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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봄으로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섭니다. 난방비 폭탄을 어서 피하려면 그 방법이 그래도 가장 낫습니다. 추위를 벗어나는 것이지요. 그래도 이 달까지는 폭탄을 피하기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생활전선’이라고 말하는데 과연 삶의 전쟁터에 있는 듯합니다. 중요한 것은 일단 살아남는 일입니다. 그래야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습니다. 아무튼 감사한 일 하나, 누가 뭐라 해도 시간은 거침없이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루하루 더디다 느껴질지 모르지만 분명히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조만간 봄날을 맞을 것입니다. 따뜻한 봄볕을 받으며 우리 서로 지난겨울 폭탄을 피해 살아남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리라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말하면 2월은 축제의 달입니다. 우리 아이들과 며느리까지 모두 생일이 이 달에 모여 있습니다. 그래서 하루에 몰아쳐 파티를 가집니다. 그러고 나서 그 날에 각자 가정에서 따로 생일상을 받는 것으로 합니다. 서로 멀리 떨어져 살고 있으니 때마다 모이기 쉽지 않습니다. 때문에 이 방법이 어쩌면 아주 편합니다. 게다가 때로는 설날까지 겹쳐서 통합잔치를 가지게 됩니다. 여러 가지로 절약도 되고 매우 경제적입니다. 요즘처럼 경제적으로 어려운 때에는 더욱 덕이 됩니다. 에너지 절약에도 한 몫을 하는 셈이지요. ㅋㅋ
2월의 출발선을 떠났습니다. 얼굴을 펴고 신나게 달려보기 바랍니다. 건강하게 행복하게 파이팅!!
2023년 2월 4일 김종우 목사 드림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히브리서 11 : 37 - 38)
<교섭>
여행이 자유롭기는 하지만 세상에는 위험한 곳이 있습니다. 나라 안에서도 그러할진대 나라 밖으로 나간다면 일단 상대국에 대한 정보를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상식입니다. 왜냐하면 나라 밖으로 나가면 나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나를 인정하고 있는 나라의 이름이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아무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다녀도 알게 모르게 국적이 동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나의 하는 행동이 자칫 나라의 위신을 떨어뜨리고 명예를 훼손시킬 수 있습니다. 물론 그 반대로 나로 인하여 우리나라를 알리고 좋은 인상을 남겨줄 수도 있습니다. 타국으로의 여행은 개인적인 일이라 할지라도 나라의 명예도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23명, 적지 않은 인원입니다. 그 많은 사람이 버스를 타고 낯선 곳으로 향합니다. 그리고 테러집단에게 피납됩니다. 한두 명도 아니고 이 많은 사람이 타국에서 납치가 되었습니다. 당연히 요구사항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서 도무지 응할 수 없는 사항입니다. 더구나 세계적으로 테러집단과는 협상 불가라는 원칙을 어떻게 수용해야 할지 고민입니다. 그냥 죽게 내버려두어야 하는가,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지켜주어야 하는 정부로서는 난감해집니다. 일단 외교부 직원을 급파합니다. 저들이 요구하는 사항의 시한이 제한되어 있으니 주저할 시간이 없습니다. 외교부에서는 이미 이런 사태를 대비하여 위기대응법을 갖추고 있을 것입니다.
국가정보원에서도 사태를 알고 난 즉시 대응합니다. 현지에 보다 빨리 적응할 수 있는 대원을 파견합니다. 서로 다른 두 팀이 현지에 도착한 것입니다. 외교부와 국가정보원입니다. ‘박대식’은 이미 중동에서 비슷한 경험을 쌓은 실력자입니다. 다만 업무수행 중 동료가 희생되는 사고를 당해 그 책임을 지고 수감 중이었습니다. 그래도 이런 사건에 가장 적합하다 판단한 국가정보원에서 빼내어 다시 임무를 맡긴 것입니다. 현장에 쉽게 적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한 나라에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국제적 지위와 또 테러에 대응하는 전례가 되기 때문에 함부로 응대할 수 없습니다. 생명을 구하는 일이 최우선이라 해도 국가 전체의 명예가 달려있습니다.
