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잎산정요시
쇼와 7년 2월 니시마에 4(개정전은 동쪽10 6) 5승 3패( 춘추원사건 (을) 위해 편성 변경)
쇼와 7년 3월 니시마에 4 8승 2패
떡잎산정치
쇼와 7년 5월 히가시마에 2 6승 5패
쇼와 7년 10월 히가시마에 2 11휴 (축농증)
쇼와 8년 1월 히가시마에 5 9승 2패
쇼와 8년 5월 히가시마에 2 4승 7패
쇼와 9년 1월 니시마에 4 6승 5패
떡잎산정무관
쇼와 9년 5월 니시마에 1 6승 5패
떡잎산정병위
쇼와 10년 1월 동코무스비 4승 6패 1분
쇼와 10년 5월 히가시마에 1 4승 7패
떡잎산정무관
쇼와 11년 1월 히가시마에 3 9승 2패 금 ( 무사시산 )
쇼와 11년 5월 서쪽 세키와케(스모의 등급) 11승
후타바야마 사다지
쇼와 12년 1월 동경대학관 11승
쇼와 12년 5월 동경대학관 13승
쇼와 13년 1월 서쪽 요코즈나 13승
쇼와 13년 5월 동쪽 요코즈나 13승
쇼와 14년 1월 동쪽 요코즈나 9승 4패
쇼와 14년 5월 동쪽 요코즈나 15승
쇼와 15년 1월 동쪽 요코즈나 14승 1패
쇼와 15년 5월 동쪽 요코즈나 7승 5패 3휴(옆구리 동통)
쇼와 16년 1월 서쪽 요코즈나 14승 1패
쇼와 16년 5월 서쪽 요코즈나 13승 2패
쇼와 17년 1월 동쪽 요코즈나 14승 1패
쇼와 17년 5월 동쪽 요코즈나 13승 2패
쇼와 18년 1월 서쪽 요코즈나 15승
쇼와 18년 5월 동쪽 요코즈나 15승
쇼와 19년 1월 서쪽 요코즈나 11승 4패
쇼와 19년 5월 동장횡 9승 1패
쇼와 19년 11월 동장횡 4승 3패 3휴(아메바 이질)
쇼와 20년 6월 서장횡 1승 6휴 (면정)
쇼와 20년 11월 서장횡 10휴 (아메바 이질·황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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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츠요시 사다지(穐吉 定次)
체격 : 179cm,128kg
생일 : 메이지 45년2월9일
출신 : 오이타현 우사시
소속 : 立浪[ 4]→双葉山
데뷔 : 쇼와 2년3월(15세)
신주료 : 쇼와 6년5월(19세)
신입막 : 쇼와 7년2월(20세)
신요코즈나 : 쇼와 12년5월(25세)
은퇴 : 쇼와 20년11월(33세)
사망 : 쇼와 43년12월16일(56세)
주특기 : 右四つ、寄り、上手投げ
통산전적 : 31장소 276승 68패 33휴장 1긴뽀시
일본역사에 위대한 요코즈나 5걸안에 들어가는 인물이죠...179cm,128kg
로 당시로썬 가장 균형잡힌 체격을 가지고 있었죠. 사실 쇼와땐
34대 요코즈나 미나노카와(191cm,146kg)의 체격이면 어마어마한
거구였고 후타바야마정도의 체격이면 이상적인 체격으로 불리던
때였습니다.
