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바키아3 - 언덕을 올라 브라티슬라바성에 도착해 오래된 고성을 구경하다!
2022년 5월 8일 헝가리 비셰그라드 Visegrád 에서 호텔에 체크아웃을 하고 슬로바키아 의 브라티슬라바 로
가기위해 배를 타고 다뉴브(도나우) 강 을 건너 나기마로스 비셰그라드역에 도착해 밴딩머신 기계에서
표를 끊을려고 하니.... 화면에 나오는 역은 헝가리 국내역 뿐이라 끊지 못하고 체코 프라하행 기차에 탑니다.
식당칸에 가서 맥주 한잔을 하고는 한참 달려서 기차가 슬로바키아 국경을 지난 후에야 차장에게서
기차표 를 끊는데...... 우리 기차는 끝없이 이어지는 들판을 1시간 40분을 달려서는 달려서는
오후 4시에 슬로바키아 의 수도인 브라티슬라바 에 도착하기로 나와서 호텔을 찾아 체크인을 합니다.
오후 5시 가까운지라 호텔을 나와 시내지도를 보면서 도로를 따라 내려가니 대통령궁 인데 시간이
늦어 문이 닫혔기로 다시 길을 건너 가파른 계단을 올라 언덕 을 올라가서는 성벽을 따라
7~ 8분을 걸어서 마침내 산정에 우뚝 서 있는 브라티슬라바 성 Bratislavsky Hrad 에 들어섭니다.
브라티슬라바성 Bratislavsky Hrad 은 11세기 건립된후 1811년 화재로 완전히 소실되어 폐허가 되었다가
1953년 재건되었으며..... 공산주의 시대에는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의 브라티슬라바 거처 이자
슬로바키아 국회의사당 으로 이용되었으며, 현재 브라티슬라바성 입구에는 슬로바키아 국회가 위치합니다.
브라티슬라바성 은 무료이긴 하지만 시간이 5시 반이나 되었으니 성 내부로 들어
가는 것은 불가능 한지라 천천히 걸으며 건물을 구경하다가 북쪽으로
올라가니 저 아래에 유유히 흐르는 다뉴브강(도나우강) Donaw River 이 보입니다.
여기 다뉴브강은 한강 정도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항구와 조선소 까지 있다니.... 조금
과장하면 바다 처럼 넓은 강을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동아일보에 실린 한국과
프랑스가 처음 만나 건배한 ‘샴페인의 섬’, ‘날아오르는 새의 섬.’ 이란 글이 떠오릅니다.
전남 신안군 비금도(飛禽島) 는 하늘에서 보면 날개를 펼친 큰 새 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신안의 설악산으로 불리는 그림산의 절경과 끝없는 명사십리 해변 으로 유명한 비금도가
‘한국과 프랑스가 처음 만난 섬’, ‘샴페인 섬’ 으로 주목받고 있다. 비금도에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전남 목포 KTX 역에서 차를 타고 천사대교를 건너니 암태도 남강 선착장 이 나온다. 이곳에서
차를 싣고 페리호를 타면 50분만에 비금도 에 도착한다. 해변이 4.2km에 이르는 비금도
명사십리 해수욕장 은 모래사장을 차를 타고 달릴만큼 눈과 가슴이 시원하게 뚫리는 해변이다.
또한 고갯마루에서 바라보면 하트 모양으로 보이는 ‘하누넘 해변’ 은 연인들이 사랑을 속삭이며 인증샷을
남기는 명소다. 비금도를 가로지르는 그림산과 선왕산은 기암괴석이 절경 을 이룬다. 다도해의 섬들이
몽환적으로 떠 있고, 염전 위로 붉은 노을이 지니 힐링이 되는 섬으로 알파고와 대결했던 이세돌의 고향
이기도 한데, 172년 전 이 섬에서 한국과 프랑스 관리들이 샴페인과 막걸리 를 주고받으며 첫 만남을 가졌다.
1851년 4월 2일 프랑스 고래잡이선 나르발호 가 비금도 모래 해변 바위섬에 부딪쳐 산산조각 이 나고 말았다.
