 인간이 똑같은 시간에 식사를 같이한다면, 그러니까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북한, 나이지리아의 아이와 여자, 그리고 노인도 빠짐없이 같이 식사한다면,”에 우선적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김영탁은 여기에서 식사와 관련한 불가능한 가정假定을 시도한다. 형용사 ‘똑같은’과 부사 ‘빠짐없이’가 가리키는 방향에는 식사에서 소외되고 배제된 약자弱者를 향한 아우름과 통합이 있다.
2연의 ‘같이’역시 같은 맥락에서 연결된다. ‘혼자’가 아닌 ‘같이’라는 것, “혼자 밥 먹”는 것이 아닌 “점심이라도 같이”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김영탁은 “지구의 모든 인간”을 식구食口로 인식하려고 노력한다. 식구의 의미가 “한집에서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임을 감안할 때, 시인은 정情이 많은 사람임에 틀림없다. 김영탁 시인은 이 시에서 이웃과 더불어 사는 세상의 따뜻함을 지향하는 것이다.
그녀가 내 집에 온 지 10년이 넘었다
우리는 결혼식도 안 하고 간편하게 동거했다
그녀는 지상의 태양들을 가져온 내 식탐을 나무라지 않고
차가운 인내심으로 잘 받아 주었다
홀아비가 처녀를 데리고 산다고
주변의 지인들은 손가락질하며 입방아를 찧으며 쑥덕거렸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냉장고 여자를 냉녀冷女를 부르지 않고
빙녀氷女, 또는 애빙녀愛氷女라고 부르며 서로 말없이 잘 지냈다
보다 못한 친척들이나 지인들이 이 이상한 동거를 해결하기 위해
내 집으로 달려오면, 그녀는 냉장고 안으로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기에
실제로 그녀를 본 사람은 없다
물론 나도 그녀를 찾아 헤매다가
그녀의 고향인 저 머나먼 설산雪山이나 안나푸르나엘 갔나 하고
냉동실 문을 열어봤지만, 차가운 숨결만 느꼈을 뿐이다
- 「냉장고 여자」부분
시인의 인간적인 면모가 부각되는 시이다. 김영탁은 여기에서 ‘그녀’를 이야기한다. 시인이 말하는 그녀는 ‘냉장고’인 동시에 ‘여자’이다. ‘10년’이 넘는 시간을 동거한 ‘나’와 ‘그녀’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 주변의 지인들은 홀아비인 ‘내’가 처녀인 ‘냉장고’를 데리고 사는 모습을 ‘이상한 동거’로 규정했지만 “내 식탐을 나무라지 않고/차가운 인내심으로 잘 받아 주었”던 그녀는 이상적인 ‘여자’였던 것이다.
김영탁은 의인법 또는 의인화를 정밀화함으로써 이 시의 수준을 고양한다. 특히 “실제로 그녀를 본 사람은 없다/물론 나도 그녀를 찾아 헤매다가/그녀의 고향인 저 머나먼 설산雪山이나 안나푸르나엘 갔나 하고/냉동실 문을 열어 봤지만, 차가운 숨결만 느꼈을 뿐이다”라는 2연의 후반부가 인상적이다. ‘설산’이나 ‘안나푸르나’가 조성하는 시각적인 효과가 뛰어나고 무엇보다도 존재存在와 부재不在의 시소게임seeeaw game을 감행하는 그녀의 모습이 매력적이다.
