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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감사] 1975년 납북 어부 최욱일, 2007년 귀환 - 31년만에
북한 아내의 도움으로 납북한 지 20년 만에 가족에게 보낸 눈물의 편지! | 이제 만나러 갑니다 417회 다시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70jMwJGoBfc
1975년 8월 동해상에서 조업 중 북한 경비정에 의해 납북됐다가 31년여 만에 만난
납북 어부 최욱일(67)씨와 부인 양정자(66)씨가 서로를 부여안고 하염없이 숨죽여 눈물을 흘렸다.
생사(生死)도 모른 채 지내온 한 많은 지난 세월, 통곡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남들이 들을까 봐 목놓아 울 수도 없었다.
부부는 주름이 가득하고 반백이 된 서로를 한눈에 알아봤다.
“내 한시도 당신을 잊은 적이 없소. 몸은 비록 이북에 있었지만 마음은 늘 고향에 있었소.”
납북 당시 172㎝의 키에, 64㎏의 건장한 선원이었던 최씨는 새까만 얼굴에 48㎏도 채 되지 않는 앙상한 모습이었다.
탈북 도중 당한 교통사고로 8바늘을 꿰맨 오른쪽 이마엔 피와 고름이 범벅이 된 ‘거즈(gauze)’가 아무렇게나 붙어 있었다.
얼굴과 온몸엔 시퍼런 멍도 보였다.
최씨는 납북 이듬해인 1976년 7월 함북 김책시 풍년리 남새(채소)밭 농장에 배치됐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79년 아이 둘 딸린 여자와 결혼해 1남1녀를 더 낳았다.
주변의 감시는 그래도 풀어지지 않았다. 우연히 옆집 사람과 다투다가 그 집이 자신을 감시한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최씨는 “북 체제는 기본적으로 감시와 통제요. 나더러는 잘 때도 혼자 자지 마라,
심지어 변소에 갈 때도 혼자 가지 말라고 한단 말이오”라고 말했다.
최씨는 당시 농장 일을 하면서 쌀과 옥수수가 절반씩 섞인 한 끼 200g 정도의 식량을 배급 받았다고 했다.
최씨는 “그래도 배급이 나올 때는 좋았다”고 말했다. 1995년쯤부터는 배급도 일절 끊겨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했다.
함께 납북됐다가 김책시에 살던 천왕호 선원 박상원(납북 당시 37세)씨도 1998년 굶어 죽었다고 최씨는 말했다.
이후 산으로 들로 먹을 것을 찾아 헤맸다. 최씨는 “칡뿌리는 ‘선생’이지. 토끼가 먹는 풀이라면 다 먹었다”고 말했다.
최씨는 “지금 북한은 군량미 빼곤 일반 사람들이 먹을 게 거의 없다”고 말했다.
집단 농장에서 농사를 지으면 소출이 목표량에 미치든 못 미치든 군량미는 100% 징수해가고,
온갖 토지대, 농약대, 비료대로 거둬가니 남아나는 게 없다는 것이다.
최씨는 “올해부터는 핵실험으로 한국의 비료 지원마저 끊길 테니 농사짓기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전했다.
단 3일간의 만남을 가진 최씨 부부는 3일 오전 중국 모처에서 또다시 기약할 수 없는 이별을 했다.
“나를 두고 자네 혼자 어디를 가나. 나도 데리고 가소.” 최씨가 울음을 삼켰다.
“30년 전에 잡혀간 것도 억울한데, 간신히 탈출시켰더니 정부에서 왜 도와줄 생각을 않느냐.”
양씨는 최씨의 가슴에 매달려 울부짖었다. 비행기 시각이 다가왔지만 양씨는 입만 달싹였다.
최씨는 “나는 이제 돌아갈 곳이 한국밖에 없다”며 “제발 하루 빨리 한국에 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애원했다.
납북 어부 최욱일씨 부부 31년간의 이별… 3일간의 만남
http://nabisang.tistory.com/10768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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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감사] 1975년 납북 어부 최욱일, 2007년 귀환 - 31년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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