프랑스 북부 르아브르 에서 출항한 나르발호는 고래를 찾아 대서양, 인도양, 남태평양을 넘어 한국까지
와 신안 앞바다에서 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당시 한국 바다에는 서양의 포경선이 수시로 출몰했는데,
1849년에는 프랑스 포경선 리앙쿠르호가 동해에서 독도를 발견해 ‘리앙쿠르섬’ 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해안에 좌초된 나르발호 선원들은 200년 전에 일본 나가사키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제주도에 난파되어 귀국을 금지 당하고 조선에 감금됐던 하멜 일행이나, 12년
전에 처형된 프랑스 신부 처럼 감옥에 갇히거나 목숨을 잃을 것이란 공포 에 떨었다.
당시 조선의 상황은 신해박해(1791년), 신유박해(1801년), 기해박해(1839년) 로 국내에 비밀리에
입국해 활동하던 프랑스 선교사들이 대거 처형 당해 이방인에 대한 경계심이 높았던 상황. 그래서
9명의 선원이 소형 배를 타고 탈출해 4월 19일 중국 상하이 프랑스 영사관 을 찾아가 구조를 요청했다.
샤를 드 몽티니 영사 는 다음 날인 4월 20일 곧바로 통역관과 영국 상인, 중국인 선원 등 30명을 태운
배를 이끌고 비금도에 있는 선원들을 찾아나섰다. 몽티니 영사는 제주도 대정 해변에 도착해
“난파된 프랑스 배와 선원들을 봤느냐” 고 물었지만 모두 모른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결국 북상해서는 신안 앞바다 섬들을 하나하나 뒤지며 찾아다닌 끝에 비금도 를 발견했다고 한다.
비금도에 도착한 몽티니 영사는 걱정과는 달리 선원들이 주민들로 부터 쌀 등 음식을 제공 받고, 숙소에서
당국의 보호 아래 잘 지내는 것을 보고 안심했다고 한다. 비변사등록과 일성록에 따르면 조선의 조정
에서는 비금도에 난파한 프랑스 선원들이 중국으로 갈수 있도록 배 2척 을 마련해 주라는 지시를 내렸단다.
몽티니 영사 는 5월 2일 비금도를 관할하는 나주 목사 를 만난 자리에서 한국 정부에 고마움
을 표시하고, 프랑스 선원들을 직접 배에 태워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떠나기 하루
전날인 2일. 몽티니 영사와 나주목사는 송별회 를 가졌다. 몽티니 영사는 배에서
샴페인과 와인 수십병 을 꺼내 왔고, 조선인들은 도자기와 항아리에 담긴 전통술 을 가져왔다.
“선실에서 조선 관료들에게 출발에 필요한 식량을 요청 하고 나서, 갑판으로 올라갔습니다. 거기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우리 배의 50여명의 선원이 음식이 차려진 작은 테이블(소반) 을 각자 앞에 두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 사이로 한국인들이 항아리 단지와 잔을 들고 다니면서 술을 따라 주었습니다. 우리
도 그들에게 술을 대접하고 함께 마셨습니다. 정말 그림처럼 아름다운 식사 (pittoresque repas) 였습니다.”
“우리는 몇 시간 동안 다양한 종류의 샴페인과 와인, 독주 를 함께 마셨습니다. 나는 한국인들처럼 술을 마시는
사람들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샴페인과 와인, 특히 도수가 높은 술을 열정적 으로 마셨습니다. 조선
의 관료들은 자신들이 마시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하인들에게도 마시고 샴페인 병을 가져가도록 했습니다.”
몽티니 영사는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 에게 보낸 보고서에 비금도에서의 송별연 장면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조선인이 따라 주었다는 항아리에 담긴 술은 막걸리 로 보이며, 독주도 마셨다는 말로 보아 소주 도 제공
됐을 가능성이 있다. 이는 한국 사람이 처음 샴페인을, 프랑스 사람이 처음 우리 막걸리와 소주를 마신
공식기록이다. 몽티니 영사는 보고서에서 비금도를 ‘날아오르는 새의 섬 (l’le de l’Oiseau Volant)’ 이라고 썼다.
