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나라의 완벽한 세대교체 - 누르하치, 홍타이지, 도르곤
<그림> 홍타이지 시기 중원 침공 경로
<그림>에 보이는 중원 침공은 예외 없이 모두 산해관을 피해 화북으로 우회하여 (만리)장성의 다른 관문을 넘어 이루어졌다. 일단 중원에 진입한 부대는 신속한 약탈전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였고, 약탈이 끝나면 다시 장성을 넘어 성경盛京(심양의 만주족식 표기)으로 귀환하였다. 이는 만주 대신들의 ‘대토론’ 의견 가운데 산해관 공략 - 거점 확보의 중장기적 전략보다 산해관 우회 - 전리품 획득 중심의 단기적 전략이 채택되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총 다섯 차례의 중원 침공 모두 성경을 출발한지 보통 6개월 이내로 귀환하는 단기전이었다.
그렇다면 홍타이지는 왜 이토록 여러 차례에 걸쳐 중원 침공을 시도했을까? 그것도 산해관을 직접 돌파하지 못하고 내몽골 초원으로 멀리 우회하여 화북으로 진입하는 공격을 수차례나 되풀이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는 천총天聰 연간과 숭덕崇德 연간(둘 다 홍타이지의 다른 연호) 중원 침공의 성과를 사료에서 어떻게 적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어렵지 않게 추측해 볼 수 있다. 당시 전리품의 기록에 빠지지 않는 항목은 금, 은, 비단 등의 재화도 있지만 가장 중시된 것은 다름 아닌 인구, 즉 한인 포로였다.
누르하치의 한인 탄압 정책으로 요동 지역에는 노동 인구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태였고, 홍타이지는 농업 생산력을 높이고 인구와 토지를 재편하기 위해 “계정수전計丁授田”, “편정입장編丁立莊” 등과 같은 토지 정책을 추진함에 있어서 경작의 경험이 풍부한 한인 노동력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즉 홍타이지는 만주의 새로운 근거지가 된 요동 지역의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전문적인 농업 노동력을 확보해야 했고, 수차례에 걸친 중원 침공은 한인 포로와 가축들을 획득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공급 방식이었던 것이다.
청군은 화북 각지의 주현을 점령하더라도 수성을 고집하지 않고 인구와 재물을 약탈한 뒤 곧바로 퇴각하는 게릴라식 전술을 활용하였다. 홍타이지 시기 중원 침공은 정복이나 지배보다는 약탈이 주된 목적이었으므로 그 파괴상은 더욱 심각하였고, 그 결과 해당 지역의 민심을 크게 동요시켜 국지적인 반란을 촉발시키기도 하였다. 청군이 華北 지역을 유린함으로써 지역 사회의 황폐화와 백성의 유리流離를 초래하였고, 이것이 결과적으로 북직례와 산동 곳곳에서 토적 반란이 일어나는 배경이 된 것이다.
그러나 산해관을 얻지 못하는 한 청군은 먼 길을 우회하여 장성의 다른 관문을 돌파해야 했고, 너무 길어진 행군 경로로 인해 불의의 습격을 받거나 퇴로가 쉽게 차단당할 가능성도 상존하였다. 결국 홍타이지는 수차례 중원 침공에서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산해관을 확보하지 못한 상황에서는 결코 명을 상대로 결정타를 날릴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총 다섯 차례에 걸친 중원 침공 중에 북경성을 포위하기도 하고 기내畿內 지역과 산서 · 산동의 여러 주현을 유린하며 많은 전리품을 획득하였지만, 결국에는 하나의 성도 거점으로 유지하지 못했다. 산해관을 피해 화북으로 우회하는 행군이 명의 허를 찌르는 효과적인 전략이기는 했지만, 산해관을 확보하지 못하는 이상 진정한 의미의 정복 전쟁으로 발전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청군이 숭덕崇德 7년(1642) 4월 송산~금주(松錦) 전투에서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고 요서 지역을 거점으로 확보하자, 한인 관원들은 좀 더 과감하게 북경을 직접 공격할 것을 상주하였다. 특히 崇德 7년(1642) 9월 5일 구사어전 머르건 히야 툴라이(Tulai, 圖賴)와 조택윤祖澤潤, 그리고 머이런장긴 조가법祖可法과 장존인張存仁은 기존의 약탈전이 부유하고 지위가 높은 자들에게만 유리할 뿐이라고 지적하였다. 장령將領은 거느리는 종역從役(역졸)이 많고 부유한 자는 말이 많고 건장하니 얻는 것이 많은 반면, 가난한 군사는 그저 자기 한 몸과 말 한 필 밖에 없으니 휴대할 수 있는 것이 얼마 되지 않아 전리품의 혜택이 충분히 돌아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북경을 점령하는 것이야말로 모두를 부유하게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만주 대신들이 강조해 온 대 중국 전략의 경제적 효과를 다른 관점에서 비판한 것이다. 이미 수차례 중원 침공을 통해 상당한 재물을 획득하였고, 유적流賊의 발호로 인해 북경 일대의 방어가 취약해진 상황에서 이제는 북경을 직접 공략하고 산해관을 제어하는 것이 만주의 병사에게 더 큰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논리로 발전하였다. 차하르 몽골 복속과 조선 침공 이후 만주 내부의 역량이 빠른 속도로 강화되고, 반대로 명의 내부 사정은 잇따른 자연 재해와 유적流賊의 횡행 등으로 계속 악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한인 관원들은 새로운 대 중국 전략의 전환을 건의한 것이다.
