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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인맥 - 육사 출신
황원갑 <역사소설가>
한국 현대사에서 육사 출신을 빼놓고는 거의 할 말이 없다. 그들은 8.15광복 이후 6.25동란, 5.16쿠데타, 10.26과 12.12사태에서 5.17쿠데타로 이어지는 역사의 격동기마다 이 나라의 운명을 좌우해왔다.
1946년 5월 1일 개교한 육사는 그 동안 박정희(朴正熙), 전두환(全斗煥), 노태우(盧泰愚) 3명의 대통령과 국회의장 1명, 국무총리 2명을 비롯하여 수많은 국회의원, 장차관 및 기관 단체장을 배출함으로써 그 어떤 명문대학보다 앞서는 최대 규모의 엘리트 산실 역할을 했다.
국민을 위한 국민의 군대에 파벌이 존재한다는 것은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건군 초기부터 우리 군대에는 파벌이 존재했다. 군대 내의 파벌인 군벌(軍閥)은 ‘군인의 신분으로 군인의 입장을 떠나 정치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정치군인 집단‘이다.
군벌은 단순한 침목단체가 아니다. 군벌은 특정 리더를 핵심으로 형
성되어 상호 안전과 이익을 추구하는 비공식 그룹이다. 군벌은 출신지, 출신 고교, 임관 과정, 근무지 등을 통해 형성된다. 과거에는 일부 소수에 불과한 이들 군벌이 군 핵심부에 포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므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이를테면 5.16 당시 5기생과 8기생 일부를 주축으로 한 소위 주체세력, 12.12 당시 11기생 일부와 하나회가 주축이 된 소위 신군부 등이다. 군내에 이런 파벌이 없었다면 5.16이나 12.12 같은 것은 일어나지도 않았고 성공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30년 동안 군부 통치의 어두운 그림
자가 짙게 드리웠던 것은 실로 이들 정치군인의 집단, 군벌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 군의 장교는 정규 육사 츨신, ROTC 출신, 제3사관학교
출신, 갑종간부후보생 출신, 학사장교 출신 등으로 형성되어 있다. 수적으로는 ROTC 출신이 가장 많지만 장성급 이상은 정규 육사 출신이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 사실상 군부의 핵심 세력을 이루고 있다.
창군 초기 군 수뇌부는 크게 일본군계, 만주군계, 중국군계 등 3대 파벌로 나뉘어 있었다. 이중 일본군계 중 일본 육사 출신 인맥은 이응준(李應俊), 신태영(申泰英), 김석원(金錫源), 채병덕(蔡秉德), 이종찬(李鍾贊), 이용문(李龍文), 이형근(李亨根) 장군 등으로 이들 대부분이 초창기 한국군의 수뇌부를 차지했다.
학병 출신은 김종오(金鍾五), 강영훈(姜英勳), 최영희(崔榮喜), 김웅수(金雄洙), 김성은(金聖恩) 장군 등이고, 하사관 출신은 송요찬(宋堯讚) 장군을 대표적으로 최경록(崔慶祿), 김창룡(金昌龍), 서종철(徐鍾喆), 고광도(高光道) 장군 등이다.
이들 일본군 출신은 1공화국 초기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김구(金九)의 인맥인 중국군 계열을 거세한 뒤 대체세력으로 등용함으로써 급부상하게 되었다. 그 뒤 일본군 출신 세력이 점차 비대해지자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육성한 그룹이 만주군 출신이었다. 이들 만군계는 이승만의 총애를 독차지하면서 50년대 말까지 군부를 장악하기에 이른다.