푸르고 붉은 산소 용접기로
달과 해를 붙이는 순간
절커덕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지상의 별들은 서늘한 푸른색으로 반짝거렸고
나무는 더욱더 짙푸르다 못해
우주의 희미한 그림자로 누워 있고
나무에서 갓 태어난 새들은 파랑의 파랑새
파랑새 사람들 귓속을 파고들며
포르릉 포르릉 머릿속을 날아다닌다
남자, 허리 한번 쯤 휘청거리다
줄 끊어진 가오리연처럼 흐느적거리고
여자, 젖꽃판이 부풀어 오를 대로 올라
지상의 꽃들은 서늘해지고
술통의 술은 깊고 푸른 기억을 마치고
봉인의 말뚝을 풀면 천정天庭은 붉은 보자기에 감싸인다
사람들, 붉은 입속에서 튀어나온 말은
어눌하게 더듬거리며 지치지 않고
태양의 반점까지 달려가지만
산소 용접기에서 뿜어 나오는
붉고 푸른 불꽃 소리에
젖꽃판이 닫히고
말은, 또 더듬거리며 파랑새를 따라
날아다닌다
-「일식」전문
이 시는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다층구조사회多層構造社會이다. 일식日蝕이라는 작품의 제목이 알려주듯이, 이 시는 ‘해’와 ‘달’을 다룬다. 여기에서 제시되는 ‘해’와 ‘달’은 ‘남자’와 ‘여자’에 각각 대응한다. 곧 ‘달’이 ‘해’의 일부나 전부를 가리는 현상 또는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탐닉하는 현상이 ‘일식’인 것이다. 김영탁은 산소 용접기의 붉고 푸른 불꽃으로 “달과 해를 붙이는 순간”을 포착했는데 이는 남녀의 교합交合을 가리킨다. 산소 용접기의 불꽃은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남녀의 관계를 형상화하는 데 적극적으로 기여한다.
‘별들’이나 ‘우주’ 또는 ‘태양’은 천문天文으로서의 ‘일식’과 관련되는 어휘인데, 2연에서 전개되는 남자와 여자의 방사房事에 도움을 준다. 이 시의 핵심은 2연의 서두에 놓인 “남자, 허리 한 번쯤 휘청거리다/줄 끊어진 가오리 연처럼 흐느적거리고/여자, 젖꽃판이 부풀어 오를 대로 올라/지상의 꽃들은 서늘해지고,”에서 찾을 수 있으니, 이는 남자의 사정射精과 여자의 오르가슴orgasme을 적확하게 묘사한 대목이다.
1연의 ‘푸르고 붉은’ ‘푸른색’ ‘짙푸르다’ ‘파랑’ 2연의 ‘푸른’ ‘붉은’ ‘붉고 푸른’ 등의 색채 이미지는 천문으로서의 일식과 남녀의 교합으로서의 일식을 동시에 활성화한다. ‘파랑새’의 출현 역시 기억할 만한 사건인데, 파랑새가 사람들의 귓속을 파고들거나 머릿속을 날아다니는 장면이나 ‘말’이 파랑새를 따라 날아다니는 광경은 이 시를 형이상학적인 층위로 끌어올린다. 더불어 파랑새가 ‘희망’이나 ‘행복’을 상징한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일도 필요하겠다.
지하철 계단에서 완두콩을 까고 있는 늙은 여인
손이 부지런하다, 아무리 봐도 콩을 사는 사람은 없고
바삐 지나가는 사람들
이미 가망 없는 뻔한 업業이지만
여인의 주름진 손이 염주를 굴리듯
콩 껍질에 희미한 때처럼 비쳐 오가는 그림자를 어루만진다
콩은 시간이 갈수로 오드카니 쌓여 가는데, 어찌어찌
껍질 안에서 빠져나온 콩 하나가
지하철 계단을 콩콩콩 내려간다
땅속으로 들어간 콩의 유전流轉이야 뻔하겠지만
그때부터 여인의 손에서 완두콩 넝쿨이 쑥쑥 뻗어 나와
하늘로 푸르게 푸르게 올라간다
-「완두콩」전문
