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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류명리학회 時流命理學會
 
 
 
카페 게시글
자유롭게 스크랩 사진으로 보는 한국100년/1960년대 2부
행복나무 추천 0 조회 86 13.06.26 13:1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우물

두레박은 군인 철모로 만들었다.

 

두레박이 없으면 물을 마실 수 없다.

물은 생명의 근원이다.

대한민국 6~70년대는 군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다.

원하던 원치않던 군이 곧 생명줄이었다

 

젊은 연인들의 메카, 아카데미극장

신성일 엄앵란 주연의 청춘물이 집중 상영되던 개봉관이었다.

광화문 현 동화면세점 부근이다

 

종로 5가(1962)

 

관광회사

도봉산이나 안양 유원지 가는것도 관광코스였다

 

광장시장(1962)

 

숭고한 사랑

위대란 말 외에 달리 표현할 ?이 없습니다.

 

무악재 고개 확장공사(1961)

 

시골길도 다듬어지기 시작했다

 

광화문(1962)

 

광화문(1966)

 

광화문 지하도 공사가 완료되었다(1968)

전차길이 사라졌다.

 

김포가도(1962)

양평동에서 김포공항 가는 길이 개통되었다

 

제2한강교 개통(1964)

오늘날의 양화대교다

 

시내길도 포장공사가 한창이다

 

서소문에서 아현동 가는길

고가도로 공사가 벌어졌고 길거리에는 새나라 택시와 콜트 택시가 보인다

 

새나라 자동차회사가 국내 자동차 업계의 선두 주자로 나서자

이를 추격하던 신진자동차 회사가 일본 미쓰비시에서 콜트를 들여와 조립생산 하려하자

일본 미쓰비시측에서 완제품 1600대 구입을 강요한다.

을의 입장에서 울며겨자먹기로 1600대를 수입하기로 한 신진은 관세를 포탈하려다 덜미가 잡혔다.

결국 미쓰비시는 콜트 1600대 파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고 한국상륙을 접어야 했다.

그 틈바구니를 헤집고 들어온 것이 도요다 코로나다.

닛산의 불루버드(새나라) 미쓰비시의 콜트에 이어 제3세대다

 

명동 입구(1965)

알파약국, 국내에 없는 희귀한 약을 파는 유명한 약국이었다

 

명동 입구에는 한독약품 광고탑이 있었고 전차길이 있었다(1966)

교통문화가 성숙되지 않은 그 당시 사람들은 아무데나 건너 다녔다

 

중국을 방문한 한국 관광객들이

중국은 횡단보도로 건너지 않고 교통질서가 엉망이라고 흉보지만

우리의 50년전을 뒤돌아보면 누가 누구를 흉볼일만도 아니다

 

광화문 사거리의 무질서

서로 먼저 가려다 뒤엉켰다

 

잦은 위수령 발동과 계엄령 발동으로 대학 캠퍼스는 물론 시내 요소요소에 군이 배치되었다 (1965)

 

수원(1968)

 

노량진

노들역 5번 출구 근처다

 

덕수궁 스케이트장

 

신촌 로타리

자가용은 대부분 군에서 불하한 윌리스 ?차를 개조한 박스카(하꼬가다)였다

 

양평동에서 광명 철산리 가는 뱃길(1968)

안양천을 건너 학교에 가고 직장에 다녔다

저런 진창을 다녀야 했으니 영등포를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사는 진등포'라 했다.