만군 출신 인맥은 다시 봉천군관학교와 신경군관학교 출신으로 나뉘는데, 봉천 출신은 정일권(丁一權), 백선엽(白善燁) 장군이 대표적이고, 신경 출신은 이주일(李周一), 김동하(金東河), 박임항(朴林恒), 박정희(朴正熙), 이한림(李翰林), 강문봉(姜文奉) 장군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중 대부분은 졸업 뒤 일본 육사에 편입하고, 광복 뒤에는 한국군 창설에 참여하여 요직을 차지했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 때 일본 육사 출신인 당시 참모총장 이종찬은 이승만 대통령의 군 동원령을 정치적 중립을 이유로 거부했다. 이 사건으로 이종찬은 해임되고 후임에 만주군 출신인 백선엽이 임명됐다. 그 뒤 이승만은 만군 출신인 서북파(평안도파) 백선엽과 동북파(함경도파) 정일권을 번갈아가며 참모총장에 앉혔다.
반면 건군 초기 중국군 계열에서는 광복군 참모장을 지낸 이범석(李範奭) 장군이 초대 국방부장관이 되었고, 일본 육사 출신이지만 광복군에 참여해 참모총장을 지낸 유동열(柳東說) 장군이 미군정 초대 통위부장, 중국군 소장이던 송호성(宋虎聲) 장군은 국방경비대 사령관이 되었다. 중국군 및 광복군 출신으로는 이들 외에 김홍일(金弘壹), 안춘생(安椿生), 최덕신(崔德新), 이성가(李成佳), 김신(金信) 장군 등이 있었으나 일본군 및 만주군 출신들에 밀려 큰 세력권을 형성할 수 없었다.
이들 일본군 및 만주군 출신과 더불어 1948년 육사 설립 이후의 졸업생들로 이뤄진 소장파인 이른바 정군파(整軍派)가 1961년 5.16까지 군부를 이끌어온 3대 인맥이었다.
한국군 최초의 간부 양성 기관은 1945년 12월 5일 개교한 군사영어학교. 이응준의 사위인 이형근이 교장, 만군파의 리더 원용덕이 부교장을 맡은 군사영어학교는 110명의 장교를 배출했는데 이 중에서 대장 8명, 중장 20명 등 68명의 장성이 나와 1960년대까지 군의 중추부를 형성했다.
군사영어학교 출신 대장으로는 이형근, 정일권, 장창국, 민기식, 김종오, 김계원, 백선엽, 최영희, 김용배 장군 등이 있었고, 장도영, 송요찬은 참모총장을 지냈다. 이들 중 일부는 5.16 이후 박정희 장군과의 친분에 따라 정 ․ 관계에 화려하게 등장, 한 시대를 주름잡았으나 10.26 뒤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무대에서 사라져버렸다.
육사의 모체인 조선경비사관학교는 1946년 5월 1일 1기생 88명이 입교식을 가졌다. 이날이 육사 개교기념일. 88명 중 60여 명은 군사영어학교 재학생이었고 20여 명은 각도 8개 연대에서 추천한 하사관이었다. 이들은 45일간의 단기교육을 받고 40명이 임관되었다.
1기 출신대장은 임충식(任忠植) ․ 서종철(徐鍾喆) 장군으로서 이들은 국방부장관까지 올라갔다. 중장은 없고 소장은 김점곤(金點坤) ․ 임부택(林富澤) ․ 황엽(黃燁) 장군 등. 5.16 당시 임부택 장군은 1군단장, 김점곤 장군은 연합참모본부장, 서종철 장군은 6관구사령관으로서 비교적 유력한 자리에 있었으나 모두 쿠데타에 가담하지는 않았다.
육사 출신으로 11기 이전까지는 2 ․ 5 ․ 8기가 두드러지게 세력을 이룬 그룹으로 꼽힌다. 반면 1기와 3 ․ 4기, 6 ․ 7기 등은 이들의 위세에 눌려 별 빛을 보지 못했다.
1946년 9월 263명이 입교, 12월에 196명이 임관한 2기는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하여 7명의 장관이 나왔고, 6명의 대장을 포함해 79명의 장성을 배출했다. 2기생 중 5.16에 적극 반대한 장군은 당시 정보학교장 한웅진(韓雄震) 준장뿐이었으며, 쿠데타가 성공하자 한신 소장이 내무부장관, 심흥선 소장이 공보부장관, 김희덕 소장이 최고위원, 조성근 준장이 건설부장관, 이존일 준장이 전북지사, 이소동 준장이 치안국장으로서 박정희 장군을 도왔다.