소박하고 조촐하면서도 완결성을 획득한 시이다. 김영탁은 비근한 일상의 순간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는다. 우리는 언젠가 “지하철 계단에서 완두콩을 까고 있는 늙은 여인”을 또는 그와 비슷한 누군가를 본 적이 있다. 늙은 여인의 주변을 “아무리 봐도 콩을 사는 사람은 없고/바삐 지나가는 사람들”뿐이다. “이미 가망 없는 뻔한 업業이지만”이라는 시행詩行은 늙은 여인을 향한 시인의 심경을 알려준다. 이는 형용사 ‘안타깝다’나 ‘애처롭다’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어지는 “여인의 주름진 손이 염주를 굴리듯/콩 껍질에 희미한 때처럼 비쳐 오가는 그림자를 어루만진다”라는 진술은 주목할 만하다. 앞서 제시되었던 ‘이미’나 ‘없는’ 또는 ‘뻔한’이라는 일련의 부정적 표현을 뒤집을 수 있는 진술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완두콩 하나가 지하철 계단으로 굴러 떨어지는 모습을 포착한다. 우리는 완두콩이 “콩콩콩 내려간다”라는 진술에서 김영탁의 위트를 확인한다. 계속되는 “땅속으로 들어간 콩의 유전流轉이야 뻔하겠지만”이라는 시행에서 ‘뻔하겠지만’은 위에서 살핀 “업이지만”에 대응되는 구조이다. ‘~지만’ 또는 ‘~지마는’은 어떤 사실이나 내용을 시인하면서 그에 반대되는 내용을 말하거나 조건을 붙여 말할 때에 쓰는 연결 어미로서, 이 표현의 전후前後는 대조적인 의미로 수렴된다. “뻔하겠지만”에 담긴 부정적인 의미는 연결되는 시행에서 극적인 반전을 이룬다. “그때부터 여인의 손에서 완두콩 넝쿨이 쑥쑥 뻗어나와/하늘로 푸르게 푸르게 올라간다”라는 진술은 의미심장하다. 영국의 구전 민화인「잭과 콩나무Jack and the Beanstalk」를 연상시키는 이 대목은 독자들의 가슴을 훈훈하게 데우는 훌륭한 마무리이다. 독자는 이 시에 등장하는 ‘업業’과 ‘염주’와 ‘유전流轉’같은 어휘에서 불교의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늙은 여인의 행동 곧 “완두콩을 까고” “그림자를 어루만”지는 행위가 어떤 수도修道나 구도求道의 경지에 다가설 수 있는 가능성을 암시한다.
금방, 하늘에 방울소리 딸랑거리며
날아온 파랑새 한 마리
파랑새 한 마리 물푸레나무 건드리면
나뭇가지마다 뿔이 솟듯 뾰족 돋아나는 푸른 잎
나무, 온몸으로 출렁이며 푸른 강물처럼 흐르네
봄이 부는 피리소리는 늙지 않아
나무가 나무로 태어나는 시간은 다시, 처녀이지만
봄바람은 타고난 솜씨로 나무와 접하며 춤추네
나무여
땅과 하늘에 서로 뿌리 뻗고 서 있는 나무여
지상의 모든 모래를 담은 너무 큰 모래시계
깨지고 날아갈까 봐 불안하고 두근거리지만
봄 피리소리에 처녀막 몸 하면서
밀고 올라오는 사막의 폭풍, 달리는 천 마리 말
그 죄 없는 마력으로
나무는 뜨거운 모래 두레박 끌어 올리면
모래로 가득 찬 가쁜 숨, 얇은 막 사이로
터져 나오는 푸른 잎들이여
가끔, 견딜 수 없는 나무 안의 뜨거움에
뿔 달린 파랑새 막을 뚫고 날아가네
-「봄, 한다」전문
앞에서 살핀 시「일식」과 유사한 계열을 이루는 시이다.「일식」의 ‘해와 달’ 또는 ‘남자와 여자’의 조합이「봄, 한다」에서는 ‘파랑새’와 ‘물푸레나무’로 바뀐다. 흥미롭게도 이 시의 ‘파랑새’와 ‘물푸레나무’ 역시 각각 ‘남자’와 ‘여자’에 대응한다. 천체天體의 구도로 남자와 여자의 교합을 다뤘던 김영탁은 새와 나무의 구도로 남녀의 소통을 묘사한다.
1연 3행의 “파랑새 한 마리 물푸레나무 건드리면” 이나 1연 8행의 “봄바람은 타고난 솜씨로 나무와 접하며 춤추네” 그리고 3연 2행의 “뿔 달린 파랑새 막을 뚫고 날아가네”등은 남녀의 교접交接을 일컫는 멋진 은유의 사례事例이다. 이 시에서 남자에 해당하는 ‘파랑새’는 ‘봄바람’이나 ‘사막의 폭풍’ 또는 ‘천 마리 말’ 등으로 자유롭게 변형되면서 역동성逆動性을 과시하고, 여자에 해당하는 ‘물푸레나무’는 ‘모래시계’나 ‘모래 두레박’ 또는 ‘처녀’등의 어휘와 접속한다. 특히 ‘푸른 잎(들)’이나 ‘푸른 강물’ 등 ‘푸른’ 이미지는 ‘(물푸레)나무’의 ‘뜨거움’또는 ‘오르가슴’을 정확하게 포착한다.
