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편지 108신]선비들의 한여름 꽃 ‘백일홍 향연饗宴’
이 여름 ‘서원書院여행’에 기꺼이 동참해준 사돈께.
2019년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한국의 대표적인 서원 9개.
아시겠지만, 서원은 16세기 중반∼17세기 조선시대 지방 지식인들에 의해 건립된 사립 성리학 교육기관이지요.
지금이야 대학이 300개도 더 되지만, 조선시대엔 ‘성균관成均館’이 유일무이한 왕립대학교였답니다.
제가 좋아하는 표현으로는 ‘Only Royal Academy’. 초대 이사장은 당연히 태조 이성계였지요.
성균관은 조선 팔도의 관찰사들이 생원 진사시험에 합격한 선비 200명을 추천,
대과大科에 합격할 때까지 먹여주고 재워주고 용돈까지 주는 국가장학생으로 구성된 국립대학이었으며,
졸업연한도 없어 어느 선비는 20년을 성균관 대학생으로 보내기도 했지요.
오늘날의 사립대학 역할은 조선 팔도에 세워진 600여개의 서원이 했답니다.
서원은 크게 3개의 건물로 구성돼 있는 게 특징입니다.
첫째가 서원과 관련된 인물의 제향祭享을 올리기 위한 제향공간이며,
둘째가 유생들의 공부와 숙식을 위해 지은 건축물로 강학공간입니다.
마지막이 서원 관계자들의 모임과 유생들의 휴식을 위한 교류 및 유식공간의 건축물이지요
(병산서원의 만대루나 돈암서원의 산앙루 등).
그런데, 유네스코는 한국의 서원을 왜 세계유산으로 등재했을까요?
그것은 한국의 서원이야말로 인류 전체를 위해 보호되어야 할
‘뛰어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가 있다고 인정한 때문입니다.
지난주 토요일 논산의 ‘돈암서원遯巖書院’이 다섯 번째 여행지였지요.
돈암서원하면 맨먼저 ‘조선유학의 종장’으로 일컬는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1548-1631)을 떠올려야 합니다.
사계는 조선의 예절을 집대성한 『가례집람家禮輯覽』의 저자이자
율곡 이이의 제자로 기호학파를 계승한 대표적인 학자입니다.
일찍이 벼슬을 그만 두고 향리에서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냈습니다.
아들인 신독재愼獨齋(1574-1656) 김집金集, 동춘당 송준길, 송시열 등이 대표적인 제자입니다
(제향공간인 숭례사에서 네 분 배향).
김집은 성균관 문묘文廟의 ‘동방 18현(겨레의 스승 열여덟 분)’중 아버지 사계와 나란히 배향된 유일한 인물입니다.
중국 송조육현宋朝六賢중 정이程頤와 정호程顥는 형제이지만 역사이래 이렇게 칭송되는 부자父子의 경우는 없습니다.
현종때 사액을 받았으며, 흥선대원군이 650여개의 서원들에 철폐령을 내렸으나,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좌청룡우백호라고 하지만, 대둔산과 계룡산을 좌우로 두고 건립된 돈산서원은 문외한이 봐도 위치가 참 좋은 것같았지요.
큰 홍수로 원래 자리에서 이전을 했다지요. 요즘 백일홍(배롱나무) 사진찍기에 필이 충만한 사돈은
숭례사 안의 백일홍을 문이 닫힌 관계로 찍지 못해 애가 달았지요.
송시열 글씨의 ‘응도당凝道堂(1633년 건립)’은 1971년 옮겨졌다는데
건축물 자체가 예를 실천하는 건축제도의 모델이라고 했지요. 우리야 뭐가 뭔지 모르지만요.
‘정회당靜會堂’이라는 편액을 불과 8세의 신동이 썼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지요.
인근에 있는 사계선생의 묘소도 찾았지요.
묘소 앞의 검붉은 야생 복분자도 처음 따먹어보고,
종가찻집에 들러 종부가 담은 식혜 한 잔으로 무더위를 식히며
400년 되었다는 종가宗家도 둘러보는 좋은 시간을 가졌지요.
곧이어 명재明齋 윤증尹拯(1629-1714) 고택으로 차를 돌렸습니다.
조선중기 호서지방의 대표적인 양반가옥이라지만,
우리의 눈은 연못을 둘러싼 백일홍의 예쁜 자태와 나란히 나란히 항아리장꽝이었지요.
일주일 전 새벽에도 다녀갔다는 사돈의 셔터는 더욱 바빠지고,
얼마나 섬세한 사진작품이 나올지 기대도 되었지요.
백일홍의 향연, 너무 좋았습니다.
담양 명옥헌의 백일홍도 구경한 적 있지만,
군산향교의 백일홍이 백미白眉이자 장관이라는 사돈의 말에 그곳도 가보고 싶었습니다.