지난달 2일 프랑스 파리 교외에 있는 세브르 국립도자기 박물관 에서는 ‘샴페인과 막걸리의 첫
만남’ 이라는 흥미로운 행사가 열렸다. 이날 행사의 주인공은 옹기로 만든 갈색 주병(酒甁)
이었다. 1851년 비금도에서 몽티니 영사가 선물로 받아 본국에 가져갔던 바로 그 술병이었다.
비금도 사건을 연구한 피에르 에마뉘엘 루 교수(파리 7대학)는 “초기에 비밀리에 활동한 프랑스 선교사들이나
개인적으로 표류했던 선원도 있지만, 몽티니 영사는 프랑스 정부의 외교관으로서 처음으로 조선의 관료
와 첫 공식 만남을 가진 사람”이라며 “비금도는 한-프랑스 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장소” 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과 프랑스의 첫 만남을 선교사 박해나 병인양요 (1866년) 로만 기억하는데, 비금도 사건은 난파된
선원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양국 관료들이 힘을 합한 인도주의적 만남 이었고, 술과 음식을 나눈
문화 교류의 장 이었다” 며 “비금도가 한국과 프랑스 양국의 화합의 장소 로 잘 기려지면 좋겠다” 고 말했다.
신안군의 비금도, 도초도, 노대도, 안좌도 등엔 제임스 터렐, 올라푸르 엘리아손, 앤터니 곰리
등 세계적인 작가의 설치 미술 작품 이 들어서는 ‘예술섬 프로젝트’ 가 진행 중이다.
박우량 신안 군수는 “예술섬 프로젝트 가 진행되고 있는 비금도 를 한 - 프랑스 간의
역사적인 첫 만남을 기리는 기념관, 샴페인과 막걸리를 즐길 수 있는
해변 공원 등 한국과 프랑스 문화를 즐길 수 있는 섬으로 가꿔 나가겠다” 고 말했다.
비금도 명사십리 바닷가 에는 영국을 대표하는 설치 미술가 곰리의 작품 이 들어선다. 곰리는 영국 북동부
의 작은 탄광 도시였던 게이츠헤드에 220t의 철근을 사용해 ‘북방의 천사’ (높이 20m)라는 거대 철제
조각상을 세웠다. 덕분에 한때 탄광촌이었던 이 작은 도시는 세계적인 예술 도시 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명사십리 해변에 세워지는 곰리의 작품 은 신안의 명물인 소금 결정체 처럼 정육면체 모양의 철근이 모여
사람을 형상화한 것이다. 포스코가 40억 원어치의 철근을 무상으로 제공하기로 했다. 곰리의
작품은 밀물 때는 바닷속 으로 들어갔다가 물이 빠지면 드러나는 보기 드문 작품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그런데 조선에서 천주교도 박해 그러니까 프랑스인 신부와 조선인 천주교도를 죽인건 모두 5차례 인데
1839년 제3차 천주교 탄압인 기해 박해 때는 프랑스인 신부 3명에 조선인 100명이 처형 당했습니다.
1851년 비안도에서는 저런 인정 이 있었지만 그전 1846년 4차 병오 박해는 한국 최초의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순교했으며 15년후 1866년 5차 병인박해 로 인해 프랑스 함대가 침입하는 병인양요 전쟁 이 일어납니다.
병인박해 는 대원군 시절로 1866년 부터 1871년 신미양요 까지 이어졌는데 프랑스인 신부 9명 과 배교를 거부한
조선인 신도 8천명 이 잔인하기 그지없는 고문을 당하고 처형 당했는데, 도망쳐서 산이나 섬으로 도주하다가
사고로 죽거나 병이나 혹은 굶어죽은 사람은 부지기수이니 전체 희생자는 8천명에서 엄청나가 늘어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프랑스인과 조선 관리들의 술잔을 나눈지 15년 후 인 1866년에 러시아인 들이 함경도에 출몰하자
대원군은 프랑스의 힘을 빌려 대처 하려고 했는데 러시아인이 물러가서 프랑스의 도움이 불필요해지고
내실(부인) 에 예수교도 들이 드나든다는 소문이 돌자 유림으로 부터 지탄을 피하기 위해 프랑스 신부들과
조선인 예수교도들을 죽이라는 명령 을 내렸으니 굶주림과 질병 사고등 실제 죽은 사람은 만여명이 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