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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쌈지 은행
오종락
아버지가 돈을 넣어 두시던 쌈지는 내겐 작은 은행이었다.
20대 초반 공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일찌감치 회사에 취직을 하였다. 그때 다달이 월급을 타면 몽땅 아버지에게 갖다 드렸다. 아버지는 내가 드린 월급봉투를 받으시며 “한 달간 고생했다.” “니가 번 돈은 한 푼도 안 쓰고 은행에 넣어 키워 주마”하셨다. 월말이면 아들이 벌어 온 돈을 세어보시면서 흐뭇한 표정을 지으셨다. 그 돈은 일정기간 아버지의 쌈지 은행에 보관되었다.
아버지가 거처하시던 사랑방 구들목 쪽에는 검은색 자물통이 달린 벽장이 하나 있었다. 그 벽장 속에는 단단한 작은 궤짝 하나가 들어 있었고, 돈과 중요한 문서는 항상 그 궤짝에 넣어 황동색 붕어 자물통을 채워 보관했다. 내가 드린 월급봉투도 쌈지에 넣어 작은 금고였던 그곳에 함께 보관해 두었다. 양곡이나 소를 판돈은 그곳에 보관하였다가 목돈이 필요할 때 사용하셨다. 또 쓰고 남은 돈은 장날이 돌아오면 큰장(대구 서문시장)에 장을 보러 가시면서 은행에 예치하였다. 70년대 초반 서문시장 좌측에는 넓은 도로를 사이에 두고 서울은행과 한일은행이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시골에서 큰장에 들러 장도 보고 은행 볼일 보기도 편리하여 아버지가 단골로 이용하시던 두 은행이었다.
내가 월급을 아버지에게 맡긴 지 일 년쯤 지났을 무렵이었다. 아버지는 ‘월급 돈을 잘 키워나가고 있다는 것을 내게 보여주며 용기를 심어주려는 듯이’,“다가오는 장날 장도 보고 은행에 같이 한번 다녀오자꾸나.”하셨다.
큰장이 서는 날 이른 아침이었다. 마을버스를 타고 큰장에 도착하자마자 아버지는 단골 은행부터 찾으셨다. 은행 창구 앞에서 한복 조끼 안주머니에서 쌈지를 끄집어내어 월급 돈을 챙긴 다음 통장과 함께 창구로 내밀었다. 매달 큰장 날 시장 오시는 길에 은행에 들러 빠짐없이 꼬박꼬박 저축해 오고 있음을 내게 보여 주려고 했던 것 같다. 은행 문을 나설 때 아버지 쌈지 은행은 나에겐 한국은행이나 다름없는 존재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은행 볼일을 마치고 시장에 들러 농기구 상회에서 쟁기날, 괭이 등 농기구를 산 후, 포목전에 들러 어머니가 부탁하신 옷감을 몇 마 뜨시고 재봉실과 흰 실타래도 사셨다. 이것저것 필요한 장보기를 마무리하고 나니 점심을 먹기는 좀 이른 시간이었다. 아버지는 “시장에 장 보러 왔다가 맨입으로 안 돌아간단다.”하시며 시장 내 빵집에서 설탕이 듬뿍 뿌려진 도넛을 한 봉지 사 주셨다. 도넛을 맛있게 먹고 있는 나를 바라보시며 아버지는 “부지런히 해라. 월급은 장가갈 밑천이 되도록 아버지가 목돈으로 키워 주마”하셨다. 그 당시 은행에 저축하는 일은 아버지가 도맡아 하셨으므로 나는 은행에 대해서는 익숙하지 못했다. 오로지 아버지의 쌈지가 바로 나의 은행이라는 굳은 믿음으로 살아왔다.
아버지의 쌈지는 두 종류가 있었다. 돈을 주로 넣어 궤짝에 보관하시던 쌈지와 평소 담배와 용돈을 함께 넣어 사용하시던 쌈지가 있었다. 돈을 넣어 보관하시던 쌈지는 바느질 솜씨가 좋으신 어머니가 세 가지 색상의 헝겊을 사용하여 재봉틀로 촘촘히 박아 고급스럽게 만든 쌈지였다. 평소에 사용하시던 쌈지는 회색 헝겊으로 만든 3단 주머니가 달린 쌈지였으며 맨 안쪽 칸에는 지폐와 동전을, 중간 칸은 담배와 곰방대를, 맨 앞쪽 낮은 칸은 작은 성냥갑이나 지프라이터 등을 넣고 다니셨다.
아버지의 쌈지는 푼돈을 써야 할 일이 생길 때마다 열리곤 했다. 어머니가 제사장을 보러 가실 때에도, 가까운 친척 아이들이 방문하여 용돈을 줄 때도, 나의 학습 준비물인 도화지나 크레파스 값을 줄 때도 풀었다 말아 넣으셨다. 아버지 쌈지에서 나온 지폐는 손때와 담배 냄새가 버무려져 특유한 향내를 풍겼다. 그 향내는 내 유년시절 아버지의 향수였고, 오늘날 고급 남성 향수보다도 더 그윽한 내음으로 내 뇌리에 깊숙이 배어있다. 아버지의 쌈지는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요술주머니라고 여겼다. 쌈지 끈이 술술 풀리면 지폐와 동전이 곧잘 나오는 것을 보면서 든든한 은행 마냥 여기며 살아왔다.