사진을 보면 정말 멋지게 생겼습니다^^ 일본도를 딱들고 날카로운
자세를 취한 모습...미나노카와처럼 비정상적인 체형이 아니라
확실하게 상하체가 두껍고 발달된 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완벽하게만 보이는 후타바야마도 감추고 싶은게 있다면 어릴때
친구랑놀다 친구가쏜 불화살에 한쪽눈을 다쳐서 완전히 실명했고
사고당시 기계에 오른쪽 새끼손가락까지 절단된 그런 핸디캡을 가지고
있었단 말입니다. 이런선수가 향후 일본스모역사에 위대한
요코즈나가 될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스모를 시작하게 된 경위는 선박일을 하던 아버지가 무려 5000엔
(당시로썬 엄청난금액이었죠)의 빚을 지는 바람에 어떻게든 돈벌어볼
생각으로 입문하게 된것이 계기였습니다. 입문당시엔 그저그런 덩치
였고 힘도 특출나게 세보이지 않았지만 후타바야마는 누구보다 강한
상,하체 근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찌됐건 잘나가던 후타바야마도 고비가 있었는데 지병인 축농증과
극심한 부진으로 삼역에서 마에가시라로 미끄러지고 은퇴를 결심
할뻔했지만 거의 하루에 한갑이상 펴대던 담배도 끓어버리고 축농증이
나아지면서 다시 상승세를 타기 시작합니다.
후타바야마의 오른쪽눈 실명은 입문당시부터 타츠나미오야카타와 부인
은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였기에
언론에 전혀 알려져있지 않았죠. 그런데 사실이 드러나기 시작했던게
쇼와 16년 요코즈나 재위떄 어떤패배에서 오른쪽눈 보이는시야쪽에서
꼼짝없이 당한일이었는데 이때 왜 그걸 보고도 대응을 못했나 해서
그때부터 그의 오른눈은 아예 보이지 않는게 아니냐는 소문이 들렸죠
사실 5살에 불화살에 맞아서 실명할당시부터 오른눈이 안보였죠^^;
그게 너무 늦게 알려졌을뿐...
그가 한때 마작에 빠져서 연습을 팽개치고 마작에 미쳐있을때
타츠나미 오아캬타가 불같이 화를 내면서 '마작에 빠져 오래 앉아
있으면 몸에 좋지않다!' 라고 호통치고 마작도구랑 패를 2층창밖
으로 던져버렸습니다. 이에 후타바야마는 크게 반성하고 동료들이
마작하자고 권해도 눈길한번 주지않았답니다. 자기게임기 만졌다고
후배를 폭행하고 오야카타 부인에게가지 행패부린 후타하쿠로와
(60대 요코즈나)크게 대조되는 모습입니다.
쇼와 11년7월부터 그는 전무후무한 69연승기록을 달성하면서 일본열도를
열광의 도가니탕으로 몰고 갑니다. 이기록은 2000년이 지나고
부시가 첨단무기를 써대는 이시대에도 깨지지않는 불멸의 기록으로
남아있답니다.
그는 또한 조선인이라는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예가 바로 극진가라데 창시자인 최배달과의 인연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인에 대한 대우가 어땠는지는 말로 표현하지 못했었고
후타바야마가 만일 조선인인게 밝혀지면 자신의 스모인생도
망가질게 뻔했던게 현실이었습니다. 만화 바람의 파이터 전반부를
보시면 나오는 얘기거든요? 그래도 끈기가 있는 한국인의 기질이
있었기에 오른눈이 실명되고 오른쪽 새끼손가락이 없는채로 스모에
입문해서 위대한 요코즈나로 남았겠져...
그의 사이비종교관련 글입니다. 뜻 잘 해석하시기 바라고요^^ 이건
제가 글로 표현하기가 어려워서 그쪽 원문을 옮긴겁니다.
그는 은퇴후에도 정말 승승장구하면서 족적을 남겼고 그의 저서 2편은
아직도 인기있는 책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은퇴후 한때
사이비종교에 빠져서 포교활동하다 구속된일은 그의 인생에 유일한
오점으로 남아있습니다. 물론 그후 다시 마음가다듬고 스모협회 이사장
까지 맡으면서 사이비종교혐의로 구속됐던 오점을 털어버리고
스모계 개혁에 산파역을 하면서 56세에 죽을때까지 승승장구
했다는 사실...