2기생 중 대장까지 오른 이로서 이세호 장군이 참모총장, 문형태 ․ 심흥선 ․ 한신 장군이 합참의장, 이소동 장군이 군사령관을 역임했다. 그러나 2기생 중에는 5.16초기 박정희 장군을 체포하려던 이철희 방첩대장과 이상국 사단장이 있었는가 하면,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장인인 이규동도 있다. 뿐만 아니라 뒷날 ‘야수의 마음으로 유신의 심장을 쏜’ 김재규(金載圭) 중앙정보부장도 동기생이었으니 2기생이야 말로 5.16과 10.26이라는 한국 현대사 양대 사건의 주역이라 할 수 있었다.
3기와 4기는 모두 1947년에 입교하고 졸업했다. 296명이 임관한 3기 중에서는 노재현 ․ 박희동 ․ 최세인 등 3명의 대장을 포함해 63명의 장성을 배출했다. 김현옥 ․ 양찬우 전 내무부장관, 김종수 전 수산청장, 최우근 전 의원, 고광도 전 석공사장도 3기생이다.
107명이 임관한 4기에서는 김종환 전 내무부장관이 유일한 대장. 이병형 전 합참본부장이 유일한 중장이다. 황인성 전 교통부장관, 조시형 전 농림부장관도 4기생출신 예비역소장.
1947년 12월에 입교하여 1948년 4월에 380명이 임관한 5기는10.26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던 정승화(鄭昇和) 대장을 비롯, 채명신(蔡命信) 중장 등 58명의 장성을 배출했다. 5.16 당신 해병대와 함께 실병 동원을 담당, 8기생들에게 거세당할 때까지 주체세력을 형성했던 5기생들은 6.25 후반부터 대령으로 진급했으나 5.16 당시까지 선두주자 4~ 5명만이 별을 달았을 뿐 대부분이 대령에 머물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 5기생들이 야전군의 중추인 연대장이나 사단 참모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구체적인 거사계획은 김종필(金鍾泌)을 중심으로 한 8기생들이 담당한 반면 주력부대의 지휘 출동은 5기생들이 맡았던 것이다. 8기생들에 의해 쿠데타의 리더로 옹립된 박정희 소장이 5기생들을 개별적으로 포섭, 조직을 확대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그들이 육사 생도 시절 1중대장이 박정희 대위였다는 인연이 크게 작용했다. 당시 박 중대장은 기합을 거의주지 않아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5기생 중 5.16쿠데타의 주체세력은 당시 6군단 포병사령관 문재준 대령, 공수단장 박치옥 대령, 6관구 참모장 김재춘 대령, 포병학교 한생연대장 노창점 대령, 2군사 공병참모 박기석 대령, 12사단장 박춘식 준장, 고사포여단장 송찬호 준장, 학공학교장 이원엽 대령, 5사단장 채명신 준장, 보병학교 참모장 최재명 대령, 포병단장 황종갑 대령 등이며, 이들 대부분이 평안도와 함경도 출신이었다.
그러나 5.16이 성공한 지 2개월도 못된 1961년 7월 1일 이들 대부분은 8기생과의 권력투쟁에서 패배, 반혁명이란 명목 아래 거세되고 군에서도 하차하게 됐다.
6기생은 1948년 5월 각 연대에서 우수한 사병을 선발, 3개월간 단기훈련을 마치고 임관되었다. 대장을 배출하지 못한 6기생 중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박태준(朴泰俊) 전 포항제철 회장, 국무총리이다. 박 씨는 5.16때최고회의 비서실장과 최고위원을 지내고 소장으로 예편했다.
7기생은 재학 중 경비사관학교에서 육군사관학교로 개명했다. 6개월간 교육받은 7기생은 정규반, 특별반, 후기반으로 나누어 입교했다.