70년대 후반, 내가 공직에 입문하기 전 대기업에 다닐 때었다. 그동안 아버지의 쌈지를 통하여 모은 돈이 일천만 원을 넘었다. 그 당시로서는 매우 큰돈이었다. 아버지는 자식이 집을 일찍이 한 채 마련하는 것을 유독 좋아하시는 분이었다. “너 장가가면 곧바로 집 장만하는데 써야 하니 좀 더 모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그 무렵의 일이었다.
하루는 큰형 댁에 세 들어 살던 아주머니가 잘 아는 이쁜 처녀가 한 사람 있다며 중매를 해 주겠다고 했다. 내가 차곡차곡 저축을 하여 돈을 제법 모아 놓은 사실을 형수님을 통하여 들었던 모양이다. 아주머니가 규수 댁 부모님에게 착실한 청년이라고 소개를 하여 맞선까지 보게 되었다. 중매쟁이가 나를 그럴듯하게 소개한 영향인지, 규수 댁 부모님은 알뜰히 저축을 하고 있는 나에게 후한 점수를 주었다. 맞선을 보고 난 후 결혼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성사된 근원은 아버지의 쌈지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쌈지를 통하여 마련된 자금은 결혼 후 첫 주택 구입 자금으로 쓰였다. 월급에서 한 푼 두 푼 모은 것이 종잣돈이 되어 대구에 작은 주택을 마련하게 되었다. 집을 구입할 때 모자라는 비용은 큰방과 문간방을 별도로 전세를 놓아 충당하였다. 지방에서 근무를 하다가 집을 장만한 후 두 해가 지난 뒤 대구로 발령을 받게 되었다. 지방에서 근무할 때는 관사에서 거주하다가 대구로 막상 이사를 하려고 보니 큰방 세입자의 전세금 내줄 돈이 부족하여 한동안 고민을 했었다. 아버지는 쌈지에서 약간의 돈을 꺼내어 보태 주시면서 대안을 가르쳐 주셨다. 세입자에게 내줄 돈이 적은 문간방으로 일단 이사하는 게 좋겠다고 하셨다. 문간방에서 한두 해 살면서 큰방 전세금 내줄 돈을 마련한 후 큰방으로 이사를 했다. 아버지 쌈지 은행은 결혼의 끈을 이어주었고 집을 장만하여 이사를 할 때까지 늘 함께한 든든한 나의 은행이었다.
그 시절 아버지의 쌈지는 가장의 권위와 경제권의 상징이기도 했다. 지금은 세상이 너무나 다른 모습으로 변해 버렸다. 월급봉투에서 계좌이체 시대로 변하여 그 시절의 모습은 모두 사라지고 옛 추억 속에 남아있다. 그래도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아버지의 쌈지는 아직도 작은 은행의 형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 외환위기의 여파로 아버지가 이용하시던 두 은행도 합병으로 사라졌다. 아쉬운 마음에서 내 기억 속의 흔적으로 더듬어 보게 된다.
무심한 세상은 아버지의 시대와는 달리 쌈지의 역할도 부모의 처지도 새로운 모습으로 바꿔 놓았다. 쌈지를 신중하고 지혜롭게 풀었다가 말아 넣기도 해야 하는 부모의 입장이 되었다. 노년의 삶에 있어서 쌈지의 관리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세태인 것 같다. 바야흐로 ‘셀프 부양 시대’가 눈앞에 다가왔다고 한다. 쌈지는 생을 마감할 때까지 잘 관리해야 함은 더 이상 강조해서 무엇하겠는가. 아버지는 당신의 쌈지를 통하여 내가 어릴 적부터 소중한 가르침을 주신 것 같다. 오늘날까지 살아오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한 경제관념과 살아가는 삶의 지혜를 유산으로 물려준 게 아닌가 한다
(2016.5.28.)
첫댓글 아버지의 쌈지는 퍼내도 퍼내도 마르지 않는 우물 같은 존재였지요. 그러나 대부분의 아버지들은 자신에게만은 그 쌈지가 잘 열리지 않는 인내의 쌈지였던 것도 지금에사 느끼게 됩니다. 잘읽었습니다.
그 당시 아버님의 쌈지나 어머님의 복 주머니가 우리들에게는 은행이였지요, 잔고 걱정없이 필요할때 때를쓰면 없다던 돈이
요술 주머니 처럼튀어 나왔지요. 그 시절 나에겐 신용등급이 가장좋은 믿음직한 은행.....좋은글 감사합니다.
우리 아버지 같으신 분이 그기에도 계셨네요. 작은 궤짝, 벼루상자가 나란히 놓여있던 아버지 은행창고, 딸이 돈을 벌지 않을때도 살았다면서 잡비까지 대주시면서 우체국 저금통장에는 번 돈 보다 많았답니다. 동생과 오빠의 등록금도 손수 장만하시면서 몫이 다르다고 딸 돈은 고이고이 모으셨답니다.
옛날로 되돌아가는 느낌으로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
훌융하신 부모님 덕분에 셋방살이의 서러움을 면하셨습니다.일찍 경제관념을 교육하신것 같습니다.쌈지돈의 위력을 보는것 같습니다.많이 배웠습니다.
막내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과 기대가 잘 우러 납니다. 지나간 추억이 주마등 처럼 눈 앞에 선 하게 펼쳐지겠습니다. 그 추억 고히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어릴 때의 조부모님 모습을 뵙는 것 같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가장 기본 본이 되는 부모님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