그러나 홍타이지는 그들의 제안을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너희들이 건의한 대로 북경을 곧바로 취하라는 것은 짐의 생각으로는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북경을 취하는 것은 마치 큰 나무를 벌목하는 것과 같아서, 반드시 먼저 양쪽에서 계속 찍어 들어가면 (힘들게 밀어 넘기지 않아도) 큰 나무가 스스로 넘어질 것이다. 지금 우리는 산해관 바깥의 4개 성을 모두 취하지 못했는데 어찌 곧바로 산해관을 장악할 수 있겠는가. 지금 명국의 정병이 이미 소진되었으니 우리 군대가 사방에서 약탈을 가하면, 저들의 세력은 나날이 쇠퇴할 것이고 우리의 병력은 나날이 강해질 것이니, 그제야 비로소 북경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위 내용에 따르면, 한인 관원들의 끈질긴 북경 공략 주장에도 불구하고 홍타이지는 여전히 북경 공략에 대해 신중한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특히 북경을 취하는 것을 “큰 나무를 베는” 일에 비유한 것은 당시 홍타이지가 북경 공략을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고 있고, 한 번의 공격으로 단숨에 끝낼 수는 없다고 여긴 것으로 보인다. 홍타이지는 북경 공략에 앞서 산해관 공략을 선결 과제로 삼았고, 산해관 공략을 위해서는 산해관 외곽의 성들을 정복하여 서로의 연계를 끊어놔야 한다는 논리를 계속 활용하였다. 즉 북경이건 산해관이건 기습적으로 곧바로 나아가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고, 그 근방을 우선 점령해 놓고 이를 거점으로 사방에서 포위해 나가는 정공법에 가까운 전략을 고수하였다. 이미 천총天聰 연간부터 만주 대신들은 물론, 투항해 온 명의 서생을 비롯해 기존의 한인 관원들까지도 홍타이지에게 북경 공략을 줄기차게 요구해 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홍타이지는 여전히 기존의 약탈전을 고수하면서 자신의 신중한 관점을 쉽게 굽히지 않았던 것이다.
숭덕崇德 8년(1643) 8월 9일 홍타이지가 52세의 나이로 성경盛京(심양의 만주족식 표기)에서 돌연 사망함으로써, 중원에 대한 공격은 잠시 교착 상태에 빠졌다. 홍타이지는 생전에 후계자를 결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거론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위 계승 문제를 놓고 심각한 권력 투쟁이 전개될 조짐이 보였다. 홍타이지의 아들 11명 중 8명이 남아 있었고, 누르하치의 12子이자 홍타이지의 이복형제였던 무영군왕 아지거, 14子 화석예친왕 도르곤, 15子 화석예친왕 도도, 그리고 홍타이지의 종형제 화석정친왕 지르갈랑 등 도 잠재적인 경쟁자였다.
홍타이지가 사망한 지 5일 후 숭덕崇德 8년(1643) 8월 14일 새로운 황제를 세우기 위한 팔기 왕공대신 회의가 盛京의 숭정전崇政殿에서 열렸다. 숭정전 회의는 홍타이지의 아들을 추대하고자 하는 양황기 장영의 무장 시위로 시작되어, 다이샨의 호오거 추대와 호오거의 고사, 양황기 장영의 위협적인 발언과 도르곤의 저지, 아지거와 도도의 도르곤 추대와 도르곤의 사양, 도도의 자천과 반대, 그리고 도르곤의 풀린(Fulin, 福臨) 추대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황위의 계승 자격을 先帝의 아들로 못 박은 양황기 장영의 주장은 도르곤을 비롯한 홍타이지 형제의 후보 자격을 제한하였다. 도르곤은 이를 수용고 장비莊妃 소생의 제9子, 여섯 살에 불과한 풀린을 추대하였던 것이다. 풀린의 즉위는 당시 청 조정 내부의 권력 투쟁을 최소화하기 위한 최선의 결정이었다고 평가된다.