무작정 협상에 들어가고자 하는 외교부 실장 ‘정재호’와 신중하게 적의 책임자를 먼저 찾아 협상하고자 하는 정보원 대식과 충돌이 생깁니다. 정부 책임자가 우선이기에 앞장서 길로 나섭니다. 그리고 눈앞에서 자살폭탄 테러를 목격하고 당합니다. 현실과 현장이 어떠함을 확인한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서로 협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식이 아는 통역자 ‘카심’을 대동하여 중간 안내자를 찾아냅니다. 영국인이라 하는 브러커와 거래를 성립하여 돈을 가지고 현장으로 들어가려 합니다. 뭔가 이상함을 눈치 챕니다. 가짜 브로커입니다. 사기군인 것입니다. 돈만 갈취당합니다. 대식이 뒤쫓아 가서 해결하고 돈을 찾아옵니다. 그 사이 대식의 과거를 들추어낸 외교부에서는 대식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돈을 되찾아옴으로 해결됩니다.
시간은 흐르고 협상은 진전이 없고 그 사이 두 사람이 희생당합니다. 곧 이어지는 살상이 예고되어 있습니다. 정부에서는 다시 외교부 장관을 급파합니다. 재호에게 손 놓고 귀국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대로 포기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국민의 생명을 지키고 구해내야 하는 일입니다. 돈도 명예도 나라 체면도 일단 접어두고 저들의 요구를 들으며 따라가서 면전에서 따져야 합니다. 가능할까요? 재호가 아무리 고집을 해도 장관은 듣지 않습니다. 그런 사정을 어찌 알았는지 대통령이 직접 재호와 통화합니다. 대통령의 입장도 국민의 생명이 우선이라는 원칙을 세운 모양입니다. 중요한 것은 가능성입니다. 저들이 과연 협상에 응하여 대면할까 하는 것이지요.
어렵습니다. 그러나 1%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일단 시도하겠습니다. 대통령이 허락합니다. 대식과 카심 그리고 재호가 몇 경호원과 현장으로 가지만 재호와 카심만 허락받습니다. 탈레반 책임자와 재호의 협상이 전개됩니다. 당신이 책임자인지 어찌 알 수 있느냐 하면서 그 증거로 3명을 먼저 석방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만한 권한이 있는지 확인하자는 것이지요. 지혜로운 제안이라 생각됩니다. 두 명을 풀어줍니다. 그러나 탈레반 수감자들을 석방하는 조건은 이루어지기 어려운 난제입니다. 우리나라가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설령 그렇다 해도 테러집단의 요구를 응해준다는 것이 국제사회에서 용인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도 있습니다.
다른 무엇보다 마지막 협상의 진전과정이 가장 볼 만합니다. 참으로 말 한 마디가 천량 빚을 갚을 수 있다는 놀라운 능력을 실감합니다. 우리가 하는 말은 영혼이고 생명입니다. 한 마디 실수가 한 사람뿐만 아니라 나라의 운명도 가를 수 있습니다. 목숨이 오락가락 하는 순간의 협상 테이블에서 오가는 말들은 그야말로 피를 말리는 전쟁입니다. 황정민, 원빈 두 배우의 실력이야 다 아는 사실이고 ‘카심’을 연기하는 강기영, 이 배우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영화 ‘교섭’(The Point Man)을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진화
신앙생활을 10년 이상 하고 교회를 그 이상으로 다녀도 예수님의 12 제자를 다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그저 안다고 해야 베드로, 요한 그리고 야고보 정도라고나 할까요? 좀 더 나으면 마태나 배반한 가룟 유다와 의심 많은 도마 정도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면 머리를 갸우뚱하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아무튼 반은 언급하였습니다. 그러면 누구누구 남았습니까? 안드레, 바돌로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빌립, 다대오와 가나안인 시몬입니다. 물론 가룟 유다는 예수님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 먼저 스스로 목매어 자살합니다. 그래서 행 1장에 보면 그를 대신하여 맛디아라 하는 제자가 12 사도 가운데 가입하게 되지요(26). 요한계시록에 보면 장차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에서 이 12 사도의 이름이 어디에 있는가 볼 수 있습니다. 계 21 : 10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 그 성곽에 열두 문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열두 문들 위에 이스라엘 자손 12 지파의 이름이 쓰여 있답니다. 또한 그 성곽에 열두 기초석이 있습니다. 14절 “그 성에 성곽은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이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 그 기초석에 누구 이름이 있다고요? 예수님의 12 사도의 이름이 있답니다. 그러므로 그 날 우리가 볼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12지파의 이름과 예수님의 12 사도의 이름을 다 보게 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12 지파의 이름은 압니까? 그들이 누구의 자손입니까? 잘 아는 대로 야곱의 자손들입니다. 이스라엘 12 지파는 바로 야곱의 열두 아들들에게서 시작되지요. 야곱의 이름이 나중에 이스라엘로 바뀝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12 지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야곱의 아들들의 이름을 보겠습니다. 야곱에게는 아내가 넷이 있었습니다. 그 각각에게서 아들들이 태어납니다. 그리고 합하여 열둘이 됩니다. 그 이야기가 창 29장에서부터 시작하여 35장에까지 이어집니다. 거기에 나오는 이름들을 봅니다.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단, 납달리, 갓, 아셀, 잇사갈, 스불론 그리고 야곱이 사랑했던 라헬에게서 태어난 요셉과 베냐민입니다. 