 

청계천 6가까지 복개가 되어있고 8~9가 쪽으로 공사가 시작되었다

왼쪽이 동대문뽁 오른쪽이 서울운동장 쪽이며 멀리보이는 산이 용마산이다

 

청계천(마장동)

 청계천에서 물놀이 하는 어린이들(1968)

 

뚝섬 고기잡이 배를 바라보는 아이 펜티 실종

 

쌀가게

 

남대문시장 어물전

 

 남대문 시장 노점

 

배달 바구니

 

남대문시장 식육점

냉장고가 보급되지 않은 그 당시에는 지육을 노출하여 팔았다

 

여의도에서 마포 바라보기

지금 63빌딩 근처다

 

동자동

 

퇴계로 남산육교

육교는 차도용 육교로 남산 올라가는 길이다

 

후암동 3거리

마주 보이는 언덕길이 힐튼 호텔 올라가는 길이다

 

시청앞

새나라 택시가 주종이다

 

반도호텔앞에서 미 대사관 바라보기

시발택시가 보인다

 

반도호텔에서 내려다본 도심의 노후 건물

 

고단한 삶을 살았던 서민들(1968)

 

창경원

봄이오면 창경원에 가서 벚꼴놀이를 하고 놀이기구 타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골목

 

공중전화

휴대폰은커녕 집전화도 귀했던 그 시절, 전화 한 통화 하려면 30분은 보통이었다

 

일가족(1968.1.1)

당시 청와대에서 배포했던 가족사진.

왼쪽부터 박근혜, 박지만, 육영수 ,박정희, 박근영

청와대는 신년을 맞으면 천황의 동정을 공개하는 일본을 모방해 새해 첫날 대통령 가족 동정을 공개했다.

 

세뇌였을까?

대부분의 백성들은 일 잘하는 대통령으로 알고 었었다.

헌데, 그의 딸이 최근 그가 행한 5.16과 유신이 '헌법 가치를 훼손했다'고 규정했다.

 

헌법이 뭔가?

국법 중에서도 나라의 으뜸 법이다.

옛날에는 국법을 어기면 능지처참에 처해졌다.

그도 인혁당 관계자들이 국법을 어겼다고 확정판결 18시간만에 사형에 처하지 않았는가.

예나 지금이나 국법은 엄중하다.

비록 그는 국법을 어겼다고 억지를 썼지만.

 

그동안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과(過)도 있지만 공(功)이 크니 과(過)는 덮어두자.

우리가 보릿고개를 넘긴 게 누구 덕이냐? 는 현실수긍론과

'과(過)는 과고 공(功)은 공이다.

수양대군이 정치를 잘했다고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것까지 정당화 될수는 없지 않느냐?' 는

역사 인식론이 평행선을 달려왔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부터 박정희는

과(過)라는 5.16에서 부터 다시 출발해야 하지않을까 한다.

왜냐하면

박정희에게서 5.16을 빼면 내세울 게 없다.

굳이 밝히자면 남로당 가입과

'천황폐하께 목숨바쳐 충성하겠다.' 혈서를 쓰고 들어간

만주군관학교 다까끼 마사오라는 추한 몰골만 드러나게 된다.

 

각설하고

그의 딸은 정신박약아도 아니고 정신지체장애인도 아니다.

이 나라 국정을 5년간 책임지겠다고 대선에 나선 정치인이다.

그가 그렇게 확인했으니 다른 사람들은 토를 달 수 없을것이다.

그가 18대 대선에 당선되든 낙선하든 아뭏튼 잘 나왔다.

그의 아버지의 과에 대해서 마침표를 찍어주었으니까.

 

'5.16은 구국의 결단이 아니라 권력욕에 의한 헌정 파괴다. 고로, 5.16은 나쁘다. 유신철폐하라 .'

고 말만 해도 붙잡아 갔는데

그의 딸의 입을 통해서 5.16 자체가' 헌법가치훼손'이라고 확인되기 까지 51년이 걸렸다.

이 나라 주인에게 고통을 안겨준 너무나 긴 세월이다.

 

한강인도교 남단(1966)

전차는 68년도까지 운행되었다

 

전차가 지나가는 한국은행 앞

 

금화 아파트(1969)

완전 3층 구조다.

맨 위에는 산동네, 그리고 아파트 그 아래는  기와집 단독주택

그래서 맨 윗동네를 달과 가까이 산다해서 '달동네'라 불렀다.

 

사랑은 눈물의 씨앗(1969)

고영남 감독, 윤정희, 최무룡, 남궁원 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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