김영탁의 이 시는 새와 나무라는 자연을 도입하여 성욕性慾이라는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을 아름답게 묘파한 수작秀作이다. 작품의 마지막 시행인 ‘뿔 달린 파랑새 막을 뚫고 날아가네’를 남성의 성기性器가 여성의 처녀막處女膜을 뚫는 행위로 읽는 것은 타당하다. 일찍이 작가 이효석이「메밀꽃 필 무렵(1936)」에서 시도했던 애욕愛慾을 향한 극적인 순간이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고향에 혼자 사는 어머니 두루마기 사준다고 한다
명절 때나 고향에 갈 때마다
근3년 동안 그렇게 얘기했다
필요 없습니다
요즘 누가 두루마기 입나요
어머니는 인근 안동에 한복 잘하는 집 있다고
직접 맞춰 주려고 한다
입을 일도 없는데 정말 필요 없습니다
요즘 누가 두루마기 입나요
어느 날 아침 9시
어머니한테 농협이라며 전화가 왔다
농협 직원 바꾸어 줄게 통장번호 부르라고 한다
아예 직접 맞춰 입어라, 하며
백오십 만원을 부쳤다
한 푼, 두 푼 모은 돈
왜 그리 부쳐 주려고 그러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새삼스럽기도 하지만
새장가갈 일도 아닌데
아니,내가 두루마기 입을 일이나 있나요
아무튼 돈 부치니 꼭 한복 한 벌 하고 두루마기 해 입어라
아마 그럴지도 모르겠다
내가 서울서 발가벗고 다닌다고
벗은 채 막춤이나 추고 다닌다고
이제 어른 되라고 점잖은 어른 되라고
그게 안쓰러워 두루마기 맞춰 주려고 그러셨는지
붉은 단풍은 쉬이 지지 않고
가을 하늘에 한 땀, 한 땀 수놓을 때
고향에 혼자 사는 어머니한테 두루마리 편지가 왔다
인터넷과 스마트폰 시대에
요즘 누가 편지 쓴다고
긴긴 두루마리 편지
끝없는 편지
-「두루마기 편지」전문
김영탁 시인의 선한 얼굴이 절로 떠오르는 시이다. 시의 화자인 ‘나’와 고향에 혼자 사시는 ‘어머니’의 의사소통이 작품의 핵심이다. ‘나’와 ‘어머니’의 대화 주제는 ‘두루마기’이다. 어머니는 주로 외출할 때 입는 우리나라 고유의 웃옷인 두루마기를 사주겠다고 ‘내’가 “명절 때나 고향에 갈 때마다/근 3년 동안”얘기했다. 오랜 시간 동안 반복적으로 말하는 것으로 보아 어머니가 ‘나’에게 두루마기를 사주겠다는 마음은 확고하다. 하지만 ‘나’는 두루마기가 필요 없다. 1연에 거듭 제시되는 구어口語, “요즘 누가 두루마기 입나요”에는 두루마기에 관한 화자의 생각이 잘 드러난다.
근 3년 동안 두루마기가 필요 없다고 이야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두루마기 사랑은 계속된다. 어머니는 “아예 직접 맞춰 입어라”하며 “한 푼, 두 푼 모은 돈”인 “백 오십만 원”을 ‘내’통장으로 부치신 것이다. ‘나’의 입장은 “아니, 내가 두루마기 입을 일이나 있나요”라는 입말에 담겨있다. 어머니는 왜 불필요한 한복과 두루마기를 해 입으라는 것일까? 3연에 이르러 ‘나’는 비로소 어머니의 심정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고향’ 떠나 ‘서울’가서 “발가벗고 다닌다고/벗은 채 막춤이나 추고 다닌다고”“이제 어른되라고 점잖은 어른 되라고/그게 안쓰러워” 그러셨을 것으로 짐작해보는 것이다. 부모에게는 지천명知天命을 훌쩍 넘기고 이순耳順을 바라보는 자식 또한 여전히 ‘어른’이 아닌 ‘아이’인가 보다. 두루마기는 어머니의 사랑을 아들에게 전달하는 매개이다.
