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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규원 시인의 詩 그리고 詩作法
<겨울 숲을 바라보며>
겨울 숲을 바라보며
완전히 벗어버린
이 스산한 그러나 느닷없이 죄를 얻어
우리를 아름답게 하는 겨울의
한 순간을 들판에서 만난다.
누구나 함부로 벗어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욱 누구나 함부로 완전히
벗어버릴 수 없는
이 처참한 선택을
겨울 숲을 바라보며, 벗어버린 나무들을 보며, 나는
이곳에서 인간이기 때문에
한 벌의 죄를 더 얻는다.
한 벌의 죄를 더 겹쳐 입고
겨울의 들판에 선 나는
종일 죄, 죄 하며 내리는
눈보라 속에 놓인다.
<나무와 허공>
잎이 가지를 떠난다
하늘이 그 자리를
허공에 맡긴다
<새와 나무>
어제 내린 눈이 어제에 있지 않고
오늘 위에 쌓여 있습니다
눈은 그래도 여전히 희고 부드럽고
개나리 울타리 근처에서 찍히는
새의 발자국에는 깊이가 생기고 있습니다
어제의 새들은 그러나 발자국만
오늘 위에 있고 몸은
어제 위의 눈에서 거닐고 있습니다
작은 돌들은 아직도 여기에
있었다거나 있다거나 하지 않고
나무들은 모두 눈을 뚫고 서서
잎 하나 없는 가지를 가지의 허공과
허공의 가지 사이에 집어넣고 있습니다
<만물은 흔들리면서>
만물은 흔들리면서 흔들리는 만큼
튼튼한 줄기를 얻고
잎은 흔들려서 스스로
살아있는 잎인 것을 증명한다.
바람은 오늘도 분다.
수만의 잎은 제각기
잎을 엮는 하루를 가누고
들판의 슬픔 들판의 고독 들판의 고통
그리고 들판의 말똥도
다른 곳에서
각각 자기와 만나고 있다.
피하지 마라
빈 들에 가서 비로서 깨닫는 그것
우리는 늘 흔들리고 있음을.
<아이와 망초>
길을 가다 아이가 허리를 굽혀
돌 하나를 집어 들었다
돌이 사라진 자리는 젖고
돌 없이 어두워졌다
아이는 한 손으로 돌을 허공으로
던졌다 받았다를 몇 번
반복했다 그 때마다 날개를
몸 속에 넣은 돌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허공은 돌이 지나갔다는 사실을
스스로 지웠다
아이의 손에 멈춘 돌은
잠시 혼자 빛났다
아이가 몇 걸음 가다
돌을 길가에 버렸다
돌은 길가의 망초 옆에
발을 몸속에 넣고
멈추어 섰다
<유리창과 빗방울>
빗방울 하나가 유리창에 척 달라붙었습니다
순간 유리창에 잔뜩 붙어 있던 적막이 한꺼번에 후두둑 떨어졌습니다
빗방울이 이번에는 둘 셋 넷 그리고 다섯 여섯 이렇게 왁자하게 달라붙었습니다
한동안 빗방울은 그리고는 소식이 없었습니다
유리창에는 빗방울 위에까지 다시 적막이 잔뜩 달라붙었습니다
유리창은 그러나 여전히 하얗게 반짝였습니다
빗방울 하나가 다시 적막을 한 군데 뜯어내고
유리창에 척 달라붙었습니다.
<발자국과 깊이>
어제는 펑펑 흰 눈이 내려 눈부셨고
오늘은 여전히 하얗게 쌓여 있어 눈부시다
뜰에서는 박새 한 마리가
자기가 찍은 발자국의 깊이를 보고 있다
깊이를 보고 있는 박새가
깊이보다 먼저 눈부시다
기다렸다는 듯이 저만치 앞서 가던
박새 한 마리 눈 위에 붙어 있는
자기의 그림자를 뜯어내어 몸에 붙이고
불쑥 날아오른다 그리고
허공 속으로 들어가 자신을 지워버린다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허공이 눈부시다
<오규원 시인의 詩作法>
"시는 배제와 선택으로부터 그 생명이 시작된다."
"시적 묘사는 근본적으로 언어를 회화적인 방향으로 가시화하고, 시적 진술은 독백의 양상으로 가청화한다. 시적 묘사가 可視的·提示的·感覺的이라면, 시적 진술은 可聽的· 告白的·解釋的 성향, 관조를 통한 감지 쪽이다."