(정말 그는 인생대역전을 2번이나 해냈군요. 오른눈과 오른새끼손가락
이 절단된 상태에서 데뷔해서 요코즈나에 오르고 69연승을 남기고
한떄 사이비종교에 빠져 구속되었다 스모협회 이사장까지 맡아
승승장구하고)
은퇴한 직후에 새우교에 달렸다. 새우교는 지코손을 교조라고 해, 스스로는오가미님과 칭해 떡잎산을 소전오위대한 신의 화신과 칭했다. 그리고 신시라고 말해 「세계 사회개혁 (위해)때문에 근처 천변지이가 일어나 세계의 인구는 3 분의 1 밖에 남지 않는다」라고 돌아다녀, 킨키 지방 남부의 지진을 포교에 이용하고 있었다. 쇼와 22년 1월에 경찰이 카나자와시의 본부를 가택 수색 했을 때에는, 몸빼 모습으로 가로막아, 1자 6치수의 북의 바치를 거절해 예 해 마구 설친 끝에 보호되었다. 이전부터 교제가 있는 아사히 신문의 후지이 츠네오 기자가 보증인으로서 「향후, 일절새우교와 절연 시킨다」의 하나의 문서를 경찰서 길게 넣어 주어, 석방되었다. 그리고 카나자와로부터 약 20 km 정도 떠난 식후 마실물을 넣어두는 주전자 온천에 후지이에 이끌려, 보내는 동안에 냉정을 되찾아, 늦어 석방된 지코손이 탈환하려고 사자인 고세이겐(기성)을 보냈지만, 두번다시 뒤돌아 보지 않았다. 구도적인 면이 화근이 된 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뭐^^ 어쨋든 후덕한 인품으로 주변사람들에게도 존경받던 그가 갑자기
왜 이런일을 했는지는^^; 오로지 후타바야마만이 알겠죠.
그후 사이비종교와도 연을 끓고 스모협회에서 이사장을 맡아서 스모계의
개혁에 선봉장역할을 했습니다. 당시로써는 우리나라대통령 '노짱'
의 등장에 비유될정도였죠^^ 대표적인 업적으로 스모협회의 법인화
,베야별 전원시합제 채택,번부삭감,부상자를 위한 스모진료소개설
등등 스모계의 현대화에 큰 업적을 남겼답니다.
쇼와 35년 12월에 협회의 재단법인 35년 기념식전으로 인사를 하려고 했을 때에, 인사장을 건네주는 계의 수의 산 하지만 인사장을 잊어 버렸지만, 수의 산이 취해 돌아오는 동안은 악겁도하지 않고 유연과 계속 서 독특한 분위기에 참가자로부터는 실소도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감심 시켜, 마침내는 박수가 끓어올랐다.
쇼와 37년 11월에 스모계에서 처음의 자수포장을 훈장을 받았다.
「떡잎산자서전」 「스모 구도록」을 저술했다.
타츠나미 의 17 회기에 잠겼다. 종시훈삼등 욱일소수장이 추증되었다
정말 그는 스모판에서 현역때도,은퇴할때도 승승장구하고 요코즈나에
오른셈이 되었습니다^^ 아쉽게도 56세로 숨졌는데 34대 요코즈나
미나노카와(男女ノ川)보다 3년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도
미나노카와처럼 말년에 자식들에게 버림받고 비참한삶을 사는
우를 범하지 않고 은퇴후에도 존경을 한몸에 받는 선수가 되었다는것
^^ 정말 은퇴선수 성공사례의 모범케이스죠^^
첫댓글 앞의 한자는 '雙'자의 약자격으로서 '또 우(又)' 자가 앞뒤로 두개 겹쳐진 글자입니다. 훈과 음은 우리말로 둘(또는 두)쌍이라고 발음하지요. 흔하게 쓰이는 단어로 '쌍생아(雙生兒)'가 있습니다.
수학시간에 자주 들어본적이 있는 쌍곡선도 있지요
지요노후지 편을 좀 빨리 당겨해주시면 안될까요? ^^;;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