부모에게 자식은 걱정이나 염려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번에는 ‘두루마리 편지’이다.‘나’에게는 가로로 길게 이어 돌돌 둥글게 만 종이인 두루마리에 쓴 어머니의 편지가 어색하다. “요즘 누가 편지 쓴다고”라는 ‘나’의 구어는 이를 입증하는 말이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보편화된 ‘요즘’ 어머니의 “긴긴 두루마리 편지/끝없는 편지”는 특이하다. 어머니가 ‘나’에게 보낸 “긴긴 두루머리 편지/ 끝없는 편지”는 특이하다. 어머니가 ‘나’에게 보낸 ‘긴긴’ 두루마리 편지. ‘끝없는 편지’는 그녀의 곡진한 사랑을 의미한다. 조금 더 어렵고 불편할 수 있지만, 어머니는 쉽고 편리한 방법이 아닌 정성을 담을 수 있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이 시에서 화자 ‘나’는 “요즘 누가~”의 어법으로 어머니의 ‘두루마기’와 ‘두루마리 편지’가 시대착어적임을 지적하였으나, 이는 ‘나’의 본심이 아닐 것이다. 이 작품의 제목은 ‘두루마리 편지’가 아닌 ‘두루마기 편지’이다. ‘두루마기 편지’는 오식誤植이 아니다. 여기에는 ‘두루마기’와 ‘두루마리 편지’라는 어머니의 사랑의 매개를 동시에 포옹하려는 김영탁의 따스한 진심이 담겨있다.
어디서 왔는지 모를
플라스틱으로 만든 애기 주먹만 한 부처
정수리에 상투 구멍을 만들어
언제부터 누가 매달아 놨는지
대웅전大雄殿가운데 자리도 아닌
백미러에 매달려 흔들거리는
후광後光도 없는 플라스틱 부처, 어느 날
그 행적이 궁금하여
부처의 엉덩이 밑을 바라보니
중국에서 건너오셨구나
가볍고 조잡한 플라스틱 싸구려 중국제라고
그럼 그렇지. 고개를 끄덕이지만
그래도 금물을 들여
번쩍번쩍 금빛의 부처
백미러에 매달려 나를 지그시 바라보시네
내가 운전을 하며 앞차나 옆차에 대고
보행자와 오토바이에 대고
씩씩거리며 쌍말이나 욕을 할 때마다
백미러에 매달린 플라스틱 부처는
말없이 바라보셨네
사람보다 차가 우선이라고 믿던 습관이
횡단보도에서 사람을 깔아뭉갤 뻔했다가
다행이 가벼운 사고에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아이고, 부처님! 두 손을 플라스틱 부처을 향해 비볐네
여기저기 다니며 절했던 우람한 대웅전 부처보다
내가 타고 있는 승용차가 대웅보전大雄寶殿이고 금부처였네
- 「플라스틱 부처」전문
앞에서 고찰한 시「완두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김영탁의 시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는 불교적인 영향력이다. 이번에 다룰 시「플라스틱 부처」역시 시인의 불교적인 세계관이 노출되어 있는 작품이다. 시의 화자 ‘나’에 따르면 ‘플라스틱 부처’는 “어디서 왔는지 모를”것이고, “언제부터 누가 매달아 놨는지” 알 수 없는 대상이며, 다만 자동차 “백미러에 매달려 흔들거리는”“가볍고 조잡한 플라스틱 싸구려 중국제” 부처일 따름이다. 이런 일련의 진술은 플라스틱 부처를 대하는 ‘나’의 감정이나 심리가 상당히 부정적임을 알려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라스틱 부처에 대한 ‘나’의 심정은 완전한 부정不定이 아닌 부분부정部分不定에 가깝다는 사실을 확인해야 한다. “나를 지그시 바라보시네”나 “말없이 바라보셨네” 등에 담긴 경어법이 유의미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횡단보도에서 사람을 깔아뭉갤 뻔”한 사건을 체험하면서 플라스틱 부처를 향한 ‘나’의 태도는 극적으로 바뀐다. 화자는 이제 “여기저기 다니며 절했던 우람한 대웅전 부처보다/내가 타고 있는 승용차가 대웅보전大雄寶殿이고 금부처였네!”라는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다. ‘나’는 비로소 인식의 전환 내지 역전에 도달한 것이다.
아울러 이 글은 김영탁의 ‘플라스틱 부처’를 보다 창의적인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작품 <TV부처(1974)>, 시인 김종삼의 시「나(1980)」곧 “망가져 가는 저질 플라스틱 臨時 人間”과의 관련성을 제안한다.
3.