그런데 계 7장에 나오는 이스라엘 12 지파의 이름에는 ‘단’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요셉과 요셉의 아들인 므낫세가 나옵니다. 즉 요셉에게서 두 지파의 몫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선 요셉의 아들은 둘이 있습니다. 므낫세와 에브라임입니다. 요셉이 애굽에 종으로 팔려 갔다가 나중에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그 때 결혼해서 낳은 아들들이지요. 나중에 아비 야곱이 애굽에 와서 같이 살며 죽기 전 요셉을 불러 축복합니다. 요셉이 두 아들을 축복해주기를 바라며 아비인 이스라엘 앞으로 데려 갑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동생인 에브라임에게 장자의 축복을 하지요. 그러므로 요셉의 이름은 므낫세가 아니라 에브라임이 이어갑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비록 요셉의 아들들이지만 야곱이 자기 아들들로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창 48 : 5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게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열두 지파 조상의 자리에 앉게 됩니다.
그러면 ‘단’ 지파는 왜 사라졌을까요? 야곱 즉 이스라엘이 죽기 전에 그 아들들을 불러 예언합니다. 창 49 : 1 “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의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그리고는 아들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장래의 일을 말해줍니다. 예언이지요. 그런데 단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이상합니다. 창 49 : 16 - 18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같이그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단은 길의 뱀이요첩경의 독사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로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우선 ‘이스라엘의 한 지파 같이’ 그 백성을 심판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한 지파가 아니라는 뜻인가? 그가 도대체 무엇인데 그 백성을 심판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 뒤의 말이 더 이상합니다. 단을 가리켜 뱀이랍니다. 잘 아는 대로 뱀은 마귀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뱀이 하와를 유혹해서 범죄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 하늘에 전쟁이 있을 때에 쫓겨나는 자입니다. 계 12 : 9 “큰 용이 내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쫓기니라”
과연 단 지파가 나중에 마귀 짓거리를 합니다. 구약 성경 중 사사기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사는 동안 얼마나 하나님을 배반하고 살았나 하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사사기 끝 부분에 가면 단 지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삿 18 : 1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 단 지파는 이 때에 거할 기업의 땅을 구하는 중이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이 때까지 기업의 땅 분배함을 얻지 못하였음이라” 그렇게 자기 기업을 얻으려고 유리하던 중 한 가정에서 우상을 세우고 섬기는 것을 탈취합니다. 그 가정의 제사장까지 잡아와서 자기네 제사장으로 세웁니다. 그리고 30절 “단 자손이 자기를 위하여 그 새긴 신상을 세웠고 모세의 손자 게르손의 아들 요나단과 그 자손은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어 이 백성이 사로잡히는 날까지 이르렀더라” 본래 제사장은 모세가 아니라 모세의 형 아론의 자손에서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하여 단 지파 사람들은 우상을 따라갔고 하나님을 등진 지파가 되었습니다.
처음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 지방에 살던 아브라함을 불러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를 통하여 이삭이 태어나고 이삭에게서 야곱이 태어납니다. 그리고 야곱을 통하여 열두 아들이 태어나고 야곱은 하나님에게서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받습니다.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어떻게 얻었습니까?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20년을 살다가 돌아옵니다. 그런데 동생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에서는 4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맞이하러 옵니다. 야곱이 두려워하여 가속은 다 강을 건너보내고는 혼자 얍복 강가에서 기도합니다. 그 때 천사가 나타나 야곱과 씨름을 합니다. 창 32 : 27 - 28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이스라엘은 바로 이긴 자로서 받은 이름입니다. 이긴 자의 자손, 열두 아들로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창조된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성경을 이야기하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입니다.