▶ 글쓰기란, 글쓰기의 하나인 詩作이란, 눈에 띄는 대로 생각되는 대로, 적는 행위가 아니다...시에서의 미적 인식이란, 일상적이고 기계적인 우리들의 삶 속에 파묻혀 있는 세계를 관찰하고 느끼고 그것을 언어로 드러내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는 데 적절한 언어만이 살아 있는 예술적 언어들이다...시란 감정의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세계가 숨기고 있는 모든 가치로운 것들을 감지하고 표현하는 예술 형식이다. 그런 까닭으로 시에는 푸념이나 혼잣소리가 끼어들 틈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그런 감정의 세계이다. 시란 "감정의 해방이 아니고 감정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엘리어트의 말을 이런 점에서도 귀담아둘 필요가 있다.
▶ 시는 '전면적'으로 의사 소통을 꿈꾸는 언어이다. 시는 작가의 감정과 태도만을 표현하는 언어 행위도 아니고 개념적 의미의 정보만을 전달하는 것도 아닌, 그 자체로 하나의 완성된 언어적 세계인 탓이다...시에도 물론 논리가 있다. 그러나 그 논리는 "내재적 요소의 어울림에 의한 긴장"이나 시점이 드러내는 일관성 뒤에 숨어 있는 구조적 기반일 뿐이다. 시는 감지한 사실의 형상화이지 감지한 사실을 논리화하는 공간은 아니다...시적 대상과의 심리적 거리가 미적 지각에 필요한 작가의 적절한 태도의 문제라면, 시적 대상과 관점과의 문제는 감지의 시각 angle of vision 과 관련되어 있다...관점은 'a view'의 의미다. 그러니까 인생관 a view of life, 세계관 a view of the world 처럼 하나의 觀을 암시한다. 이와 달리 시점은 'point of view'의 의미이다. 그러니까 관점 속의 시각들이다.
▶ 시적 언술, 즉 시적 표현은 장식하는 데 있지 않고, 가려져 있거나 벗어나 있거나 왜곡되어 있는 사물의 본질과 현상을 드러내는 데 있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말하는 '낯설게 하기'란 바로 관습과 왜곡을 벗겨내기 위한 시각 확보와 다르지 않다...우리들은 사실을 완벽하게 기술할 수는 없다. 우리들 그 누구도, 그 누구의 세계관도 세계 속의 모든 것을 포괄할 만큼 그렇게 큰 폭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을 잘못 해석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사실을 다 기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작품 속의 사실은 그러므로 배제와 선택의 사실이며, 그것도 사실대로가 아니라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배제와 선택 그 자체가 인식인 것은 이와 같은 연유에서이다.
▶ 작품 속에 나타나는 상식과 사실은 전혀 다르다. 작품 속의 상식은 작품 밖에 있을 때와 다름없는 거죽 지식이지만, 사실은 느낌feeling을 구체화하는 존재이다...작품 속의 사실적 존재나 현상은, 그것들이 이미 허구인 예술 작품 속으로 공간 이동을 한 만큼,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구체화하는 형상적 존재들이다. 작가는 이런 형상, 이런 형상화를 통해 말한다.
▶ 풍자는 사실적 지각에 의한 직접적인 제시의 세계가 아니라 기지·반어·냉소·조롱의 방법적 수용에 의해 빗대어 공격하는 정신의 세계이다. 이 풍자의 세계에 들어온 사실적 존재들은 풍자를 구성하는 풍자적 또는 우화적 요소(사실적 요소가 아닌)로 변모하여 사실적인 가면을 쓴 관념이 된다...피상적·추상적·기계적·장식적 지각의 작품은 인식 부족의 소산이고, 또 그만큼 덜 형상화된 작품의 형태를 보여준다...사실적·감각적·풍자적·해석적 유형은 각각 그 나름의 아름다운 미적 인식을 보여준다...후자의 유형에 속한다면, 유형으로부터 발생하는 우열은 없다고 보아야 한다. 유형은 사고의 깊이와 넓이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 태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 연상으로 이루어지는 세계의 아름다움은 연상의 구체화이지 연상의 근거를 구차스런 구절로 설명하는 데 있지 않다...'무지와 무능 때문에 죽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는 극히 私的인 고백이다. 