이 글은 김영탁의 두 번째 시집『냉장고 여자』에서 펼쳐지고 있는 시인의 시 세계를 점검하려는 소중한 무대이다. 김영탁의 시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편으로써 시와 삶의 연관성을 제안하면서 이 글은 출발하였다.
시「점심 대폭발」에서 우리는 정情이 많은 사람으로서의 김영탁을 만날 수 있었다. 그의 시에는 식사에서 소외되고 배제된 약자弱子를 향한 아우름과 통합이 있고, 그의 삶은 이웃과 더불어 사는 세상의 따뜻함을 지향하고 있다.
「냉장고 여자」는 시인의 인간적인 면모가 부각되는 시이다. 김영탁은 의인법 또는 의인화를 정밀화함으로써 이 시의 수준을 고양했다. 존재存在와 부재不在의 시소게임seesaw game을 감행하는 냉장고 또는 그녀의 모습이 매력적이다. 시인의 또 다른 시「여보, 세탁기」역시 세탁기를 ‘그녀’로 형상화하고 있는데 독자의 일독을 권한다.
시「일식」은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다층구조사회多層構造社會이다. ‘달’이 ‘해’의 일부나 전부를 가리는 현상 또는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탐닉하는 현상이 ‘일식日蝕’이다. 김영탁은 산소 용접기의 붉고 푸른 불꽃으로 “달과 해를 붙이는 순간”을 포착했는데 이는 남녀의 교합交合을 가리켰다. 산소 용접기의 불꽃은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남녀의 관계를 형상화하는데 적극적으로 기여했다.
「완두콩」은 소박하고 조촐하면서도 완결성을 획득한 시이다. 김영탁은 이 작품으로 자신이 비근한 일상의 순간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는 시인임을 입증했다. 독자는 이 시에 등장하는 ‘업業’과 ‘염주’와 ‘유전流轉’같은 어휘에서 불교의 영향력을 확인할 수도 있겠다.
김영탁의 시「봄, 한다」는 새와 나무라는 자연을 도입하여 성욕性慾이라는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아름답게 묘파한 수작秀作이다. 작품의 마지막 시행인 “뿔 달린 파랑새 막을 뚫고 날아가네”를 남성의 성기性器가 여성의 처녀막處女膜을 뚫는 행위로 읽는 것은 타당하다. 일찍이 작가 이효석이「메밀꽃 필 무렵(1936)」에서 시도했던 애욕愛慾을 향한 극적인 순간이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선한 얼굴이 절로 떠오르는 시가 바로「두루마기 편지」이다. 시의 화자인 ‘나’와 고향에 혼자 사시는 ‘어머니’의 의사소통이 작품의 핵심이다. 이 작품의 제목은 ‘두루마리 편지’가 아닌 ‘두루마기 편지’이다. ‘두루마기 편지’는 오식誤植이 아니다. 여기에는 ‘두루마기’와 ‘두루마리 편지’라는 어머니의 사랑의 매개를 동시에 포용하려는 김영탁의 따스한 진심이 담겨있다.
시「플라스틱 부처」역시 시인의 불교적인 세계관이 노출되어 있는 작품이다. 유의할 점은 플라스틱 부처에 대한 시의 ‘나’의 심경이 완전한 부정否定이 아닌 부분부정部分否定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이 글은 김영탁의 ‘플라스틱 부처’를 보다 창의적인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작품 <TV부처(1974)>, 시인 김종삼의 시「나(1980)」곧 “망가져 가는 저질 플라스틱 臨時 人間”과의 관련성을 제안했다.
김영탁의 이번 시집에 수록된 작품 중「황천식당黃泉食堂에서 만난 시인」이라는 시가 있다. 황천黃泉이라는 표현이 암시하듯이 이 시의 배경에는 문상問喪을 간 체험이 자리한다. 시인은 “젊어서 떠난 이” “세상 떠난 시인”을 조문弔問하는 자리에서 “육개장 국밥을” 퍼먹으며 이렇게 말한다. “허기진 뱃구레로 들어오는 국밥은 왜 이리 달까” 김영탁은 세상 떠난 이와 대비되는 아직 ‘살아남은 자들의’ 심리를 무서우리만치 적확하게 포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 글은 그를 가리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시인으로 규정하고 싶다. 김영탁이 길어올린 식욕食慾, 성욕性慾, 정情 등의 감정, 심리, 욕망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본질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역설의 논리로 넘나드는 인간을 포착한 시「여자만灣-벌교 참꼬막」을 비롯한 시집『냉장고 여자』는 한 정직한 인간의 참된 기록인 것이다. 앞으로 시인의 시가 또 그의 삶이 푸르게 더 푸르게 솟아오르기를 기원한다.★.