8기는 5.16과 뗄 수 없는 관계다. 이들은 1960년대와 1970년대 20년간 어느 학교 어느 동기생보다 많은 국회의원, 장관, 대산, 기관장을 배출했다. 1948년 12월에 입교, 1949년 4월에 임관한 8기생은 동기생이 1355명으로 가장 많으며, 군 경력자가 없는 민간인 출신이며, 연령분포가 고르다는 특징이 있다.
8기생과 장도영(張都暎), 박정희(朴正熙)와의 인연은 6.25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장도영은 육본 정보국장, 박정희는 좌익 숙군에 걸렸다가 백선엽(白善燁), 장도영 등에 의해 구명되어 문관으로 전투정보상황실장을 맡고 잇었다. 그때 정보국에 함께 있던 8기생 그룹이 김종필(金鍾泌)을 비롯하여 전재구, 전재덕, 이병희, 이영근, 이희성, 석정선 등이었다.
김종필, 김형욱, 오치성, 김동환, 길재호, 옥창호, 신윤창, 이백일, 박원빈, 오학진, 홍종철, 장동운, 조창대, 엄병길, 이종근, 박배근 등 8기생들은 일사불란하게 박정희 소장을 정점으로 6.16을 성공시켰다. 그 뒤 1963년 1월부터 민주공화당 창당을 둘러싸고 주체 사이에 내분이 일어 친김계와 반김계로 갈라져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엿다.
예비역 중령으로 5.16을 주도한 김종필은 군정을 거쳐 민정 이후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충청도 출신 장군들을 요직에 앉히기 시작했지만 박정희 대통령과 반김계의 견제로 군부 내충청 인맥은 뿌리를 내릴 수 없었다. 동북파, 서북파 등 이북 출신 군맥과 5기생을 제거한 김종필과 8기생의 부상을 경계하던 박정희는 자신의 인맥 형성에도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1963년 민정 이양 후 자신의 출신지인 영남 인사들을 정부 및 국회 요직에 기용한 데 이어 군부 핵심부서에도 경상도 출신 장성들을 중용하기 시작했다. 김계원, 서종철, 김재규, 이소동, 정승화, 유학성, 황영시, 이희성, 백석주 등이다.
이런 배경에서 태동한 새로운 군내 인맥이 정규 육사 11기, 그 중에서도 경상도 출신 청년장교들을 핵심으로 한 하나회 군벌이었다.
8기 출신 에비역 장성은 모두 110명. 군에 복귀한 이들은 1965년부터 별을 달기 시작하여 이희성, 차규헌, 진종채 등 대장 3명을 배출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들 3명이 모두 1979년 12.12때 정승화 총장을 반대하고 전두환의 합수부 편을 들었다. 중장은 윤흥정, 이범준, 이재전, 전성각 등 4명. 소장은 강창성, 윤필용, 김종호 등. 이 중 이재전은 동기생 가운데 참모총장 감이라고 손꼽힐 정도로 장래가 촉망되던 우수한 인재였으나 10.26 당시 청와대 경호실 차장으로 잇었던 것이 불운이었다.
육사 5기 선배들을 제거했던 8기생들, 그들 자신이 20년 뒤 12.12 주도세력인 11기 후배들에게 쫓겨나는 수모를 겪을 줄 어찌 알았으랴. 승리 아니면 패배뿐인 이러한 군사문화도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짧은 ‘서울의 봄’이 시작되던 1980년 3월 초 어느 날. 보안사령관 전두화(全斗煥) 소장(11기)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마주앉은 선배 보안사령관인 강창성(姜昌成) 예비역 소장(8기)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3김 저것들이 설치고 있는데 저 사람들 가지고 어디 되겠습니까? 김종필이는 흠이 많고 경솔하며, 김영삼(金泳三)이는 아직 어려서 능력이 부족한 것 같고, 김대중(金大中)이는 사상을 도무지 믿을 수 있어야지요.”