이상의 「絶壁」은 꽃과 향기로 상징되는 세계로 이끌리는 의식의 운동을 정교하게 조직하고 있지만, 습작시 「낭떠리지」는 삶의 방향 감각과 욕망을 잃어버린 개인의 사사로운 고백이다....많은 사람들이, 특히 습작기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낭떠러지」와 유사하게 사사로운 일을 장식적이고 현학적인 말로 미화하는 형태로 시를 쓰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읽고 싶어하고 또 언어 예술인 시가 요구하는 것은 私談도 사담적인 내용을 어려운 말로 미화하는 솜씨도 아닌 시적 인식이다. 시적 인식이란 그 양상이 어떻든 누구나 듣고 싶어하고(사담은 개개인에게는 중요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그런 것은 아니다), 알고 싶어하고, 깨닫고 싶어하는 세계에 대한 새롭고도 구체적인 깨달음이다. 언어로 표현하기 이전에는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던, 그렇기 때문에 시인의 표현 행위의 결과로 현실적으로 비로소 존재하게 된 그리고 형상화된 세계이다....많은 시인의 시에 나타나는 사담적 측면은 사담적 형식만 차용하고 있는 것이지, 사담적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상의 「絶壁」도 외형상으로는 사담적 성격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담적 형식을 빌어 비사담적인 인식을 친근한 사담적 형식으로 표현하는 데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흔히 작품 속의 시적 화자가 '나'라는 형태일 때 사담적 형태로 보이나, 그것은 외형적인 것일 뿐이다. 시적 공간은 체험과 상상을 통한 재구성·재창조의 공간이지 사담처럼 말하고 싶은 모든 것을 무분별하게 쏟아놓는 고백의 공간은 아니다.
▶ 시는 어디까지나 절제된 언어로 된 세계이다. 시가 비유와 상징을 적극적으로 차용하는 것도 절제된 언어로 세계를 인식하려는 양식상의 미덕을 기초로 하고 있는 탓이다...습작시의 '우리들의 웃음'이라는 구절에서 피에로적 속성을 드러내고자 할 때는, 그런 특정한 삶의 국면이 함께 있어야 설득력이 있다.
▶ 뒤집어 말한다면 명시적으로 논거를 제시하거나 설명할 경우 그 명시적 표현의 한계 안에 갇히게 될 상상력을, 그런 표현을 생략함으로써 오히려 자유롭게 증폭시키는 역할을 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시적 진술은, 그러므로 묘사 못지않게, 우리들 정서의 밑바닥에 자리잡고 있는 상투적인 의미 체계에 새로운 충격을 줄 수 있는 깨달음을 동반하는 표현이어야 한다...이럴 때 가장 적절한 지적은 "시는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감정으로부터의 도피"라는 엘리어트의 말이다. 시도 그 나름대로 세계를 인식하는 한 양식이다. 그런 만큼 그 속에서 우리는 인식의 내용을 요구한다. 다시 말하면 독자인 우리로서는 인식하지 못했으나 시인이 인식한 어떤 것, 또는 다른 시인이 인식하지 못한 어떤 것이 그 속에 함유되어 있기를 희망한다...습작시 「상처」의 작가는 가슴속에 응어리진 감정을 모두 다 쏟아내었으므로 가슴이 후련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읽는 독자인 우리는 기대한 새로운 깨달음과 만날 수 없으므로 실망하게 되고, 과연 이러한 감정적 표현도 시인가라는 질문 속에 빠진다.
▶ 시적 묘사의 구조는 대체로 두 가지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 첫째 시적 묘사는 대상에 대한 관찰을 축으로 하고 있으므로 관찰의 시각이 일차적으로 작품의 구조를 결정한다. 때문에 고정 시점·이동 시점·회전 시점·영상 조립 시점 등이 작품의 구조로 나타난다. 둘째 관찰하는 대상이 어떤 성질의 것이냐에 따라 구조가 달라진다. 즉 서경적 대상이냐 서사적 대상이냐, 아니면 심상적 대상이냐에 따라 달라진다...그러나 시적 진술은 관찰이 작품의 축이 아니라 해명이 작품의 축이다. 그 해명이 독백의 형태를 하고 있거나, 권유의 형태나 해석의 형태를 하고 있거나, 어떻든 이 모두는 自省이라는 깨달음을 핵으로 갖고 있다. 그 깨달음은 가시적이고 감각적인 형태의 어떤 것이 아니라 관념적인 형태의 어떤 것이다. 보여줄 수 있기보다 들려줄 수 있는 어떤 것이다.