섭정을 시작한 지르갈랑과 도르곤은 제왕諸王과 버일러들이 참여하는 기존 합의 정치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효율적인 국정 운영을 명목으로, 숭덕崇德 8년(1643) 12월 제왕諸王과 버일러가 맡고 있던 6부의 관할권을 회수하여 일반 대신에게 부여하려 하였다. 이 과정에서 두 섭정왕과 만주 제왕諸王, 그리고 대신들 간의 신경전이 벌어졌으나 결국 6부의 업무는 제왕諸王과 버일러의 손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지르갈랑과 도르곤 두 섭정왕의 권위와 국정 장악력은 크게 제고되었다.
그런데 해가 바뀌고 새로운 연호를 쓰게 된 순치順治 원년(1644) 정월 10일 지르갈랑은 돌연 내삼원內三院, 6부, 도찰원都察院, 이번원理藩院의 당관堂官에게 영지令旨를 내려, 앞으로 각 아문이 처리하는 업무를 보고할 때 도르곤에게 먼저 보고하고 당안檔案에도 도르곤의 이름을 먼저 적도록 지시하였다. 공동 섭정왕 지르갈랑이 이렇게 스스로 도르곤의 뒤로 물러서는 모습을 보인 이유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좌위坐立의 반차班次(반열) 및 행례行禮의 의주儀注(의논과 참조)는 전례대로 행하라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정책의 입안과 결재의 우선권만을 도르곤에게 넘긴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향후 대명對明 전략과 그 실행도 섭정왕 도르곤의 의지와 결정에 더 큰 무게가 실리게 되었다.
홍타이지 사후 전열을 가다듬은 청 조정이 재차 명에 대한 약탈전을 준비하고 있을 때, 개주蓋州에서 요양을 취하고 있던 내비서원內秘書院 대학사大學士 범문정范文程이 순치順治 원년(1644) 4월 4일 도르곤에게 계(상소)를 올려 당시의 시국을 분석하고 향후 청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건의하였다. 유구流寇(각지에서 이동하는 도적떼)가 서쪽에 자리잡고 수륙의 도적떼가 남쪽을 위협하고 있으며, 병사와 백성(兵民)이 북쪽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청의 군대가 동쪽을 정벌하고 있는 가운데, 사방에서 적을 맞이하고 있는 명의 운명은 그 어느 때보다 위태로우니, 지금이야말로 섭정 제왕諸王이 공을 세울 절호의 기회라고 호소하였다. 특히 지금 유구流寇가 중원을 유린하고 있는 상황을 보면 마치 진秦이 민심을 잃자 초楚와 한漢이 다투어 일어난 것과 같기 때문에, 청은 당장 명과 천하를 다투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향후에는 결국 유구流寇와 각축을 벌이게 될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그리고 유구流寇와의 대결에서 승리하려면 단순히 강한 군대를 믿는 것보다는, 기율을 바로 세워 명과 유구流寇로 인해 피폐해진 백성을 적극적으로 포용하고 안무하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정복 지역의 관원은 원래의 관직을 유지시켜 주고 민인은 생업을 보장해 주되 현능한 자를 기용하면 모든 사람이 청으로 와 귀순할 것이고, 이를 기반으로 유구流寇를 몰아내면 이번에야말로 대업을 세울 수 있다고 건의하였다. 그리고 이번 원정은 북경으로 곧바로 치고 들어가든, 아니면 하나하나 주변의 성을 취하면서 전진하든지 간에, 중원에 진입한 후에는 산해관 이서 지역에 단단한 성 하나를 골라 병사를 주둔시켜 굳게 지킴으로써 군대가 왕래할 때의 거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상 범문정이 도르곤에게 올린 건의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실 앞서 한인 서생과 관원들이 홍타이지에게 올렸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그 때의 상황과 지금이 다른 점은 ①명의 국내 사정이 예전보다 훨씬 악화되었다는 점, ② 청이 산해관 이동의 금주와 영원 등을 거점으로 확보하였다는 점, 그리고 ③ 화북으로 우회하는 중원 침공에 많은 경험과 요령이 생겼다는 점 등 모두 청에게는 유리하고 명에게는 불리한 상황이 훨씬 심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도르곤은 곧바로 범문정을 성경盛京으로 돌아오게 하였고 범문정은 제왕諸王을 알현하고 다음과 같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자고로 살육을 좋아하는 자가 천하를 얻은 경우는 없습니다. 만약 국가가 단지 관동關東만을 얻고자 한다면 마땅히 공격과 노략질(攻掠)을 함께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중국을 통일하고자 한다면 백성을 편안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누르하치와 홍타이지에 이어 이제는 순치제順治帝와 도르곤을 위해 범문정이 줄기차게 내놓고 있는 주장은 관외關外에 머물 것이 아니라 중원에 진출하여 새로운 대업을 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범문정은 중원의 농민군과 연합하여 명의 혼란을 극대화하려 한 기존 청 조정의 입장과 달리, 이자성의 농민군을 연합의 대상이 아닌 명백한 경쟁 상대 혹은 적으로 간주하였다.