하나님은 이 이스라엘 12 지파를 이 땅에서 당신의 제사장으로 세우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들로 세상을 구원하는 사역을 맡기려 하셨습니다. 출 19 : 5 - 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찌니라” 아멘! 이 세계가 다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하나님의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세상에 분포되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유독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 왜 하필 이스라엘이냐? 하고 따질 이유도 권한도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피조물인 주제에 창조주에게 왜? 라는 질문은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미술 시간에 진흙으로 무엇을 빚던 그것은 전적으로 만드는 자의 생각이고 의지입니다. 만들다 다시 뭉개버려도 진흙은 할 말이 없습니다. 사 45 : 9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자로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진저 진흙이 토기장이를 대하여 너는 무엇을 만드느뇨 할 수 있겠으며 너의 만든 것이 너를 가리켜 그는 손이 없다 할 수 있겠느뇨” 창조주 하나님과 우리 피조물인 인간과의 관계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피조물인 주제에 창조주에게 이러쿵저러쿵 말할 자격이 없다는 뜻입니다. 아무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세상만국 중에서 제사장 나라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제사장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의 조건이 있습니다. 출 19 : 5절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입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따라가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처음 아담을 부르셨습니다. 아담에게도 같은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창 1 :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아멘! 바로 제사장의 복입니다. 땅에 충만하여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 그것은 왕 같은 제사장이 누리는 복입니다. 그런데 아담이 어떻게 하였습니까?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었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한 것입니다. 그 결과 인간의 수명도 점점 짧아졌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셨던 것은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고 영생하는 것이었지요. 아담이 하나님의 소원을 깨뜨렸고 이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스라엘 백성도 깨뜨립니다. 호 6 : 7 “저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거기서 내게 패역을 행하였느니라”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떠나셨고 이스라엘의 역사를 종결짓습니다. 혈통으로 이어졌던 육적 이스라엘의 종말입니다.
하나님은 아담 때부터 계획하셨습니다. 아담이 범죄하였을 때 이미 약속하셨습니다. 창 3 :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이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은 마지막 때입니다. 구약의 마지막 때에도 이루어졌지만 아직 온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마귀의 시험을 이기셨고 또한 십자가에서 승리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아직 마귀는 그 세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제 온전히 이루어집니까? 신약의 마지막 때입니다. 즉 계시록 때입니다. 계 12 : 5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바로 여자의 후손입니다. 그가 이긴 자가 되어 장차 만국을 다스릴 것입니다. 그 앞에 4절을 보면 그 아이를 마귀가 해하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절 “그 꼬리가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그렇지요? 하지만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 아이는 하나님 보좌 앞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하여 만국을 다스릴 철장 권세를 가지고 와서 마귀의 세력을 물리칠 것입니다.
육적 이스라엘을 끝내신 하나님은 영적 이스라엘을 창조하셨습니다. 처음에는 구약 시대 이스라엘 12 지파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초장부터 즉 아담부터 하나님을 등졌습니다. 하나님은 참고 참으시며 기다리셨지만 도무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혈통 중심의 육적 이스라엘은 망하고 끝났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예수님의 12 제자를 통하여 영적 이스라엘 12지파를 세우려 하셨습니다. 그들이 제사장 나라가 되어 만국을 구원하고 다스리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온 땅에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지상 사역을 마치고 하늘로 올라가실 때 마지막 당부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마 28 : 19 - 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아멘! 여기서도 중요한 부분은 바로 가르치고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처음 육적 이스라엘 12 지파가 하나님께로 받은 말씀도 그것이었습니다. 순종하면 너희가 세계만국 가운데서 제사장 나라가 되어 세상을 구원하고 다스릴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을 똑같이 영적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약속하신 것입니다. 벧전 2 : 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처음 아담을 불러 세우셨을 때나 육적 이스라엘을 창조하여 약속하신 것이나 영적 이스라엘을 세워 약속하신 것이 모두 동일합니다. 하나님은 12지파를 창조하시고 그들을 제사장으로 세워 생육 번성 충만하여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을 정복하여 다스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고 그들을 번성시켜 마귀세상과 싸워 이기도록 해야 합니다. 시간이 걸리는 일이지요. 더구나 하나님 백성이라 하는 선민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만들어 섬깁니다. 돌아오라고 경고하며 채찍질하고 경계해도 막무가내입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성경에서 증거하는 하나님 백성의 역사는 하나님의 원하신 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등졌습니다. 육적 이스라엘 백성이 또한 하나님을 등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영적 이스라엘 백성도 하나님을 배반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뜻이 좌절되는가? 그것이 아닙니다. 그럴 수가 없겠지요.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최종적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이 바로 요한계시록에 밝혀져 있습니다. 그것이 또한 성경에 이미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위 마지막 때가 예언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살후 2 : 1 - 2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혹 영으로나 혹 말로나 혹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아니할 그것이라” 주 강림에 대하여 즉 재림에 대하여 그동안 많은 미혹이 있어 왔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에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는 당부이지요.