▶ 시를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김소월 '먼 후일']과 같이 일상적 언술과 가까워질수록 화자의 언술도 그와 같이 담백해지며, 일상적 어투의 진술이 나타나게 된다. 이 점 때문에 자칫하면 시의 구조가 느슨하게 될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박재삼 '수정가']와 같은 독백의 유형은 전형적인 서정시의 형태이다. 시인이 '나'라는 화자를 선택하든 다른 가면을 쓴 화자를 선택하든, 이 독백의 형태는 화자가 감상적·피상적·추상적 진술에 빠지기 쉬우므로 시인 스스로가 제어해야 한다. 시란 그런 종류의 언술이 아닌 까닭이다. [김영태 '노래 1']은 묘사형의 시가 흔히 보여주는 형태이다. 이런 유형은 감상이나 관념에 빠질 위험이 적은 대신 무의미한 정황을 펼쳐놓은 가능성이 많다. 또한 대상의 지배적인 인상 또는 심상을 감지하지 못할 때 작품이 무미건조하게 될 위험성도 상존한다.
▶ 시에서 묘사라는 수사법이 강조되는 것도 그와 같은 쟝르적 특성(위험 부담)을 이겨내기 위한 자주적·자구적 장치이다. 묘사는 그런 위험 부담을 줄여주면서 대상을 감각적으로 드러내는 데 가장 적합한 수사법이기 때문이다...시에서의 語調란 시인의 어조가 아니라 화자의 어조이다. 화자를 통해, 시란 현실적 공간이 아닌 어디까지나 창조적 허구의 공간임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 시인이 수많은 탈을 쓰고 언술을 하는 데는 그만한 근거가 있다. ① 시인이 어떤 유형의 인물(화자)이나 관념·사물의 입장에 섬으로써 세계를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이야기할 수 있으며, ② 화자로 선택한 인물이나 관념 또는 사물이 거느리고 있는 의미 체계를 인유적 또는 비유적으로 수렴할 수 있으며, ③ 시적 국면에 어울리는 화자와 그 어조를 동시에 살려서 형식화할 수 있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 比喩figure란 에이브럼즈의 표현을 그대로 빌면, 한 언어의 화자가 어떤 특별한 의미나 효과를 얻기 위해 일상적인 또는 보편적인 그 단어의 의미와 그 단어의 연결체로부터 벗어나는 표현 형태를 말한다..."길이 있다."와 같은 축어적 표현literal expression의 의미를 문자적 의미literal meaning라 하고, "길이 꿈처럼 있다."는 비유에 의해 일상적이거나 보편적인 의미로부터 벗어나 있다...한 언어의 화자speaker of a language에 의해 파악된 다른 말(꿈)의 해석을 받아 (길이) 새로운 비유적 의미figurative meaning라는 특별한 의미망을 갖게 된다...비유에는 의미의 비유(figures of thought), 즉 단어의 문자적 의미literary meaning에 뚜렷한 의미의 변화를 가져오는 비유가있고, 말의 비유(figures of speech), 즉 단어를 잘 배열함으로써 특별한 효과를 가져오는 비유가 있다...비유, 즉 특정의 언어 결합은 인접성contiguity과 유사성similarity에 의해 이루어진다...비유를 기교의 차원에서 보지 말아달라는 말을 해두고 싶어서이다. 비유는 기교의 차원이 아니라 인식의 차원에서 이루어질 때 비로소 진정한 몫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 은유에는 죽은 은유 dead metaphor가 있다. 은유의 구조이기는 하나 이미 상식화되어 있는 것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것은 상식화되어 은유로 읽히지 않기 때문이다...상식적인 비유를 시 속에 표현하는 경우는 표현 그 자체에 문제가 있다기보다 이런 표현을 하는 작가의 의식이 상식 차원에 머물고 있다는 데 유의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한 번 밝힌 바를 다시 강조하자면, 비유란 단순히 표현의 기교가 아니라 세계 인식의 깊이와 넓이 그 자체여야 하는 것이다...隱喩 metaphor 는, 직유와 달리, 연결어가 없는 비유이다. 그러니까 원관념을 A라고 하고 보조관념을 B라고 할 때, B 같은 A에서 '같은'이라는 연결어가 없는 형태이다...은유에는 연결어가 없는 만큼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결합 상태가 직접적이다. 직접적인 만큼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에 강한 탄력이 생긴다. 그 탄력은 두 개의 관념이 가지고 있는 차이성과 유사성이 서로 부딪치며 이룩해내는 새로운 의미론적 전이와 의미 발생의 磁場이다.