범문정은 기존 농민군과의 연합 노선을 반대하고 백성을 피폐하게 만드는 것은 명이나 농민군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며, 이들 사이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는 약탈 일변도의 태도를 버리고 백성의 생업을 보장해 주는 전략으로 선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사실 범문정이 지금까지 이렇듯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그의 생각을 드러낸 적은 없었다. 범문정은 10여 년 전에 홍타이지에게 명의 백성에 대한 살육을 멈추자고 청한 적이 있었지만 홍타이지에게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도르곤은 홍타이지와 달리 범문정의 건의를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이를 직접 실행에 옮겼다. 정당한 대의명분과 적절한 타이밍의 외부 원정은 내부적으로 최고의 권력을 완성해 가고 있던 섭정왕 도르곤에게 화룡점정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보면서도 참 청나라는 하늘이 내린 나라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완벽한 세대교체 내용입니다. 본문을 다 읽기 싫어서 내린 분들을 위해 요약해 드리자면,
누르하치는 후금 건국 이후에도 만주족 우선주의를 버리지 못해 한인 농민들을 탄압했고 그 결과 소빙기 때문에 가뜩이나 양식도 적은 판국에 내부적으로 한인의 반란이 일어나는 등 후금이 뿌리째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첫번째 링크 참조)
이 위기를 홍타이지는 한인 차별 폐지와 더불어 명, 조선에 대한 약탈전, 그리고 한인 농민의 강제 이주를 통한 생산력 향상으로 극복하면서 북경 및 산해관 공략에 필요한 성들을 차근차근 점령하는 한편 한인 문사들의 북경 점령 요청은 청나라의 정황상 시기상조라고 생각하며 주변의 성들을 공략한다는 정공법만 고집하면서 묵살해버립니다.
이 정책들이 효과를 보여 산해관 코앞인 송산, 금주까지 점령하였으나 여전히 홍타이지가 신중론을 고수하던 시점에서 홍타이지가 갑작스럽게 돌연사(1643)하고 후계자 결정 회의가 열리게 됩니다. 제위를 둘러싸고 여러 제왕諸王들과 버일러들이 충분히 대립할 수 있었던 상황에서 홍타이지의 아들인 아이신기오로 풀린을 새로운 황제로 추대하기로 합의했고 이후에는 6살짜리 왕 풀린을 대신해 섭정왕인 도르곤과 지르갈랑이 행정 서무(6부)의 권한을 장악하며 제왕들의 정책 개입을 막아냅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대단한 수준인데 이듬해(1644)에는 지르갈랑이 자신이 명나라 공략에 부족함을 느끼고 도르곤에게 대 명나라 정책의 입안과 결정권을 양도합니다. 이런 시국을 보고 때가 왔다고 느낀 것인지 한인 대학사 범문정이 일찍이 홍타이지에게 건의했으나 그토록 무시당했던 북경 공략 계책을 다시 상주하게 되고 여기에 기존에 명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이자성과 연합하려던 청나라의 정책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합니다. 사실상 홍타이지의 계승자나 마찬가지였던 도르곤은 대의명분과 대외원정의 성과를 동시에 확보하여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자 범문정의 건의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다들 아시다시피 투항한 오삼계(3만)와 청(10만)의 연합군이 이자성의 20만을 일대 회전에서 격파하면서 청의 입관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 무슨 미친 타이밍인지, 소설로 써도 이런식으로 쓰면 좀 그럴듯하게 쓰라고 까일 일들이 청나라 초기에선 버젓이 일어났다는게 동시기 조선의 계승과정과 전대의 똥이 후대의 왕들에게 전가되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움과 찬탄이 저절로 나오게 되는 글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