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영화 속 영웅]
일송정 푸른 솔은 (The Green Pine Tree), 1983
 
일본군 3300여 명 멸한
독립전쟁 최대의 승전 신화를 영화에 담다
 
감독: 이장호, 출연: 진유영, 윤양하, 이보희, 신일룡
청산리 전투 배경, 사실적 묘사, 실제 참전했던 노병의 내레이션
가곡 ‘선구자’ 나오는 전투장면 압권, 대종상 3관왕·백상 시나리오상 수상
98년 전, 우리 한반도의 3월은 대한독립을 외치는 함성으로 가득했다. 1일 서울을 시작으로 3월 내내 우리 선조들은 전국에서 독립을 외쳤다. 3월 3일이었던 고종의 장례식을 보러 상경했다가 만세운동을 접하고 지방으로 돌아간 참배객들은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전국에 전파했다.
이에 크게 당황한 일제는 무력으로 진압했다. 수만 명이 총탄에 쓰러졌고, 감옥에 끌려가 고문을 받은 사람도 수없이 많았다. 일본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가시적인 시위는 사라졌지만 광복의 뜻을 세운 지사들은 국내를 탈출, 항일 독립 단체를 만들었다. 당시 만주 지역만 해도 70여 개의 독립단체가 있었다. 북간도의 북로군정서(총사령관 김좌진)와 대한독립군(사령관 홍범도), 천주교인들이 만든 의민단(단장 방우룡) 등이 대표적이었다.
북로군정서를 비롯한 북간도 독립군은 청산리(靑山里)를 거점으로 일본군에 대항했다. 우리 독립군은 10여 차례 전투 끝에 일본군을 대파했는데 그것이 ‘청산리 대첩’이다. 당시 김좌진 장군은 나중소·박영희·이범석 등과 함께 1920년 10월 20~23일 청산리의 80리 계곡에서 세 차례 격전을 벌여 일본군 3300여 명을 섬멸했다. 이 전투는 봉오동전투와 함께 독립전쟁 사상 최대의 승전으로 불린다.
영화 ‘일송정 푸른 솔은’은 이 청산리전투를 다루고 있다. 청산리전투에 참전한 노병(이우석 옹, 87세)의 내레이션으로 전개되는 영화는 전투 실화를 바탕으로 사실적으로 풀어간다.
수적 열세에도 크게 승리한 독립군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뒤 북간도로 이주한 애국 청년들은 북로군정서라는 독립단체를 결성하고 항전 준비를 갖춘다. 지휘부는 총사령관 김좌진 장군과 이범석 등이었다. 한편 만주를 삼킨 일본군은 이 지역의 비적 장작림을 포섭해 독립군을 섬멸하려는 계략을 세우고 있었다. 김좌진 장군과 휘하의 지휘부는 피하지 않고 주민들을 보호하며 백두산을 향해 행군한다. 그러자 일본군은 5만여의 대병력으로 독립군을 포위한다. 죽음을 각오한 독립군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일본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청산리전투에서 크게 승리한다.
영화의 절정은 국민가수 조용필이 부른 가곡 ‘선구자’가 배경 음악으로 나오는 마지막 전투 장면이다. 독립군 주력부대가 퇴각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물밀듯 쇄도하는 일본군 앞에서 장렬하게 산화하는 기관총 소대원들의 모습과 쓰러진 독립군의 총을 주워 들고 싸우는 밥집 여자의 활약상이 그려지는 전투 장면은 관객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든다.
강렬한 메시지, 배우들의 열연 돋보여
영화는 지금 기준으로도 괜찮은 전쟁 스펙터클을 보여준다. 하지만 민족주의 감성에 너무 호소한 탓일까? 작품 완성도 측면에서는 다소 미흡하다. 기계적으로 단순 비교는 할 수 없지만 요즘 항일 전쟁을 다룬 역사물 ‘밀정’ ‘암살’과 비교하면 후한 점수는 받지 못할 것 같다. 그러나 메시지만큼은 최근 영화보다 강렬하다. 나라를 잃은 설움과 울분이 배우들의 열연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된다. 한 누리꾼의 지적대로 역사물이 대세인 요즘, 다시 만들어도 작품적으로나 상업적으로 좋은 결과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국방부의 지원을 받은 ‘일송정 푸른 솔은’은 1983년 제22회 대종상 작품상(계몽부문), 미술상, 특별상(신인부문: 이보희)을 받았고, 제20회 백상예술대상 시나리오상(백결)을 수상했다. 이 영화가 데뷔작이었던 이보희는 이장호 감독과의 인연으로 이후 ‘바보선언’ ‘어우동’ ‘외인구단’ 등에 잇따라 출연하면서 그의 페르소나(persona, 감독의 분신)가 됐다. 멜로영화 ‘별들의 고향’으로 데뷔한 이장호 감독은 드물게 상업적인 흥행 영화와 메시지가 강한, 사회성 짙은 작품을 모두 만드는 감독으로 정평이 있다.
후진 양성에 힘 쏟은 김좌진 장군
김좌진 장군은 일제에 맞선 무력 항쟁 가운데 가장 빛나는 청산리전투의 영웅이었다. 그는 1925년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 부교장으로서 독립군 간부 양성에도 주력했다. 조국의 광복을 염원하면서 가장 무게를 둔 일이 후진 양성이었던 것이다. 그는 일제와의 실전을 통해 체계적인 군사훈련과 병사들의 강인한 체력만이 승전을 담보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체계적인 훈련으로 단련된 개인 병사의 전투력은 오늘날 첨단 무기가 승패를 가르는 현대전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