▶ 置換 은유 epiphor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은유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A=B 또는 A의 B라는 비유 형태가 그 기본이다. 어원적으로 말한다면, 아직은 모호하고 또 불확실한 원관념이 이미 잘 알려져 있고 보다 구체적인 보조관념에 의해 새로운epi 의미론적 이동phora을 하는 것이다...竝置 은유 diaphor는 치환 은유와 달리 'A는 B이다' 또는 'A의 B'라는 식의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는 시구와 시구를 병치함으로써 그 시구와 시구가 창출하는 독특한 의미론적 전이의 형태를 말하는 것이다.
▶ 象徵symbol은 직유나 은유에서 원관념이 숨고 보조관념만 나타나 있는 형태이다...개인적 상징personal symbol 시인들이 사적으로 '어떤 것이 다른 것을 의미'하도록 사용하는 경우, 대중적 상징public symbol 제도적 또는 문화적 전통 속의 상징을 빌어 사용하는 경우, 원형적 상징archetypal symbol 모든 인간에게 유사한 의미나 반응을 환기하는 이미지나 話素를 사용하는 경우, 상징은 단순히 말바꾸기 놀이가 아니다.
▶ 活喩 personification는 인간이 아닌 사물이나 추상 개념에 인간적인 요소를 부여하여 표현하는 비유법이다. 그럴 때 대상(사물이나 추상 개념)은 感情移入이 되어 생동감을 갖는다...활유에는 형태상 완전한 의인화 perfect personification와 불완전한 의인화 imperfect personification가 있다. 완전한 의인화는 대상에 인간적 속성이 완전히 부여되어 있는 형태, 불완전한 의인화는 부분적으로 인간의 속성이 부여되고 있는 형태이다. 그러니까 이 분류는 단지 형태상의 차이다...引喩 allusion는 잘 알려진 시가·문장·어구·인명 등을 적절히 인용하여 자기의 의도를 살리는 방법이다. 인유는 그러한 역사적·문화적 자산을 끌어들임으로써 과거의 의미와 새로운 의미를 중첩시켜 독특한 의미론적 문맥을 형성하는 것이다.
▶ 提喩 synecdoche는 사물의 일부로써 그 사물의 전체를 나타내는 비유이다...換喩 metonymy는 사물의 일부로써 그 사물과 관계가 깊은 다른 어떤 것을 나타낸다. a) 빵(음식물의 일부) → (음식물의 전체) ―제유, b) 백의(옷의 일부) → (백의와 관계깊은, 한국인의 정신) ―환유...a)에서는 일부와 전체이지만 사물 그 자체를 나타내는 데는 변화가 없다. 그러나 b)에서는 옷(백의)이 옷과 전혀 다른 한국인의 정신을 나타낸다. 이와 같이 제유와 환유는 둘 모두 보조관념만 나타나 있고 원관념(음식물, 한국의 정신)이 숨어 있다는 점에서 상징과 유사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 상징과 다른 점이 있다면 숨어 있는 원관념을 쉽게 알 수 있고, 상징과 달리 원관념이 여럿일 수가 없다는 점이다. 즉, 상징의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多數:1이라면, 제유와 환유는 1:1의 관계이다
▶ 제유와 환유는 인정성의 비유 figures of contiguity라는 점이다. 앞서 살펴본 비유들이 유사성의 비유 figures of similarity, 즉 차이성 속의 유사성이 비유 발생의 근거가 되었지만, 이들 경우에는 일종의 인접 상태가 비유의 근거가 되고 있는 것이다. 빵은 음식물과 다른 존재, 즉 차이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음식물 그 자체이다. 즉 음식물(유개념)의 하나(종개념)이다. 다른 수많은 음식물들과 마찬가지로 음식물이라는 유개념을 둘러싸고 있는 인접 사물의 하나이다. 흰옷[白衣]은 한국인과 유사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흰옷과 한국인은 그 자체로서는 사실상 차이성 속의 유사성이 별로 없다. 그러나 흰옷은 전통적으로 한국인이 즐겨 입는 의상인 것이다. 그러니까 흰옷[白衣] 하면 한국인의 정신이 연상되는, 그렇게 관계가 깊은 것(인접 사물)이다.
▶ 諷喩allegory란 의도하는 바 본래의 의미는 숨기고 다른 말 또는 이야기를 내세워 본래의 의미를 암시하는 비유법이다...풍유는 표면적으로 전개되는 구체적 사실 또는 정황과 이면에 숨겨진 추상적 의미의 층이 통상적으로 존재하고, 원관념(추상적 의미)이 숨고 보조관념(구체적 사실 사건)만 나타나 있으므로 상징과 유사한 형태를 보여주나 풍자·비판·교훈성을 적극 띠고 있는 점이 다르다.