“최규하(崔圭夏) 대통령은 참 멍청한 인물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정권을 맡길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런 사람은 그대로 놔두고 일본의 쇼군(將軍)처럼 군부가 실권을 장악한 뒤 정국을 주도해나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강창창 저 <군벌정치>)
그때 전두환이 듣고 싶은 말 대신 듣기 싫은 말만 하고 낭혼 강창성은 그해 5.17 이후 게엄사 합동수사본부로 끌려가 구속되고 만다. 보복을 당한 것이다.
강 장군과 전 장군의 악연은 이보다 7년 전인 1973년 3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보안사령관 강창성은 박 대통령의 특명으로 이른바 윤필용(尹必鏞)사건을 수사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전두환 준장 등 육사 11기 출신을 핵심으로 한 군내 비밀조직 하나회를 적잘하고 메스를 가했다. 하나회는 8기생의 발호를 막기 위해 박 대통령이 60년대 초부터 후원한 군내 사조직으로 뒷날 12.12와 5.17을 주도, 5.16에 이어 또다시 민주화를 짓밟고 군부 통치의 악순환을 불러온 5공정권의 모태였다.
당시 강창성의 수사 결과 하나회는 11기 일부, 특히 경상도 출신 장교들이 주축이 되어 장성급에서 중위까지 200여 명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1단계 수사가 마무리된 다음 손영길 준장 등 10여 명의 하나회 회원이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과 함께 군법회의에 회부되고 31명이 에편조치되었다. 그러나 2단계 수사를 건의하던 강창성은 3관구사령관으로 좌천당하고 하나회 수사는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윤필용 장군과 가깝던 손영길 준장 등만 제거되고 박종규(朴鐘圭) 경호실장과 가깝던 전두환 준장 등 하나회 핵심세력은 그대로 살아남아 1979년 10.26까지 비밀리에 성장을 지속할 수 있었다.
박 대통령이 강창성의 건의를 묵살하고 하나회 수사에 무언의 압력을 가한 이면에는 진종채(陳鍾埰_ 장군 등이 “이러다가 경상도 장군 씨가 마른다”고 호소했기 때문이란 설도 있다. 하나회가 막강한 정치군벌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박 대통령의 비호와 아울러 ‘피스톨 박’이라 불리던 당대의 세도가 박종규 경호실장, ‘정치장교들의 대부’로 알려진 윤필용 수경사령관 및 서종철, 진종채, 차규헌, 유학성, 황영시, 김시진 장군 등 군부 실력자들의 후원에 힘입은 바 컸다.
육사 11기는 1952년 1월 20일 진해에서 입교, 1955년 10월 156명이 소위로 임관했다. 이들에게는 최초의 정규 육사 출신이라는 자부심, 4년간 동고동락한 동료의식, 집권자 및 일부 선배들의 지나친 총애로 정치에 일찍 눈뜬 점 등이 특징이다. 이들은 임관 후 일선부대에 배치된 뒤에도 일부 군단장, 사단장의 지나친 우대를 받았다.
1957년 9월 7사단장으로 부임한 박정희 준장은 손영길 소위를 눈여겨보고 총애하기 시작했다. 당시 7사단에는 8기생 선두주자 강창성 중령이 정보참모, 윤필용 중령이 군수참모였다. 1960년 초 박정희 소장이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으로 재직할 때에는 손영길 대위 외 권익현, 김식 대위 등 7, 8명의 11기생이 휘하에 있었다.
전두환 대위는 스스로 찾아가서 박정희 소장의 눈에 든 케이스였다. 당시 서울문리대 ROTC 교관이던 전두환 대위는 5.16이 나자 그 이튿날 육본으로 박 장군을 찾아가 단독면담을 신청, 5.16의 당위성에 대한 설명을 듣고 곧장 육사로 달려가 후배들을 설득해 5.18 육사생도 혁명지지 시가행진을 이끌어냈다. 전 대위는 이 공으로 최고회의 의장 수석민원비서관이 된다. 역시 서울문리대 ROTC 교건이던 노태우(盧泰愚) 대위도 5.16에 동조, 곧 방첩대 정보장교로 전임된다. 당시 윤필용 중령은 최고회의 비서실장대리, 박종규 소령은 경호대장. 하나회 회원들이 승진과 보직 등 인사상 특전을 누리며 경호실, 정보부, 보안사, 수경사, 특전사 등 권력 핵심부에 대거 포진하게 된 것도 그 덕분이다.