저도 마당 꽃밭에 백일홍 한 그루를 꼭 심을 작정입니다.
백일홍은 매화와 함께 선비들의 꽃이라 할 수 있겠지요.
익산역에서 만나 세 곳을 다니니 그새 1시가 되었군요.
길가 노성항아리보쌈집의 정식도 깔끔했습니다.
아직은 ‘현역’이므로 점심은 당연히 사돈의 몫이라는데야 “고마운 일이지요”라며 웃을 밖에요. 흐흐.
금마의 ‘가람문학관’을 가는 도중에 논산에 사는 막내매제의 전화입니다.
“형님, 탑정호에 출렁다리가 최근에 개통되었는데, 그곳을 다녀가시죠” 불감청고소원이었지요.
탑정호를 가로지르는 출렁다리는 길이가 600m나 된다해서 놀랐지요.
논산의 명물로 자리잡겠지만, 지자체들의 앞다퉈 출렁다리나 케이블카 등을 세워
관광객을 유치하는 경쟁이 좋게만은 보이지 않았지만, 개통 1주일이라니 건너면서 줄도 흔들거려보아야겠지요.
제 고향 인근인 순창에는 채계산 출렁다리가 이것보다는 더 스릴이 있으니, 기회 되면 안사돈과 함께 건너보시지요.
여행은 일정에 없던 곳이 더욱 재미를 안겨주기도 하지요.
이제 ‘현대시조의 아버지’라 불리는 가람 이병기(1891-1968)문학관으로 향했습니다.
실제로 말년인 1968년까지 사셨다는 생가는 새삼 복원을 할 필요가 없었기에 보기에 너무 좋았습니다.
고교 은사 구름재 박병순선생님으로부터 가람의 수제자라는 말을 많이 들었던 터라 익숙한 이름이었지만,
이토록 유명한 시조시인이자 국문학과 교수이자 서지학자로 학계에 영향력이 큰 인물인지는 잘 몰랐지요.
1943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고난도 겪었지만, 창씨 개명도 거부하며 우리말 사랑에 평생을 헌신한 분이었습니다.
사돈은 그분의 시조 한 편을 기억하시나요?
저는 그전부터 <젖>이라는 시조를 알고 있었습니다.
나의 무릎을 베고 마즈막 누우시든 날
쓰린 괴로움을 참하 말도 못하시고
매었든 옷고롬 풀고 가슴 내어 뵈더이다
깜안 젖꼭지는 옛날과 같으외다
나와 나의 동긔(동기) 어리든 팔구 남매
따듯한 품안에 안겨 이 젖 물고 크더이다
어떠신지요? 어머니 임종을 지켜보는데, 옷고름 풀고 내어비친 늙은 어머니의 젖을 본
팔구 남매의 소회를 이토록 절절히 운문으로 풀어내는 시조의 대가임을 알 수 있었지요.
문학관 벽에 걸려 있는 '냉이꽃'이라는 인상적인 시조도 보았지요.
<太陽이 그대로라면 地球는 어떨건가/水素彈 原子彈을 아무리 만든다더라도//
냉이꽃 한 잎에겐들/그 목숨을 뉘 넣을까>
아무리 과학이 발전하여 수소탄과 원자탄을 만든다지만
냉이꽃 한 잎에 목숨을 넣을 수 있느냐는 반문인 듯합니다.
그렇지요. 인간을 복제한다해도 꽃 한 송이를 어떻게 탄생시킬 수 있나요?
가람선생은 평소 세 가지 복이 많다며 소탈하고 행복하게 사셨다지요.
술복, 제자복, 난蘭복이 그거이라지요.
몇몇 문학관을 가보았지만, 가장 마음에 드는 문학관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인조人造가 거의 없었거든요.
미당문학관은 나로선 아예 꼴불견수준이었습니다.
당신이 살던 생가, 당신의 할아버지가 세운 초가정자인 승운당, 연못, 나무 몇 그루와 유서깊은 돌.
가람 선생의 시조집을 구해 음미해 볼 작정입니다.
지난 토요일은 실례의 말씀이지만‘전용기사’인 사돈 덕분에 또 한번 좋은 기행을 했습니다.
이번이 탐매여행을 시작으로 다섯 번째인가요?
승주 선암사, 강진 불위사, 고창 문수사, 벌교 태백산맥문학관, 보성 나철기념관,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하회마을, 필암서원과 무성서원.
이제 세계유산 서원은 네 곳만 남았군요. 올 가을 마저 다녀오십시다.
그리고 호남과 충청도의 문학관을 순례합시다.
사돈은 사진을 찍고, 저는 졸문이지만 기행문을 남기고.
나중에 어쩌다 사돈이 함께 펴내는 한 권의 책이 된다면, 이것도 흔치 않을 일이겠지요.
다음을 기약하며 줄입니다.
내내 평안하소서.
8월 9일
임실 우거에서 우천 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