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국문과 20044009 조선숙입니다.
등업이 되지 않아서
부득이하게 다른 학생 아이디로
이렇게 올립니다.
과제를 늦게 제출하게 되어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첫 번째 : ‘전함 포템킨’
.......혁명은 전쟁이다’ 레닌 1905년
으로 시작되는 ‘전함 포템킨’은 러시아 영화사에서 여러모로 의미를 두는 영화이다.
1900년대 러시아 영화의 한 획을 그었다는 이 영화는 몽타주기법을 사용한 것으로 감독 에
이젠쉬타인을 세계적 거장으로 불리우게 했다.
1925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는 러시아 당시의 통치자, 레닌에 의해 ‘영화장려산업’이라는 이
름으로 민중선동을 위한 ‘소비에트영화’로서의 몫을 단단히 했다. 그러므로 영화는 예술성과
더불어 사회성이 선명하게 강조된다.
‘전함 포템킨’ 상영 후 평은, 사실왜곡적인 면과 혁명이 일어나야 하는 이유를 민중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방법론에 있어 1919년 레닌이 언급한 바와 같이 ‘영화는 대중선동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기 때문에 모든 예술장르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예술’이라는 측면을 극명하게
보여준 작품이었다.
영화 속으로 들어가자면 영화는 ‘무성영화’로서 총 5장으로 구성되어 있어 작금에 최고조
로 발전한 현대적 영화를 보는데 익숙한 우리에게 다소 낯설 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영화 시작과 더불어 장이 바뀔 때마다 소제목이 달아 지고 그래서 내용 유추와 더
불어 대사가 아닌 영화 전체에 흘렀던 배경음악에 무게를 더해 들음으로 사색하듯 영화를
감상할 수 있었다.
첨예한 사회주의에서도 인권을 옹호하는 이들의 용기가 발휘되는 이 영화는 자신이 추구하
는 이념을 위해 ‘스프 한 그릇에 목숨을 바치다’ 라는, 물론 상징적인 바쿠린추크의 죽음에
표현되는 이 말은 비단 어둡던 러시아 시대만의 산물은 아니다.
지구상엔 여전히 자유를 갈망하는 또 다른 포템킨의 선원들, 오대사의 시민들이 있기에 이
영화가 2007년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한 것이다.
‘전함 포템킨’은 영화를 봄에 있어 지독한 편식쟁이 였던 내가 이전에 먹었던 것 보다 아
주 근사한 맛의 영화를 보는 눈을 갖게 했다.
두 번째 : ‘병사의 발라드’
1959년 - 이 길은 도시로 통한다 -
라는 한 여인의 독백으로 시작한 영화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소전쟁에 전투 연락병으로
투입된 여인의 아들 알요사에 관한 이야기이다.
하나의 커다란 주제아래 여러 에피소드를 묶은 것처럼 이어지는 영화는 제목에서 암시하듯
시종일관 따뜻하다. 번역상의 문제일수도 있으나 거의 신파극에 가까운듯한 대사처리와 배
우들의 과장된 몸짓은 영화를 보는 내내 웃음이 지어졌다.
첫 번째 본 ‘전함포템킨’과는 시간상 50년이 흘렀고 1960년 전후의 러시아 영화사는 스탈
린이 사망하고 흐루시초프가 정권을 잡음으로 바야흐로 영화부분에서도 ‘해빙’의 시대가 된
것이다. 그것은 영화를 통해 오직 민중선동만을 목적으로 했던 이데올로기적 흐름에서 벗어
나 휴머니즘관점을 지향하기 시작한 것이다 . 그 대표작이 이 영화인 만큼 영화는 전쟁을
주제로 하고 있지만 내용은 일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소소한 만남과 관계를 통해 전쟁 건너
편에 있는 평화를 보여 주는 듯 하다.
얼마 전, ‘사랑해 파리’라는 프랑스 영화를 보았는데 총 18편의 옴니버스 형식의 영화였다.
그 18편의 주제는 ‘사랑’이었으므로 결국 각기 다른 18가지의 사랑을 본 셈이다.
‘병사의 발라드’를 보면서 그 영화가 생각난 것은 알요사가 포상휴가를 받아 어머니를 뵈
러 고향에 가는 여정에서 만난 사람, 모두에게서 다른 색깔의 사랑을 보았고 말미에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으로 끝을 맺는다.
사랑에 있어 무게 차이가 있겠냐만은 세상서 가장 큰 사랑으로 끝을 맺음 또한 시사하는
바가 있다. 물론 극히 자의적일 수 있는 나의 해석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 관한한 모두
들 이 계절 한낮의 봄빛보다 더 따뜻한 영화 라는것은 부인하지 않을 것 같다.
세 번째 : ‘안드레이 루블료프’
기독교의 ‘사순절’기간이었다. 수업을 통해 이 영화를 본 시간이....... 그래서 개인적으로 더
애정 비슷한 마음까지 품으면서 보았다.
극 흐름은 한마디로 어려웠다. 무슨 내용인가 생각할 겨를 없이 돌아가는 필름은 조금 전
화면이 무엇을 뜻하는것 이었지? 라는 스스로의 질문에 답이 빨리 안 나오자 답답해지기도
했다. 다만 정말 그나마 내가 기독교인 인것이 다행. 간간히 나오는 성경말씀이 내가 보는
흐름을 겨우 이어주었다.
영화의 제작연도인 1966년은 영화의 해빙기를 맞게 해 주었던 흐루시초프가 강제로 사임
당하고 브레즈네프가 정권을 잡음으로 영화사의 분위기는 다시 이전으로 돌아간다. 당 정책
에 부합하지 않은 영화들은 재촬영이나 상영이 금지되기에 이른 것이다.
영화는 ‘성상화가’ 세 사람을 축으로 시작하되 안드레이 루블로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과정에서 두 친구 다닐라, 키릴과 테오판네스, 세르게이, 포마, 타르타르족, 보리스 그 외 벙
어리 여자등을 통해 루블로프가 성상화를 그리고자 결심하기까지의 과정에서 수도사로서의
신앙적 갈등과 예술적 갈등이 증폭되고 꼬이면서 결국 소년 보리스가 청동종을 만드는 모습
을 보며 결심하는 것으로 맺는다.
기억나는 대사와 장면은 소년 보리스가 종을 만드는 과정에서 자신과 연령이 비슷한 아이
가 작업하는데 충실하지 않는다는 본보기로 작업 감시자에게 그 아이를 때릴것을 요구하고
매 맞는 소리를 들으면서 안드레이에게 말하는 장면이다. “매 맞는 아이 위로해 주세요. 그
게 당신들 일이니까요”.......
또한 이단의 여자가 자기 소속에서 달아나 헤엄치고 있지만 배에 탄 사제는 그녀를 건져주
지 않고 스쳐지나간다.
귀족의 일, 사제의 일, 천한 신분자들의 일이 명확하게 구분되는 중세사회의 전형 인듯한
신분관계에서 어쩌면 귀족보다 더 권위적이고 이중적이고 왜곡된 사제의 모습이 오늘날도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보아졌다.
그러나 이 모든 내용적인 면을 떠나 러시아 영화의 예술성엔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어렵다는 것은 그만큼 관객으로 사유케 하는 시간을 주는 것이다. 절제된 대사미와 영상미
는 지금 영화관에서 넘쳐나는 그 어떤 영화들보다 긴 여운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