11기는 1973년 1월 전두환, 손영길, 김복동, 최성택 등 선두그룹 4명이 첫 별을 달았고, 1년 뒤 노태우, 정호용, 이상훈, 안재석 등이 준장으로 진급했다.
윤필용사건으로 하나회가 된서리를 만났지만 뿌리 뽑힌 것은 아니었다. 박 대통령이 이이제이로 윤필용을 치고 강창성마저 쫓아낸 뒤 진종채에 이어 보안사령관이 된 전두환은 하나회 후배들을 요직에 불러앉히기 시작했다. 이 인맥이 운명의 날인 12.12 당시 각군부대에서 눈부신 활약을 했던 것이다.
1979년 10.26으로 절대권력자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자 졸지에 보호막을 상실한 정치군별 하나회는 심각한 위기감 속에서 자구책을 강구할 수박에 없었다. 더구나 군의 최고지휘자 정승화(鄭昇和) 육군참모총장은 인맥과 파벌을 몹시 싫어하는 인물이었다.
10.26 다음날 계엄사령관 정승화 총장이 가장 먼저 취한 조치는 참모차장 이희성 중장(8기)을 중정부장서리로 임명하고, 후임에 군단장 윤성민 중장(9기)을 발탁한 일이었다. 정 총장이 뒷날 기자에게 밝힌 바에 따르면 “윤 장군이 서열은 늦지만 호남 충신이 군 수뇌부에 너무 적다는 여론을 존중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사람 좋은 정 총장은 12.12로 당할 때까지 하나회는 윤필용사건 때 완전히 소멸된 줄 알았다고 했다.
또 전성각 수경사령관(8기)을 장태완 소장(종합 11기)으로 교체하고, 창와대 경호실 작ㅈ던차장보 김복동 소장(11기)을 부군단장으로 전보시키고, 정동호 준장(12기)을 경호실장에 임명했다.
그러나 당시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에게는 힘이 있었다. 함종수사본부장이 된 전두환은 보안사 및 중앙정보부의 권한 외에 검찰과 경찰의 수사권까지 장악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수족과 같은 하나회 멤버들이 일선 사단장, 연대장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당시 정규 육사 출신이 사단장의 3분의 1, 연대장의 3분의 2나 되었다. 이들 하나회를 비롯한 정규 육사 출신 전두환의 인맥이 12.12라는 결ㅈ덩적 순간에 엄청난 괴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당시 정 총장(5기) 측 장군이 3군사령관 이건영 중장(7기), 합참ㄴ본부장 문홍구 중장(9기), 수경사령관 장태완 소장(종합 11기) 등 정규 육사 이전 출신인 데 반해 전두환 소장 측 인맥은 정규 육사 출신이 절대다수 압도적이었다.
12.12를 전환점으로 군부의 헤게모니는 정규 육사 출신 소장파의 손에 완전히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이듬해 1980년 신군부는 민주화 열기로 뜨겁던 ‘서울의 봄’을 5.17 돌풍으로 무참히 짓밟고 이 땅을 또다시 어둡고 긴 군사통치의 구렁텅이로 몰아가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정규 육사 출신을 모두 매도해서는 안 된다. 소위 정치군인은 전 장교의 1%도 되지 않는다. ‘5.16은 한번으로 족하다’면서 하극상 쿠데타에 참여하기를 거부한 11기 출신 장군이 있는가 하면, 죽음을 무릅쓰고 특전사령관을 지키던 김오랑(金五郞) 소령도 육사 25기였다.
정승화 장군(1929~ 2002년) 생전에 필자에게 들려준 말이다.
“군이 정치를 해서 안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장교들이 명령과 법을 동동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10.26 직후부터 군이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정치권력의 공백기에 새로운 정치권력을 창출하는데 끼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권력지향적인 정치군인들의 하극상 쿠데타로 인해 무위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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