여기서 분별할 수 있는 근거가 주어집니다. 3절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즉 주 재림 전에 발생할 일이 먼저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배도하는 일입니다. 둘째는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사건이 먼저 일어나기 전에는 주 재림을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세기 말에도 예수님 재림하신다고 요란을 떤 사건을 기억합니다. 해외토픽에도 나타났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소복 차림에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밤새 기다리다 아침 이슬 맞으며 힘없이 내려왔습니다. 그냥 어리석은 소동으로 끝이 났습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합니까? 성경을 모르니까 그렇습니다. 이 말씀에 뭐라 합니까? 재림 전에 배도하는 일이 있고 그리고 멸망의 사건이 일어난다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설명은 없이 그냥 오신다 하니 말하는 자나 따라가는 자가 말씀대로 모두 소경이었던 것입니다. 마 15 : 14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 목자를 탓할 계제가 아닙니다. 스스로 똑똑해지지 않으면 분별 없이 따라갑니다. 결과는 지옥행이지요.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주 재림의 순서가 그렇습니다. 배도하는 자 즉 배도자가 나타나야 하고 다음 멸망시키는 자 즉 멸망자가 나타나야 주님의 재림이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그 때가 우리가 말하는 소위 종말입니다. 말하자면 한 시대가 끝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그 때는 이제 영적 이스라엘의 종말입니다. 즉 우리 시대의 끝이지요. 그러면 다음에 누가 나타나겠습니까? 다시 육적인 이스라엘이 등장하지는 않겠지요. 이미 실패한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새 이스라엘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하나님 원하셨던 그 나라, 하나님 나라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셨고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렇게도 소망하는 영생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바로 이 배도자가 누구이며 멸망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처리되어야 온전한 구원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다시는 배반이나 멸망 같은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런 자들은 이제 완전히 제거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계 21 : 4절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뭐라 하십니까?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아멘!
오늘의 주제는 이스라엘의 창조이며 진화입니다. 말씀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의 역사는 하나님 백성의 역사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어떻게 당신의 나라를 이루려 하시는가 하는 것을 이야기해줍니다. 결국은 이루어집니다. 그 시작과 끝이 성경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시작이고 또한 끝입니다. 계획하시고 이루십니다. 우리가 때마다 기도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 : 10). 여기서 하늘은 하나님이 계시는 영계를 말하고 땅은 우리가 사는 세상 곧 육계입니다. 영계의 하나님 나라가 이곳 육계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예수님이 바라셨고 우리에게 기도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은 그렇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곳에 참된 하나님의 자녀들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참된 하나님의 자녀라고 언급한 것은 거짓 하나님의 자녀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초림 때 서기관 바리새인들을 가리켜 예수님은 독사의 자식들 즉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칭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얼마나 충격이었을까요? 자기네는 자기들만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굳게 믿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8 :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그러니 마귀 자식들이지요.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굳게 믿고 있지만 예수님은 똑같이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너희 아비는 하나님이 아니라 마귀다 하는 것이지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생각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기도하며 ‘하나님 아버지!’하고 부릅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가 왜 네 에비냐?’하고 물으신다면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예수님 초림 때 서기관 바리새인들과 똑같은 입장 아니겠습니까? 그들은 자기네 아버지가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이라고 철저히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지요. 누구 말이 맞습니까? 유대인들 말이 맞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맞습니까? 지금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며 신앙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영생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과연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영생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목자를 택하셨고 당신의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으로 시작하여 육적 이스라엘도 그리고 오늘날 영적 이스라엘도 하나님을 배반합니다. 그것이 성경이 증거하는 역사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영적 새 이스라엘로 창조되는 그 날이 옵니다. 그 날이 끝이고 또한 영원한 나라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소망하며 신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가 아버지라고 믿고 있는 그 분이 과연 나를 아들로, 자녀로 인정하고 계시는지 확인해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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