▶ 寓話fable는 동식물을 주인공으로 하여 인간의 삶을 암시하는 이야기 형태이다. 그러니까 우화의 보조관념은 모두 非人格的인 동식물이며 원관념은 인격적인 것이 된다....聲喩onomatopoeia는 표현하려는 대상의 소리·동작·상태·의미 등을 음성을오 模寫하는 비유이다. 그러니까 음성 상징 sound symbol이다...戱言法pun은 같은 소리[同音語]가 나거나, 소리는 유사[類音語]하지만 뜻이 전혀 다른 말을 사용한 비유법이다...희언법에 의한 비유는 가끔 奇想conceit과 겹치기도 한다. 그러나 기상은 대체로 직유나 은유에서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당돌하게 결합되어 있는 경우 또는 파격적인 이미지를 두고 말한다. 이와 달리, 희언법은 어디까지나 동음이의어·유의어를 적절히 구사한 비유이다
▶ 단어 자체 속에서 뚜렷한 文字的 意味의 변화를 일으키는 의미의 비유figures of thought와 달리, 말의 비유figures of speech는 단어를 잘 배열함으로써 특별한 효과를 얻는 수사적 표현들이다. 이와 같이 각각 다른 특성 때문에 의미의 비유를 비유적 언어figurative language, 말의 비유를 수사적 비유rhetorical figures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니까 語順의 수사적 조절을 통한 의미의 강조와 변화를 창출하는 것이 말의 비유이다.
▶ 반어는 에이론처럼, 의도적으로 실상 또는 진실을 숨기고 표면적으로는 다르게 말하는 수사법이다. 흔히, 우리는 잘못한 사람에게 반대로 '잘했다'고 한다. 이런 경우가 바로 반어이다...역설은 표면적으로는 모순되는 것 같지만, 그 표면적인 진술 너머에서 진실을 드러내고 있는 수사법이다. 이와 같이, 표현된 것과 은폐하고 있는 표현의 구조가 반어와 유사하므로, 역설을 반어의 한 종류로 보기도 한다.
▶ 咏歎exclamation은 감정을 강조하기 위해서 '오, 아아' 등등의 감탄사·감탄 조사·감탄형 어미 등을 활용하는 수사법이다...頓呼法apostrophe은 시문詩文의 중간에 갑작스럽게 사물 또는 사람의 이름을 넣어 정서적 충격을 불러일으키는 수사법이다. 영탄법의 독특한 형태로 볼 수 있다...逆言法paralipsis은 어떤 부분을 의도적으로 생략함으로써 오히려 작가가 생략한 의미를 강조하는 효과를 얻도록 하는 수사법이다...修辭的 疑問法 rhetorical question은 응답을 바라고 하는 질문의 형태가 아니다. 질문이라기보다 질문의 형식을 빈 주장이다. 그러니까 주장 또는 느낌을 직접 진술하는 것보다 더 큰 효과를 얻기 위한 수사법이다...婉曲語法 euphemism은 그리스어 '좋게 말하다 to speak well'에 해당하는 말로부터 연유한 것이다. 즉, 불유쾌하거나 무섭거나 비위에 거슬리는 것을 가리키는 데 쓰이는 말 대신 이보다 모호하거나 우회적인, 또 덜 일반화된 말을 사용하는 수사법이다
▶ 시의 행과 연이 이루어지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김춘수는 그 이유를 세 가지로 들고 있다. 리듬의 段落strope, 의미의 단락, 이미지의 단락이 그것이다. 즉, 리듬을 중시할 경우와 의미를 중시할 경우, 그리고 이미지를 중시할 경우에 따라 행의 구분이 달라지는 것이다...박용래의 「울타리 밖」은 '천연히'가 한 연으로 놓여 있다. 그만큼 이 말 하나로 작가가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작품 속의 '天然히'는 앞과 뒤에 있는 각 연과 맞먹는 '이미지의 重量'을 작가가 부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작품 속의 '마을'은 결국 '천연히'라는 한마디 말의 이미지(이 이미지를 구체화해주는 것이 앞뒤의 연이다)로 부각되어 있는 셈이다. 실제로 이 이미지는 한 행의 機能을 충분히 수행하고 있을 만큼 효과적이다.