.♣.
=================
◆ 표4의 글 ◆
소금꽃은 바다와 태양과 시간이 만든 꽃이다. 희고 날카로운 빛으로 보석처럼 빛나지만, 물에 닿으면 이내 녹아버리는 부질없는 꽃이다. “...아무리 당신을 껴안아도 마음은 늘/ 해골을 안는 거 같아요/ 바람이 뼈 사이로 빠져나가고/ 늘 허기져서 하얀 소금 꽃이 피고…” 김영탁은 욕망과 유혹, 시뮬레이션이 번쩍이는 이 시대에 소금 꽃을 피우며 미안해하는 시인이다. 하지만 그의 상상력은 예민하고 그의 시선은 자유분방하다. 일상의 안일과 강박 속에서도 냉장고에서 가을 피리까지 좀비에서 스마트 폰까지 만덕산 용문사에서 안데스 보르헤스까지 심지어 UFO까지 시의 밀도를 향한 고통스러운 탐색을 멈추지 않는다. 어설프게 각자覺者의 포즈를 취하지 않고 지적 취향이나 실험으로 불순하게 시류의 페이지를 넘보지도 않는 그의 소금 꽃이 내는 맛이 깊고 정직하다. - 문정희(시인·동국대 석좌 교수)
무릇 시인은 세계를 재발견하는 자이며 재해석하는 자다. 김영탁 시인에게도 일상은 늘 재발견된다. 재발견되는 것, 이것이 곧 그의 시시가 보여주는 큰 줄기다. 그것이 생활용품이거나 자연이거나 행위뿐만 아니라 역사에서도 늘 재발견된다. 그래서「냉장고 여자」에서처럼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것까지 재발견하게 된다. 이 재발견된 세계는 늘 불안정하여서 폭발하거나 이별하고 떠나가거나 휘발한다. “무명의 전사들이 죽었다가/ 살아난 지상의 풀처럼,/더는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고”(「곡우穀雨」) 어제가 지워져 오늘이 되고 오늘이 지워져 내일이 되는 세계의 불안정을 새롭게 인지시켜준다. 이 폭발하는 불안정한 세계에 대한 재해석이 그의 시를 다시금 깊이 되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시가 갖는 힘이다. - 성선경(시인)
김영탁 시인의 시는 빛나는 감각과 따뜻한 정서가 어우러진 정감의 서사를 함의하고 있다. 그는 문명의 삭막함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인간과 사물 나아가 인간과 자연이 화해하는 지평과 그 지평이 지닌 의의를 넉넉하게 펼쳐 보이는 데 주력하고 있다. “예쁜 사람을 흘긋거리는 사람을/가지에 주렁주렁 달고 다 같이 나무가 된다”(「북나무」)며 지하철 풍경을 새롭게 읽는 혜안이 “나발 소리가 아직 쟁쟁하게 재어진 돼지목살을/석쇠에 올려놓고 굵은 소금을 치며 소주잔을 따르는”(「여름, 한다」) 낭만적 기백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얼마나 실감 나는가! 그의 시에는 언제나 이렇듯 충분한 소통과 공감대가 있었기에 “뼈와 살을 버리며/가없는 바다로 나아가고 싶었네”(「고등어자반」)에 나타난 허정과 무욕의 상상력은 자연스러운 진정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주체와 타자를 통합적으로 인식하는 휴머니즘, 상품과 자본이 지배하는 현대성의 그림자를 초월하는 호연지기, 생의 비애와 결핍에 재치 있게 대응하는 기지와 해학의 품격 등은 김영탁 시의 능동적 개성을 구성하는 튼실한 근간들이다. - 김종태(시인·평론가·호서대 교수)
.♣.
=================
▶ 김영탁金永卓 시인∥
∙ 1959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 1998년 계간시지 『시안』으로 등단하여,
∙ 시집으로 『새소리에 몸이 절로 먼 산 보고 인사하네』『냉장고 여자』가 있다.
∙ 현재 계간 시종합문예지 『문학청춘』 주간으로 활동하고 있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